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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조선에서 발췌 : 드러머 최세진

posted Mar 2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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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봄 어느 날, 서울 스카라 극장에서 제1회 재즈 콘서트가 열렸다. 콘서트 중간쯤 얼핏 봐도 이목구비가 수려한 댄디 보이가 베니 굿맨 작곡의 「싱 싱 싱(Sing Sing Sing・원 연주자는 베니 굿맨 악단의 진 쿠러퍼)」의 전곡을 드럼을 치며 부르고 있었다. 「싱 싱 싱」의 전곡 연주는 국내 최초였다.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선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그 댄디 보이는 이젠 국내 최고령 재즈 드러머가 된 최세진이었다.

『그날 공연은 내 일생에 있어 「잊을 수 없는 날」이었소. 한참 「싱 싱 싱」을 부르는데 바로 앞 자리 어두운 불빛 속에 낯익은 얼굴이 스치는 거예요. 그래 자세히 보니 바로 아버님이었어요. 연주고 뭐고 이젠 죽었다 싶데요. 공연이 끝난 후에 나가니 아버님이 뒷짐을 지고 서 계시는 겁니다』

생각보다 아버지의 표정은 풀어져 있었다.

『따라 와!』

아버지와 아들은 충무로 어느 한식당에 마주앉았다. 설렁탕 두 그릇이 탁자 위에 놓였다.

『얘, 어서 먹어라』

설렁탕 국물을 다 마셔갈 무렵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진아, 이젠 네 갈 길로 가라. 그동안 네 행동은 다 용서하마. 그런데, 아비에게 하나만 약속해라』

그러면서 아버지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 드럼에서는 최고가 돼야 한다』

아버지는 이날 기막힌 아들의 연주 솜씨를 보고, 드러머는 이미 아들의 운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세진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한때 세진은 클라리넷에 미쳐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세진의 클라리넷을 빼앗아 무릎으로 단번에 동강을 내버렸다. 그러면서 소릴 질렀다.

『이놈아, 폐도 안 좋은 놈이 무슨 악기까지 부냐? 너, 그것 잘 불어야 딴따라밖에 더 되겠니? 평생 그 짓 해봐야 거지 신세 못 면한다』

KJC를 창립하다

루디(Rudy) 최세진. 루디는 최세진의 별명이다. 그가 홍콩에서 살 때 뮤지션 세노가 「최」를 발음한다는 게 「쩨」로 하면서 부르기 어렵다며 「루디」로 하자고 해 붙여진 것이다. 아직도 최세진은 「루디」가 좋아 이메일 주소에도 루디를 끼워 넣을 정도다.

충북 진천 출생. 유년기는 강원도 속초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빅터 레코드 대리점을 하고 있었다. 삼촌은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클라리넷을 불었다.


클라리넷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 클라리넷뿐 아니라 트럼펫까지 불었다.

서울 무선 중학교를 졸업하던 1945년, 광복이 됐다. 이때 부민관 미8군 방송국에서 흐르는 재즈는 단번에 세진을 홀리게 했다.

폐가 안 좋아 클라리넷을 접고 드럼을 잡는다. 세 곳의 드럼 학원을 옮겨다니며 드럼을 배운다. 미군 재즈 방송을 귀동냥하며 드럼으로 흉내를 냈다.

1947년, 태평양 가극단의 가수 김정구에게 픽업돼 드러머로 데뷔한다. 열여섯이었다. 그 6년 후. 「박춘석 악극단(Silver Star Big Band)」에 입단한다. 박춘석은 본디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이어 엄토미 악단, 미8군 쇼 밴드에서 일한다.

1959년, 운 좋게 동남아 순회 연주길에 오른다.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7개국이었다.

1961년 두 번째 동남아 순회공연길에 오른다. 「김치캣 쇼」의 일원이었다. 당시 밴드 멤버는 색소포니스트 故 이정식, 피아니스트 노명석, 기타리스트(베이스) 박준형 등이었다. 내친 김에 홍콩에 아예 주저앉고 만다. 재즈 악단 「프로페셔널스」를 만들어 악단장이 된다.

『당시 홍콩은 한국에 비하면 재즈 천국이었지요. 재즈 교본도 악기도 널려 있었구요. 이후 16년 간 홍콩에서 살았습니다. 영주권까지 있었지요』

홍콩 생활 중 1964년에 일본의 명 트럼페터 히노 데루마사를 만난 것과 이듬해 비밥 창시자인 데르니에스 몽크 악단을 만나 재즈 클럽 「골든 페닉스」에서 잼 세션을 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또한 클라리네티스트 토니 스캇과도 함께 연주했다.

『저는 되도록 악보를 보지 않습니다. 악보 보는 버릇을 하게 되면 아리랑도 악보 없이는 연주 못해요. 한 번은, 스타 겐트의 오케스트라 대곡인 「아티스트 인 점프」를 세 번 연주하고 악보를 버렸지요』

히노 데루마사는 무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다가 휴식시간에는 곧장 분장실로 달려가 연습을 하고 다시 무대에 섰다. 이같은 열정은 결국 그를 세계적 트럼페터로 올려놓았다. 그래서 히노 데루마사를 존경한다.

