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7. Trans-Java Drive

posted Aug 2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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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여름 휴가

    시대가 변했니 어쩌니 하지만, 휴가는 여전히 사치품에 해당한다. 올해는 며칠씩 여름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나는 일을 생략할 참이었다. 일이 많았던 탓도 있었지만, 네 식구의 여비도 만만치가 않은 탓이기도 했고, 선뜻 장거리 여행에 나설 만큼 심신이 활력에 차 있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게다가, 큰 녀석은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것인지, 멀리 여행은 안 갔으면 좋겠다며 시큰둥했다. 팔뚝만한 녀석을 안고 스페인으로, 이태리로, 스코틀랜드로 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낮은 옥타브의 목소리로 다 큰 척을 하는 것인지.

    그리하여, 이번 여행은 순전히 작은 아들의 희망에 의해 이뤄진 셈이다. 아직 막내티를 많이 내는 꼬마 녀석은 방학이 시작되자 마자부터 눈썹을 팔자로 만들면서 올해는 정말 아무데도 여행을 안갈 거냐고 성화를 부렸다. 지난 주말, 녀석이 풀죽은 목소리로 “이제 3주 후면 또 학교에 가야 하는데, 결국 올해는 집에만 있게 되나보다”고 넋두리 하는 걸 듣고서는 결국 항복했다. 휴가를 얻기는 얻어야겠지.

    덮어놓고 멀리 떠나는 것만 여행은 아니다. 그 점을 깨닫는 데는 적지 않은 과거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거의 언제나, 일과성으로 먼 곳을 여행하는 것보다 내가 발붙이고 사는 그곳의 풍물과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보는 일의 보람이 더 컸다. 그래서 올해는 자바섬을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 식구가 지금 1년 가까이 살고 있는 섬의 ‘자바’라는 이름이 가졌던 원래 뜻은 분명치 않은데, 고대에 인도인들이 이 섬에 온 뒤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지방의 토속 식물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멀다’는 자바족의 방언이라는 설도 있으며, ‘보리(곡식)’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그 유래가 어떻든, ‘자바’라는 이름은 근대에 들어와 서구인들에게는 막연한 낭만과 이국취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오리엔털리즘의 대상이 되었다.

    1929년 영화 Wild Orchids에서, 그레타 가르보는 남편을 따라 자바섬으로 왔다가 그녀에게 반해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자바의 왕자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로 인한 파국을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스크린 속에서 인도네시아는 고질라나 킹콩 같은 괴물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취미삼아 호랑이 사냥을 다니면서 그레타 가르보를 유혹하는, 느끼하고 멀쑥한 왕자가 사는 나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현대인들에게 자바는 세 가지로 유명하다. 첫째, 동부자바 솔로강변에서 1891년 화석이 발견되어 원숭이와 인류를 잇는 고리로 일컬어지던 자바원인은 세계사 교과서들이 빠짐없이 다루고 있는 호모 에렉투스의 한 갈래다. 자바 원인이 호모 사피언스의 조상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는 중인데, 현재로서는 회의론이 대세이긴 하다. 둘째, 화란인들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들여와 재배를 시작했던 커피가 유명세를 타서 결국 서구에서 ‘자바’라는 이름은 커피와 동의어가 되었다. “I love coffee, I love tea-”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 Java Jive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최근에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종업원들이 불러댔었지.) 또 다른 한 가지, 선마이크로시스템스社가 개발해서 오늘날 모든 직장과 가정에서 쓰이고 있는 컴퓨터 언어의 이름도 ‘자바’다. 소프트웨어 개발팀 직원들이 자주 들리던 커피가게의 상호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자바스크립트의 로고는, 당연하게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잔이다.

    남한의 면적보다 조금 더 넓은 자바섬(13만 ㎢)은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큰 섬이고, 인도네시아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자바섬의 면적은 인도네시아 전체 육지의 십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곳에는 인도네시아 2억4천 전체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2천의 인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연히,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섬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조밀한 지역에 해당한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독립을 선포하고 오늘날의 국가를 이루기 전에는 사실상 독립된 하나의 나라였던 적이 없다. 300여 종족이 18,000여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섬에 나뉘어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인도네시아는 아직도 ‘nation-state building’의 걸음마 단계에 있는 셈이다. 독립 후 지금까지 드넓은 영토 안의 다양한 종족과 언어를 묶어 하나의 나라를 이끌고 가는 데 이용된 방편의 하나가 자바섬의 정치적인 중심역할이다. 하지만 이른바 ‘자바 중심주의’에는 명암이 엇갈린다.

    과거 수하르토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자신이 자바문화의 수호자임을 표방했었고, 독립 이래 하비비(98-99) 대통령을 제외한 네 명의 대통령이 모두 자바섬 출신이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하비비가 충분한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고 여긴다.) 자바의 문화는 다른 지방에 비해 우월한 대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 60여년간 정계, 관계, 군부의 거의 모든 요직이 줄곧 자바인들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해왔다. 자연히,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는 자바중심주의와 반자바중심주의의 갈등양상을 내포한다.

