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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 3

posted Oct 3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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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손발로 찍는 사진

    “카메라를 들고, 막 달아나려는 포획물을 당신의 작은 상자 안에 포획하는 그 짧은 순간에 창조적 행위는 막을 내린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3‐1 사진은 카메라가 찍는 게 아니다

앞서 제 2장은 카메라라는 기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긴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나 카메라에 대한 이해는 시작일 뿐, 사진촬영의 끝은 아닙니다. 사진은 “카메라로” 찍는 것이지, “카메라가” 찍는 건 아니니까요. 사진을 찍는 건 어디까지나 당신입니다. 제게 니콘 F3 카메라를 권해주셨던 외삼촌께서 해 주신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면, ‘으음‐ 이런 사진을 찍어야겠다’라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 다음에 셔터를 눌러서 사진을 찍잖니. 그 사진을 인화해 보았을 때, 막상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그림과 똑같은 사진을 얻게 되려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찍으려고 셔터를 눌러서 결과를 비교해보는 과정을 2천 번 정도는 해야 한다더라.”

쉽게 말해서, 의도가 담긴 셔터를 2천 번은 눌러 봐야 카메라라는 붓을 마음대로 휘둘러서 사진이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겠습니다. 카메라라는 첨단기계도 사진촬영이라는 미학적 활동에 있어서는 그림이나 서예에 사용하는 붓에 비해서 근본적으로 더 자율적이랄 것도, 자동적이랄 것도 없는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겁니다.

워낙 뛰어난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도 때때로 제법 그럴듯한 사진을 찍어낼 수는 있지만, 사진사의 의도와 품격이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여느 예술분야와 똑 같은 훈련과 연습과 반성과, 때때로 자괴감에 시달리는 고통의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이것은 저주라기보다는 축복이에요. 만약에, 비싼 카메라만 한 대 덜렁 손에 들면 사진을 처음 찍는 사람이나 셔터를 5천 번 눌러본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사진이 나온다면야 사진촬영이 멋진 예술로 자리 잡을 도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죠. 만약 사진이 전적으로 카메라의 산물이었다면 사진촬영은 예술은커녕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얘기할만한 취미조차 되기 어려웠을 터입니다.

제 2장을 꼼꼼히 읽어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테지만, 카메라는 생명이 없는 도구 치고는 꽤나 멋진 재주를 부릴 수 있는 동반자입니다. 그동안 난다 긴다 하는 기술자들과 예술가들과 카메라 제조사들은 카메라가 사진가의 목적에 잘 봉사하는 기계가 되도록 개량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 왔습니다. 카메라가 부릴 수 있는 재주들의 절반은 이들 사진 기술자들의 공로라고 해야 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빛과 색깔의 성질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조물주의 공로인 셈이죠. 이제 이 기묘하고 재미난 재료들을 가지고 어떤 구체적인 표현을 할 것이냐는 것이 온전히 당신의 몫으로 남습니다. 흥분되지 않으십니까? DSLR 정도의 카메라를 가지게 되었다면, 당신은 마치 화구며 물감 같은 재료들이 빠짐없이 갖춰진 화실을 선사받은 화가와도 같이 창작에 임할 준비가 된 셈이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그림 이야기를 잠시 해 보죠. 저의 생각으론, 화가가 몸에 익힌 예술적 기량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은 수채화가 아닐까 합니다. 덧칠이 밑칠을 가려주지 않기 때문에, 재료를 다루는 솜씨나 종이를 다루는 솜씨뿐만이 아니라, 형태나 색채를 다루는 솜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림이 바로 수채화입니다. 사람마다 서명하는 글씨체가 다르듯이 화가마다 붓놀림의 필체가 다 다른데, 그런 필체가 제일 확연히 드러나는 그림이기도 하죠. 금세 물기를 말려버리는 시간과 다투며 그리는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반면에, 유화는 그림 그리는 사람 속에 숨겨져 있는 잠재적 기량을 제일 많이 드러내 줍니다. 유화는 마음에 들 때 까지 색과 형태를 덧입혀나갈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므로, 참을성을 가지고 끈기 있게 그리는 그림입니다. 유화는 덧칠을 하면 할수록 질량감이 좋아지고 색채가 깊어지기도 합니다. 유화물감의 용매인 기름은 마르는 데 오래 걸려서 어쩔 때는 더 그리고 싶어도 칠이 마르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조급한 마음을 다독이면서, 시간과 벗하며 그리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써놓고 보면 수채화와 유화는 매우 이질적인 예술방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흰 바탕에 물감을 덧입혀 가면서 작품을 완성하는 “더하기” 방식의 창작이라는 점에서는 수채화건, 유화건, 파스텔화건, 크레파스화건, 모든 회화예술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사진은 다릅니다. 비유가 허락된다면, 사진은 일종의 ‘칼질’입니다. 거대한 덩어리로부터 덜어내고 잘라내는 “뺄셈” 방식의 창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4차원의 세계 속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입체적이고, 끊임없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는 세계이니까요. 우리의 전신과 전 생애, 우리가 몸담은 전 세계를 휘감고 흐르는 시간은 잠시도 멈추는 일이 없이 흐릅니다. 상대성 원리를 잠시 잊기로 한다면,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고까지 말할 수 있어요. 물론,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은 하나의 비유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기체나 유체처럼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에서 위치를 바꿔 가는 건 아니니까요.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라고만 말하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인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변화하는 시간의 어느 한 단면을 사진은 ‘찰칵’ 하고 잘라내서 박제의 상태로 얼려버리는 겁니다.

둘째, 우리는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광대무변한 공간 속을 살고 있습니다. 눈이 닿을 수 없는 우주 저 편까지 상상하지 않더라도, 야외에 나가서 사방을 둘러보세요. 위, 아래, 전, 후, 좌, 우 어디 하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구석은 없습니다. 이 드넓은 공간 어느 구석에다가 뷰 파인더로 조그맣게 네모를 쳐서 평면의 영상으로 오려낼 지를, 사진가는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을 찍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어느 순간을 얼려버릴 것이냐”와 “어느 공간을 도려낼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주체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당신입니다. 카메라는, 비유컨대, 칼이나 가위와도 흡사한 도구인 셈이죠.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므로, 여태까지 사진을 찍은 사람이나 앞으로 사진을 찍을 사람이 제아무리 많더라도 당신이 찍을 수 있는 사진은 무한합니다. 이건 좋은 소식이지만, 동시에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 시공이 무한하기 때문에 과연 그것의 어디를 오려내야 아름다운 사진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대단히 미묘하고도 어려운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 3장에서는, 이 어려운 결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사항들을 설명 드릴까 합니다.

3‐2 시간의 어디를 잘라낼 것인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08년생인 그는 2004년에 타계했죠. 앞의 제 1장에 설명한 “기록을 위한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는 데 그가 크게 기여했으므로, 그는 일반적으로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아버지로 숭앙받습니다. 하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현대 사진예술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일상적인 현실감을 절묘하게 반영하는 순간포착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사진 철학을 그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진가들은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취급한다. 그것들이 한 번 사라지고 나면,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사라진 것을 다시 불러올 방법이 없다. 기억을 현상하고 인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종군 사진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 등과 함께 1947년 보도사진 작가그룹인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50mm 표준렌즈만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했고, 그가 애용하던 카메라는 라이카(Leica)의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였습니다. 이 작고 조용한 카메라도 사람들 눈에 띌까봐 그는 카메라의 빛나는 부분을 검은 테이프로 감싸서 가지고 다녔다더군요. 그는 인화 과정에서 사진에 변형을 가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기피했을 뿐 아니라, 사진의 일부를 잘라내는 크로핑(cropping)조차 싫어해서 거의 언제나 필름의 프레임 전체를 인화했습니다. 그는 스트로보를 사용하는 것조차 “음악회에서 권총을 쏘는 것처럼 무례한”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를테면, 카르티에 브레송은 기계가 부리는 재주에 최소한도만 의존하고, 표준 렌즈만을 써서, 카메라의 모든 주요 기능들도 수동으로 조작해야만 사진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본보기요 표상이자 스승이자 증거인 셈이에요.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으려 했던 건 자연스럽고 친근한 사진이 아니라, 일상적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선 느낌을 주는 사진이었습니다. 화가로서 수업을 받기도 했던 그가 지향했던 화풍은 초현실주의였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가급적 단순한 조작과, 가급적 덜 가공된 현실을 통해서 충격적인 느낌과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으로부터 “수동 노출 카메라로 찍은 사진만 진짜 예술”이라는 가르침을 얻었다면, 그것은 오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한 기계와 표준렌즈를 사용해서 충격적인 사진을 찍어내는 그의 방식은 대단히 치열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모두가 카르티에 브레송과 동일한 미학적 가치관을 지닐 필요야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모든 사진가가 카르티에 브레송으로부터 귀담아 들어야 할 조언이 있다면, 그것은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을 포착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입니다. 1952년 미국에서 출간한 그의 사진집 제목이기도 한 “결정적 순간”이라는 표현은 이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이름과 동의어처럼 여겨지고 있을 정도죠. 이 사진집의 프랑스어 제목은 “Images àla Sauvette”인데, “달아나는 이미지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미지들은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카메라로 포박하지 않으면 시간의 저 편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사물은 없다.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 창조적인 한 순간이 존재한다. 당신의 눈으로 삶이 당신에게 제공한 구도나 표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직관을 사용해서 언제 셔터를 눌러야 할지를 깨달아야 한다. 바로 것이 사진가가 창조적인 순간이다. 아차, 그 순간! 그것은 한 번 놓치면 영영 사라진다.”

