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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 Europe, once more

posted Jun 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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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3일, 금요일


영국 생활도 1년 반에 접어들어 귀국을 6개월 앞두고 있던 겨울에 서울의 부모님이 다니러 오셨다. 어둡고 추운 영국에만 있을 일이 아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프랑스와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배를 타는 대신 몇 달 전(1994년 11월)에 개통한 유로터널을 이용했다. 일찍 출발해서 출발역인 폭스톤Folkestone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페리선 승선 때와 비슷하게 차를 탄 채 줄을 지어 대기하다가 기차 안으로 자동차를 탄 채 승차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 차를 몰고 기차 몸통 안으로 들어갔다.


세계 최장 해저터널인 영불간의 유로터널이 처음 구상된 것은 19세기 초였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1956년에 지질학 조사를 시작했고, 공사에 관한 합의는 1985년 대처 총리와 미테랑 대통령 사이에 이루어졌다. 프랑스측에서 1987년 먼저 시공에 착수했으니 만 7년 만에 터널이 완성된 것이다. 영국의 폭스톤과 프랑스의 칼레를 연결하는 이 터널은 평균 수심 45m의 해저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길이 50.5km중 해저 부분의 길이는 38km에 달한다. 다소 과장한다면, 이제 영국은 섬이 아니게 된 셈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세계화의 물질적 징표들 중 하나가 바로 이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는 시간은 35분에 불과했지만 전후 대기시간이 페리보다 길어 선편에 비해 시간이 크게 절약되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여느 기차나 다를 게 없었지만, 바다 밑 땅굴 속을 지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폐소공포증과 비슷한 갑갑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칼레에서 파리로 이동하는 내내 차장 바깥의 풍경을 보면서 아버지는 마치 당신이 농사를 짓다가 오시기라도 한 것처럼 프랑스 땅의 넓고 비옥함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도 이번이 세 번째라고, 나는 어느새 파리 시내가 낯설지 않았다. 우리가 예약한 메르큐르Mercure 호텔은 에펠탑 코밑에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어느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좀 늦었지만 거리로 나선 우리 일행을 에펠탑은 변함없이 우아한 자태로 맞아주었다. 아들은 만 두 살이 되기 전에 두 번째로 에펠탑 전망대에 올라갔다. 이번에는 잠들지 않은 채 풍경을 두리번거리면서.


2월 4일, 토요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함께 파리 시내를 산책했다. 지하철로 콩코드Concorde역에 내렸는데, 출구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한참을 걸어서야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이것도 좋은 관광’이라며 파리시내의 정취를 만끽하셨다. 나는 지난번 수학여행때 뛰어서라도 박물관을 구경한 적이 있었으므로, 아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드농Denon관과 슐리Sully관을 관람하는 사이에 아들과 함께 로비에 앉아 쉬었다.


원래 12세기에 군사용으로 지어졌던 루브르 궁은 17세기 중반에 루이 14세가 거처로 삼으면서 왕궁이 되었다가 18세기에는 박물관으로 탈바꿈을 했다. 이곳의 전시물은 꾸준히 늘어났고 나폴레옹 시절에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5만여 점에 달하는 이집트 유물도 대부분 이때 확보되었는데, 카이로 박물관도 루브르에 비하면 빈약해 보일 정도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도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의 고대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남의 나라에서 약탈해온 물건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문화재 약탈을 당해본 나라의 백성 치고 이런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남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잘 보관하는 안목과 능력은 - 그런 것이 없었을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 다행스러운 것이 아닐까.


첫돌도 되기 전에 걸음마를 시작해서 14개월째를 맞는 아들은 오늘따라 기운이 남는지 박물관 로비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서툴게 뛰다가 넘어지는 녀석을 붙들기 위해 내내 따라다니느라 나는 아침부터 지쳐버렸다. 루브르 박물관을 주인공들의 달리기 장소로 써먹었던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감독의 영화 <국외자들Bande a Part(영어제목 Band of Outsiders)>이 생각났다. 세 명의 주인공은 ‘루브르 통과 달리기’ 세계 기록인 9분 43초를 깼다며 좋아했었다. 이 영화에서 루브르 박물관은 엄격하고 점잖은, 그러나 고리타분하고 억압적인 기성의 질서를 상징했다. 박물관 로비까지 와서 관람을 마다하고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는 아들과 나도 루브르의 ‘국외자들’인 셈이었다.