    동티모르의 독립, 아체나 서파푸아 지역의 분리독립운동 같은 사건들은 자바중심주의가 최근까지 인도네시아에 드리운 가장 짙은 그림자에 해당한다. 다가오는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바인의 역할의 비중은 다시금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될 터이다. 이런 모든 사정을 감안하면, 인도네시아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자바의 모습을 속속들이 눈에 담아야 한다는 점이 자명해진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자동차 여행으로 휴가를 보내는 것이 반드시 여비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식구들에게 납득시키는 데는, 위와 같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했다. 다들 그렇게 하듯이, 토요일부터 그 다음 주 일요일까지 7박8일의 일정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떠나기 전에 맞을 손님이 생겼다. 내가 마치 피붙이 父兄처럼 느끼는 선배 한 분이 공무로 출장을 오시게 된 것. 나로서는 기꺼이 휴가여정을 5박6일로 잘랐다. 여행이 길고 늘어지는 것보다 짧고 강렬한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식구들을 설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막상 휴가를 시작하기 전날인 월요일은 유난스레 온종일 바쁘기도 했다. 마치, 놀러 가려면 값을 치르고 떠나라는 듯이,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저녁에는 공항에서 손님들을 마중했다. 다른 손님들이 다들 숙소객실로 들어가신 뒤, 나는 꼭 2년만에 다시 만난 선배를 모시고 포도주 세 병을 해치우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 답했다. 새벽이 되어 귀가해 보니 아내가 짐을 꾸리면서 눈을 흘긴다. 여행 떠나기 전날마다 정말 이러기냐고.

■ 첫째 날

< Jakarta-Sukamandi-Indramayu-Cirebon-Tegal-Pemalang-Pekalongan-Kendang-Semarang >

    오랜만에 마신 포도주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내색을 했다가는 좋은 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 아침 일곱시부터 북새통을 떨었건만, 여덟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사실, 식구들이 군말 않고 길고 긴 자동차 여행을 따라나선 데에는 작년 이맘 때, 미국 대륙을 가로세로 질러가며 자동차로 여행을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니, 도움이 되었던 정도가 아니다. 실은, 우리는 작년 휴가의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 위로 내리는 세찬 비나 칠흑 같은 어둠이 들이치지 못하는 한 평 남짓한 불가침의 공간, 그 속에 식구들이 오롯이 모여앉아 광대무변한 세상 속을 누비는 것이 바로 자동차 여행이 아니던가.

    세월의 저편으로 흐릿해져 가던 여행의 기억에 불을 지른 것은 지난 달 온 식구가 함께 보았던 두 편의 영화였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RV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Little Miss Sunshine. 이 두 영화들은 식구들이 장거리를 자동차로 여행하며 겪는 좌충우돌을 담고 있다. 워낙 두 영화 다 재미있었고, 특히 우리 식구들에게는 마치 작년의 앨범을 다시 뒤적이는 것 같은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올해는 흔쾌히 혼자서 운전을 도맡아 하겠다는 우리 집 운전기사 디디 아저씨가 가세했다는 것이다. 족자카르타 북부 산악지방이 고향인 45세의 디디씨는 지난 일 년간 성실하게 우리 식구들을 위해서 일해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98년 외환위기와 겹쳐 일어났던 전국적인 폭동 이래로, 불행하게도 치안사정이 예전만 못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런 탓에, 현지 언어와 현지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 없이는 심지어 자카르타 안에서도 자유로이 운전을 하고 돌아다니기가 여의치 못하다. 게다가, 자바섬은 인도네시아의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중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도로사정이 열악하다. 자바 순환 간선도로라는 것이 대부분 꼬불꼬불한 왕복 2차선이거나, 심지어는 동네 뒷길 같은 골목들도 포함하고 있으니, 여간 무모하지 않고서는 장거리 여행에 손수 운전을 꿈꾸는 외국인은 없다.

    운전기사의 도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동차 여행의 요건으로서는 일종의 반칙 같은 것이긴 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는 그간 자카르타에 사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그러하듯이, 치안사정과 엄청난 교통체증으로 인해 좀처럼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운전기사가 퇴근하고 나면 발이 묶이는 갑갑한 생활을 해왔다. 이곳의 교통체증이 어느 정도냐 하면, 주말에 용감하게 자카르타 외곽의 산으로 떠났던 직장 상사 한 분은 네 시간 동안 정체된 도로에 갇혀 계시다가 목적지까지 삼분지 일도 못가고 차를 돌려 귀가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마치 갇혀 지내다가 탈출하는 것 같은 가벼운 기분을 만끽하며 반칙 여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자바섬의 북쪽 해안을 따라 찌르본과 스마랑을 거쳐 수라바야로 갈 작정이다. 자카르타와 스마랑, 수라바야 세 도시는 과거 식민지 시절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주목하고 발전시킨 북쪽 해안을 따라 자리 잡은 도시들이다. 식민지 시절에 바타비아라고 불리웠던 수도 자카르타의 외곽을 벗어나자마자, 멋들어진 고속도로는 왕복 2차선의 시골길로 줄어든다. 시골길의 정취도 좋지만 갑자기 막막하다. 이런 길로 이 큰 섬을 한 바퀴 돈다는 말인가? 5박6일만에 과연 귀가할 수 있을 것인가?

    찌르본을 통과하면서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갔지만, 들어갈 만한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찌르본은 생각보다 훨씬 큰 도시였는데, 시내를 헤매면서 맥도널드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식구들은 아내가 센스 있게 준비해 온 김밥을 먹으면서 계속 전진. 나는 원래 조수석에 앉아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기사가 배가 고픈데 옆자리에서 뭘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는 일은, 체통 문제를 떠나서, 어쩐지 스스로 너무 짐승 같아 보여서이다. 몸보다 더 불편할 줄 아는 것이 마음이니까.

