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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 4

posted Oct 3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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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가슴으로 찍는 사진

    “셔터를 개방하기 전에 바라보며 생각하라. 가슴과 마음이 카메라의 진정한 렌즈다.”  
                                                                                                                   ‐ 유수프 카쉬

    “사진을 찍는 행위는 현실 그 자체와,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시적 형체의 활발한 조합을 ‐ 찰나의 순간에 ‐ 동시에 인지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와, 눈과, 마음을 하나의 축에 두어야 한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4‐1 거짓말입니다

사진은 카메라로 찍고, 손발로 찍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손발로 찍는다 함은, 창의적인 구도를 잡고 발품을 팔거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거기에 관한 이야기로 여기까지 지면을 채웠죠. 사진은 카메라로, 손발로 찍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좋은 사진이 저절로 찍히는 건 아니에요. 누군가 그렇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좋은 사진은 가슴으로 찍습니다.

내공이 깊은 작가들 중에는 사진과 관련된 기술이나 법칙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그냥 막 찍고, 많이 찍어보는 게 최고라고 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술적인 규칙이나 통념적인 관습에 얽매이는 것 보다는 자기만의 방식을 저절로 터득하라는 뜻이겠지요. 저는 그런 가르침의 취지에는 십분 동감할 수 있지만, 누군가가 극단적으로 카메라의 원리나 빛의 특성, 구성의 일반적인 원리를 깡그리 몰라야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라고 봅니다. 누군가가 조리개나 셔터나 필름이나 빛의 특성 같은 건 하나도 소용이 없다고 강변한다면 저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것들을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저는 이 글의 독자들이 제 3장까지 설명된 내용을 전부 다 잊어버리시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독자들이 행여나 좋은 사진을 찍는데 필요한 조언들이 주로 제 2장이나 제3장에 들어있다고 느끼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지식이나 상식들은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면서, 어느 단계에서는 잊어버리고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구속의 틀이기도 하거든요. 일찍이 阮堂 김정희는 寫蘭有法不可無法亦不可 (난초를 그리는 데 법도가 따로 있어서는 안 되지만, 법도가 없어서도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예술은 반복에 의한 기량(craftsmanship)에도, 손재주의 한계를 벗어난 철학(philosophy)에도 똑같이 의존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의 歲寒圖가 주는 기묘한 감동은, 유법과 무법 사이의 시퍼렇게 선 날 위를 걷고자 했던 완당의 부단한 노력에서 빚어지는 것일 터입니다. 사진에도 법도가 없어서는 곤란할 것이기에 앞의 내용을 굳이 정리해서 썼습니다. 하지만 좋은 사진은 정해진 법도를 따라서 찍는 건 아닙니다.

사진은 카메라로 찍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진은 가슴으로 찍는 겁니다. 이점을 두고두고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4‐2 Eye Candy

아이 캔디(Eye Candy)라는 표현을 들어본 일이 있으신가요? 나는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이거 뭔가? 눈깔사탕?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진이나 그림들 중에서, 보기에는 썩 괜찮지만 아무런 이야깃거리나 감동을 담고 있지 않은 것들을 이렇게 부른다더군요. 눈에만 달콤하고 영양가는 전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림에다 비유한다면, 우리가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부르는 종류와 흡사한 설명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사진에 관해서는 ‘달력 사진’이라는 표현도 종종 쓰이고 있습니다만.

앞 장에서 3분할 구도 같은 걸 굳이 소개한 이유는, 같은 피사체라도 그렇게 찍는 편이 한가운데 놓고 찍는 것보다는 못 다한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흥미를 느끼도록 만드는데 유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3분할 사진을 도식적인 습관으로 찍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구도의 규칙은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는 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도나 색감이나 노출이나 대비가 별로 흠잡을 데 없이 찍혀 있는데도 “흠‐ 괜찮군” 하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하는 사진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제가 찍은 사진들도 팔 할은 이런 ‘눈깔사탕’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보자들은 자기가 찍은 사진이 달력사진 같아 보인다고 해서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달력사진은 뭐 찍기 쉬운 줄 압니까? 그게 다 배움의 도상에서 거쳐 가야 하는 일인 거죠.

그러나, 그저 이쁘고 깔끔하고 산뜻한 사진을 찍게 되었다고 해서 거기 안주한다면 당신은 촬영기사가 될 수는 있어도 사진작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나머지 한걸음을 더 내딛으려는 노력이 사진 촬영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즐거움에 해당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무엇보다, 저 자신이 사진작가 축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아이 캔디(eye candy) 이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과정의, 그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시길 빌고 있습니다. 음속을 돌파하는 비행기가 부럽지 않을 그 희열을.