관람을 마친 부모님과 박물관 구내식당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슬슬 걸어서 퐁네프Pont Neuf 다리 앞으로 갔다. 사마리띤Samaritine 백화점에 들러 어머니 스카프와 꼬맹이 바지도 샀다. 아버지께서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돌아보며, 상상보다 훨씬 웅장하다며 즐거워하시더니 급기야 기념품점에서 노트르담 뱃지를 사서 호주머니 깃에 꽂으시고는 어린애처럼 좋아하셨다. 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시 전철을 타고 샹젤리제로 갔다. 샤를 드골 에뜨왈르Charles De Gaulle Etoile와 개선문을 돌아 내려와, 샹젤리제 끄트머리쯤 있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로 식사를 했다. 역시 영국의 식당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맛있는 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이었다. 식사 후에는 소화를 시킬 겸 트로카데로Trocadero광장으로 갔다. 이 광장은 프랑스가 1823년 스페인 남쪽 트로카데로 섬의 요새를 점령한 것을 기념해 만든 광장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행사를 11월 11일에 이곳에서 열기 때문에 트로카데로 11월 11일 광장Place du Trocadéro et du 11 Novembre이라고도 부른다.


다양한 박물관이 입주해 있는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이 언덕 위에서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한눈에 들어오는 에펠탑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트로카데로의 분수를 배경으로 저만치 보이는 빛의 탑. 파리를 잘 요약하는 이미지였다. 내친 김에 세느강에서 유람선도 타볼까 했는데, 하필이면 며칠 전 쏟아진 겨울비로 인한 홍수 때문에 강이 불어 선착장들이 다 물에 잠기고 유람선은 운항을 중단한 상태였다. 아버지와 나, 꼬맹이가 함께 센 강변 놀이터에서 회전목마를 탔다. 깔깔대던 아들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한참 남았다.


2월 5일, 일요일


오늘은 뭘 할까요 여쭤봤더니, 아버지께서 주저 없이 베르사이유를 보자고 하신다. 호텔 지하에 세워둔 차를 몰아서 지도를 보면서 베르사이유를 찾아갔다. 몇 달 전 선배의 차를 얻어 타고 갔던 길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아 진땀 꽤나 흘렸다. 베르사이유는 루이 14세가 왕궁을 짓기 전까지는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황폐한 습지에 불과했다. 소년시절부터 절대군주의 꿈을 불태우던 루이는 자연을 향해서도 태양왕의 주권을 발휘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작년 여름 더위에 허덕이면서 구경했던 때에 비하면 차분한 기분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이동수단도 마땅치 않던 시절 절대군주의 통치 장소로 기능하기에 베르사이유는 지나치게 넓어 보였다. 이곳에 모여 살던 왕족과 귀족들의 의사소통을 위해 온 궁전 안을 헤집고 다녔을 시종들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생각이 앞섰다. 느릿느릿 구경하며 돌아다니기에도 이렇게 피곤한데.


우리 식구가 산책하는 보폭으로 궁전 관람을 마친 것은 오후 세시 경이었다. 궁전 밖으로 나와 바로 성문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당뇨 때문인지 허기를 참기 힘들어 하셨다. 아무 식당이나 들어간 것 치고는 음식이 썩 괜찮았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가셔서도 부모님 두 분 다 “특히 수프가 맛있더라”며 두고두고 이 식당 말씀을 하셨다. 밥 먹는 동안 지도를 들여다보며 파리로 돌아가는 여정을 궁리하느라 나는 식당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소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에서 장발장Jean Valjean이 숨어 다니던 파리의 거대한 하수도Les Egouts를 구경할까 했는데, 파리에 도착하고 보니 관람시간이 지나 문이 닫혀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좀 쉬다가 아내와 꼬마를 남겨두고 부모님과 몽마르뜨르로 산책을 나섰다. 해질 무렵부터 날씨가 수상쩍더니 겨울비가 뿌려대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저녁 사크레쾨르 성당 앞은 관광객도 없이 한산했다. 지난 번 파리에 왔을 때 먼발치에서 올려보기만 했던 이 성당은 가까이서 보아도 아름다웠다. 흰 대리석을 사용해 비잔틴 양식을 본떠 만든 이 성당은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고, 중근동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둥근 세 개의 돔이 삼각형의 탄탄한 구도로 지어져 몽마르뜨르 일대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한다. 성당 앞에는 잔 다르크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성당 안에 들어갔더니 주일저녁 미사가 행해지고 있었다. 부모님은 뒤켠 벤치에 앉아 기도를 드리셨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산 기념 뱃지 생각이 나셨던지, 아버지는 물으셨다. “여기는 뱃지 안 파나?”


