성지(聖地)에서
- 우하(愚下)에게
조바심을 죄처럼 품고 살다가
오늘 드디어 요단강을 건넜다.
이승의 검문소에서 네시간
뙤약볕 받으며 서서
어릴 적 녹번동 우리 집 앞을 흐르던
실개천을 닮은 저 강물이
고달픈 모래바람 속에 파묻히면 어쩌나
걱정했다.
저승의 검문소에서 다시 두시간
쿠오바디스
옛 도성에서도 나는 主의 자취를 찾지 못하고
포장지로 싼 전설들이 좌판에 놓인 좁은 길을 걸었다.
걷다가
초록색 모자를 떼지어 눌러쓴 성지순례단
동포 아주머니들의 사진기 셔터도 눌러주고
목마른자가 되어
플라스틱 통에 든 생수를 마셨다.
문득
여권과 지갑과 영국에 두고 온 아들
오늘 밤 등짐 속에 다시 챙겨야 할 내 잘잘못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