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5. Northern Wales

posted Jun 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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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5일 목요일


그러고 보니 어린이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 집에 하나 뿐인 어린이를 데리고 웨일즈로 떠났다. 동급생인 대만 친구 후이완Hui-Wan과 태국 친구 차바나르뜨Chavanart양이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오전수업을 끝내고 오후수업은 함께 빠졌다. 우리는 모두 교실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듣는 것보다 웨일즈를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한 공부라고 생각하는 동양인들이었다. 후이완과 차바나르뜨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우리 아들을 두고, 앞 다투어 보모 역할을 자청했다. 국제법 에세이를 쓰느라 이틀 밤을 새다시피 하고 바삐 집을 나서려니, 정신이 없어서 꼭 뭔가를 빠뜨리고 떠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봄이 왔건만 겨우내처럼 우중충하게 비가 내렸다. 여행을 상쾌하게 시작하라는 날씨는 아니었다. 옥스퍼드에서 북북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우리는 슈르즈버리Shrewsbury 좀 못가서 점심을 먹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웨일즈 땅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로 표지판이 영어가 아닌 웨일즈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정지 표지판에는 ‘STOP’ 대신에 ‘ARAF’라고 적혀있었다. 우리 다섯 사람이 난생 처음으로 웨일즈에 발을 들여놓기 불과 반 년 전인 1993년 10월 영국의회는 웨일즈 지역 내에서 웨일즈 어와 영어 공문서가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는 법률Welsh Language Act을 통과시켰었다.


우리가 처음 마주친 웨일즈 도시는 처크Chirk라는 소도시였다. 우리는 이곳에 잠시 들려 중세에 지어진 처크 성Chirk Castle의 앞마당과 수도교水道橋 Aqueduct를 구경했다. 농업용수로야 어느 문명에나 존재했지만, 고대의 최첨단 상수도시설이던 아치형 교량형태의 수도교는 로마인 특유의 미적 취향과 공학적 재능의 증거물이다. 유럽 시골의 구석구석에서 로마식 수도교를 만날 때마다, 마치 “우리가 여기도 정복했었다”고 말하는 고대 로마인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수원지에서 공급지까지 먼 거리를 끊임없이 일정하게 낮아지도록 만들어둔 로마식 물길은 때로는 까마득히 높은 곳을, 때로는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지나간다. 로마문명의 혜택 바깥에 머물던 고대 유럽인들에게, 수도교의 위엄 있는 모습과 그 효율적인 공학적 성취는 절망적인 경외의 대상이었으리라.


첫 목적지인 콘위Conwy에 도착했을 때는 5시경이었는데, 여자들을 너무 많이 데려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세 여자가 의기투합해서 잠자리를 까다롭게 고르는 바람에 여러 곳의 숙소를 전전하느라 금세 7시가 되어버렸다. 그 덕에 훌륭한 B&B를 고를 수는 있었다. 숙소의 이름은 ‘Llewellyn’이었다. 웨일즈에 들어온 뒤로 L자 두개로 시작하는 지명이 자주 보였는데 그 정확한 발음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우리 숙소의 주인장으로부터, 웨일즈 어에서 LL로 시작하는 단어는 “혀를 R 발음할 때처럼 만들어서 H 소리를 내면 되고”, 따라서 이 숙소의 이름은 ‘흘레웰린’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S와 H의 중간쯤 되는 그 기묘한 발음을 내가 여러 차례 따라한 뒤에야 주인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식사 전에 콘위 성벽이나 산책해보지 그러냐”는 그의 권유에 따라, 우리는 어둑어둑한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었다. 바다 위로 툭 튀어나오듯 도전적인 자세로 바다와 접하고 있는 성벽이었다. 콘위성은 에드워드 1세가 13세기에 지어놓은 북웨일즈 5개 주요 성의 하나로, 주변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이 성이 지어진 원래의 목적이 자연경관과의 조화 같은 것이었을 리는 없다. 1287년에 완성된 콘위 성은 양쪽 끝에 망루와 성의 중간에 여덟 개의 육중한 성탑을 갖췄고, 그 북쪽 끝은 바다를 향해 뻗은 다리와 이어져 있었다. 이 성채를 딛고 서니 700년 전에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을 잉글랜드인과 웨일즈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사람들은 자신을 영국인Englishman이라고 부르는 외국인을 만나면 아직도 언짢아 한다. 심지어 브리티쉬British라는 명칭도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긴 오죽하면 월드컵에도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가 각각 다른 팀으로 출전해 왔을까마는.