4‐3 나를 찍는다

사진은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일은 자신을 찍는 일입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진을 찍고,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사진을 찍죠. 생각이 복잡한 사람은 복잡한 사진을 찍고, 성품이 간결하고 깔끔한 사람은 간결한 사진을 찍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어떤 피사체를 어떻게 찍을까 고민하는 과정은 나의 어떤 면을 드러내고 표현할까를 고민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로 불리는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의 연작 인물사진집 <인간>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품고 있는 애틋한 사랑이 잘 느껴집니다. 대체로 인물사진을 장기로 삼는 사람들은 성품이 따뜻하고 사람을 잘 사귀는 타입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가 자신의 외모도 수더분하고 품성도 원만해서 피사체가 되는 모델들에게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좋은 인물사진을 찍게 마련이죠. 어눌하면 그 어눌함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 수도 있고, 더러는 탁월한 말재주로 피사체를 활짝 웃게 만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편, 풍경 사진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고독을 즐기는 타입이기 쉽습니다. 시인 황동규는 홀로 외로운 기분의 황홀함을 “홀로움”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외로움의 황홀경에 빠진 사람이나, 군중과의 부대낌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풍경사진은 잘 어울리는 취미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풍경사진의 대가 안젤 아담스(Ansel Adams)는 외동아들로 태어나 12살 이후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루게릭병이라는 희귀한 병마와 싸우다가 2005년에 작고한 부여 태생의 사진작가 김영갑은 제주도의 자연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겼죠. 그의 사진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외로움을 해일처럼 쏟아냅니다. 그의 사진 속에서는, 나무도, 오름도, 자갈돌들조차도 외롭다고, 외로워서 못 견디겠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쯤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라는 자신의 저서에 “Fere Libenter homines id quod volunt credunt”라는 멋진 경구를 포함시켰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쉽사리 믿어버린다’는 뜻이에요. 카이사르의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려 했던 것만을 본다”고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원문처럼 직설적인 맛은 없어도 ‘본다’는 동사의 멋스러움을 잘 살린 의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카이사르가 말한 원래 취지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진촬영에 있어서 이것은 명심해둘 만한 금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려 했던 것만을 본다.” 그리고 촬영한다. 

이른바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1912년 베르트하이머의 연구로 시작된 게슈탈트 심리학은 ‘형태 심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게슈탈트(Gestalt)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지각할 때 떠오르는 형태를 가리킵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으로 설명되는 현상 중에는 우리 눈의 착시현상도 포함됩니다. 다음 그림은 ‘루빈의 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흰 부분은 장식용 컵(goblet)이지만, 검은 부분을 바라보면 마주보는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해요. 루빈의 컵이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현상은 우리 시각의 습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의식은 무엇을 바라보든 통일성, 연속성, 유사성을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습관이 배반당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물을 인식하려는 질긴 버릇이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려 했던 것만을 본다는 겁니다.

"백지에 그려진 원은, 배고픈 이에겐 빵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에겐 공이고, 가난한 어떤 이에겐 돈으로 지각된다. 개인이 전경前景으로 떠올렸던 게슈탈트를 해소하고 나면 그 전경은 배경背景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게슈탈트가 형성되어 전경으로 떠오른다. 미해결 과제는 계속 전경으로 떠올라 새로운 게슈탈트 형성을 방해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장면을 시각적으로 인지할 경우 그것은 개별 이미지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총체적인 장면으로 인지한다는 말이다. 지각 대상들은 ‘큰 단위’ 또는 ‘전체성’ (Ganzheit) 이다."
                                                                                                      ‐ 김경희, <게슈탈트 심리학>, 21쪽 

너무 어려운 얘긴가요? 그저, 게슈탈트 심리학이란 게 있다는 정도는 상식 삼아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동그란 원이 배고픈 이이겐 빵이고, 어린아이에겐 공으로 보인다는 점은 사진쟁이들한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진 속에서는 철길과 전봇대가 만나는 날카로운 각도가 먼 산을 찌르는 창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아이가 들고 있는 풍선이 산등성이를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건 사진에 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전체를 지각한다는 뜻은, 보이는 각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에요. 똑같은 녹색이라도 나뭇잎의 색깔일 때는 그저 평온한 느낌을 주지만 신호등의 불빛일 때, 그것은 ‘가도 좋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게 즉물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사진 속에 담긴 피사체들은 서로 함께 사진 속에 담기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 관계에 어떤 느낌이나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것은 사진가의 몫이죠.

왜냐구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려 했던 것만을 보기 때문이에요. 거꾸로 뒤집어서 말하면, 사진을 찍는 사람은 가급적 많은 걸 보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진가는 스쳐보는 것을 향해 셔터를 개방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떤 의미를 두고 응시하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지요. 그래서, 가급적 많은 것을 본다는 것은 자기 주변의 사물과 사람과 풍경의 작고 세세한 부분, 크고 거대한 부분,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모두 ‘응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가능케 하는 건 바로 호기심입니다. 열 살 언저리의 개구쟁이 소년들은 어떤 한 가지 주재에 매몰되어 매너리즘에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그들처럼 매사에 호기심을 가져야 합니다.