홍콩에 이어 태국 방콕에서 1년 간의 연주 생활을 했다. 1975년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야마하 재즈 스쿨」 강사도 했다. 1976년 홍콩 영주권은 물론 태국 영주권도 포기, 영구 귀국한다.

이때 국내 재즈계는 너무 낙후됐고 가난했다. 비틀즈와 트위스트가 휩쓸고 지나간 한국의 재즈계는 폐허였다. 미8군, 내자호텔 등에서 재즈 연주를 한다.

『내자호텔 사장이 세라노였지요. 그의 권유로 재즈 보컬리스트 「미스 황」과 함께 「최세진 퀀텟」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8군 산하의 재즈 밴드 프론티어와 교섭해 「선데이 재즈 잼 세션」을 열었다. 「잼 세션」은 연주자들이 사전에 아무런 약속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재즈의 부활을 꿈꿨다. 재즈 이론가 이판근을 찾았다.

『이보게, 우리 재즈 동우회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

『형님, 안 됩니다. 한국 사람은 뭉치면 싸움질이나 합니다』

충무로 명성 다방에서 몇 번인가 만난 끝에 드디어 이판근을 설득시켰다.

명성 다방은 당시 뮤직션들의 아지트였다. 1976년, 음악 동우회 「KJC(Korea Jazz Club)」가 탄생됐다. 지금의 KJC와는 다르다. 최세진이 회장, 이판근이 부회장이었다. 사무실은 서울 신당동 예비군 군악대 사무실 한 귀퉁이를 빌렸다.

일본 재즈계를 장악했던 한국 뮤지션들

이 언저리. 건축가 김수근을 만난다. 그의 형이 재즈 드러머여선지 김수근은 재즈광이었다. 김수근이 하루는 KJC와 함께 「불우이웃돕기 재즈 콘서트」를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김수근의 「공간 사랑」 소극장을 무대로 이후 3년 간 콘서트를 가진다. 이 콘서트는 「명희원」을 경영하던 이방자 여사의 도움이 컸다. 그 뒤 최세진은 KJC를 「프리재즈의 1인자」 강태환에게 넘겨 준다.

1978년 미국 순회 연주길에 오른다. 하와이, LA,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시카고 등이었다. 1979년부터 5년 간 하얏트 호텔, 롯테호텔 등에서 10여 년 간 연주 활동을 했다. 일본 드러머의 상징인 조지 가와구치와의 빅 밴드 협연은 감동으로 남아 있다.

『한국인의 재즈 성향은 타고난 겁니다. 우리 국악 리듬은 라틴 아메리카의 재즈와 닮았습니다. 일본의 名재즈 뮤지션들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 한국인들이었습니다. 한국인 재즈 뮤지션이 아니면 일본 재즈계가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었지요. 트럼페터 난리 후미오, 재즈 보컬리스트 데이크 미네, 악단장 와타나네 후로시, 베이스 플레이어 가네코 등이 모두 한국인입니다』

언젠가 홍콩에서 만난 일본의 유명한 트럼페터 히라키 히데오는 세진의 손을 불쑥 잡더니 실토했다.

『저, 실은 한국인입니다』

히라키 히데오는 그후 자살했다. 단짝 색스포니스트 이봉조와는 추억이 적지 않다.

『이봉조는 저보다 한 살 아래인데, 아주 친했어요. 머리가 영민했지요. 붓글씨도 일품이었구요. 친화력도 대단했어요』

1954년, 이봉조는 서울시청 토목과 직원이었다. 그때까지도 최세진은 이봉조가 색소폰을 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하루는 이봉조의 색소폰을 들었다. 그런데 이게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야, 너 색소폰을 언제 배워 그렇게 잘 부냐?』

『내가 평소 취미 삼아 불었다 아이가. 들을 만하나?』

그래서 바로 무교동의 미8군 밴드 스윙 타임즈로 끌고 갔다. 최세진은 악단장에게 말했다.

『이봉조라는 친구인데요, 색소폰 연주가 기가 막힙니다』

『아, 그래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이봉조는 그 자리에서 「저 하늘이 얼마나 높기에」라는 재즈곡을 불었다.

악단장은 물론 스윙 타임즈의 기존 색소포니스트도 두손 들고 말았다. 자기보다 월등한 색소폰 연주 실력에 기가 질려 버린 것이다. 이봉조는 더 이상의 오디션이고 뭐고 없이, 그 자리에서 제꺽 스윙 타임즈의 멤버가 된다.

이봉조는, 名 트럼페터 스탕게스가 인삼을 사러 한국에 들렀을 때도 예의 수완을 발휘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스탕게스는 나이트 클럽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뿐만 아니다. 「재즈계의 바흐」로 불리는 듀크 엘링턴과도 편지로 교분을 맺었다.

최세진은 세계적 드러머 맥스 로치, 버드 리치, 조 모레로 등을 좋아한다.

그들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 요즘 덕성女大 실용음악과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늘 강조한다.

『드럼이든 클라리넷이든 모든 연주는 적당주의로는 안 됩니다. 연주자들은 졸업이란 게 없습니다. 무대에서 죽을 때가 바로 졸업입니다. 그리고 학교 공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아트조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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