5월 6일 금요일


친절한 여관주인은 잉글랜드와는 차원이 다른 웨일즈 식 친절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오전에 우리를 몸소 데리고 콘위 시내를 한 바퀴 구경시켜 주었다. 우리는 햇빛 아래서 콘위 성을 다시 구경하며 그 아름다움을 찬탄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주인장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성을 기점으로 시작하여 성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콘위 도심은 아담했고, 그 안에 볼만한 것은 없었다. 우리는 ‘Butterfly Jungle’이라고 이름 붙인 나비농장과,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집The Smallest House 따위의 억지스러운 구경거리를 돌아보았을 뿐이다. 여관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가 전에 겪어보았던 동양인 손님 중에는 일본인이 많았던 걸까. 주인장은 목례를 여러 번 했다.


다음 목적지는 예의 LL로 시작되는 도시 흘란두드노Llandudno. 영국 최고 휴양지중 하나라는 도시였지만 우중충한 날씨 덕분인지 휴양지 분위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우고 이곳의 명소라는 그레이트 옴Great Orme 언덕으로 갔다.  여행 책자에는 단지 바다를 내다보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만 되어 있었는데, 최근 오픈한 폐광 관광코스가 있었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 광산으로서, 청동기시대에도 채광을 한 증거가 최근 발견되어 활발히 고고학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안내를 맡은 가이드는 마을의 고고학자였다. 한사람이 겨우 기어들어갔다가 뒷걸음질로 수백 미터를 다시 기어 나와야 하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갱도 속으로 들어가 본 것은 유별난 체험이었다. 그 갱도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당시에는 5-7세 아동이 작업했으리라 추정된다는 설명이었다. 그 폐쇄공포감 무쌍한 땅 속에서 문명의 기초라는 것에 대해 다소간의 비애를 느꼈다. 인류는 얼마나 긴긴 세월동안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큰 생산 활동에 인생을 소모해왔을까. 그 장구한 세월의 부피가 묵직한 질감으로 가슴에 느껴졌다.


우리는 흘란두드노를 떠나 뱅고어Bangor를 지나쳤고, 멋들어진 메나이 교Menai Bridge 위를 달려 강을 닮은 좁다란 해협을 건넜다. 앵글시 섬Anglsey Island의 초입에 자리 잡은 도시 보머리스Beaumaris에서 묵어가기로 했다. 뜻밖에 빈 방이 별로 없어 어렵사리 숙소를 구했다. 보머리스는 노르만 왕족이었던 에드워드1세가 이곳을 아름다운 마을Beaux Mairies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는 설명이 팜플렛에 적혀있었다. 어째서 belles mairies 가 아닌지 궁금했지만, 붙들고 그런 걸 물어볼 상대는 없었다. 마을 전체가 쥐죽은 듯 썰렁하고 비도 뿌려대는 날씨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여관방이 어찌나 추운지 간곡히 부탁해서 주인한테서 히터를 빌렸는데, 워낙 작아서 큰 도움은 못되었다. 아내가 아들에게 젖병을 물리고 있는 동안, 옥스퍼드에서 산 수첩 크기의 스케치북을 꺼내 첫 페이지에 창밖으로 보이는 해안풍경을 그려보았다. 해가 빠른 속도로 지고 있어서 그리면 그릴수록 시커먼 그림이 되어갔다.