앞에서 마구 찍기(시간적으로)와 두루 찍기(공간적으로)를 연습으로 권해드린 바 있습니다. 이런 연습의 참뜻은 가급적 많은 것들을 응시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주변에서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날, 당신의 사진은 전에 없던 깊이를 지니게 될 겁니다. 그러고 보면, 사진을 찍는 행위는 바깥세상을 인화지에 담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이 달라지는 경험입니다.

4‐4 추상주의

사진은 프레임 속에 온갖 잡다한 피사체들을 주렁주렁 널어놓을 때만 멋져 보이는 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배경이나 장식을 생략하고 주피사체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미니멀리즘을 구사할 수도 있습니다. 피사체의 어떤 부분만을 크로핑하거나 확대해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 속의 사물을 확대해서 촬영하다 보면 다른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얼마든지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일전에 난초와 아이리스의 꽃잎들을 확대해서 에로틱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작가의 작품을 접하고 감탄을 한 일이 있습니다. 사진은 자기 자신을 찍는 작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에로틱한 성정을 지닌 사람은, 꽃잎이나 과일 같은 식물을 바라보면서도 신체의 부위를 발견하는 겁니다. 뭐, 하긴, 꽃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식물의 드러난 성기관이긴 하죠.

다른 어떤 사물을 굳이 연상시키지 않더라도, 가령 빗물 고인 웅덩이에 비친 네온사인처럼 추상적인 형태와 색감만으로도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강암 돌절구의 허리 부분처럼 독특한 질감을 지닌 피사체를 확대시키면 흑백으로 음영과 질감만을 취하더라도 그 어떤 생생한 느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느낌이나 생각에 형태를 입히는 것이 진정한 미술의 사명이라고 믿는 사조를 관념주의(conceptualism)라고 부릅니다. 사실,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사진이 그림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대상의 속성이나 특징을 빼내버린 것을 추상이라고 하는데, 사진은 뭔가를 찍어야 하니까 당초에 대상 없이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피사체들의 어떤 부분이 깜짝 놀랄 만큼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은 사진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진 같지 않은 사진. “이게 정말 사진 맞아?”라는 물음이 절로 나오는 추상적 이미지들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회화 분야에서는 거꾸로 포토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그림을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작가들이 자기 장르에 대한 도전을 통해 추구하는 건 일종의 반어적인 미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4‐5 빛을 아끼는 사람이 좋은 사진을 찍는다

아직 ‘탈북자’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한참 전이던 1987년 2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사선(死線)을 넘어 탈출해 온 김만철씨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 탈출했노라고 밝혔습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라는 표현은 북한을 탈출해본 경험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도 달콤한 느낌으로 들립니다. 아등바등 싸워 가면서 시시콜콜한 걱정거리에 시달리지 않고, 나무 그늘에 누워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그런 상상이 펼쳐지지 않습니까? 실제로 적도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웃음에 인색하지 않고 천성도 낙천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쪽 나라에서는 좀처럼 위대한 화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태양이 사시사철 내리쬐는 밝은 풍경은 좀처럼 안타까운 감흥을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ㅈ가 좋아하는 북반구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서 작품 활동을 펼친 작가는 후안 미로와 빈센트 반 고호입니다. 후안 미로는 뛰어난 색채감각을 무기로 추상화를 자주 그렸기 때문에 풍경화가라고 부를 수는 없겠습니다. 고호는 남불의 이글거리는 태양빛 그 자체를 화폭에 옮겨놓으려고 애썼죠. 그래서 그의 그림은 해바라기도, 들판도, 숲도, 사이프러스 나무들도 하늘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호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태양이 흔한 동네에서 그리는 그림, 하면 고갱의 그림이 먼저 떠오릅니다. 강렬하지만 평면적인 화풍. 강렬한 태양빛은 그림으로부터 입체감을 빼앗아버립니다.

태양빛이 너무 귀해도 그림 그리기에 적합하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영국이 자랑하는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는 ‘빛의 연금술사’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서 빛은 항상 안쓰러운 결핍의 느낌을 줍니다. 저는 2년간 영국에서 살아봤는데, 과연 영국인들이 여름에 잠간 반짝하는 햇볕을 미치도록 목말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국의 긴 겨울은 춥고, 축축하고, 어둡습니다. 빛이 너무 귀해도 그림은 입체적인 생동감을 주기 어렵습니다. 위도상 영국 이북지역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러시아인들이 무용이나 연극,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면서도 칸딘스키를 제외하면 세계적인 화가를 그다지 배출하지 못했다는 사정도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일단 서양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유럽에만 국한해서 계속 살펴보죠. 화폭 속의 그림들이 생동감을 가질 정도로 적당한 태양빛의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빛이 아까운 줄 아는 화가들의 전범은 르네상스 이후 플랑드르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요하네스 폴 베르메르의 화첩을 구해서 곰곰이 그의 그림들을 살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베르메르는 아주 소중한 가르침을 주거든요. 그것은 “빛을 소중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이에요.

