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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Chet Baker)

posted Jun 0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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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tBaker_small.jpg

 

■ 쳇 베이커(Chet Baker)

트럼펫이 이렇게 슬픈 소리를 내는 악기였던가? 슬픈 소리를 내는 악기는 여럿 있다. 바이올린, 팬플룻, 하모니카, 해금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다른 슬픔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의 트럼펫 선율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런 종류의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쓸쓸함이었고,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소리가 닿는 모든 것을 공허함으로 가득 채웠다. 쳇 베이커(Chet Baker)의 <Alone Together>. 뉴욕에서 근무하던 12년 전 어느 밤, 퇴근길의 운전석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곡을 들으며 나도 그 공허함에 감염되었다.

앨범을 주문했다. <Chet>은 리버사이드 레이블의 1959년 앨범이었다. 피아노에 빌 에반즈(Bill Evans), 베이스에 폴 체임버스(Paul Chambers), 기타에 케니 버렐(Kenny Burrell) 등 기라성 같은 스타급 연주자들이 참가한 명반이었다. 앨범만 산 게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 폴 사이먼을 듣고 감명을 받아 세뱃돈을 받자마자 기타를 샀던 것처럼, 나는 맨해튼의 악기점으로 달려가 은빛 찬란한 트럼펫을 구입했다. 바쁜 점심시간을 쪼개 학원에서 수업도 받았고, 밤이면 자동차 안에 문을 닫고 앉아 연습도 적잖이 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쳇 베이커 같은 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을 때까지.

1950년대에 쳇 베이커는 미국 서부지역의 간판급 스타였다. “제임스 딘, 프랭크 시나트라, 빅스 바이더벡을 한 데 섞어놓았다”는 찬사가 그에게 쏟아졌다. 깔끔한 외모의 소유자인 그를 할리우드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1955년에는 <Hell's Horizon>이라는 영화에 연기자로도 데뷔했다. 미국 재즈 음악계가 백인 스타를 고대하던 무렵이었다. 195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재즈라는 음악은 미국의 남부에서 태어나 동부에서 장성했다. 이제 장년기에 접어든 50년대의 재즈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한쪽 길은 현대음악이라는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 길에는 대중음악이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었다. 50년대 대중의 기호에 맞는 편안한 재즈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서부 지역이었다. 대중은 이제 춤으로 화답하며 열광할 뜨거운 음악이 아니라 내면으로 파고드는 차분한 선율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비밥의 영재였던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1959년에 <Kind of Blue>를 녹음하면서 쿨재즈의 대문을 열어젖힌 것도 대중의 그런 갈증을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용적인 사람들이 여유로운 환경 속에 모여 사는 서부지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선율이 유행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웨스트코스트재즈라고 불렀다. 쳇 베이커는 50년대 웨스트코스트재즈의 총아였다. 그러나 장래가 촉망되던 그의 생애는 정작 감옥에 들락거리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상습적인 헤로인 복용으로 때문이었다. 우리 국민이 올림픽에 열광했던 1988년, 베이커는 암스테르담의 길거리에서 마약을 복용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1929년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난 쳇 베이커도 여느 대가들처럼 어린 시절에 음악을 시작했다. 기타리스트였던 베이커의 부친은 그에게 트롬본을 선물했는데, 꼬맹이가 큰 악기를 버거워하자 트럼펫으로 바꿔주었다. 재즈 역사상 가장 깊은 우수에 젖은 연주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1946년에 군에 입대해 군악대에서 근무했는데, 제대한 후에는 서부지역을 찾아온 대스타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도 협연을 했다. 베이커가 스물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1952년 게리 멀리건(Gerry Mulligan) 사중주단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이 연주한 <My Funny Valentine>은 기념비적인 곡이 되었다. 조영남이 화개장터를 부르듯이, 베이커는 그 후 일평생 어느 곳에 가건 <My Funny Valentine>을 연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멀리건(바리톤 색소폰)과 베이커는 같은 선율을 연주하지 않고 대위법적인 선율을 주고받으면서 연주했다. 그들은 마치 악기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비밥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실험이었다.

1956년에 퍼시픽 레코드사는 베이커의 노래 실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Chet Baker Sings>라는 앨범이 나왔고, 베이커는 가수로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팝의 색채가 엿보이는 이 앨범은 전통 재즈 팬들로부터는 “이게 무슨 재즈냐”는 혹평을 받았다. 어눌하면서 무심한 베이커의 노래는 그의 트럼펫 소리와 신기할 만큼 닮아 있다. 아무래도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노래 실력이지만, 그의 음색은 흉내 내기 어려운 쓸쓸함을 담고 있다. 그 묘한 분위기의 한 가지 비결은 바이브레이션을 극도로 자제한다는 점이었다.

베이커의 노래에 관해서, 열혈 재즈 팬인 유종연 선배는 “침대 머리맡에서 연인에게 흥얼거리는 음성”이라고 표현했다. 작곡가인 나의 후배 권오섭군의 묘사는 이렇다. “도대체 입을 반도 안 벌리고 중얼거리듯이 노래하는 스타일하며, 그다지 높지도 않은 고음에서 이른바 ’삑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출하는 ‘대범함’에다가 라이브에서는 종종 트럼펫 불다 입술 아프면 노래하고, 노래하다가 목 아프면 트럼펫 부는 무심함까지...” (권오섭 저, <무인도에 떨어져도 음악> 중에서)

찰리 파커의 흉내라도 낼 작정이었던지, 베이커도 걸핏하면 악기를 전당잡히고 마약을 구했다. 60년대는 그에게 어두운 시절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마약 혐의로 1년 이상 투옥되는가 하면, 독일과 영국에서는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 머무는 동안에도 감옥을 마치 출근하듯 드나들며 지냈다. 1966년에는 마약을 구하던 와중에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아 입술이 찢어지고 앞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트럼펫을 불 수 없게 된 그는 주유소 점원 같은 일거리를 찾아 헤매야 했다. 화려했던 쳇 베이커의 연주자로서의 삶은 거기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70년대에 접어들자 베이커는 심기일전, 재기에 성공한다. 의치로 해 넣은 앞니에 맞추어 앙부쉬르(embouchure)도 새로 익혀야 했다. 좀 더 따뜻한 소리의 위안을 받고 싶었던 걸까. 부상에서 회복된 후로 몇 년간 그는 플루겔혼을 불었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트럼펫을 잡고 뉴욕에서 기타리스트 짐홀(Jim Hall)과 함께 앨범 작업을 했고, 그 뒤로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거의 유럽에서만 활동했다.

유럽에서의 그의 활약상은 50년대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피아니스트 필 마르코위츠(Phil Markowitz)와의 사중주단, 기타리스트 필립 카트린느(Philip Catherine), 베이시스트 장루이 라센포스(Jean-Louis Rassinfosse)와의 트리오 음반은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는 스탄 게츠(Stan Getz)와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사망하기 불과 한 해 전인 1987년, 그는 도쿄 공연에서 예전보다 한층 완숙해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유튜브 영상을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이때 58세에 불과하던 그의 얼굴은 마치 80대 노인처럼 보인다. 가슴 속에 품은 우수가 얼마나 짙으면 인간의 삶이 저토록 고단해지는 걸까. 확인해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그의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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