2월 6일, 월요일


파리를 떠나 한 시간쯤 칼레 항구를 향해 차를 몰던 도중에, 유로터널을 건너는 우리 기차표가 5일 왕복권이라서 하루 더 유효하다는 걸 깨달았다. 가는 길에 있는 브뤼헤에 들러 1박 하자고 제안했더니 전원 찬성이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전화로 기차시간을 조정하고 벨기에로 방향을 돌렸다. 브뤼헤 입구에 들어서니 지난번에 낯을 익힌 도시가 반가웠다. 2월은 여행 비수기이다 보니 온 도시가 썰렁한 분위기인 점은 지난 여름과 판이하게 달랐다.


우리는 시내 한 복판의 호텔 홀리데이인Holyday Inn에 체크인을 하고 거리를 구경했다. 관광객용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구경했고, 광장 근처의 상점들도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점찍으신 식당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했는데, 음식도 맛있고 서비스도 훌륭했다. 유럽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뭘 시키든지 감자튀김 또는 구운 감자가 인심 좋게 한 뭉터기씩 따라 나오는 것이 보통인데, 아버지는 여행 내내 이 넉넉한 감자 인심에 아주 질리셨던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웨이터가 감자를 그릇에 따로 담아 오니 아예 탁자에 놓기도 전에 양손을 휘저으시며 거절하셨다.


바다가 가까운 유럽 북부도시답게, 저녁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무척 추웠다. 호텔에 돌아온 뒤 아기는 할머니와 놀았다. 여행을 어지간히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덕분인지, 꼬마는 사진기를 제 앞이마에 갖다 대고 할머니를 찍어드리는 시늉을 하면서 재롱을 부렸다. 나는 혼자 호텔 맨 꼭대기 층의 수영장에 올라가 몇 바퀴 수영을 했다. 혼잣말이 웅웅 울리던 그 겨울의 텅 빈 그 수영장.


2월 7일, 화요일


피로를 못 이겨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옆방의 부모님은 벌써 산책을 나가고 안계셨다. 열 시쯤 돌아오셨는데 아침에 아버지는 수영을 하셨고, 두 분이 함께 시내를 산책하고 나서 커피까지 한 잔씩 드셨다고 했다.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체크아웃을 하고 가방을 트렁크에 실어둔 다음, 시내 바깥쪽을 흐르는 큰 운하를 따라 온 식구가 함께 산책을 했다. 운하 옆 둔덕에 있는 풍차를 배경으로 가족사진도 찍었다. 이제 케임브리지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다시 열차에 자동차를 싣고 유로터널을 지났다. 폭스톤 역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도버에 들러, 전에 몇 번 지나치면서도 자세히 보지 못했던 도버 성을 구경했고, 절벽 위에서 항구에 출렁이는 영불해협의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처녀시절 용두산 외가집에서 내려보았던 부산항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근처에 있는 켄터베리Canterbury도 들러 웅장한 대성당을 구경했다. 14세기의 영국시인 초서Geoffrey Chaucer가 썼던 운문소설 <켄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는 이곳을 목적지 삼아 여행하던 순례자들이 경험담과 들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었다. 영국 성공회의 중심지라는 켄터베리 대성당까지 왔으니, 우리의 ‘켄터베리 이야기’도 여기서 막을 내릴 순서였다. 여러 곳을 기웃거리느라 아홉시 가까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다들 녹초가 되었지만, 아내는 맏며느리답게 지친 내색도 없이 저녁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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