    길가에 단촐한 현지 식당들은 더러 있었지만 거기서 끼니를 섣불리 때울 수는 없었다. 더럽다거나 기분이 찜찜한 때문이 아니라, 벌써 몇 번째 배탈 설사로 고생들을 한 경험들이 있어서, 함부로 현지 음식을 사먹었다가는 여행은 고사하고 곧장 병원신세를 져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를 세우고, 디디씨에게 우리는 좀 산책하며 쉴 테니 식사를 하라고 했더니만 자기는 아침을 많이 먹어서 생각이 없단다. 디디씨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뭘 먹는 법이 없다. 아, 그놈의 자바인의 예의범절. 먹어라, 필요 없다, 서로 벅벅 우기다가 이러다가는 싸움 나겠다 싶은 대목쯤에서 포기하고 함께 굶기로 했다. 졌다!

    원래 인도네시아인들은 같이 식사하자고 세 번은 권해야 ‘이미 먹었다’는 대답이 ‘아직 안했다’로 바뀐다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체면과 겉치례(겡시; gengsi)를 중시한다. 이 나라 말로는 예절을 소빤(sopan)이라고 부르는데, 예의가 거친, 즉 소빤(sopan)이 까사르(kasar)한 사람들을 제일 천박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말로 화장실을 까마르 끄찔(kamar kecil), 즉 ‘작은 방’이라고 부른다. 완곡어법(euphemism)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작 인도네시아인들은 점잖은 자리에서는 까마르 끄찔조차 불편한 표현으로 생각하여 ‘뒤에(블라깡; belakang)’에 다녀 오겠다며 실례를 구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말레이시아에서는 화장실을 딴다스(tandas)라고 부르며, 이들에게 까마르 끄찔이 어디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마나 작은 방을 찾느냐고 되묻는다. 말레이시아에 출장 갔다가 이런 경험을 한 뒤, 나는 지나치리만큼 완곡한 인니어의 어법은 자바 지방이 과연 원산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심한 욕 가운데 하나가 못 배워먹은 놈(kurang ajar)이라는 점도, 이 나라 사람들이 예의범절을 깨우치는 일을 중시한다는 하나의 반증이 된다. 특히 자바 사람들은, 예절의 기준과 철학이 좀 우리와 달라서 그렇지, 정도로 따지면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히 울고 갈 만큼, 또는 일본인들의 ‘다테마에(建前)’가 야하게 느껴질 만큼 희노애락을 감추는 일에 탁월하다. 인도네시아에 오시면 함부로 화내거나 큰소리를 지르지 마실 일이다. ‘꾸랑 아자르’라고 등 뒤에서 손가락질 받기 싫으시다면.

    배운 사람 흉내 내느라고 허기진 배로 스마랑에 도착해서 찌뿌트라 호텔에 체크인 한 것은 출발한지 아홉시간 뒤인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였다. 이 호텔에는 약 50불짜리 방 두 개를 빌렸다. 140만 인구를 가진 스마랑은 인도네시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로, 중부자바주의 주도다. 스마랑이라는 이름은 명나라 환관 鄭和의 이름인 三寶(San Bao)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정화 제독은 1405년이 스마랑에 상륙했고, 스마랑에는 그를 기리는 Gedung Batu라는 기념관도 있다. 스마랑의 정화 기념관과 중국식 사당들은 이곳의 중국계들이 그만큼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물이다.

    이곳에 사시는 P 선배님께서 저녁을 사 주셨다. 추레한 모습으로 식솔들을 이끌고 나타난 나를 따뜻한 미소로 맞으며 반겨주시는 고등학교 선배님이 스마랑에도 계시다 이런 말씀이다. 선배님을 따라서 간 곳은 스마랑 뒷산 위 주택가에 자리잡은 Hills라는 식당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식당 안으로 발을 들이며 탄성을 질렀다. 널찍한 야외 테라스 저 편으로 스마랑 시내의 멋들어진 야경이 활짝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시내를 굽어보며,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는 낯이 익었다. 그것은 해 저무는 피렌체 언덕 위에서 맡아보던 바람의 냄새와 같았다. 내 기억이 내게 그렇게 속삭였다.

    함께 자리를 한 또 한 분의 고등학교 선배님이 계셨다. 처음 만나 뵌 분이었지만, 딱히 그를 처음 뵙는 것만도 아니긴 했다. Y 선배님은,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주인공 병태 역할을 맡았던 왕년의 영화배우였는데, 이 영화는 그가 출연한 단 한 편의 영화이기도 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최인호의 원작소설을 1975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한 <바보들의 행진>은 한국 영화사를 말할 때 도저히 빼 놓고 이야기 할 길이 없는 문제적 작품이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라, 국내 최초로 영화과(UCLA) 학위를 받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친하게 지냈으나 결국 38세에 간암으로 요절한 고 하길종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 현실과 타협했다고 한숨지었다지만. 설사 유신체제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본질상 영화란 3차원의 세계를 평면에 그리기 때문에 타협이고,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협이며, 작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품이기도 하기 때문에 타협인 것이다. 제발, <바보들의 행진> 만큼만 타협하라고 해라. 오늘날 심형래의 <디워>의 성공에 눈을 흘기는 수많은 예술영화감독들도 정치적 유행과 타협하면서 스스로를 안티테제라고 속이곤 하지 않는가. 그들이 만드는 영화라고 해서, 관객에게 돈 받고 팔지 않는 그 무언가는 아닌 것이다. <디워>라는 괴수영화를 둘러싸고, ‘내가 너만큼 공부했으면 반에서 1등이 아니라 전국 1등이라도 했을 것’이라는 야유 비슷한 얘기들이 요즘 하도 시끄럽길래 잠시 곁길로 새봤다. 어쨌든,