그의 작품들 중 ‘우유를 따르는 하녀’라든지, ‘물병을 쥔 여인’ 같은 그림들은 화가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눈동자에 비친 한 방울 빛은 또 어떻습니까! (눈동자에 반사된 빛을, 사진에서는 캐치 라이트(catch light)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인물의 얼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필수적 요소니, 인물사진에 전념하려는 분들께서는 필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빛을 소중히 여기는 화가는 그림자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 속에 빛을 그리고 싶다면 그림자를 잘 그려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에서 빛은 다 그린 뒤에 나타나는 것이지 그려지는 건 아닙니다. 어떤 그림자와 그늘을 그려 넣느냐에 따라 붉은 빛깔 도는 저녁햇살도, 눈부신 인공조명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마술처럼.

그림에서건 사진에서건, 빛을 소중하게 다루는 태도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직사광선 아래만 찾아다니는 사람은 결국 별 감흥이 없는 아이 캔디(eye candy)만 건져오기가 십상입니다. 달력 그림으로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예쁜 풍경 속에 예쁜 사람이 예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사진들 말씀이에요. 이런 사진은 피사체 속 모델의 연인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겐 감동을 주기 어렵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생사도 그러합니다. 저도 물론 온화하고, 밝고, 쾌활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됨됨이를 정작 드러내는 것은 그가 가진 그늘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친절하고 밝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그늘을 숨기거나 감추어 드러내지 않는 사람, 또는 그림자를 아예 갖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이입니다. 자신의 그늘을 열어 보여주지는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생각 없는 것이기가 쉽습니다. 낙천적인 쾌활함은 분명 장점이지만, 세상은 낙천주의로만 살아지진 않는 법이죠. 물잔의 절반이 비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라는 얘기들을 흔히 하지만, 잔의 반이 찼다고 말하는 사람 중 과연 누가 잔을 채우려 들겠습니까. 그래서, 너무 어두운 피사체만 아니라면, 저는 그늘을 가진 풍경을 더 사랑합니다. 

빛이 있으면, 사진은 찍힙니다. 작은 불빛이라도 촬영에 이용해 보면 의외로 그윽한 분위기의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필름 감도는 좀 높여야겠죠.) 완벽주의자적인 면모를 갖고 있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촬영기술의 혁신가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그는 1969년 혁신적인 SF 영화 <2001: A Space Odyssey>로 아카데미 특수효과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75년에는 라이언 오닐을 주인공으로 기용해 아일랜드 모험가 배리 린든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Barry Lyndon>을 감독했습니다. 18세기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촛불로만 이루어진 실내광을 촬영하기 위해 큐브릭 감독은 특수한 카메라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자이스(Zeiss)사가 NASA의 아폴로 우주선 달 착륙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f/0.70 값의 50mm 렌즈가 사상 최초로 영화촬영에 동원되었던 거죠. 그 덕분에 <Barry Lyndon>은 그 전의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던 고즈넉한 촛불 조명 실내장면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내라고 해서 무조건 서둘러 스트로보를 사용하기 전에 실내등만을 이용해서 촬영을 해 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됩니다. 다만, 형광등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형광등이 주광색으로 보이지만, 필름에는 녹색 불빛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색온도가 좀 더 떨어질망정, 텅스텐 계열의 백열등을 사용하는 건 무난합니다. 백열등 조명 아래 찍은 인물사진은 오붓하고 다감한 느낌을 줍니다.

낮에도 실내촬영은 결코 불리한 조건이 아니에요. 창문을 통해 실내로 들어오는 태양빛은 부드러운 확산광이 되기 때문에 인물 촬영에 유용합니다. 스튜디오에서는 일부러 이런 광선을 만들려고 조명에 확산판을 씌우기도 합니다. 직사광선은 대비(contrast)가 너무 강하기 마련이지만, 확산광은 그림자의 경계선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표면의 거친 질감도 자연스럽게 감춰주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사진이 빛의 예술이라는 말의 의미는 사진을 찍으러 들로 산으로, 또는 광장이나 시민의 숲 같은 밝고 환한 데로 커다란 삼각대를 들쳐 메고 돌아다녀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사진의 소재는 당신의 주변에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빛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을 갖느냐 입니다.