결정적 순간이란 과연 어떤 순간을 말하느냐 하는 건, 아쉽게도,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사진을 찍는 당신 자신밖에 없는 거죠. 사진은 사진가의 의도를 담는 그릇이니까요. 손에 사진기를 들고서도 어떤 장면을 놓쳤다면, 자기가 뭔가를 놓쳤다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방금 놓친 ‘결정적 순간’은 당신이 며칠째 기다려왔던 장면일 수도 있고, 우연히 벌어진 어떤 현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초보자일수록 사진의 구도와 화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순간포착을 위한 순발력이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원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자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어야 합니다. 카메라가 갖춰야 할 여러 가지 성능 중에서 “언제나 어디나 들고 다닐 수 있는” 간편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거워서 집에 두고 온 최고급 SLR 카메라보다, 혹시 몰라서 주머니에 넣어 온 똑딱이 디카가 더 좋은 카메라라는 뜻이죠. 아니, 더 좋고 말고가 아닙니다.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카메라는 “없는 카메라”입니다.

앞서 제 2장에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똑딱이 카메라의 유용성을 함부로 멸시하면 큰 코 다칩니다. 난다 긴다 하는 전문 사진작가들도 똑딱이 카메라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즘은 500만 화소가 훌쩍 넘는 가공할 성능의 카메라를 탑재한 휴대폰들도 있으니,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택의 폭은 더 커진 셈이죠. 만일 큰 맘 먹고 렌즈 교환용 DSLR을 구입했다면 정작 그 사용법을 잘 익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새로 구입한 묵직한 카메라를 가급적 자주 들고 나다니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카메라의 노출과 초점을 빨리 맞추는 연습을 해보자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진을 촬영하는 행동과 총을 쏘는 행동을 영어로는 다 shooting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을 얘기했었죠? 사진가의 순간포착 연습은 총잡이가 속사수가 되기 위해 연습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Taxi Driver>의 명장면이 혹시 기억나시나요? 로버트 드니로가 총을 여러 개 차고 거울 앞에서 “지금 당신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Are you talking to me?)” 라고 중얼거리며 감춰둔 총을 휘리릭 빨리 빼드는 연습을 하던 장면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가진 카메라가 노출과 초점을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종이라면, 로버트 드니로 식의 연습이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갑자기 들면서 빠른 손놀림으로 노출을 맞추고 초점을 조절하는 연습이죠. 만일 노출을 자동으로 한다면, 초점 빨리 맞추기 연습만 할 수도 있겠죠. 능숙한 사진가가 손에 익은 카메라의 초점을 피사체에 맞추는 속도는 AF 카메라의 모터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고 합니다. 이왕 고급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면 ‘속사수’가 되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눈앞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펼쳐질 때, 이런 연습은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겁니다.

◆ 자동노출과 자동초점을 활용하자

한 발씩 발사되는 구형 소총으로 속사 실력을 발휘해야만 먹이를 사냥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성능 좋은 자동소총이 있다면 그걸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카메라에 버젓이 장착된 자동노출 모드와 AF 모터를 쓰지 않아서 ‘결정적 순간’을 놓친다면, 그건 이유 있는 고집이라기보다 바보스러운 짓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 카메라의 AF 렌즈는 내부에 설치된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한 손떨림 방지기능 덕분에 운전 중에 한 손으로 바깥의 경치를 찍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안정적입니다. 그럴 정도라는 뜻이지, 운전 중에 한 손으로 묘기를 부리라는 뜻은 아닙니다만.

◆ 연속사진과 브라켓팅을 이용하자

고급 기종 카메라가 갖추고 있는 연사 기능은 순간포착에 매우 유용합니다. 웬만한 보급형 DSLR들도 초당 3‐5장의 연사 기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표정이나 자세는 0.1초 단위만 달라도 다른 느낌을 줍니다. 사진가가 자기 의도를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촬영하는 시간보다 미세한 차이를 잡아낼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죠.

노출 브라케팅을 사용하면, 카메라는 적정노출보다 단계별로 노출이 덜하고 더한 사진들을 몇 장 더 찍어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빛과 카메라에 기록되는 빛은 언제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당히 숙련되기 전에는 풍경을 눈으로 보면서 결과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눈이 엄청나게 기능이 좋은 카메라라서 그런 거죠.) 그런 경험부족의 빈 공간을 브라케팅 기능이 잘 채워줍니다.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찍어내는 능력은 중요하므로, 브라케팅을 남용한다면 그만큼 자신을 훈련시킬 기회를 저버리는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일생에 단 한 번 방문한 멋진 장소에서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다고 합시다. 그런데 피사체가 역광이거나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산처럼 콘트라스트가 커서 어떤 노출이 적당한지 망설여집니다. 이럴 때는 굳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느라 그 순간의 빛과 표정과 자세와 구도를 놓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거침없이 브라케팅!

◆ 기다림을 연습하자

‘결정적 순간’이란 건 넋 놓고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별안간 휙 나타나서 “날 찍어주쇼”하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피사체가 원하는 밝기의 빛을 받으며 원하는 모습을 갖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좋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과, 용기를 가지고 다가서는 사람이 좋은 사진을 찍는 거죠. 기다려야 알맞은 시간을 잘라낼 수 있고, 다가서야 꽉 찬 공간을 잘라낼 수 있거든요.

기다림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원하는 계절, 원하는 기후, 또는 원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나의 피사체가 원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눈이 오기 시작하거나 그치기를 기다릴 수도 있을 터이고, 산등성이에 역광을 받으면서 행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도 있겠습니다. 저물어가는 해가 나뭇가지 사이에 걸릴 때를 기다릴 수도 있고, 저만치서 놀고 있는 꼬마들이 다함께 깔깔대며 웃어젖히기를 기다릴 수도 있을 겁니다. 고양이의 기지개나 강아지의 하품을 기다릴 수도 있을 거고, 사납던 태양빛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수그러들기 시작하는 순간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겁니다. 잘 찍은 사진들은 대체로, 무심한 속사수들의 우연한 전리품이기보다는 참을성 있는 저격수들의 보람찬 포획물인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 움직이는 것들의 움직임을 예측해보자

<Next>라는 영화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는 앞으로 몇 분 후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초능력을 가진 사나이로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악당이 난사하는 빗발치는 총알 사이를 뚫고 나가기도 합니다. 왼 발을 한 발 더 내딛으면 자신이 총에 맞습니다, 그러니까 방향을 바꾸고, 그 다음 총알은 얼굴로 날아옵니다, 그러니까 상체를 숙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만화 같은 얘기지만, 사진가들이 부러워할 초능력은 몇 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몇 분, 내지는 몇 초 후를 내다볼 능력일 겁니다. 그럴 수 있다면, ‘결정적 순간’은 좀처럼 우리 카메라를 벗어나기 힘들겠죠. 기다리는 훈련이 유익한 이유는 참을성을 길러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피사체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 어떤 순간을 기다리다 보면, 피사체를 둘러싼 움직임들을 어느 정도 예측하는 연습도 하게 됩니다.