    대학 시절 주인공으로 출연한 단 한 편의 영화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가 되고, 그 후로 그는 영화계를 영영 떠나고, 어느 날 그는 친구의 소개로 홀연히 적도 근처의 소도시에 정착해서 사업을 하고, 여름 휴가차 찾아와 처음 만나는 고교 후배가 맞담배를 피우는데, 그 후배가 바로 당신이라고 한번 상상해 보시라. 낯선 열대의 도시에서 피렌체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어딘가 앞뒤가 안맞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선배들과 맥주잔을 부딪혔다. <바보들의 행진>을 낳았던 한국의 정치와, 그 영화가 유행시켰던 생맥주, 통기타, 청바지, 또 그 밖의 온갖 70년대의 것들이 소리 없이 주변을 맴맴 돌고 있던 저녁이었다.

    한국영화 최고의 키스씬으로 일컬어지는 병태와 영자의 입영열차 키스 장면에 대해서 여쭤보려다가, 너무 되바라진 질문 같아서 그만뒀다. 집에 돌아온 뒤,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보고 싶어서 친구에게 DVD를 구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한 줄 답장이 왔다. “한 번 물어볼께마는, 그런 건 구해져야 세상이 정상인 거 아니겠냐.”

■ 둘째 날

< Semarang-Demak-Kudus-Pati-Rembang-Kragan-Tuban-Paciran-Gresik-Surabaya >

    여덟시에 일어나 숙박비에 포함된 아침식사를 하고 아홉시에 호텔을 떠났다. 길을 물어 잠시 Laung Sewu에 들렀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 지어져 동인도 철도회사 본부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독립 후 군부대의 본부청사로 사용되었고, 수하르토 정권 시절 독직으로 유명한 그의 막내아들의 소유가 되었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 멋들어진 외관과는 달리, 다가가 보니 부서진 창문과 이끼 낀 벽. 버러진 건물의 을씨년스러움이 물씬했다.

    여러 개의 창문과 출입구를 가진 이 건물의 별명은 “천개의 문(Pintu Seribu)”이다. 불길한 압제의 기억을 떠올리듯, 이 건물은 요즘은 귀신이 나오는 집(haunted house)으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도 유령 사냥꾼들에게 잘 알려진 집이라는 걸 보면, 귀신 얘기는 을씨년스러운 외관 때문에 그냥 생긴 우스개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집에 사는 귀신들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적도의 짙은 아침햇살 속에서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에 그 앞을 얼씬거린다면 아마 사뭇 다른 느낌일 테지.

    물어물어 스마랑을 벗어나 동쪽으로 난 국도로 접어들었다. 길은 자카르타-스마랑 구간보다도 더 나빴다. 그런 덕분인지, 어제보다 더 짧은 거리였지만 스마랑부터 수라바야까지도 여전히 아홉시간이 걸렸다. 논과 밭 사이로 달려 오다가, 집을 떠난 후 처음으로 해변도로를 만나면서 수라바야가 가까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내들이 염전 위로 물을 길어오르고 있었다.

    수라바야에 다가왔다는 것은, 이제 자바족의 거주지역에서 마두라족의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바섬에 제일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은 순다족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외지로부터 자바족이 이동해온 뒤로는 반둥을 거점으로 서부자바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오늘날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바족인데, 인도네시아 전체인구의 약 45-50%에 달하는 이들은 자바섬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과거 식민지 시절 이래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꾸준히 이른바 내국민이동정책(Transmigration Policy)을 통해 인구밀집지역의 자바인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토록 권장했다. 그 결과, 자바인들은 자바섬 이외의 지역에도 많은 수의 인구가 흩어져 살고 있다.

    참고로, 수카르노, 수하르토, 수얀또, 수리안또 등등 Su- (자바어로 ‘좋다’는 접두어)로 시작해서 -o로 끝나는 인도네시아인을 만나신다면, 그는 확실하게 자바인으로 보시면 된다. 그리고, 자바인의 이름에는 직계로 전수되는 성이 따로 없다. 이름이 세 낱말이라도 그건 다 성이 아닌 이름인 것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부를 때 자꾸만 성이 아닌 이름 앞에 Mr.를 붙이는 습관은 그런 사정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제 우리가 막 들어선 동부자바 지역에는 수라바야 바로 앞의 마두라 섬을 근거지로 하는 마두라족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나흐들라툴 울라마라는 국내 최대의 보수적인 이슬람 단체가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다수의 마두라인들이 이 조직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을 만큼, 마두라인들은 종교적으로 열성적이다. 마두라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면서도 조상숭배 의식을 보편적으로 행할 만큼 가족을 중시하고,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며, 기질상으로 격정적이고, 외골수로 고집스럽고,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충성스러운 우정을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어딘가 우리나라 남도풍의 기질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부산시와 수라바야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니, 그것 참.

