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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移徙)

posted Jun 0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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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移徙)

- 우하(愚下)에게


1.


서울을 떠나던 날

아파트 정원에서 헛디뎌

젖은 땅에 비뚤게 찍혀진

발자국 망연히 바라보며

하마터면 밖으로 흐느낄 뻔 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거늘

살던 자리를 접고 뜨는 것은

한 해 두 해 나이 먹으며

되풀이할수록 수월해 지는 법이 없다


세간을 정리하는 일은

세상을 뜨는 일의 연습


두고 떠나야 하는 것들이

이렇게 가엾고 쓰라린 것인 줄

철없을 때는 미처 몰랐었다

철새처럼 

잠시 머물던 자리에도

단념해야 할 것들 많더구나


경황없이 비 내리고

현관 앞까지 나를 쫓아오던

흙발자국들.

내 뒤를 밟는 건 늘 나뿐인데

포장이사 상자들처럼

차곡차곡 챙겨가야 할

후회는 또 왜 이리 많으냐.


2.


수 만 킬로미터를 날아와

정돈된 타인들의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

시침떼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운전중에 길을 잃더라도

수 만 킬로미터씩 헤맬 일은 없겠지

워싱턴 DC 495 환상도로를 달릴 때는

되도록 마음을 편히 먹는다.

한눈 팔지 않고 달리다 보면

돌아오리 출발했던 그곳으로


출근길, 철늦은 나비 한마리

길을 잃고 고속도로를 느긋이 횡단하다가

앞유리창에 무모하게 날아와 부딪혔다.

(나비의 입장에서는

내가 날아와 부딪힌거겠지.)

이곳에선 앞유리창을 바람막이라고 부르거니와

바람을 막다보면 때로 생사도 가름하기 마련

세상에 남아 바람의 박자로 떠는

날개빛은 여전히 아름답더라.


내세에서도 고단하게 세간을 풀어야 한다면

누가 부활을 꿈꾸겠나만

짐짓

운전대를 잡고 무도하게 달려가는

나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은

빠진 터럭을 다시 심듯

벌써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3.


시간이 점액질의 고체처럼 더디게 움직일 때면

세월을 앞질러 살고 싶다 차라리

늙고 싶다 어서

성숙이라도, 시드는 거라도 좋으니.


노인도 현자도 한자리에

부단히 뿌리박고 살기는 어려운 시절이지만

삶을 접고 펴기를 무던히 반복하다 보면

모르지

몸 가벼이 발자국 대신

빛깔로 남을 수 있을지도

고속질주 멈추고 돌아볼런지도

웃으며, 때로


스스로 마디 풀리는 일들을 만나고 싶다

개선이라도, 개악이라도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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