음, 내가 원하는 빛깔의 낙조가 지려면 25분쯤 남았겠군. 지난 30분간의 차량통행 패턴으로 봐선 앞으로 3분쯤 후면 적당한 지점에 학생들을 잔뜩 내려놓을 버스가 나타나겠군. 기다림을 통해 체득하는 진짜 연습은 이런 거라고 생각됩니다.

◆ 마구 찍어보자 

우리는 사냥감을 찾아 잠복한 육식동물처럼 참을성을 무기 삼아 사진을 찍을 수도 있지만, 인내심이 소진되었거나 마음이 급하거나 또는 뭘 찍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땐 마구 찍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우연이 선사하는 좋은 사진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 주변의 사물이나 식구들, 자화상, 또는 주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마구잡이로 찍어대다 보면 어디선가 그럴듯한 피사체를 발견할 수 있기 마련입니다. 예전에 필름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이런 방법을 함부로 권하기 부담스러웠습니다. 효과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사치스러운 실험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요즘은 디카가 대세이지 않습니까!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 카메라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장점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은 지워버리면 그만이니까, “마구 찍는” 초식의 비용을 거의 0(영)에 수렴하도록 만들어준 거죠. 직접 한 번 해 보세요. 의외로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도움이 되는 놀이임을 발견하게 되실 테니까요.

3‐3 시간의 마술

똑 같은 풍경을 다른 시간에 찍어보면, 빛에 따라 풍경의 인상이 크게 변하는 데 놀라게 됩니다. 희망차 보이던 풍경이 씩씩하게도, 지루하게도, 또는 애잔하게도 느껴집니다. 긴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루 중에도 빛은 변화무쌍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이 대목에서 문득, 서로 사귀다가 여자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동서양으로 떨어져 지내게 되었던 후배 커플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이른바 장거리(long‐distance) 커플이 된 것인데, 주변 사람들은 마치 짓궂은 저주처럼 “롱‐D 커플의 연애는 오래가기 어렵다”고들 이야기하더랍니다. 오기가 나서라도 두 사람은 잔인한 전화요금 고지서와 분투를 벌이면서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후배가 한숨을 쉬며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변한 건 아닌데, 시차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활기찬 기분으로 전화하면 저쪽은 지친 저녁이고, 밤에 술 한 잔 걸치고 멜랑콜리한 우수에 젖어 감미로운 통화를 좀 할라 치면 상대방은 막 하루를 시작하는 바쁜 시간이라 분위기를 맞출 길이 없더라는 거죠. 말뜻을 알아듣는 것만으로 연애가 되는 것일 리는 없습니다. 서로의 분위기가 전달되어야 했던 겁니다. 한낮 사진과 저녁 사진을 여러 장 섞어놓고 한 번 살펴보시길. 이 사진들은 마치 롱‐D 커플들처럼 서로 교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한낮의 태양은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집니다. 이때 햇빛은 매우 밝은 양지와 짧고 어두운 그림자로 이루어진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냅니다. 그림자가 드물기 때문에, 정오 무렵의 야외 사진들은 대체로 평면적이고 납작한 느낌을 줘요. 위험한 일반론에 기대서 말하자면, 대낮은 사진 찍기에 좋은 시간은 아닌 셈이죠. 대낮의 태양광은 미세하게 푸른 기운이 돕니다. 사람의 눈은 적응력이 강해서 그 푸른 기운을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카메라는 민감하게 기록합니다. 대비(contrast)가 지나치게 강한 사진 속에서 사물의 형체는 오히려 왜곡되어 보이는 수가 있기 때문에, 뙤약볕이 쨍쨍 내려쬐는 날보다는, 구름 덕분에 태양빛이 야외를 마치 스튜디오 내부처럼 부드러운 확산광으로 채워줄 때가 사진 찍기에는 더 좋은 날씨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일 뿐입니다. 강렬한 직사광선 아래서만 찍을 수 있는 강렬한 사진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한편,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의 태양빛은 지구라는 무대 위에 비춰지는 가장 드라마틱한 조명입니다. 햇볕은 붉은 기가 도는 따뜻한 빛깔을 띠고, 사선으로 기울어지는 음영이 사물의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만들어주죠. 이 조명 아래서 건물은 정감 있어 보이고, 풍경은 장엄해 보이고, 인물은 성숙해 보입니다. 똑같은 피사체가 마치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은 것처럼 감광되는 겁니다. 이 극적인 조명은 하루 중 짧은 시간 동안에만 존재하다가 스러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출 후 한 시간과 일몰 전 한 시간은 이른바 '매직 아워(magic hour)', 그러니까 마법의 시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조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앞에서 설명한 속사 연습이라든지 기다림 같은 것이 중요합니다.

붉은 노을로 타오르던 저녁 무렵의 태양빛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단말마와 같이 옅은 청회색으로 빛나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twilight blue라고 부르는 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지만, 이 시간대에 찍힌 사진들은 독특한 애수를 덧입습니다. 해가 솟아오르기 직전의 박명도 멋진 조명이죠. 자연조명의 이런 아름다움을 일단 느끼게 되고난 후에는, 스트로보를 터뜨려 피사체에 인공조명을 씌워버리는 일이 무작스러운 만행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스트로보 사용을 가리켜, “음악회에서 권총을 쏘는 것처럼 무례한 짓”이라고까지 표현했으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적절한 대목에서 잘 쓰인 스트로보는 사진의 아름다움에 보탬에 될 수 있으므로 인공조명에 대해 지나친 결벽으로 일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자연광을 살려보려고 애쓰는 대신 게으르게 스트로보를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틀림없습니다. 

사진기가 정상이라고 판단하는 것보다 한두 스톱 쯤 노출을 과하게 찍으면 어딘가 몽환적이거나 반항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고의로 노출을 조금 부족하게 찍으면 예민한 느낌의 사진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여명이나 박명 속의 미약한 태양광을 가지고 어렵사리 찍은 사진으로도 멋진 느낌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빛만 있으면 어디서든 찍을 수 있기 때문에, 빛이 어떤 느낌이나 색조를 띄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눈이 백색 또는 주광색으로 인식하는 형광등을 네거티브 필름은 초록색이 감도는 빛으로 인식합니다. 텅스텐 계열의 백열등은 사진으로 찍어보면 눈으로 인식했던 것보다 더 노란 기운이 짙게 감돌게 나오죠. 디지털 카메라의 경우, 카메라더러 지금 조명을 기준으로 봤을 때 어떤 색깔을 흰색으로 삼을지를 지정할 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화이트 밸런스(white balance)”라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노란색 가로등 아래에서 카메라로 흰 종이에 대고 화이트 밸런스를 맞추면, 그때부터는 흰 종이가 흰색으로 나오게끔 다른 모든 색깔을 조절하는 겁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예컨대 흰색이랍시고 아이보리색에다가 밸런스를 맞췄다가는 진짜 흰색은 퍼러스름하게 나와 버린다는 점이에요. 참고로, 평균노출은 회색 카드(Grey Card), 화이트 밸런스는 흰색 물건으로 한다는 점을 헛갈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화이트 밸런스는 인공조명 아래서 그림을 촬영할 때 매우 요긴한 기능이긴 한데, 그렇다고 조명을 백색광으로 맞춰주는 게 언제나 능사인 건 아닙니다. 예컨대 그림자 상태로 미루어 전등조명임이 확실한데 백색조명처럼 사진에 찍히는 것도 부자연스러울 수 있거든요. 경우에 따라선 텅스텐 조명이 강렬한 노란 빛으로 나올 때 비로소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사진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조명의 색 얘기가 나왔으니 색온도에 대해서 잠간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눈이 인식하는 색깔들은 빛의 파장을 타고 전달됩니다. 이 색의 절대적인 값을 표시하는 방식을 색온도라고 합니다. 왜 굳이 온도라는 척도를 사용하냐 하면, 물체에 열을 가했을 때 초반에는 붉게 변했다가 점점 온도를 높임에 따라 황색, 백색이 되고 정말 뜨거우면 푸른색을 띄게 되기 때문이에요. 망원경으로 별빛을 보면서 그 별이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지를 계산해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치입니다. 색온도는 절대온도를 기준으로 캘빈도(K)라는 단위로 표시되는데, 맑은 날 정오 무렵의 태양광은 색온도가 대체로 5500K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보다 색온도가 낮은 조명은 붉은 색을 띄고, 색온도가 높으면 푸른색을 띄는 거죠. 아침과 오후 나절의 태양빛은 4000~5000K, 일출 및 일몰시에는 2000~3000K, 텅스텐광은 3200K 정도라고 합니다, 대략.
 