    마두라 섬은 대단히 척박하기 때문에, 농사일은 마두라 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유목, 어로 등에 주로 종사했다 하니, “인도네시아의 카우보이들”이라는 그들의 별명 또한 그럴듯하지 않은가. 실제로 마두라인들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황소 경주라고 한다. 이런 마두라인들이 동부자바에 다수 거주한다는 사실과, 수라바야가 일명 투쟁의 도시, 영웅의 도시라는 사실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라바야는 수많은 반식민지 투사들을 배출했고, 1945년 일본 패망 뒤 지배자를 자처하며 돌아온 화란과 인도네시아 사이의 독립전쟁도 그 첫 단추가 수라바야 감옥의 무장봉기에서 끼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만일 인도네시아 밖에 사는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최근에 어디선가 수라바야라는 이름을 접해본 희미한 기억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피터 잭슨의 영화 King Kong에서일지도 모른다. 일군의 영화 제작팀이 소위 해골섬(Skull Island)에 가기 위해 승선하는 Venture호의 선미에는 Surabaya라고, 큼지막한 글씨로 선박의 등록지가 표기되어 있다. 실은 이것도 실수에 해당하는데,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33년에 수라바야는 지금과는 달리 Soerabaya라고 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카르노가 Soekarno였듯이.) 아마 영화속 선장이 올바른 철자를 몰랐다는 뜻이려니.

    제프 브리지스와 제시카 랭이 주연하고, 이제는 사라져 버리고 없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위로 킹콩이 기어오르던 1976년 영화도 수라바야에서 출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만, 거기서는 주인공이 잡아타는 택시의 운전대가 왼쪽에 붙어 있다. 인도네시아의 자동차는 죄다 오른쪽에 운전대가 있다. 제작팀이 인도네시아에 와 본 적이 없었거나, 아니면 주인공이 탄 택시가 하필 수입된 미제 중고차였거나....

    500만명의 인구가 사는 수라바야는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다. 이곳에는 해군사관학교와 해군사령부가 있고 큰 항구가 있어 어딘가 부산과 진해를 섞어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아래위로 길쭉한 수라바야의 지도는 그 모양새조차 부산과 닮아보였다. 내 고향의 자매도시라면, 나한테는 이모뻘 도시가 되나? 이모 집에 초대를 받은 기분으로 식당을 찾아 나서는 사이, 동부자바의 붉은 노을이 어둡게 잦아들고 있었다.

■ 셋째 날

< Surabaya-Sidoarjo-Gempol-Tosari-Bromo >

    수라바야의 쉐라톤 호텔에서는 방 하나(약 150불)에서 네 식구가 하룻밤을 났다. 뒤척이는 아이들의 몸집을 가늠해 보면서, 한 방에서 온 식구가 바글대며 머무는 여행도 이제 몇 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수라바야에서 1박을 한 이상, 멀지 않은 브로모산까지의 출발을 서두를 일은 없었다.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점심까지 먹었다. 브로모 산 중턱에 패스트푸드점이나 외국인을 위한 레스토랑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을 테니까.

    수라바야를 등 뒤에 두고 떠나며 진흙화산이 분출하고 있는 시두아르조를 지나갔다. 요즘 시두아르조는 ‘라핀도’라고 더 자주 일컬어진다. 그 이유는, 2006년 5월 28일 주식회사 라핀도 브란타스사가 가스채굴을 위해 수라바야시 외곽의 시두아르조에 시추공을 뚫었다가 드릴이 지하 3천미터에 다다를 무렵 걷잡을 수 없는 압력으로 가스와 함께 섭씨 60도 정도의 뜨거운 진흙이 분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한 압력이 내재된 진흙층 위의 석회암층을 뚫으면서 시추공에 철강 케이싱과 같은 적절한 보호조치를 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진흙화산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분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다수 지질학자들의 견해다. 땅 밑의 팽팽한 진흙 공에다 바늘을 잘못 찔렀다고나 할까. 장차 이 지역은 진흙의 무게로 다시 내려 앉아 칼데라 호수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지구의 껍데기 위에 아직도 이런 일이 진행 중이라니 나 원 참, 지구과학을 배웠을 때는 칼데라 호수라는 건 수십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들만 있는 줄 알았었지 뭔가.

    한편, 라핀도사의 시추는 우연의 일치일 뿐이며 진흙분출은 지진으로 인한 단순한 자연재해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당시 복지장관에 재직 중이던 아부리잘 바크리가 라핀도사의 지배주주이기 때문에 버젓이 제기되고 있는 억지주장이라고 믿고 있다. (진흙분출 이틀 전 300km나 떨어진 족자카르타에서 6천여명이 사망한 강도 6.3의 지진이 발생하기는 했었다.)

