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lcome Page
    • drawing
    • photos
    • cinema
    • essay
    • poems
    • music
    • toons
    • books
    • mail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posted Sep 12, 201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DexterGordonSmall.JPG

 

영화에 출연한 뮤지션들은 무수히 많다. 재즈 연주자들 중에서만 따져 보더라도, 무려 27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루이 암스트롱에서부터, 두 편의 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던 쳇 베이커, 심지어 최근에는 가수에서 배우로 전업을 하다시피 한 해리 코닉 주니어에 이르기까지, 그 명단은 길다. 역사상 최초의 유성영화가 <The Jazz Singer>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 중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가 되었던 연주자는 내가 아는 한, 딱 한 명이다. 1986년의 영화 <Round Midnight>에 출연했던 테너 색소폰 연주자 덱스터 고든.

영화가 시작되면 느릿한 카메라가 뉴욕의 싸구려 호텔 방을 비추고, 프랑스 억양의 남자가 질문을 던진다. “이 방에서 허쉘이 죽었나요?” 창밖을 쳐다보던 구부정한 장신의 흑인 노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한다. “나도 모르겠어, 프란시스. 하나같이 낡아빠진 커튼에 너저분한 벽지. 방들이 다 똑같아 보이거든. 기억나는 건 그날이 금요일이었다는 것뿐이야. 내가 허쉘을 마지막으로 본 날.”

나는 이 첫 대목을 들었을 때부터 소름이 돋았다. 주인공 데일 터너 역할을 맡았던 덱스터 고든이 뿜어내는 범상치 않은 포스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뭐랄까, 삶에 지쳐 꿈꾸기를 포기했으면서도 포기한 것들을 달관한 인간만이 낼 수 있는 그런 음색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가 연주하는 색소폰도 그의 음성과 비슷한 소리를 낸다.

덱스터 고든은 192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듀크 엘링턴과 라이오넬 햄튼이 그의 아버지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열다섯 살부터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한 고든은 열일곱 살에 직업 연주자가 되었다. 덱스터 고든은 1926년생인 존 콜트레인보다 세 살이 더 많았지만 콜트레인보다 무려 23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그래서 80년대 후반까지 활동을 했기 때문에 고든을 콜트레인보다 후대의 연주자로 착각하기도 쉬운데, 실은 콜트레인이 처음으로 색소폰을 손에 쥐었던 1943년에 고든은 이미 라이오넬 햄튼 밴드의 멤버였고, 루이 암스트롱, 플레처 헨더슨과도 협연을 하고 있었다. 고든은 스물두 살이 되던 1945년에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찰리 파커와 함께 연주와 녹음을 시작했고, 비밥의 언어를 테너 색소폰으로 번역한 선구자가 되었다.

198cm의 장신인 그를 사람들은 “꺽다리 덱스터(Long Tall Dexter)”, 또는 “섬세한 거인(Sophisticated Giant)”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곡의 정박자보다 살짝 늦는 듯 여유 있게 따라가는 고든의 연주 스타일은 원래 레스터 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초창기의 존 콜트레인은 고든의 연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콜트레인이 일가를 이룬 50년대 이후부터는 거꾸로 고든이 콜트레인의 영향을 받았다. 젊은 콜트레인은 고든의 제자요, 장성한 콜트레인은 고든의 스승이 되는 셈이다. 고든 없이 콜트레인이 없고, 콜트레인 없이 고든이 없는 것이니 이건 게 바로 고수들의 세계가 아닐까.

1962년 유럽을 방문한 고든은 거기서 무려 15년간이나 머물면서 하드밥 장르를 멋지게 구현했다. 인종차별은 미국보다 작고 재즈 연주자에 대한 존경은 더 큰 곳. 파리에 대한 그의 이런 인상은 영화 <Round Midnight>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고든은 파리와 코펜하겐을 오가며 그곳을 방문하는 버드 파월, 벤 웹스터, 프레디 허바드, 바비 허친슨 등과 협연을 했고, <Our Man in Paris>와 <One Flight Up> 같은 걸작 앨범을 녹음했다. 1965년에는 미국에 잠시 들러 <Gettin' Around>를 발표했다. 그의 행적과 어울리는 앨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1976년에야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실황을 녹음한 앨범 <Homecoming>을 발표하면서 미국의 팬들에게 자신이 건재함을 알렸다.

