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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한 아들에게

posted Apr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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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한 아들에게,

먼 나라에서 일하느라 배웅도 못했다만, 네가 입소하던 날 엄마와 아빠는 너의 첫 훈련소 식사시간, 취침점호 시간, 기상시간을 헤아리며 잠을 설쳤다. 네 엄마는 옛날 아빠를 논산에 배웅할 땐 별로 눈물도 없더니 못 따라간 게 서운한지 내내 혼자 훌쩍인다. 너는 우리에겐 요람 위에 꼬물대던 아기고, 서툰 걸음마로 넘어지던 꼬마고, 새로운 학교에서 낯설어하던 어린애이기 때문에 아무리 커도 걱정이 많구나.     

많이 힘들지? 시간이 그토록 느리게 흐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겠지. 하지만 군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게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낭비가 된단다. 거기서 익히는 규율과 자제를 남이 시키는 쓸데없는 짓으로만 여기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군 생활은 평생 유용한 경험이 될 수도 있어. 훈련과정이 힘든 이유는 제멋대로 살던 젊은이들을 전장에서 서로 생명을 의지할 수 있는 동료로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이야. 힘든 과정이 남아 있겠지만 첫 주를 잘 넘겼으면 반은 끝난 셈이다. 서툰 동기 훈련병이 전장에서 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전우로 보일 때 훈련소 과정은 어느새 끝나 있을 거야.

군대에 복무하는 동안 밖에 나가면 뭘 먹을지 같은 거 보다는 장차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찬찬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아빠는 너의 정치적 신념이 어느 쪽이건 상관 않는다만 모쪼록 남을 할퀴는 시니컬한 사람이 되지 말고 남을 감싸는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기를 빈다. 아이러니를 사랑하고 패러디를 경멸하거라. 재기발랄함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세한 관계의 결을 알아채는 능력을 기르거라. 손해를 끼치지 말고 차라리 손해를 보는 쪽에 서거라. 솔직하기보다는 정직한 사람이 되거라.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의 조각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니라고 믿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의 전모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거란다. 편집된 진실은 거의 언제나 거짓이기 때문이야. 다투어야 할 때도 있지. 다툼은 낮은 목소리와 점잖은 어휘, 확고한 논리로 하려무나.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하는 거란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우물을 파듯이 물이 나올 때까지 파거라. 한 우물을 파도 좋고 여러 개를 파도 좋다. 그러나 넓게 파거나 빨리 파는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라 파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만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단다. 이렇게 살다 보면, 미안하지만 스트레스는 제법 많이 생기는 법이다. 그걸 훅 불어 사그러뜨릴 도량과 담대함을 기르거라. 세상에는 네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나 상황보다 더 무겁고 중요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단다.

나라를 위해 총을 드는 일은 영예로운 일이니, 네가 군복과 함께 긍지도 입으면 좋겠다. 철없는 학생들이 데이트 하면서 팥빙수 사먹고 다닐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초병을 서는 덕분이라는 사실을, 네가 직접 군인이 되어보지 않았다면 모를뻔 했지 않았겠니. 부모 형제가 너를 믿고 단잠을 이룬단다. 내 피와 살인 내 아들. 사랑한다. 비록 우리는 거기 함께 있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너와 함께 계셔. 힘 내라.

2016년 10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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