    매일 평균 1만 입방미터 이상씩 솟구쳐 나오는 이 진흙은 이미 360헥타르 이상을 삼키고 여덟 개 마을에 살던 1만 명 이상의 피난민을 낳았다. 이들을 뭐라고 해야 하나? 이재민(泥災民)? 인도네시아를 한자로 印尼라고 쓰지만, 시두아르조의 인니는 진흙 니(泥)자를 써서 印泥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황당하게 삶터를 잃은 시두아르조의 주민들에 대한 보상 문제라도 무난히 해결되면 좋으련만, 사고 후 한해가 넘도록 보상은 지체되고 있어서 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진흙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솟아오르고 있다. 2007년 6월 시두아르조 주민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도요노 대통령은 ‘보상이 이토록 지지부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몰랐다’면서 눈물을 흘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약방문이 되겠지만, 보상 문제만이라도 부패한 정치권의 泥田鬪狗 대상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부는 1500여개의 커다란 콘크리트 구슬을 사슬로 묶어 진흙 분출구에 주입하는 등 기발한 시도를 해 보고 있는 중이지만, 얼른 짐작이 가듯이 별 효과는 없는 상태다. 시두아르조는 이미 스물 다섯 개의 공장을 잃었고, 전국 최대 규모로 이루어지던 새우양식장도 대부분 문을 닫고 있다. 경작지의 피해도 크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 11월에는 지하 가스관을 짓누르는 진흙의 압력으로 가스관이 폭발하는 대형사고도 벌어졌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기업과 공장들도 가스 공급 애로와 비좁은 우회도로의 정체 때문에 빚어지는 엄청난 물류비용에 허덕이고 있다.

    도로가 정체된 지점에서 차에서 내린 나는 정부가 급조한 높이 10여 미터의 제방 위로 기어 올라가서야 거대한 진흙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나무와 집들과 도로들이 저 흙 밑에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그 슬픈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방 위에는 제법 많은 숫자의 현지인들이 드문드문 찾아오는 구경군들에게 저마다 엉터리 ‘입장권’을 나눠주며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비공식 가이드들은 이 나라의 어느 관광지에서나 만날 수 있지만 대게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가 작은 액수의 잔돈만 내밀었더니 정색하고 화를 내면서 돈을 집어던진다. 앗, 이런 건 처음 당해보는 충격적인 반응이었다. 자동차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아마 이 기이한 재난이 이 동네 사람들의 성정을 더 사납게 만든 모양이다. 마음이 진흙처럼 무거워졌다.

    인도네시아의 ‘성산’ 브로모로 가는 길은 예상대로 산길이었다. 이만하면 상당히 높이 왔겠다는 생각으로 차창을 열어보니, 과연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이래 일 년만에 처음으로 맞아보는 서늘한 자연의 바람이 차안으로 밀어닥쳤다. 저녁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젖은 바람.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안개가 아니라 산할아버지가 쓰고 있던 구름모자 속이었던 모양이다. 좁은 길로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생각보다 훨씬 더 한참을 올라가서야 우리 목적지인 브로모 코티지에 닿았다.

    다섯 시쯤 코티지에 도착해서 방을 배정받았을 때는 어스름이 짙게 내리고 있었다. 브로모 코티지는, 놀랍게도, 서양인 손님들이 만원이었다. 코티지의 외관은 그럴 듯했는데, 방이 갖추고 있는 시설은 기대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검소했고, 한밤중의 방은 몹시 추웠다. 여기서 만큼은, 한 침대에서 네 식구가 비좁게 자기로 한 건 잘 한 결정이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산중턱, 브로모 코티지 앞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있었다. 마을 앞길을 산책하면서, 땔감 나무를 지고 나르는 남자를 보았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Hello”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는 꼬마 여자아이와도 만났다. 이 마을의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산이 제공하는 1차생산품들과 관광객들일 터였다.

    우리 식구들은 자카르타에서부터 가지고 온 사발면과 햇반으로 어두운 형광등 불빛이 가늘게 떨리는 숙소 방 안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아직 저녁 일곱 시밖에 안되었는데도 밖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버려서, 나는 가지고 온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 PC를 꺼내 아이들에게 <김관장대 김관장>이라는 국산 영화 DVD를 상영해 준 것이다. 신현준이 오지명 흉내를 제대로 내는 그 영화 말씀이다. 오랜만에 우리식 희극을 접해서였을까 두녀석들의 깔깔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어둑한 방을 확, 밝혔다.

    내일은 새벽 세시 반에 기상해야 한다고 하므로, 영화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누워 새우잠을 청했다. 해리포터의 친구 론 위즐리마냥 유난히 거미를 무서워하는 둘째 녀석은 아까 문 밖에서 본 호랑거미가 방에 들어올까봐 겁난다며 굳이 제일 가운데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몸에 열이 많은 큰 녀석은 이 썰렁한 방 안에서도 덥다며 자꾸 이불을 차내고...

■ 넷째 날

< Bromo-Lawang-Malang >

    세시반 알람소리에 선잠을 떨쳐내며 한기에 몸을 떨다가, 고산 유격장에서 훈련받던 훈련병 시절의 어느 새벽 기상시간을 잠시 떠올렸다. 우리 식구들은 사전정보의 미비로 방한복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방 속에 있는 옷을 죄다 꺼내 겹겹이 걸쳐 입고 방을 나섰다. 호텔 편의점에서는 방한복을 대여하고 있었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에라, 인도네시아의 산꼭대기가 추우면 얼마나 더 추워지랴 싶기도 하고, 옷도 몇 겹 껴입은 터라 그냥 객기를 부리기로 했다. 나보다도 아이들이 필요 없다고 우겼다.