주의할 점은, 붉은 빛이 따뜻한 느낌을 주고 푸른빛이 차가운 느낌을 준다는 직관적 표현과 색온도는 반대라는 사실이에요. 그러니, 어떤 사람이 “이 사진은 전반적으로 색온도가 너무 높은 빛깔이라서 차가운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하는 대신 “아하, 그런 뜻이로군”하고 이해하실 수 있으면 되겠습니다.
 
자, 그럼, 앞에서 설명한 하루 동안의 태양빛을 색온도로 다시 한 번 표현해 봅시다. 일출 무렵의 색온도는 낮습니다. 태양의 직사광선이 붉은 빛을 띠기 때문이에요. 낮 시간에 백색광에 가깝게 높아졌던 태양광의 색온도는 일몰 무렵에 다시 낮아져서 붉은 색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낮 시간에 해가 구름에 가리거나 날씨가 흐려져서 직사광이 사라지면, 푸른 하늘에 반사된 이른바 “천공광”만 남게 되어 전반적으로 푸른색이 감도는 상태가 됩니다. 즉, 비나 눈이 내리는 흐린 날에는 색온도가 한층 더 높아지게 됩니다. 맑은 날이라도 그늘진 곳의 색온도는 높기 때문에 푸른빛이 감돕니다. 이런 자연조명의 변색을 잘 활용하거나, 거기에 잘 대처하는 것이 좋은 사진을 찍는 비결 중 하나입니다
 
사진 전용 인공조명을 사용한다면 색온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습니다. 스트로보는 태양광의 색온도인 5500~6500K로 맞춰져 있어서 별다른 색보정이 필요 없는 백색광을 뿜어냅니다. 그 때문에 다른 인공조명을 받는 주변의 풍경과는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은 때때로 단점이 되기도 하죠. 무슨 조명이 되었든지, 인공 광원을 이용한다면 눈으로 보는 것과 사진에 찍혀 나오는 것 사이에는 꽤 차이가 많이 나니까, 익숙해지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디카의 경우에는 모니터로 미리 색상을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서 적절한 만큼 화이트 밸런스를 조절하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주변의 풍경들은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짓습니다. 조명의 변화가 초래하는 마술이죠. 사람들 역시 단 한 번도 똑같은 표정과 몸짓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변화의 연속선을 어느 대목에서 싹둑 잘라내어 사진 속에 담을 건지는 전적으로 카메라를 손에 든 당신의 결정입니다. 정적인 사람은 안정적인 사진을 찍을 것이고, 동적인 사람은 역동적인 사진을 찍어낼 터입니다.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굳이 정답을 찾자면, 사진 속에 스스로의 성격과 특징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사진이 좋은 사진일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피사체의 모습이나 상태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면, 동일한 풍경을 다양한 시간에 찍어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되어줄 겁니다.
 
3‐4 공간의 어디를 오려낼 것인가?
 
잘라내야 할 것은 시간만이 아니에요. 무한하게 이어지고 펼쳐진 공간의 어디를 잘라낼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면 사진으로 잘라낸 작고 네모난 공간을 프레임(frame)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매크로 렌즈를 사용해서 코딱지만 한 무당벌레로 프레임을 가득 채울 수도 있고, 프레임 속에 거대한 건물이나 산을 담고도 넉넉하게 남는 구도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3차원 공간을 평면의 프레임 속에 담을 때 생각할 문제는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화면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구도(composition)의 문제입니다. 피사체와 주변요소의 비중, 원근감, 방향성 등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같은 피사체를 찍은 사진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거든요. 둘째는, 화면 속에 담겨지는 피사체를 화면 속에 어떻게 배치하느냐 하는 미장센(Mise‐en‐scene)의 문제입니다. 미장센이란, '무대에 올린다'란 뜻의 프랑스어로 원래는 연극에서 쓰이는 용어였는데 요즘은 주로 영화의 장면구성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로 영화 용어로 알려진 미장센을 굳이 들먹이는 이유는, 구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화면 속에 의도적으로 배치된 소품들이 화면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기는 영화건 사진이건 매한가지기 때문입니다. 
 
<구도(Composition)>
 
구도는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시선의 방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막이나 너른 들판처럼 넓이와 안정감을 강조하면서 풍경의 광대함을 나타내고 싶을 때는 수평구도를 사용하고, 높이와 깊이를 강조하면서 원근감을 드러내고 싶을 때는 수직구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수직구도는 자칫 불안정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잘 사용하면 '정적인 역동성', 그러니까 막 운동량을 가지려고 하는 정지 상태 같은 잠재적 운동의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화면 아래쪽에 무게중심을 두면 안정감 있는 구도가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균형이 잘 이루어진 화면을 보면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균형이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빈틈없는 대칭형이나 반복적인 구도는 갑갑하고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균형을 깨뜨리는 구도는 역동성을 가지고 시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줍니다. 그 시선의 방향에 따라서 동적 구도는 구심적일 수도, 원심적일 수도, 직선운동적일 수도, 율동적일 수도 있겠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찍는 것을 부감(high angle) 촬영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풍경을 찍으면 객관적이고, 안정감 있고, 평온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인물을 부감촬영하면 (촬영자의 시점에서) 냉정한 느낌이 나거나 (피사체의 입장에서) 외롭고 왜소한 느낌을 풍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면서 찍는 것은 앙각(low angle) 촬영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 피사체는 눈높이에서 찍었을 때보다 당당하고 위대하고 씩씩해 보인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의 자화상은 거의 모두 로우 앵글로 찍혀 있죠.
 
사진에서 피사체의 윗부분에 나뭇가지든, 건물의 일부분이든 어떤 인위적인 하위 프레임(sub‐frame)을 배치하고 그 아래쪽으로 주 피사체가 놓이도록 찍으면 피사체는 통제되거나 억압된 느낌을 풍기게 됩니다. 사진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놓인 피사체는 사진에서 막 빠져나가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왼쪽 끝에 자리 잡은 피사체는 사진의 가운데 쪽으로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글자를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읽도록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습관이란 무섭지 않습니까? 글자를 우리와는 반대방향으로 읽는 아랍 사람들은 그림을 볼 때도 우리와는 반대방향으로 "읽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무슨 물건이든 화면의 구도를 구성하는 요소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나뭇가지나 철골이 될 수도 있고 자동차나 건물, 또는 교각이나 담벼락이 될 수도 있죠. 입체적 형태를 갖춘 물건이 아닌 음영이나 색깔도 구도의 일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둡고 강함, 또는 강렬함을 활용해서 시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죠. 어두운 색이 밝은 색보다 아래쪽에 있으면 안정감을, 그 반대면 불안정한 느낌을 줄 겁니다. 밋밋한 무채색 가운데 강렬한 붉은 삼각형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꼭지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볼 거 아니겠습니까?
 
그림자를 구도의 일부로 활용하려면 상당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3차원의 세계 속에서 그림자는 여간해선 그 어떤 형태로 인지되기 쉽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 손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그림자놀이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입체 속에 구겨져 보이는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평면의 사진 속에 어떤 모양으로 찍혀 나오게 될지를 상상해보는 연습이 필요한 거죠. 카메라처럼 2차원으로 보는 연습이랄까? 대비(contrast)가 강한 풍경의 경우,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면 음영은 밝기의 차이만이 아니라 형체도 드러냅니다. 한번 실험해 보시죠. 콘트라스트가 강렬하지 않더라도 노출을 적당히 조절하면, 그림자만으로도 제법 그럴싸한 구도를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그럼 어떤 구도가 좋은 구도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 같은 건 없습니다. 얼마든지 독창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를 가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뜻이죠. 그렇긴 해도,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들의 구도를 잘 뜯어보면 어떤 공통점이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림이나 사진의 구도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는 건 “3분할”이라는 방식입니다. 세간에는 흔히 3분할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저는 ‘법칙’이라는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 합니다. 독자들께서는 모쪼록 3분할을 마치 ‘꼭 지켜야 할 규칙’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도에 대한 그 어떤 강박관념도 나만의 독창적인 사진을 찍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알아두면 매우 유용한 구도설정방식이기 때문에 삼분할 구도를 소개드리는 것뿐입니다.