5월 7일 토요일


오전에 아담한 성을 구경한 후 보머리스를 벗어났다. 다시 메나이 해협을 반대방향으로 건너기 직전에 흘란베어Llanfair P.G.라는 도시를 통과했다. 이 도시의 본명은 "흘란베어푸흘그윈기흘고게로흐워른드로부흘란티실리오고고고흐Llanfairpwllgwyngyllgogerychwyrndrobwllllantysiliogogogoch"이며, 짐작하다시피 세계에서 가장 긴 지명에 해당한다. 이런 도시에 와봤다는 것 자체는 이야깃거리가 되겠지만, 지나치면서 살펴본 “흘란베어 어쩌구”의 시내풍경은 특별하달 게 없었다.


해협을 건너 남서쪽으로 내려가 캐너번Caernarfon에 도착했다. 캐너번에는 이제껏 본 북웨일즈의 성들 중 규모가 가장 큰 성이 있었다. 에드워드1세가 웨일즈와의 전쟁 중에 여기서 태어난 아들을 ‘Prince of Wales’라고 부른 이후, 그것은 대대로 영국 왕실에서 왕세자를 부르는 공식명칭이 되었다. 1969년, 찰스도 이 성에 와서 ‘Prince of Wales’ 대관식을 가졌다. 생각할수록 묘한 전통이었다. 만약에 통일신라왕국에서 왕세자를 ‘백제왕자’로 명명했었다면 어땠을까, 싱거운 궁금증이 잠시 일었다.


캐너번 성은 13세기 후반에 에드워드 1세가 북웨일즈에 지은 여러 성들 중 가장 크고 튼튼하다. 이 성은 잠깐만 보더라도 워릭 성처럼 통치의 장소가 아니라 최전방의 기지로 지어졌음이 자명해 보였다. 1274년에 아버지인 헨리 3세 때부터 계속되던 국내의 복잡한 정쟁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1세는 키가 무척 컸던지, 별명이 꺽다리Longshanks였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스코트랜드인의 망치Hammer of the Scots’였는데, 영화 <Braveheart>에서 멜 깁슨Mel Gibson이 연기했던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를 척살한 것도 그였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 인이나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철천지 원수일지 몰라도,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행정을 개혁하고 세제와 법제를 정비하는 한편 국가안보를 강화한 유능한 국왕이었다. 그는 1276년부터 1283년까지 두 차례의 원정을 통해 웨일즈를 영국에 완전히 복속시켰는데, 그 당시 전쟁은 물론 향후 웨일즈 통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 바로 캐너번 성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도 시작했지만, 북벌 원정의 끝은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캐너번 성을 구경한 뒤, 우리는 동네 퍼브Pub에서 점심을 먹었다. 온통 웨일즈어로 떠들어대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시끄럽다기보다는, 독특한 음악을 지닌 낯선 언어에 귀가 즐거웠다. 한 사흘 운전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피곤했다.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흘란버리스Llanberis에서 하루 더 묵으려던 계획을 변경해서 귀로에 접어들었다. 돌아오는 길, 흘란베리스 근처의 황량한 호수와, 웨일즈에서 가장 높다는 스노던Snowdon산의 돌투성이 풍경, 베투써코이드Bewts-y-coed의 아름다운 시냇물과 우거진 수풀이 인상적이었다. 여정을 일찍 접은 대신 옥스퍼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워릭Warwick까지 가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그러나 워릭에 도착하고 보니 마침 토요일이어서 여관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다행히 어느 여관의 친절한 주인 아주머니가 적극적으로 연락해 주신 덕분으로 파크 하우스Park House라는 B&B에 방을 잡고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5월 8일 일요일


날씨가 제풀에 바뀐 걸까, 아니면 웨일즈를 벗어나서일까? 워릭 에서 우리를 맞은 날씨는 화창하고 포근했다. 웨일즈의 투박한 전쟁용 성곽들에 비하면 워릭 성은 동화 속의 성처럼 아름다웠다. 좋은 날씨 속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붐비고 있어서 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워릭 성은 1068년 정복자 윌리엄에 의해 처음 지어진 후 14, 16, 19세기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져 말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처럼 따사로운 햇볕을 쏘이며 성의 구석구석을 구경한 후 뒤뜰에서 팔고 있던 바베큐로 점심식사를 했다. 늦었지만, 어김없이 봄은 다시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