    호텔 로비 앞은 아직도 캄캄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과 그들이 제각기 예약한 소형 짚차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앞마당을 채우고 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산정까지 가기 위해서는 현지인 기사가 운전하는 4인승 4륜구동차를 예약해야 했는데, 가격은 Rp 315,000(약 34불)이었다. 모르긴 해도 산정에 있는 마을의 모든 가정이 이런 식의 가이드업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싶을 만큼, 현지인 기사와 가이드들의 수는 많았다.

    우리를 태운 짚차의 기사 이르완씨는 어둠 속의 구불구불한 오르막 산길을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우리 차만이 아니라, 똑같이 생긴 낡은 짚차들의 행렬이 같은 속도로 정상을 향해 질주중이었다. 에구, 추워라. 든든한 방한복을 입은 서양인들 틈에서 우리는 독특한 복장으로 두드러질 뻔 했는데, 정상 근처에서는 노점상이 호텔에서와 똑같은 방한복을 5분의 1 가격(Rp 10,000)으로 대여하고 있었다. 여전히 안 입겠다고 떼를 쓰는 큰 녀석만 빼고 세 사람은 지조를 바꾸어서 방한복을 걸쳤다. 생각보다 춥기도 추웠지만, 다른 외국인들에게 공연히 불쌍해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

    마침내 비탈길 좁은 공터에 차를 세운 우리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인파에 섞여 전망대로 올라갔다. 여기서 전망대란, 해발 2329m의 펑퍼짐한 산정에 고등학교 운동장 응원석처럼 20여 미터 길이의 철제 계단을 만들어 둔 장소를 말한다. 큰 아들이 말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서양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건 처음 봐요.” 아닌 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까지 세상에 브로모라는 이름의 산이 있는지조차 몰랐었던 우리는, 여기가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을 끌어모으는 관광지일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인사를 나눠 보니, 우리처럼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이태리, 미국, 독일, 화란 등지에서 브로모를 보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물론, 요즘 어느 관광지를 가든지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중국인 단체관광객들도 그 두드러진 억양의 중국어로 자신들의 존재를 시끌벅적하게 알리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입에서 흰 김을 뿜으며 저마다 손에 사진기를 들고, 응원 벤치에 서서 경기 개막을 기다리는 착한 학생들처럼 기다렸다. 예전에 사막에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눈부신 별들을 잠재우며 여명이 찾아오고, 지평선 쪽이 붉게 부어오르나 싶더니, 해가 떴다. 아아 저 구름 바다. 분화구에서 넘치는 雲海는 산 아래쪽으로 넘실넘실 흐르고 있었다. 붉은 빛을 낮게 받는 분화구의 모습은 기괴하고 장엄했다. 나 역시 그랬듯이, 관광객들은 하나 둘씩 사진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해에게서 산에게로.

    일출의 붉은 기운이 웬만큼 가셔졌다 싶었을 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려, 다음 목적지인 화산입구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이번에는 아까 산정에서 내려다 보이던 분화구 안개 속으로 다시 15분쯤 차를 몰아 내려가는 것이었다. 분화구 속의 거대한 평지에는 고운 화산재가 사막을 이루고 있었고, 그 분지에 들어서자 손님을 잡으려는 현지 가이드들이 마치 여우사냥을 하는 몽골족 전사들처럼 말 한두 필씩을 이끌고 저돌적으로 차를 향해 돌진해 왔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제 차에서 내려 다시 돈을 내고 마상에 올라 어디론가 가는 차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걸어가기에는 숨이 찰 것 같은 돌 언덕길을 저마다 말 한필씩에 올라타고 분화구를 향해서 출발했는데, 분화구가 눈앞에 다가오자 심한 유황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왔던 다른 외국인들도 대부분 발을 돌리고, 독한 몇몇은 천으로 입을 가린 채 분화구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며칠 전, 분화구 근처로 소풍을 갔던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질식사했던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이곳의 정력 왕성한 화산들은 매일매일 유황을 분출하는 정도가 달랐다. 우리 식구들은 서로 눈짓으로 이 정도에서 다시 내려가자고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냥 좀 힘드니까 이 정도에서 관두자, 이런 것이 아니었고, 정말 몇 발짝만 화산 쪽으로 더 딛어도 호흡이 콱 멎을 것만 같았다. 반지를 던지려고 한 발짝씩 죽음의 산으로 다가가던 프로도의 마지막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실감이 났고, 타죽거나 매몰되기 전에 일찌감치 질식사 했다던 폼페이의 미라들의 가슴 답답한 정황도 온몸으로 이해가 갔다.

    돌산 속의 검은 화산재 사막, 그 위를 유령처럼 떠도는 유황가스와 안개의 치맛자락들. 그 사이사이에서도 모진 생명을 길러내는 누런 잡초들. 그 사이를 말달리며 생계를 꾸려가는 브로모 산사람들의 치열한 인생. 이런 외계에서, 말 타는 값의 바가지 정도는 불평할 일이 못되었다. 그러기에는 그곳의 모든 풍경이 짐짓 너무도 진지해 보였다.

    전설에 따르면, 15세기 마자빠힛 왕국의 왕과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어 브로모 산에 올라 기도를 해서 스물다섯명의 자녀를 얻었다고 한다. 단, 마지막 아이는 신들에게 바치는 조건으로. 그러나 막내가 태어났을 때, 왕비는 약속을 어겼고, 이에 노한 산신들이 화산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화산은 결국 막내아들을 희생시킬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때부터 매년 브로모에서 희생제가 열렸다고 한다. 인신공양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오늘날은 관광상품으로서의 브로모 산신제가 매년 개최된다. 우리는 불과 며칠 차이로 이 산신제를 구경할 기회는 놓쳤다.