옆의 그림처럼 화면을 가로 세로로 3등분을 해 보죠. 그러면 화면 가운데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4개 생겨납니다. (빨간 표시가 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 지점을 달리 표현하면 화면 속 수평 및 수직 1/3 또는 2/3 지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이곳에 주 피사체를 위치시키면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변화가 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피사체를 정중앙에 배치하는 수가 많은데, 우리 시각은 정중앙에 주 피사체가 놓여있는 사진을 지루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중앙을 비껴나 있는 사진에 더 매력을 느끼고, 그런 사진이 더 재미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습관적으로 화면의 중앙에 주 피사체를 놓는 이유 중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카메라가 뷰파인더의 가운데에 있는 피사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탓도 있습니다.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동상을 가운데 놓고 가까운 곳에 선 내 친구를 화면의 오른쪽에 놓는다면 동상에만 초점이 맞고 정작 내 친구는 흐릿하게 나와 버리는 식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폰카나 디카, 또는 똑딱이 필름 카메라로 3분할 구도를 찍으려면, 제 2장에서 설명한 반셔터가 아주 유용합니다. 주 피사체를 가운데 놓고 초점과 노출을 고정하도록 카메라 셔터를 절반만 누른 다음, 카메라를 살짝 옆으로 돌려서 주피사체를 3분할 지점으로 옮겨놓고 나머지 셔터를 눌러주는 겁니다.

그냥 이 정도로만 3분할 구도를 이해하셔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탐구심 강한 독자분들을 위해 좀 더 깊숙한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3분할 구도에 매력을 느끼는 현상은 의외로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황금비율’이라는 숫자와 관련되어 있거든요. 그 비율은 1:1.618 정도입니다. 황금비를 가진 직사각형을 다시 황금분할로 나누면 대략 뷰파인더를 3분할(2:3)하는 것과 비슷한 분할이 이루어집니다.

황금비율을 구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일정한 길이의 선분을 a와 b라는 두 부분으로 분리했을 때, 선분 전체와 a 부분의 비율이 a와 b 사이의 비율과 동일하게 되는 지점이 딱 한 군데 생깁니다. 그 지점에서 a와 b의 비율이 다름 아닌 1:1.618인 겁니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b):a = a:b

이를테면, 일정한 길이를 가진 선분을 두 부분으로 분할할 때, “전체와 부분의 비율”과 “두 부분 사이의 비율”이 똑같게 됨으로써, “전체와 부분이 통일적 질서” 속에 놓이는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수학적 질서 덕분인지, 인간의 시각은 1:1.618 비율을 응용하여 만든 물건이나 건축물 등을 가장 안정감 있게 느끼는 겁니다. 재미나죠?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지을 때나, 아테네인들이 파르테논 신전을 지을 때도 황금비를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식물의 잎차례(phyllotaxis), 꽃차례(inflorescence), 앵무조개 껍질의 나선구조, 심지어 은하계의 나선구조 등에서도 황금비가 관찰됩니다. 인체에서도 팔의 길이를 어깨 폭으로 나눌 경우, 사람 키를 발끝에서 배꼽까지의 높이로 나눌 경우, 각 손가락 아래쪽 두 마디 길이를 맨 위 첫째 마디 길이로 나눌 경우, 황금비율에 가깝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황금비가 아주 오래 전부터 가장 조화가 잡힌 비율로 일컬어지면서 미적 구도의 기준으로 대접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겠습니다. 그리스의 수학자 에우독소스가 이 비율을 황금비라고 명명한 이래, 중세의 프라르카파티오리라는 사람은 이것을 "신성한 비례"로 간주하기까지 했습니다. 황금비는 현대에도 우리 생활 주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컴퓨터 모니터나 TV 화면, 복사용지, 책, 십자가, 신용카드, 명함 등의 가로, 세로 비율이 대략 황금비율을 따르고 있습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나 사진의 가로 세로도 예외가 아닌 겁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가지 더. 0과 1에서 시작해서 바로 앞의 두 숫자를 합한 수자들의 수열을  “피보나치 수”라고 합니다. 피보나치 수 역시 자연계에서 자주 관찰되고 있는데, 신기한 것은, 피보나치 수를 아무거나 골라서 바로 앞의 피보나치 수로 나눈 값이 1.1618이라는 황금비에 수렴한다는 점이에요. 피보나치 수가 커질수록 나눈 값은 황금비에 더 가까워집니다. 미심쩍으면 한 번 실험해 보세요. 피보나치 수열은 다음과 같습니다.

  0,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377, 610, 987, 1597, 2584, 4181, 6765, 10946... 

재미있으라고 자세히 설명 드린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3분할 구도를 설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구도를 사진 속에 구사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하십사 하는 취지일 뿐입니다. 그 어떤 “법칙”도 당신이 찍는 사진을 구속하거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당신의 사진은 당신만의 창작물이니까요. 3분할을 잊는 것은 괜찮지만, 이점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미장센(mise‐en‐scene)>

사진 속 피사체들을 배치하는 문제를 굳이 구도에 관한 설명에서 따로 떼어내서 “미장센”이라는 영화용어를 써가며 설명하는 이유는, 구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 보조 피사체들도 나름대로의 의미와 역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사진 속에 기록될 때, 그것은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진가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일단 사진 속에 뭔가를 담을 때는 가급적 의도를 가지고 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공인되어 오던 상징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양화에서 정물은 종종 삶의 무상함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거울은 허상을 뜻했습니다. 사물을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으로 나누어 보는 습관도 서양화의 오랜 전통입니다. 백합은 순결을 뜻하고 장미는 정열을 뜻한다든지 하는 좀 더 직설적인 상징도 있을 수 있고, 평화를 염원하는 뜻을 사진 한 구석에 찍힌 비둘기 한 마리에 담아볼 수도 있겠죠. 그 밖에 당신이 기독교 신자라면 서양화 전통 속에서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온 수많은 종교적 소품들을 피사체로 활용하여 신심을 표현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면 더 오래된 전통을 따라 동양화의 상징체계를 빌려보는 것도 재미난 실험이 될 수 있습니다. 동양화는 예로부터 관념적인 회화체계이므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어쩌면 제가 굳이 미장센을 구도와 분리해서 설명하는 까닭도 그런 취지와 일맥상통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속에도 '읽혀질' 의미들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까요.

동양화 속에서 꽃들은 그 이름이 읽히는 발음을 따라 독특한 뜻을 지녔습니다. 모란은 부귀(富貴)를, 석죽(石竹) 이라고도 불리는 패랭이꽃은 “장수를 축하하는” 축수(祝壽)를, 연뿌리인 연과(蓮果)는 과거에 연달아 합격한다는 축원의 뜻을 담기도 했었답니다. 계관화(鷄冠花)인 맨드라미는 벼슬을 한다는 뜻을 담기도 했고, 버드나무는 머문다는 뜻을, 밤과 대추는 조립자(早立子)로 읽어 '아이를 일찍 낳다'는 뜻으로 통했습니다. 물고기를 그릴 때는 3의 배수로 마릿수를 정했는데, 그것은 물고기(魚)를 여(餘)로 읽어 선비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여유를 뜻하는 '삼여도'로 새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양화의 이런 의미체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조용진 교수의 <동양화 읽는 법>이라는 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동서양의 회화전통에서 약속으로 정착된 이미지들을 상징으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좀 너무 도식적인 느낌이 듭니다. 특히, 상투적인 상징을 과도하게 사용한다면 오히려 자기 사진의 독창성에 독이 될 위험이 있겠죠. 내 사진의 의미는 내가 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는 온전히 사진을 보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진가와 감상자는 정해진 약속의 체계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정의되기 어려운 느낌을 통해서 서로 교감하고 소통합니다.