4‐6 색계(色戒)

사진은 컬러로 찍을 수도 있고, 흑백으로 찍을 수도 있죠. 컬러 사진이라고 해서 자연색을 100% 재현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사진을 ‘당연히’ 컬러로 찍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오히려, 컬러 사진을 찍겠다면 그 사진이 컬러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니, 사진가는 사진에 그 이유를 부여해 주어야 해요. 사진 속 피사체의 색깔이 어떤 느낌이나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흑백사진으로도 막 돋아난 어린잎의 연약한 질감을 전할 수는 있지만, 컬러사진은 그 신록의 여린 푸르름을 더 잘 전해줄 수 있습니다. 회색조의 담벼락 한가운데 놓인 노란 물통이라든지, 주변 풍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는 빨간 간판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컬러 사진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잘 드러내 줍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 속 피사체의 색감이 ‘말을 거는’ 느낌이란 게 어떤 건지 보려면, 잘 찍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둔 작품집을 찬찬이 구경해 보는 게 유익합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같은 잡지들의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면, 컬러사진에서 색이 담당해야 하는 역할의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어요.

현란한 색깔들이 마구잡이로 사진 속에 들어있다고 해서 좋은 컬러 사진이 되는 건 아닙니다. 색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오히려 절제를 통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사진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눈길을 끄는 편이 좋습니다. 사진에 무슨 정답이나 왕도 같은 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눈길을 끄는 ‘포인트’ 가 없대서는 좋은 사진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강조점을 만드는데 형태나 구도만 떠올릴 것이 아니라 색깔의 역할도 생각해 봐야 하는 거죠.

컬러 사진의 그런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피사체가 아니라면, 오히려 흑백사진으로 찍는 쪽이 사진공부에 더 도움이 됩니다. 흑백사진은 색깔을 생략함으로써 우리가 평소에 보아오던 인물, 풍경, 정물의 낯설고 색다른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게 흑백사진의 매력이에요. 흑백사진은 사물과 풍경과 인물의 형태나 자세, 구도나 계조만으로 승부합니다. 그래서 인상적인 사진과 그렇지 못한 사진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러니 좋은 연습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흑백사진을 많이 찍다 보면, 삼라만상을 흑백으로 바라보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것도 사진가들만이 누리는 기이한 체험들 중 하나입니다. 이런 연습은 좋은 컬러 사진을 찍기 위해서도 유용합니다. 색에 현혹되기에 앞서 피사체의 구도나 형태가 인상적인지를 순간적으로 인지할 수 있으려면 색이 전부 휘발된 상태를 상상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색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색에 현혹되어 전체의 됨됨이를 망가뜨려서는 안 될 터입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흡사 무슨 금욕적인 격언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세상만사는 다 통하는 법이라더니만.

4‐7 사진을 찍은 후에 

사진 촬영은 카메라의 셔터릴리즈 단추를 누르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필름이라면 우선 현상절차를 거쳐야 하고, 찍은 사진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선택의 과정이 필요하며, 찍힌 원화를 사후적으로 보정하는 작업을 거칠 수도 있습니다. 또 필름이나 CCD에 담겨진 사진을 종이 위로 옮기는 인화 (또는 프린팅) 과정에서 사진은 그 인상이 사뭇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초보자들이 필름의 현상이나 인화까지 손길을 미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공간도 필요하고 시간과 품도 매우 많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이에요. 현상과 인화도 매우 재미있는 작업과정이므로 이것을 제외하고 나면 사진을 대체 무슨 재미로 찍느냐는 사람도 만나봤습니다. 그러나 굳이 현상이나 인화작업을 직접 자기 손으로 하지 않더라도, 사진촬영은 충분히 즐거운 활동입니다. 제가 현상이나 인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잘 압니다. (흑백필름 현상은 대학교 때 해보긴 했습니다만.) 그게 무슨 자랑이라는 뜻이 아니라, 굳이 현상과 인화로 기교를 부리는 법까지 모르더라도 사진촬영은 즐겁더라는 경험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일단 사진을 찍은 후에 초보자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많은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선별해 내는 ‘선택’ 작업이고, 두 번째는 (디지털 사진으로 찍었다면)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후보정을 하는 작업입니다. 사진을 선별하는 작업은 사진을 찍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고, 일단 사진을 찍었다면 누구든지 거쳐야하는 과정입니다. 한편,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후보정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필요하다는 의견과, 그건 일종의 속임수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죠.

<사진의 선택>

원고지 20매 정도의 분량으로 써놓았던 글을 열 달 동안 월간지에 기고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원고의 길이는 원고지 분량 17매였습니다. 미리 써둔 글의 15% 정도를 줄여야 했습니다. 이건 굉장히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더군요. 글을 쓸 때는 할 말이 있어서 쓴 거였는데, 거기서 한 두 문장도 아니고 15%를 깎아내려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중에 다시 읽어보더라도 원래 써 놓았던 글보다 15%쯤 분량을 줄여놓은 글이 훨씬 더 뜻도 잘 전달되고, 문장도 탄력이 있고, 전체적인 구성도 짜임새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열편이면 열 편 모두 예외 없이 그랬습니다. 줄이기 전의 글은 문장도 느슨하고 독자가 이해 못할까봐 중언부언한 잔소리도 많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글의 길이를 줄여보기 전에는 별로 그런 느낌을 주지 않던 글들이, 짧아진 글과 비교해보니 그렇더군요. 이런 원리는 거의 모든 창작과정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라는 조각가를 아십니까? 스위스의 조각인 그는 철사처럼 가늘고 긴 조상(彫像)을 만드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유명합니다. 처음 그의 조각을 봤을 땐 도대체 아름답기는커녕 저렇게 빼빼 말라비틀어진 인물상을 만든 취지가 뭘까 그저 궁금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 써놓은 글을 덜어내는 작업을 하노라면 저절로 떠오르는 게 자코메티의 조상들이었습니다. 본질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는 작업. 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뼈대만 철사줄처럼 남겨놓고 나머지는 아까와도 과감하게 깎아내고 버리는 작업이 필요한 거지요. 그런 과정은 어쩌면 창작과정의 요체인지도 모릅니다.