    분화구에서 다시 호텔로 돌아오니 아침 여덟시였다. 호텔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다음 목적지인 말랑을 향해 떠났다. 가는 길에는 브로모의 특산물이라는 감자를 사지 않을 수 없어 마을 어느 집에 들러 한 포대 샀다. 내 친구 C에 따르면, 세상에는 “어떻게 요리를 해 놔도 맛있는 음식이 딱 한 가지 있는데, 그게 감자”란다. 감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그 말에 대체로 동의하긴 하지만, 영국서 살면서 경험해 보니 영국 사람들은 감자를 가지고도 도저히 식욕이 나지 않게끔 요리하는 법을 알긴 하더만. 집에 돌아간 뒤, 브로모의 감자들은 죄다 찐감자로 변신할 터였다.

    예전 중동에서 해발 3천미터의 산에 갔을 때, 차량고장을 경험했었던 터라, 내리막길은 무서웠다. 운전 경험이 다양하지는 못한 디디씨를 조수석에 태우고,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엔진 브레이크를 써가며 조심조심 30분쯤 내려오다가, 막내가 호텔에 캠코더를 두고 온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대목에서 “그래도 그나마 여기서 알았으니 다행이다”고 웃어넘길 여유를 내가 가졌으면 좋았을걸, 나는 아들 녀석에게 눈을 흘겨가며 다시 오르막길로 차를 돌렸다. 호텔 직원들은 캠코더를 잘 보관하고 있었다. 차를 돌려 다시 엔진 브레이크.

    한참 산길을 가다가 중간에 다시 오르막이 나오길래 아무래도 이상해서 길을 물어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지난번 갈림길에서 어떤 사내가 친절하게 틀린 길을 알려주었던 것. 다시 차를 돌려 헤매기를 두어 번, 산 아래의 마을에 거의 다 와서 방심한 나는 갓길에 주차해 둔 트럭의 옆면에 너무 가까이 차를 몰다가 그만 우리 차의 후면경을 박살내고 말았던 것이다. 시범을 보이겠다고 큰소리 쳤다가 스타일을 구겨버린 나는, 디디씨의 눈치를 보며 운전석을 양보했다.

    동서로 긴 자바섬은 오세아니아․인도판이라는 지각이 유라시아판 밑으로 매년 평균 6cm의 속도로 침하되는 경계를 따라 솟아오른 땅이다. 그러다 보니, 자바섬에는 마치 생선의 등뼈와도 같이 동서로 고산지대가 이어져 있다. 이 산맥을 이루고 있는 산들 중 적어도 38개는 아직도 혈기 방장한 활화산들이다. 브로모에서 말랑으로 가는 길은 이를테면 자바섬의 척추가 거의 끝나는 꼬리뼈 근처를 타넘는 일이다. 기복이 있는 산길을 두어 시간 달려 우리는 말랑에 도착했다.

    워낙 새벽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한 덕에, 기분에는 벌써 하루해가 저물 만큼 움직인 것만 같은데도 말랑의 Tugu 호텔에 체크인 했을 때는 채 낮 12시가 채 되기 전이어서 방이 준비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이번 여정의 중간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말랑에서의 체류시간도 넉넉히 잡았고, 방도 두 개를 잡았다. 하지만 호텔방에 쳐박혀서 한나절을 보낼 수야 있는가. 아직 호텔방이 준비되려면 한시간쯤 더 필요하겠다는 호텔직원의 설명을 기회 삼아, 나는 쉬고 싶어 짜증을 내는 식구들을 이끌고 시내구경을 나왔다.

    80만 인구가 사는 말랑은 동부자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고도가 높아서 날씨가 서늘하고, 날씨가 선선해서 식민지 시절 보고르, 반둥과 함께 선교사들을 포함한 서양인들이 선호하는 거주지가 되었다. 외지인들과의 피가름 덕분인지 아닌지 자신은 없지만, 말랑은 반둥 및 마나도와 아울러 인도네시아 3대 미인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선입견을 가지고 봐서 그런지 말랑의 처녀들은 실제로 아담하고 예뻐 보였다. 놀랍게도 이 도시에는 무려 20여개의 대학교가 있다니 교육의 도시라는 자화자찬은 허풍이 아니겠지만, ‘동부자바의 파리’라는 별명을 실감할 정도로 말랑을 자세히 들여다 볼 시간여유는 우리에게 없었다. 하지만, 과거 ‘서아프리카의 파리’였다는 아비장이나, ‘중동의 파리’로 불리웠던 베이루트가 쇠락한 모습에 비하자면, 말랑은 적어도 차분한 기품과 건강한 활력은 유지하고 있는 도시처럼 보였다. 파리와의 비교는 내겐 어쩐지 좀 공허하게 들리지만, 선선한 언덕들과 안개 섞인 저녁공기, 바다와의 근접성, 도시의 교육열, 화산과 지진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동부자바의 샌프란시스코” 정도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재미난 것은 말랑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방언인 보소 왈리칸이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인도네시아어의 단어들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발음하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말랑(Malang)을 응알람(Ngalam)이라고 한다든지, 끄찔(작다; kecil)을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