그러니 상징적인 의미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는 말도록 합시다. 사진의 미장센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다른 데 있습니다. 이집트를 방문해서 피라미드 앞에 섰다고 해 봅시다. 만일 당신이 그 불가사의한 거대함에 압도되고 매료되어 피라미드만을 촬영했다고 칩시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은 조그만 인화지에 기록된 사각뿔 모양의 돌무더기를 볼 뿐이지, 그 규모를 실감할 길이 없습니다. 거대한 석상의 크기나, 만년설이 뒤덮인 산봉우리의 높이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피사체를 찍을 때는 누구나에게 크기가 잘 알려진 (이를테면 사람 같은) 보조 피사체를 함께 찍어서 그 규모를 한눈에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산봉우리 아래를 스쳐 지나가는 비행기를 조그맣게 함께 찍는다면 산의 높이와 규모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 식으로 보조 피사체를 활용한 미장센이 사진의 전반적 구도에도 도움을 준다면 일석이조겠지요.

그림을 분류하듯이, 사진도 풍경사진, 인물사진, 정물사진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런 틀에 가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사진가는 사진의 프레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그것은 풍경 속의 인물이나 정물일 수도 있고, 연필을 쥔 손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풍경처럼 찍힌 사진도 있고, 인물이 잡동사니들과 똑같은 비중이로 찍힌 사진도 있습니다. 풍경이나 인체나 소품의 전체를 찍을 수도 있고, 일부만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 사진의 화면 속에(en scene) 무엇이 놓이건(mise) 간에, 그것의 느낌과 의미와 역할을 결정하는 것은 당신입니다.

3‐5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법

눈으로 본 광경과 사진에 찍혀 나온 그림은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매우 성능이 좋은 스테레오 동영상 카메라라서, 렌즈 두 개가 한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입체로 보기 때문이에요. 사람의 시야에는 검은 사각형 테두리가 둘러쳐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는 카메라가 세상을 보는 방법을 흉내 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카메라의 프레임처럼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하는 거죠.

우선, 사진을 찍기 전에 한쪽 눈을 감고 피사체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 보면, 풍경이나 인물이 평면으로 찍혔을 때 어떤 느낌일지 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손이나 도구를 사용해서 내가 찍으려는 풍경 주변에 인위적으로 3:5 정도 비율의 프레임을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사각형을 만들어 경치를 훑어보기도 하고, 좀 유별나다 싶지만 필름이 끼워지지 않은 슬라이드 커버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꺼내서 그 네모난 구멍을 이리저리 견주며 (눈 가까이, 또는 멀리 움직이기도 하면서) 프레임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연습을 하거나, 또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더라도 의식적으로 인위적인 프레임으로 풍경의 여백을 크롭(crop: 잘라내 버리다)하는 버릇을 들이다 보면, 내가 촬영하게 될 사진의 결과를 좀 더 잘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의 시각 속에 보이지 않는 사각형 프레임이 자리 잡게 되는 거죠. 세상을 조그만 네모로 바라보는 훈련이랄까요?

물론 직접 카메라를 들이대고 뷰파인더로 보면 되긴 합니다. 하지만 뷰 파인더는 “찍힐 공간”만을 눈앞에 보여줄 뿐, “찍힐 수도 있었을” 프레임 바깥의 잠재적 피사체들까지 다 함께 보여주진 않지요. 그런 이유에서,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의 애호가들은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을 “의식의 흐름”에 비유하곤 하는 겁니다. 레인지 파인더는 카메라의 가장자리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사진가는 촬영을 하는 동안 한쪽 눈은 뷰 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는 다른 한쪽 눈으로는 프레임 바깥을 포함하는 실제 세상을 볼 수 있거든요. 이렇게 하면, 어떤 피사체가 프레임 바깥으로부터 안쪽으로 들어오는 속도나 시점을 좀 더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두 눈을 한꺼번에 뜨면 사진가는 실제 풍경 속에 프레임이 겹쳐진 형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꽤 멋진 일이긴 해요. 뷰파인더가 한가운데 달려 있는 SLR로는 이런 재주를 부리긴 어렵습니다.

<프레임 바깥에도 세상은 존재한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영화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화의 테크닉 중에는 외화면(外畵面: Off‐screen)이라는 게 있습니다. 화면 속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고 해서 관객들은 화면이 끝나는 지점부터 허공이나 진공상태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이 갑자기 화면 아래쪽으로 휙 사라진다면, 그 캐릭터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는 카메라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넘어지거나 길에 난 구멍 속으로 빠져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럴 경우, 관객들은 화면 바깥에 존재하는 외화면 속에 널브러진 등장인물을 상상합니다.

외화면은 시각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력의 영역인 겁니다. (영화에서는 외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청각적으로 들리기는 합니다. 청각적 요소들이 외화면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활성화시켜줍니다.) 볼 수는 없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인 거죠. 하지만 그것은 화면의 연장선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화면 속에 소개되는 것들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외화면은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더 쳐든다고 해서 보이는 공간도 아니요, 귀를 막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공간도 아닙니다. 관객은 카메라에 찍힌 것들만을 봅니다. 화면 속에 담긴 피사체들은 영화감독이나 관객이나 똑같이 볼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외화면에 담긴 것, 또는 화면의 프레임 안에 찍히지 않은 사물은, 감독은 볼 수 있어도 관객은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외화면은 감독에게 관객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제공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런 외화면의 특성이 가장 자주, 그리고 잘 나타나는 장르의 영화가 공포영화나 범죄물 같은 스릴러입니다. 어두운 공간에서 살인마나 적에게 들키지 않고 활로를 찾으려는 주인공이 있다 칩시다. 카메라는 이런 인물들을 멀찍이서 찍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긴박감이 뚝 떨어져 버립니다. 대신, 주인공이 화면에 가급적 가득 차도록 가까이서 찍습니다. 바꿔 말하면 스크린 속의 공간을 최소화하고, Off‐screen, 즉 외화면의 공간을 최대화하는 거죠. 이렇게 찍으면 관객들은 등장인물이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보다 훨씬 더 작은 공간만을 볼 수 있고, 그 나머지 외화면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합니다. 현실 속에서 누군가가 바로 옆에 서 있다면 알아채지 못할 리가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겁먹은 등장인물을 크게 프레임 속에 찍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외화면으로부터 주먹이나 몽둥이가 날아들어도 그럴듯하게 보이는 거죠. 관객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외화면을 등장인물도 보지 못할 것만 같은 착시현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975년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Jaws>는 카메라가 상어의 시점에서 희생자를 향해 점점 다가가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긴장감을 적절히 조성하는 음악과 함께 사용되었을 때, 이러한 기법이 큰 효과가 있다는 점이 드러나자 그 이후 가해자의 시점으로 긴장을 조성하는 테크닉도 자주 쓰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외화면을 활용한 긴장감 조성과는 다른 것이므로 다른 기회에 살펴볼 이야기에 해당하겠습니다.

동영상처럼 시간적 연속선상 속에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사진에서는 외화면(Off‐frame)의 역할은 영화에서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진을 바라보면서도 프레임의 바깥 공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느 정도는 상상하지 않기가 더 어렵습니다. 사진에도 외화면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진 속에 스릴과 서스펜스, 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약간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싶다면 영화의 이론을 응용해서 외화면을 활용하는 실험도 해볼 수 있습니다.

사진에 찍히지 않는 프레임 바깥의 뭔가를 보면서 화내거나 놀라는 인물을 찍었다면? 그런 사진은 뭔가 설명이 부족한 느낌을 주긴 할 테지만, 동시에 감상자에게 다양한 상상을 자극하기도 할 터입니다. 두 노부부가 화면 바깥쪽의 뭔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진이라면? 조금 예측 가능하긴 하지만 불확실한, 여러 가지 즐거운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화면 바깥의 뭔가를 붙잡으려는 시늉을 하면서 뛰어가는 장면이 있다고 칩시다. 만일 그 사람 앞에 하이힐 한 짝이 놓여 있다면? 외화면에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이 신데렐라처럼 구두를 잃어버린 채로 달아나는 미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쓸모 있을 지도 모를 몇 가지 조언들>

◆ 크로핑! 프레임을 다양하게 설정해 보자

글쓰기 또는 그림 그리기나 마찬가지로, 사진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선생님은 스스로의 경험입니다. 그 속에는 실패와 실수와 후회가 포함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피사체를 찍을 때 어떤 구도가 좋을지를 단번에 결정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여러 각도, 여러 거리에서 사진을 찍어서 비교해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매번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다면 이왕에 찍어둔 사진을 가지고 크로핑(cropping)을 이리저리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크로핑이란, 전체 사진 중에서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큼만 오려내는 걸 말합니다. ㄱ(기역)자 백지와 ㄴ(니은)자 백지를 사진에 대 보면서 가려지는 부분을 조금씩 바꿔 가며 잘라낼 크기를 가늠해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크로핑은 사진 전체의 비율(대략 3:5)에 맞게 하는 것이 무난하겠지만, 꼭 그런 비율로 잘라야만 한다는 법칙 따위는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파노라마 사진처럼 길쭉하게 잘라볼 수도 있고, 정사각형에 가깝게 크로핑을 해봐도 좋습니다. 다만, 위 아래로 너무 길쭉한 사진은 ‐ 그런 사진이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 그다지 인상적인 느낌을 주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크로핑의 힘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잘라내도 훨씬 더 인상적인 사진을 얻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으니까요.

