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

posted Jun 0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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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

1. 장마의 끝

빗방울 성기게 듣던 늦장마 오후
낮게 드리운 구름의 사나운 낯빛 사이로
이제야 누군가 환하게 웃는가
저 한 줌 뜨거운 햇살

2. 오오츠크해 고기압

남이 아닌 것은 결국 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들의 나머지
내일은 한반도 8월의 때 이른 고기압이
8월과 고기압 서로를 필경 안쓰럽게 만들 가능성이
80퍼센트입니다
겉옷을 준비하시고요
갑작스런 수치심에 막연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3. 추석 전날

먼 데를 볼 때처럼
마음의 눈을 가늘게 뜨면
세상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여름이 오는 듯 가고
옷장 위의 선풍기가 마루로 내려왔다가는
어느새 다시 옷장 위로 올라간다
달은 숨 가쁘게 이울었다 차고
뜻하지 않은 길목에서
만나고 다투던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한다
다시
또 한 철을 난 것이다
여름은 겪어도 겪어도 면역이 생기지 않는
열병이었던 것이다 매번
몸서리 치며 잎을 털어내는 가로수
꽉 다문 입처럼 늘 같은 자세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길들
온 것은 가고
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 저녁
마음의 실눈을 뜨고 바라보면
찰라의 순간처럼 흘러가는 내 모습도
보인다

4. 말의 싹

응달진 처마 끝에
겨울이 집요하게 매달려 있다
뒤뜰의 마른 덤불을 헤쳐보지만
말(語)의 싹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싹트지 않는 것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무엇을 모의하며 봄을 기다리나?


<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