덱스터 고든 최고의 앨범으로 <Gettin' Around>나 <Homecoming>을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Go!>와 <Our Man in Paris>가 좋다. 1962년 앨범인 <Go!>를 듣다 보면 그가 영락없이 레스터 영의 후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느리고 단조로운 음을 연주하면서도 스윙을 잃지 않는 그 여유 만만한 연주는 언제나 내 기분을 추슬러준다. 한편, 버드 파웰의 피아노와 함께 하는 <Our Man in Paris>에서는 부드러운 곡을 연주할 때조차 하드밥의 칼칼한 심지를 잃지 않는 그의 독특한 음색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젊은 시절의 덱스터 고든은 비밥의 선구자답게 모험적이면서도 유려한 연주를 했기 때문에, 영화 <Round Midnight>에서 고든을 먼저 접한 사람이 그의 예전 앨범들을 들으면 예상치 못한 활기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반대로, 고든의 오랜 팬이 <Round Midnight>을 본다면 활력을 잃은 그의 연주에 실망할 수도 있다. 재즈광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덱스터가 주연한 영화 <라운드 미드나이트>를 마지막까지 다 본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나로서는 영화의 질 운운하기 전에 하나의 상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삼켜져버린 것의, 냄새를 잃은 흔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영화 <Round Midnight>은 그 제목을 <상실의 시대>라고 바꿔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영화 자체가 상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 뒷골목의 카페에서 전성기가 지난 음악을 연주하는, 전성기가 지나버린 연주자. 술에 만취해 파리의 뒷골목을 비척비척 걸어가던 영화 속의 데일 터너는 덱스터 고든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을 터이다. 원래 이 영화는 ‘레스터 영과 버드 파월의 실화에 바탕을 둔 픽션’이라고 소개되었지만, 유럽에서 15년이나 연주생활을 했던 고든의 자전적인 모습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주인공을 맡은 고든이 각본과 각색에도 관여를 했다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괴롭혔던 이 영화는 어쩌면 기량을 상실한 고든의 모습을 기록으로 담고 있다기보다는 고든이 ‘상실’을 성공적으로 연기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데일 터너와 덱스터 고든을 지나치게 동일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고든의 연기는 진정성이 돋보이는 것이었다. 아카데미가 남우주연상 후보로 삼고 싶어 한 것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누구나 짠한 슬픔을 느낄 것이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덱스터 고든이 이 영화가 상영된 지 불과 4년 뒤인 1990년에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더더욱.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232 New Kid In Town file 2017.05.02 345 2
231 Tequila Sunrise file 2017.05.02 77 2
230 걱정 말아요 file 2017.05.02 104 3
229 Crossroads file 2017.05.02 64 1
228 Wanna Go Home file 2017.05.02 68 1
227 고등어 1 file 2017.05.02 124 3
226 Have You Ever Seen The Rain file 2017.05.01 5887 1
225 In My Life file 2017.04.29 83 1
224 Till There Was You file 2017.04.22 7799 1
223 Isn't She Lovely - 콩돌이 file 2015.08.17 718 12
222 April Come She Will - 콩돌이 file 2015.02.04 745 25
»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file 2014.09.12 892 22
220   →오랜만이다 2014.09.13 491 25
219 Play Something We Know - 콩이 & 콩돌이 file 2014.08.03 576 26
218 First Day of My Life - 콩돌이 file 2014.08.03 484 28
217 The Boxer file 2014.07.30 511 27
216 키스 자렛(Keith Jarrett) file 2013.08.14 1041 41
215   →후기 2013.08.14 628 34
214 스탄 게츠(Stan Getz) file 2013.06.25 908 45
213   →나도 그 음반이 제일 좋다 2013.06.28 671 4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 Nex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