◆ 주제별로 찍어보자

도대체 뭘 찍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는 하나의 피사체를 여러 시간에, 여러 각도에서, 여러 구도로 찍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동이를 나르거나 나무를 하면서 내공을 기르는 식으로, 하나의 피사체만 내내 찍다 보면 뭔가 이거다 싶은 느낌이 올 수도 있는 이치죠.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요? 하나만 정해놓고 찍기가 너무 단조롭고 지루하다면, 하나의 좁은 주제를 정해놓고 찍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건 의외로 재미난 연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꽃이라든지, 문(門)이라든지, 좁은 골목이라든지, 어린이라든지, 표지판이라든지, 또는 심지어 집안의 잡동사니라든지 하는 주제를 정해놓고 사진을 찍다 보면 당신의 사진첩은 어느 샌가 풍성해져 있을 겁니다. 흥이 좀 난다면 주제를 넓혀 봐도 좋겠습니다. 내가 사는 도시라든지, 올해라든지, 또는 5월이라든지, 한국인이라든지 하는 좀 더 추상적인 주제를 택해서 적당히 긴 기간 동안 사진을 찍어 본다면 당신의 눈은 어느새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 겁니다.

◆ 단렌즈로 연습하자

뭐 굳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흉내를 내야 된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줌렌즈가 사진가를 게으르게 만드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피사체를 크게 찍고 싶으면 피사체를 향해 몇 걸음 더 달려가고, 넓은 풍경을 찍고 싶다면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가는 노력도 사진 연습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단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가지고 여러 종류의 사진들을 오래 동안 찍다 보면 어느새 그 렌즈의 특성이 몸에 익게 됩니다. 특정 렌즈의 화각이나 밝기를 잘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죠. 그러면 당신은 다른 렌즈들을 사용할 때 자연스럽게 당신이 익숙한 그 렌즈를 기준으로 차이점을 가늠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왕이면 당신이 익숙해질 단렌즈는 표준렌즈인 쪽이 좋습니다.

좀 사치를 부려 보자면, SLR 카메라의 경우 24mm 정도의 광각 렌즈 하나, 50mm 표준렌즈 하나, 105mm 정도의 장초점 렌즈 하나 정도를 따로 장만해서 각각의 렌즈에 익숙하게 되는 것도 좋긴 합니다. 하지만 렌즈가 많다고 좋은 사진을 찍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붙박이 표준렌즈가 달린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도 사진연습에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렌즈를 바꿔 가면서 장난을 하는데 마음을 뺏기기보다, 좋은 피사체를 찾아내고 좋은 구도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 두루 찍어보자

앞부분에서 시간의 어느 대목을 잘라낼지를 설명하다가, 답답하면 ‘마구’ 찍어보시라고 권해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공간을 카메라에 담는 차원에서도 사방의 공간을 ‘두루’ 찍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라면 비용에 대한 걱정 없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될 수도 있죠. 멋진 풍경이나 피사체에만 렌즈를 들이대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 주변을, 옆을, 심지어 뒤를 돌아보면 의외의 피사체를 만나게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인도네시아 서부의 브로모 산으로 여행을 갔을 때 일입니다. 새벽 세 시쯤 안내원을 따라 올라가본 산정에는 이미 수백 명의 관광객들이 캄캄한 추위 속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변의 지평선이 회청색으로 부어오르는가 싶더니, 운해를 뚫고 붉은 해가 솟아오르더군요. 그곳에 운집한 모든 사람들이 사진기를 붉은 태양을 향해 바삐 셔터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해를 찍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틈을 빠져나와 정상의 반대편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곳에는 솟아오르는 태양의 붉은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흰 연기를 조금씩 토해내는 맞은편 화산의 정상이 굽어보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브로모에서 찍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일출 장면이 아니라 붉은 기운 도는 그 산봉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3‐6 인물사진과 관련된 몇 가지 잔재주

‘공간’을 잘라내는 것이 사진이라고 설명을 하다 보니, 마치 풍경을 위주로 찍어야만 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느낌이 없지 않군요. 정물이나 접사 등 성격이 다른 피사체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따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인물사진에 대해서만큼은 좀 덧붙일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인물을 크게 찍자

우리는 흔히 배경과 인물을 함께 찍으려다가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 기념사진만을 남기는 일을 반복하곤 합니다. 특히 어딘가 이국적인 장소, 가령 프랑스의 파리로 여행이라도 떠났다면 에펠탑을 배경으로 멋쩍게 한 장, 개선문을 배경으로 똑같은 옷을 입은 똑같은 표정의 일행을 다시 한 장,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이런 사진은 풍경사진도, 인물사진도 아닌 어정쩡한 여행의 증거자료일 뿐입니다. 이왕이면 여행의 증거도 미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사진으로 남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마음을 정하는 게 낫습니다. 이색적인 풍경이면 풍경을, 그 정취에 빠진 인물이면 인물을 따로 부각해서 사진으로 남기는 편이 미적으로도 더 만족스럽고, 기록으로서도 더 훌륭하기 마련이니까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인물을 카메라에 가깝게 배치하는 겁니다. 표정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서 찍으면 인물은 그 사진의 주인공이 됩니다. (물론 구도는 여전히 중요하죠.) 인물을 크게 찍으면서 배경도 잘 나오게 하려면 광각렌즈를 사용하면 됩니다. 하지만 광각렌즈를 사람에게 너무 가깝게 들이대면 왜곡현상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나울 수 있다는 점, 기억하시죠?

◆ 배경의 단순화

인물과 풍경이 서로 어우러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광경이 아니라면, 주변의 모습이 사진에 포함되어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배경을 ‘정리’해서 시각적으로 단순한 이미지를 만들어보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인물로 프레임을 가득 채우지 않더라도, 배경을 단순화함으로써 인물을 부각하는 겁니다.

좀 부산스럽지만 검은 장막 같은 소품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 앞에 이국적인 복장을 입은 현지인을 세우고 찍어볼 수도 있고, 단조로운 벽돌담 같은 배경을 두고 인물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배경을 생략하기 곤란한 상황이라면 앵글을 낮춘 앙각(low angle) 촬영으로 하늘을 배경으로 삼는다든지, 부감(high angle)으로 포장도로를 배경으로 삼아볼 수도 있겠죠. 

아웃 포커스 기법을 활용해서 배경을 흐릿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배경을 아웃 포커스 시키려면 ① 조리개를 최대한 열어 ‘초점심도’를 얕게 만들거나, ② 가급적 망원렌즈를 사용하거나(줌 렌즈의 경우에는 줌 버튼을 ‘wide’ 쪽이 아니라 최대한 ‘tele’ 쪽으로 둡니다), ③ 주 피사체인 인물에 되도록 가까이 접근해서 촬영함으로써 배경을 따돌리거나, 또는 이 모든 것을 배합해서 사용하면 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 2장에서 했으니 반복하지 않겠습니다.(2‐6 조리개, 2‐9 렌즈의 종류: 장초점 렌즈)

◆ 105mm 렌즈의 사교성
 
인물 사진용 렌즈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사진가의 선호에 맞게, 상황에 맞게, 또는 원하는 결과에 따라서 적당한 렌즈를 사용하면 그만이죠. 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105mm 렌즈가 인물을 촬영할 때 가장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표준렌즈보다 짧은 광각렌즈를 사용하면 인물을 크게 잡기 위해 인물에 너무 가깝게 다가서야 합니다. 이렇게 찍으면 원근감이 과장되면서 피사체가 왜곡된 모양으로 (보톡스 맞은 얼굴처럼) 나타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곤란한 문제는 카메라를 모델에 너무 가깝게 들이대야 하기 때문에 사진 찍히는 사람이 불편하게 느낀다는 점이에요. 찍히는 인물이 불편해서야 자연스러운 사진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의로 과장된 느낌을 준다든지, 장난기 있는 인물을 촬영하는 게 아니라면 여간해선 인물사진에 광각렌즈를 사용하진 않게 됩니다.