각도나 노출을 조금씩 달리 해가며 애써 찍어놓은 사진들을 바라보면 죄다 애착이 가기 마련이에요. 100장을 그렇게 찍었다면 30‐40장정도 확연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들을 골라 버리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것들 중에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골라내려면, 사진가는 사진을 찍은 사람이 아니라 이번에는 비평가가 되어야 합니다. 엄하고 혹독한 눈으로 자기 사진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골라 보세요. 더 이상은 도저히 버릴 게 없다는 상태가 올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다시 20% 정도를 버려보시죠. 그 다음에 남은 사진들이 바로 당신의 사진입니다.

<후보정>

요즘 아이들의 속된 말로 “포샵질”이라고 부르는 후보정에 관해서도 몇 마디 적을까 합니다. 후보정에 가장 널리 쓰이는 프로그램이 어도비(Adobe)사의 포토샵(Photoshop)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겼습니다. 포토샵을 이용하면 초보자도 손쉽게 사진의 색온도를 변화시키고, 질감을 다듬고, 흠집이나 원치 않는 잡티를 지우고, 사람의 다리 길이를 잡아 늘이거나 군살 부위를 없애고, 그 밖에도 이른바 “뽀샤시” 하다고들 표현하곤 하는 소프트 포커스 효과라든지, 콘트라스트와 선예도(sharpness)를 증가시켜 소위 “쨍한” 느낌을 얻는다든지 하는 온갖 재미있는 효과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의 후보정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후보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은 셔터를 개방하는 순간에 찍혀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 사진에 손을 대는 건 반칙이다. 아니다 사기다. 사람들을 현혹할 목적으로 찍는 광고사진에서 모델의 키를 늘인다든지 얼굴의 잡티를 없애는 등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예술적이라거나 미학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먼 짓이다. 사진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에 실재하는 사물의 모습을 평면 위에 담아낸다는 데 있다. 즉, 사진 속에 담겨진 미학적 가치는 실존적인 가치다. 후보정은 이런 과정과 노력을 농담처럼 만든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피사체의 실존을 훼손하는 건 값싼 거짓 기록을 만들어내는 짓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은, 디지털 사진의 보급으로 후보정 과정이 손쉽게 변하면서 사진가들은 전보다 훨씬 더 게을러졌다는 점이다.

반면에, 후보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나친 결벽증을 보일 필요는 없다. 사진 속에 담긴 피사체는 어차피 그것이 사진 속에 담긴 순간부터 더 이상 피사체 그 자체가 아니라 피사체의 어떤 측면을 기록한 근사치일 뿐이다. 사진가는 카메라든 컴퓨터든 자신에게 주어진 도구를 십분 활용해서 자신의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면 그만인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후보정이 보편화되기 훨씬 전부터도 사진가들은 현상과정에서 증감현상이라는 트릭을 써서, 또는 인화 과정에서 버닝(Burning)이나 돗징(Dodging) 기법 등을 사용해서 사후적으로 이미지에 수정을 가해온 뿌리 깊은 전통이 있다. 그러므로, 후보정을 거친 사진이 싸구려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후보정을 ‘잘못’ 했을 뿐이지, 후보정 자체가 그릇된 과정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fundamentalist) 태도다.

자,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이 두 종류의 견해 중간 어딘가에서 자기 자신만의 철학을 세우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무슨 정답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면 그만입니다. 혹시 이 문제에 관한 저의 견해를 물으신다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 후보정을 따로 할 곳이 별로 없게끔 찍는 사진이 잘 찍은 사진이다.
‐ 손쉬운 후보정 프로그램이 사진가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러나,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자연색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전부 싸잡아 반칙이나 사기로 몰아세울 것까진 없겠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의 CCD는 필름처럼 완벽하게 색상이나 톤을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 이것이 “내가 찍은 사진이다”라고 말하기에 거리낌이 있을 정도로 후보정을 했다면 그건 아마도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이기 쉽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양심은 비교적 정직하다.
‐ 후보정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잘 모를 정도로 보정한 사진이 후보정이 잘 된 사진이다.
‐ 물론,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처럼 특수한 효과를 가해서 후보정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임이 확실한 추상적 작업을 추구하는 경우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 사랑하는 사람을 찍은 사진에서 잡티나 흉터를 지워주는 건, 개인적으로 언제든 용서한다. 롱다리나 몸짱을 만드는 정도가 되면 흉을 본다.

