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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에반즈(Bill Evans)

posted Apr 0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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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P라는 후배가 있다. 그의 피아노 솜씨는 흔히 볼 수 있는 아마추어의 경지를 훌쩍 뛰어 넘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가 재즈 연주를 즐긴다는 점이다. 몇 해 전 직장에서 뜻이 맞는 몇몇 선후배가 모여 음악연주동호회를 결성했고, 나와 그는 둘 다 창립 멤버였다. 우리 동호회는 2005년 봄, 네팔 천민학교 아동을 돕기 위한 자선 음악회를 개최했다. 연습실에 나타난 P가 연주해보고 싶다고 한 곡은 빌 에반즈의 <My Foolish Heart>였다. 우리는 이 곡을 피아노, 트럼펫, 베이스, 드럼의 4중주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My Foolish Heart>는 원래 1949년 빅터 영(Victor Young)이 작곡한 노래로, 같은 제목의 영화에 삽입된 곡이었다. 그 후 숱한 가수들이 불러서 스탠더드로 자리 잡은 이 원곡에 빌 에반즈 트리오는 시적인 깊이를 덧입혀 주었다. 연주곡을 딱 하나 골라 보라는데 P가 이 곡을 택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에 빌 에반즈 트리오가 연주하는 <My Foolish Heart>의 분위기가 어디선가 들어본 다른 곡과 비슷하다거나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에반즈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일지도 모른다. 에반즈 이전에는 이런 연주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1929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에반즈는 피아노 애호가이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부터 레슨을 받았고, 열두 살부터는 가끔씩 형의 대타로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즉흥연주를 터득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동안에는 음악 동아리도 창설하고 풋볼 팀의 쿼터벡으로 활약하던 청년이었다.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다. 1980년 불과 51세로 사망했을 때 그의 건강은 약물 과용으로 인한 출혈성 궤양, 간경변, 폐렴으로 엉망이었으니까. 그의 친구 진 리즈는 그의 약물 중독을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에반즈는 아름다운 선율로 재즈에 현대성을 선사했다. 건반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지 않아도 우수에 젖은 그의 음악이 사람의 모습을 취한다면 딱 그러했을 자세였다. 그는 1958년부터 마일즈 데이비스 6중주단의 유일한 백인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이 1959년에 함께 녹음한 앨범 <Kind of Blue>는 사색적 우수와 도회적 세련미로 가득한, 재즈 사상 최고의 히트 앨범이 되었다. 이 앨범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음계(스케일)와 화음(코드) 대신 선법(모드) 위주의 실험으로 연주을 지배하고, 빌 에반즈는 일정한 음형을 동일 성부로 반복하는, 이른바 오스티나토(ostinato)로 멋지게 화답한다. 이것은 모달(Modal) 재즈의 탄생을 알리는 협력이었다.

에반즈의 연주는 드비시(Debussy), 라벨(Ravel), 또는 사티(Satie) 같은 클래식 작곡가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그를 가리켜 마일즈 데이비스는 “빌은 속에 조용한 불을 지녔다... 그의 소리는 깨끗한 폭포수를 따라 흘러내리는 수정 같은 음표들의 반짝이는 물방울과도 같다.”고 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빌 에반즈는 자신의 즉흥연주를 종종 “일본의 전통 미술”에 비겼다. 이상하지 않게도, 에반즈의 연주는 종종 “인상파적(impressionist)”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에반즈는 베이시스트 스캇 라파로(Scott LaFaro), 드러머 폴 모션(Paul Motian)과 함께 자신의 트리오를 구성했다. 이 트리오를 역대 최고의 재즈 밴드로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전까지 피아노 트리오라면 베이스와 드럼은 보조적인 반주 악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반즈 트리오는 독주와 반주의 경계를 흐렸다. 찰리 파커 이후로 즉흥독주 위주의 음악으로 치닫던 모던 재즈를 다시금 진정한 협주의 음악으로 만든 공로는 빌 에반즈의 트리오에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재즈 트리오가, 비슷한 역량을 가진 연주자들이 공평한 책임감을 가지고 곡 전체를 지탱하는 형식을 의미하게 된 것은 에반즈 이후부터의 일이니까.

이 무렵 리버사이드 레이블에서 발매한 빌 에반즈 트리오의 <Portrait in Jazz>(1959), <Explorations>(1961),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1961), <Waltz for Debby>(1961) 등 ‘리버사이드 연작’은 현대 재즈의 교과서로 여겨진다. 특히 마지막 두 앨범은 같은 날 라이브로 녹음을 해치웠다. 하루 동안 녹음한 곡들 중 라파로의 베이스 연주 비중이 높은 곡들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에, 피아노 중심의 연주라는 통념에 좀 더 부합하는 곡들은 <Waltz for Debby>에 수록되었다. 그러다 보니, <Waltz for Debby>는 누구에게나 쉽고 친숙하고 아름다운 명반으로 꼽힌다. 에반즈는 그 전까지 재즈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던 매우 느리고 조용한 연주를 시도했는데, <Waltz for Debby>의 타이틀곡인 <My Foolish Heart>는 그런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반면에,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는 현대 재즈 트리오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 명반이 되었다. 그것은 에반즈가 마일즈 데이비스와 협력하면서 얻었던 음악적 각성의 자연스러운 진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천재적인 베이시스트 스캇 라파로가 없었다면 이 앨범은 탄생할 수 없었을 터다. 많은 평론가들이 에반즈 최고의 음반으로 꼽는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에는 에반즈의 앨범 전체를 통틀어 베이스의 연주 비중이 가장 크다. 상대적으로 에반즈 자신의 연주 비중이 가장 작은 앨범이라는 뜻이다. 크게 들리고 싶거든 작게 말하라. 묘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스캇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에반즈가 크나큰 실의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60년대 후반의 에반즈는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다소 고전했지만, 1968년부터 마티 모렐(Marty Morell)이 드럼을 맡았던 트리오는 1975년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 기간은 에반즈가 마약 습관을 떨쳐버렸던 기간이기도 하다. 그의 짧은 생애 후반부에 녹음한 앨범들도 좋다. <We Will Meet Again>이라는 그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은 어딘가 고별사 같은 분위기로 충만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와 <Waltz for Debby>를 즐겨 듣는다. 전성기의 에반즈의 음악은 내성적이면서도 어딘가 앞날을 향해 전진을 모색하는 참신한 느낌이 있어서 좋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경험의 노예라던가. <My Foolish Heart>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면 내게는 언제나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피아노에 앉아 무덤덤한 표정으로 연주를 시작하던 P, 눈썹 사이에 힘을 주며 트럼펫을 불던 Y, 배운 적도 없는 재즈 베이스를 그럴듯하게 흉내 내던 L 등 지금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근무하는 후배들. 오스트리아에서 신혼살림을 꾸리고 있을 로맨티스트 P의 가슴 속에 사랑에 빠진 바보 같은 심장이 영원히 뛰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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