그렇게 보자면, 50mm 표준렌즈조차도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충분히 벌여주지는 못합니다. 제가 좀 숫기가 없는 탓일까요? 아니면 제 모델들이 카메라를 많이 낯설어 했던 탓일까요? 제가 보기엔 105mm 렌즈가 확보해주는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가 사진가에게도 모델에게도 심리적으로 가장 편안한 거리처럼 느껴졌습니다. 105mm는 망원렌즈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장초점 렌즈에 속하기 때문에 배경을 적당히 아웃 포커스 시키고 적절한 원근감을 묘사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인물사진에 정답인 렌즈가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하실까봐 선뜻 말하기가 좀 꺼려지긴 하지만, 어떤 렌즈는 다른 렌즈보다 좀 ‘덜 수줍을’ 수도 있다는 정도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물모델 사진에 속칭 '대포'라고 불리는 대구경 망원렌즈를 애용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긴 한데, 이런 걸 쓰면 배경이 너무 많이 아웃포커스 되어서 연예인 화보용 사진처럼 상투적인 사진 (즉, 누가 찍어도 비슷비슷한 사진)이 되어버린다는 문제가 있더군요.

◆ 정상노출만 정답인 건 아니다
 
제 2장 노출 보정(2‐11 기계는 바보다) 부분에서 이미 설명 드렸지만, 카메라는 평균 톤을 기준으로 정상 노출 여부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난한 노출이 항상 최상의 결과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노출을 조금 조절하면 색다른 결과를 얻을 수도 있으므로, 고의로 노출과다나 노출부족 상태를 만들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럴 때, 앞에서 설명한 브라케팅 기능이 있는 카메라라면 매우 요긴하겠죠.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노출을 1/2 내지 한 스톱 정도 과다하게 만들어 밝은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좀 무겁고 차분한 분위기라든지 드라마틱한 대조(contrast)를 원한다면 일부러 조금 노출부족 상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필름 사진의 경우, 일부러 노출 부족으로 찍은 다음 현상 단계에서 증감(Pushing)현상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색의 채도가 더 선명하게 나오기도 합니다. (고수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니 일단 참고만 하시면 되겠습니다.) 앞서 필름의 특성 부분에서 잠간 설명했지만, 리버설(슬라이드) 필름을 사용할 경우는 필름의 노출의 관용도가 매우 낮아서 적정노출이 아닌 사진은 망치기 쉬우니까, 고의로 노출과부족 상태를 만드느라고 필름 값을 너무 낭비하진 마시길.

◆ 앵글의 변화

사람들은 사진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낯설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 생김새와는 좀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진은 거울 속 얼굴만큼 입체감이 없는 탓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거울로 보는 얼굴과는 좌우가 반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좌우가 정확히 대칭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웃을 때 우리는 입술의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좀 더 많이 올라가기 마련이고, 눈썹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좌우가 뒤바뀐 거울 속 얼굴을 보면서 거기에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머리 가르마의 방향에서부터 시작해서, 반대로 나오는 겁니다. 마치, 머리를 통해 공명되는 자기 목소리만 듣고 지내기 때문에 녹음했다가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선 것과도 흡사한 이치랄까요.

평면인 사진 속에서 더더욱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면, 인물사진은 약간 측면으로 찍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면 얼굴이 좀 작아 보이기도 하죠.) 배우들 중에서는 예컨대, 오른쪽 프로필이 왼쪽보다 더 낫다고 해서 오른쪽 사진은 절대로 못 찍게 하는 사람도 있다더군요. 내 사진 속의 인물을 더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각도를 이리저리 찾아볼 일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부감(high angle) 사진은 사람을 객관적이고 초라하고 왜소하고 외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고, 앙각(low angle)으로 올려다보면서 촬영하면 인물을 주체화하고 자신감 있고 위대하게 ‐ 또는 시건방지게 ‐ 보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으면 그 마음이 사진에도 나타나는 셈이니 재미있는 일이죠. 사진가는 사소한 앵글의 변화를 통해서 자신의 주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입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 조명의 마술

사진이라는 건 결국, 인화지에 기록된 빛의 흔적입니다. 조명이 중요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어떤 조명이냐에 따라 인물사진의 분위기는 극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강한 측면광은 입체감을 강조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지만 사진을 너무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정오 무렵의 태양광은 얼굴에 보기 싫은 그림자를 만든다고 알려져 있지만, 경우에 따라선 일부러 그런 효과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의 태양광이 좋은 분위기를 만든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때의 빛은 광선의 색감도 온화할 뿐 아니라 방향도 적당한 측면광이 사선으로 비치기 때문에 무난한 입체감을 주기도 합니다.

정면광은 인물을 납작해 보이게 만들 수도 있으니 측면으로부터 비치는 보조광과 함께 사용하는 편이 좋습니다. 가장 자주 사용되는 정면광은 어두운 곳에서 스트로보를 사용해서 찍는 사진입니다. 스트로보에만 의존해서 찍는 사진은 너무 평면적인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낮에 사진을 찍으면서 스트로보를 보조광으로 활용하는 경우에는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역광일 때 적당한 밝기로 스트로보를 사용하면 주광원이 주는 역광의 비장한 느낌을 살리면서도 피사체의 세부(detail)를 보기 좋게 묘사할 수 있죠. 만일 여력이 있다면, 은색 돗자리처럼 생긴 반사판을 활용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반사판으로 너무 어두운 쪽을 비춰주면 명암의 콘트라스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 의외의 트리밍

머리나 다리가 잘리는 사진은 곤란하다는 게 통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통념일 따름입니다. 누군가의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이런 통념을 쓰레기통에 버려도 그만입니다. 얼굴 사진을 찍더라도, 정수리에서 턱선 까지 두개골 전체가 사진에 나와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눈썹 바로 위쪽부터 턱 바로 위쪽 정도까지를 잘라내면 더 강렬한 표정과 인상을 얻을 수도 있거든요. 이렇게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서 내버리는 것을 트리밍(trimming)이라고 하는데, 트리밍을 하고 취하는 쪽의 그림을 기준으로 말하면 크로핑(cropping)이라고 부릅니다.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예컨대 블레이드 러너의 리들리 스코트처럼) 이런 식으로 얼굴의 일부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워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관객에게 강렬하게 전달하는 쇼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늘어선 사람들의 다리라든지 몸통만을 찍은 사진도 기이한 느낌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진에서 피사체의 목을 잘라내는 건 어쩐지 예의바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는데, 앞쪽에서 설명했듯이 얼굴을 외화면(off‐frame)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상상의 대상으로 둠으로써 재미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생각보다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데다 그 자체로서 아름답기도 해서, 얼굴을 생략하더라도 인간의 사지와 몸통은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신호를, 또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거죠. 조각가들은 사지를 생략한 몸통(토르소라고 부릅니다)만을 만들기도 하잖습니까? 청개구리처럼, 누군가가 이렇게 찍지는 말라고 하면 거기 대들듯이 그렇게 찍어보는 식으로 상식과 관습에 도전해 보는 것도 사진을 찍는 재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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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2011.8. Hakodate (6) file 2011.08.16 3951 19
232 2011.8. Hakodate (5) file 2011.08.16 1055 19
231 2011.8. Hakodate (4) file 2011.08.16 865 19
230 2011.8. Hakodate (3) file 2011.08.16 1054 22
229 2011.8. Hakodate (2) file 2011.08.16 707 25
228 2011.8. Aomori + Hakodate file 2011.08.16 6137 21
227 2011.8. Yamagata + Akita file 2011.08.16 13832 9
226 2011.8. Fuji Mountain file 2011.08.08 604 14
225 2011.6. Enoshima, Yokohama file 2011.06.10 1123 20
224 2011.6. Kamakura file 2011.06.10 1169 19
223 Hanami-3 file 2011.04.10 1020 9
222 Hanami-2 file 2011.04.09 956 8
221 Hanami-1 file 2011.04.09 1069 8
220 Ito file 2011.04.09 89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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