후보정이라는 과정은 꼭 포토샵이 아닌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해도 되고, 후보정 방법을 소개하는 것은 특정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소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 글에서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디지털 사진에 입문한 사람들이 차차 후보정이라는 과정에 재미를 들이게 되건 말건, 제가 힘주어 주장하고 싶은 점은 후보정을 굳이 거치지 않더라도 사진촬영은 충분히 재미있고 즐거운 경험이라는 점입니다.

4‐8 지금까지 드린 조언들

이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대충 다 했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사진에 대해서 가르칠 자격이 있는 전문가가 결코 아닙니다. 사진기를 처음 손에 잡은 뒤에 온갖 귀동냥과 독서와 시행착오를 거쳐 깨우쳤던 것들을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여러 책들을 뒤적여 어렵사리 뭔가를 알게 되었을 때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왜 누군가가 이렇게 기초적인 지식들을 좀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정리해 놓은 자료는 없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거든요. 저와 비슷한 처지에서 사진을 시작하는 초보자들이 좀 더 손쉽게 사진을 찍는 즐거움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사진은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을 만큼 즐거운 취미활동이니까요.

이제 긴 글을 마무리하는 마당에, 앞에서 권해드린 내용들을 정리 삼아 한 번 요약하는 것으로 마무리에 가름할까 합니다. 사진은 카메라로 찍습니다. 그러니까 카메라의 기능을 공부하는 정도의 성의는 마땅히 필요합니다. 앞에서 보셨다시피,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사진은 손발로 찍습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한 사람이 유리합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적절한 순간을 기다려야 하고, 피사체에 다가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사진은 가슴으로 찍습니다. 사진 속에 자신의 진심과 애정을 담으려는 노력만이 좋은 사진을 낳습니다. 긴 글을 통해서 제가 하려던 말을 요약하면 이게 다입니다.

◆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세요.

제일 좋은 카메라가 뭘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는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입니다. 똑딱이도 좋고 구식 레인지 파인더도 좋아요. 당신이 어딜 가든 제법 무거운 DSLR을 항상 들고 다닐 만큼 사진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면 더더욱 좋습니다. 분명한 건 대포만한 렌즈나 삼각대를 장착한 최고급 카메라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의 카메라라는 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카메라를 고를 때부터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조건 고급 카메라 바디와 비싼 렌즈들을 줄줄이 사 모으는 걸로 사진을 시작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기계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뭔가 든든한 느낌이 들고 마음의 평화는 얻을 수도 있지만, 좋은 사진은 카메라로 찍는 거지 카메라가 찍는 게 아니에요.

◆ 마음을 정하세요.

카메라를 손에 들면 내가 찍으려는 사진이 사건의 기록을 위한 건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건지 생각해보고, 마음을 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왜 찍는지 모르면서 찍은 사진은 나중에 보더라도 어정쩡한 느낌을 줄 뿐입니다.

◆ 기록을 함께 남기세요.

사진을 찍었을 때의 상황이나 분위기, 또 가능하다면 사용렌즈나 노출(조리개/셔터) 등을 기록으로 남겨두면 공부가 되거나, 나중에 요긴하게 쓰거나, 둘 중 하나는 꼭 됩니다. 그러나 너무 귀찮다면 사진취미에 방해가 될 정도로 기록에 대한 강박관념을 크게 느끼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 기계의 도움을 기꺼이 받으세요.

앞에서 터미네이터까지 들먹여가면서 강조했으니 길게 반복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자기 카메라의 기능을 충분히 익히고 활용할 것. 자동노출과 자동초점 기능을 마음껏 즐길 것. 그러나 수동으로 그러한 조작을 하는 손기술을 함부로 ‘쓸 데 없는 짓’으로 폄하하지 않을 정도의 겸손은 가질 것.

◆ 많이 찍으세요.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는 어떤 결과를 상상하고 의도합니다. 막상 사진을 찍은 다음에 그 결과를 보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보고, 잘못 나온 사진은 버립니다. 이 과정은 많이 반복하면 할수록, 버리는 사진은 점점 줄어듭니다. 의도와 결과가 닮아가는 과정이랄 수도 있고, 나와 카메라가 점점 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랄 수도 있겠죠. 여러 가지 자료를 보면서 참고할 수는 있지만, 사진의 진정한 선생님은 자기 자신의 시행착오뿐입니다. 뭘 어떻게 찍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때는 두루 찍고 마구 찍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다 보면 돌파구가 보이기 마련입니다.

