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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1. Bath, Salisbury, Southampton

posted Jun 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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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1월, 영국에 도착한지 달포쯤 지나니 자동차가 필요했다. 함께 연수를 나온 윤성덕 학형과 공동으로 7년 된 중고차를 샀다. 지역 신문을 통해 중고차를 물색하고 명의이전이라는 낯선 행정절차를 거쳐 개중 나아보이는 차를 내 것으로 만들기는 했다. 면허를 따는 험난한 과정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좀 더 쓰겠다.


자동차도 생긴 마당에 시운전을 하지 않을 손가. 11월 5일, 우리 내외와 윤형, 이렇게 셋은 2박3일 일정으로 집을 나섰다. 지도책을 들여다보며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우리는 해 질 무렵 바스Bath 시내에 들어가 퍼트니 호텔Pulteney Hotel이라는 곳에 방을 두 개 얻었다.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불과 열여덟 개의 객실과 영국 특유의 오밀조밀한 정원을 갖추고 있는 조지언Georgeian 양식의 주택이었다. 호텔의 주인인 로이드Lloyd씨가 우리를 객실로 안내하면서 내일 아침식사 시간을 알려주었다. 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1605년 11월 5일 국왕 제임스James 1세의 종교 정책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교도들이 의사당 폭파를 시도했다. 이 사건은 미수로 끝나고 행동대장인 가이 폭스Guy Fawkes는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388년이 흐른 뒤에도 이 날은 ‘가이 폭스의 날’로 불리면서 불꽃놀이로 기념되고 있었다. 영국인들에게 400년이면 그렇게 아득한 옛날이 아니다.


이 날이 되면 아침부터 어린이들은 못생긴 가이 폭스 헝겊인형을 옆에 앉혀두고 ‘가이에게 한 푼을Penny for Guy’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불꽃놀이 비용을 구걸한다. 이 인형들은 밤이 되면 불꽃놀이와 함께 태워진다. 재미난 점은, 당초 가이 폭스의 범행이 실패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생겨났던 불꽃놀이지만 이제는 그것을 기념하는 사람의 종교나 정치적 신념에 따라서 가이 폭스를 영웅시하고 기리는 불온한 행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느닷없는 불꽃놀이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우리가 이날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영어실력이 모자란 탓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만났던 바스의 주민은 구교도였거나 정부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왜 불꽃놀이를 하나요?”라고 묻는 우리에게 그는 400년 전 폭발음모의 실패를 못내 아쉬워하는 어조로 행사의 취지를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듣자 하니 불꽃으로 과연 무엇을 기념하자는 건지 수상쩍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로마 목욕탕 박물관Roman Bath Museum으로 갔다. 바스라는 이 도시의 이름은 잉글랜드 남부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이곳에 지어놓은 공중목욕탕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는 하드리아누스의 방벽Hadrian's Wall이남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일대를 대략 200년간 지배했다. 이 춥고 습기 많은 영국 땅에 주둔하던 로마 군단병들에게 바스의 목욕탕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고마운 시설이었을 것이다. 박물관의 야외욕조에는 지금도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노천탕이 있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학부시절 영문학을 전공한 윤형이 영문학 작품에서 바스 출신 여성은 품행이 단정치 못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주었다. 부당한 편견이 조장한 정형화에 해당하겠지만, 몸을 씻는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관능적인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고장에서 유명하다는 식당 샐리 런즈Sally Lunn's에 가서 간식 삼아 빵을 먹었다. 효모로 부풀린 샐리 런 빵Sally Lunn's Bun은 가로로 잘라서 버터나 크림을 발라 먹는 빵이었다. 빵에서 레몬 향기 같은 것이 살짝 풍겼다. 17세기에 영국으로 이주한 프랑스 위그노들이 만들기 시작했다는데, ‘샐리 런’이라는 이름은 ‘해와 달soleil lune’을 의미하는 불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했다.


바스 공회당The Bath Assembly Rooms도 구경했다. 18세기 조지언 양식의 공회당은 선남선녀가 결혼상대를 만나는 장소의 역할도 했었다고 한다. 긴 드레스와 깃털 부채를 든 여성들과 목이 높이 올라오는 셔츠와 재킷으로 멋을 낸 남자들이 이 방 안에서 뽐내는 자세로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차를 타고 바스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니 수십 채의 3층 집들을 초승달 모양으로 연결해 지은 로열 크레슨트The Royal Crescent가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집들이 태양을 상징하는 둥그런 잔디밭 너머로 기다랗게 호를 그리며 늘어서 있었다. 해와 달 모양의 빵을 먹고, 해와 달을 상징하는 건물을 구경한 것이었다.


겨울철 영국의 해는 짧다. 점심시간 무렵에 서둘러 솔즈버리Salisbury를 향해 출발했다. 바스에서 솔즈버리로 가는 도로변에는 유명한 선사시대 유적인 스톤헨지Stone Henge가 있었다. 갈 길이 멀어도 여길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관광객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벌판 위로 둥글게 모여 선 바위들 주변은 적막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묘한 풍경이었다. 바위 뒤편에서 금세 망토를 덮어쓴 드루이드 사제 몇 명이 걸어 나와 인신공양 제사라도 시작할 것만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신석기 시대에 고인돌처럼 시신을 매장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더 왕 시절 마법사 멀린이 전장에서 죽은 용사들을 매장하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바위를 둥글게 세웠다는 전설도 전해 온다. 어찌 되었건 이곳은 죽은 자들의 영토인 셈이다. 세 명의 한국인이 거기 멋쩍게 서서, 어쩐지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솔즈버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너무 늦어서 대성당 안을 구경할 수는 없었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우리는 겉으로만 한 바퀴 돌며 구경했다. 하늘을 뾰족하게 찌르는 첨탑은 장엄했지만,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하는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그 후로 다시 가본 적이 없으므로, 솔즈버리 대성당은 어둠 속에 우뚝 선 실루엣으로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솔즈버리를 떠나 늦은 밤 사우드햄튼Southampton에 도착했고, B&B에서 다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아침, 사우드햄튼 미술관Art Gallery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서야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짜증이 낫다기보다는, 주말과 평일을 헛갈려 하는 학생 신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바닷가Waterfront로 가니, 처음으로 만나보는 대서양의 차가운 파도가 거기 있었다. 바닷가에 즐비한 상점 중 한 곳에 들어가, 배스 낚시의 달인인 서울의 동생에게 보내줄 모자를 하나 샀다. 챙 달린 모자 꼭대기에 헝겊으로 만든 큼직한 배스 인형 한 마리가 넉살 좋게 올라타고 있는 모자였다. 우리 셋은 각자 다른 생선을 골라 점심식사를 했다. 내가 먹은 것은 혀넙치 구이였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겉보기엔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낡은 자동차지만, 일단 시운전은 성공. 스스로 대견한 것은 지도를 보면서 낯선 고속도로를 휘젓고 다녔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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