◆ 기본을 우습게보지 마세요

표준렌즈와 일상적인 노출을 함부로 시시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충격적인 감흥을 주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초보자들은 온갖 장난을 쳐보곤 하지만, 사진의 기반은 역시 사실주의에 있습니다. 자기 눈이 잡아내지 못하는 결정적 순간의 아름다움을 광학적 잔재주로 대신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반셔터를 활용하세요

기계에 관한 자잘한 설명들 중에 초보자들에게 가장 유용하리라고 생각되는 건 반셔터입니다. 반셔터를 써서 노출과 초점을 고정한 뒤에 구도를 조정하는 데 익숙해진다면, 누구나 어느 정도 속사수의 실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노출을 정교하게 조정할 만한 여유가 없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이것은 무척 유리한 습관입니다.

◆ 밝은 날에도 스트로보를 써보세요. 오히려 어두운 곳에서 스트로보 사용을 조심하세요.

음악, 그 중에서도 드럼을 연주하다 보면 다른 악기들이 전부 쉬는 전환부에서 드럼이 혼자 독특한 박자를 채워 넣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걸 소위 ‘필인(fill‐in)’이라고 부르는데, 곡 전체가 맥이 빠지지 않게끔 만들어주는 감칠맛을 더합니다. 스트로보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도 이런 ‘필인’이에요. 조명을 등지고 선 역광의 피사체를 찍을 때, 밝은 대낮에도 스트로보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오히려 캄캄한 곳에서 스트로보 조명에만 의존하면 피사체가 납작한 유령처럼 나와 버리는 수가 있으니 조심할 일입니다.

◆ 기다리세요, 그리고 다가서세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려면 순발력도 필요하지만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좋은 사진은 재빠른 판단으로 찍기보다 무던한 기다림으로 찍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피사체에 다가서라는 조언도 잘 새기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피사체 가까이 한 발 더 다가서면 의외로 사진이 좋아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물이나 사람을 찍을 때는 더 가깝게 사귀는데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세요

당신의 눈 속에 네모난 눈을 하나 더 가지기 바랍니다. 피사체와 배경을 한눈에 척 바라보고 어디에다가 사각형 테두리를 칠건지를 결정하려면 뷰 파인더를 굳이 들여다보지 않고도 필요 없는 공간을 잘라내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익숙해질 때까지 작은 네모난 구멍이 뚫린 카드 같은 걸 들고 다니면서 연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 빛을 소중히 여기세요

카메라는 형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기록합니다. 빛이 부족하면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어려운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빛이 너무 풍성해도 드라마틱한 사진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사진에 담기 위해서 적당한 분량의 빛이 얼마만큼인지, 그 만큼의 빛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사진을 찍는 데 소모되는 고민의 팔 할입니다.

◆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찍으세요

사진을 제법 잘 찍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에 도중에 지루함을 느끼고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고 하면, 뭐가 되었든지 자기가 사랑하는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는 데서 시작해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갓난아이도 좋고, 산도 좋고, 키우는 강아지도 좋고, 고향의 골목길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피사체를 찍는 사진가는 초보자라도 사진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금세 알아챌 수 있겠죠. 사진의 목적은 결국 찍는 사람의 마음을 담아내는 데 있습니다.

4‐9 마지막 조언

앞부분에서는 말한 적이 없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마당에 전해드리고 싶은 비장의 조언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남이 찍어놓은 사진을 많이 보라는 겁니다. 잘 찍었다고 세계적으로 칭송받는 작품들을 보면서 이 사진을 어떻게 무슨 도구로 찍었는지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은 공부입니다. 좋은 사진들을 보면서, ‐ 마치 답안지를 보면서 문제를 추측하듯이 ‐ 이 사진이 찍혔을 장소의 3차원 공간을 상상해 보는 것도 훌륭한 연습이에요. “음... 태양이 저기쯤 있었겠고, 사진은 밝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제법 어둑어둑한 무렵이었겠군...”, 또는 “아이를 이렇게 활짝 웃게 만들려면 뭐라고 말을 걸었으려나?”, 또는 “여기까지 찾아가려면 발품도 꽤 팔았겠고, 때마침 지나가는 양떼를 만나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허비해야 했겠군.” 등등.

남의 사진을 너무 많이 보다 보면 그와 비슷한 아류작을 찍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별 걱정을 다 한다고. 그렇게 찍어서 자기가 봤던 사진이랑 비슷하게 나올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상태일 겁니다. 화가들도 초보 시절엔 남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연습들을 하곤 합니다. 복제전문 화가가 되겠다고 그림에 입문하는 사람이 없듯이, 남의 아류작을 만드느냐 아니냐는 결국 자기 결심에 달린 문제니까 그런 걱정을 지레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사진 자료집들은 가격이 비싸다는 점이 문제가 되긴 하는데, 서점에 서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 주변에 잡지나 광고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삼라만상이 당신의 선생님입니다. 모쪼록 당신의 카메라에 당신의 넘치는 호기심을 마음껏 담아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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