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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 Egypt

posted Jun 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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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29일, 목요일


이집트를 구경하는 일은 타임머신을 타는 일과 흡사하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먼 과거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그들의 꿈과 야망을, 그들의 실패와 좌절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에도 고대의 유적은 많다. 그러나 로마는 좀 다르다. 오늘날의 이탈리아가 가진 힘과 권위는 로마제국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탈리아는 선진국이다.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일곱 나라가 모여서 G7이라는 클럽을 만들었을 때 이탈리아도 그 중 하나였다. 옛 영광에 비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 로마의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대부분 부자들이다. 반면에, 이집트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고 한다. 첫째, 그토록 오래 전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유적을 만들었을까. 둘째, 그런데 그 후손들은 지금 왜들 이렇게 사나. 오늘날의 이집트는 산유국이지만 최대의 외화수입원은 관광수입, 이집트인 근로자들의 해외송금, 수에즈 운하 운영수익 순서다. 이집트의 일인당 GDP가 2천불을 겨우 넘은 것은 2008년이 지나서였다. 카이로 시내에는 아직도 우마차들이 많이 다니고, 빈민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집트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이집트의 어제와 오늘은 더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오만에서 생활한지도 어느 덧 1년 가까이 되어 가던 2001년 11월. 우리는 이듬해의 여름휴가를 당겨 쓰기로 했다. 이집트를 여행하고 싶었는데, 이집트를 7-8월 더위 속에서 여행하느라 낭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불과 몇 달 전까지 살다가 떠나온 뉴욕에서 전대미문의 9/11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2달 정도가 지난 무렵이었다. 당시 이집트에는, 지금은 시애틀 총영사이신 송영완 선배께서 참사관으로 근무 중이셨는데, 여행에 유익한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셨다. 여행기를 정리하다 보니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폐를 끼친 선배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느낌이다.


11월 29일, 오후 12시 반에 우리 식구를 싣고 머스캇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오후 4시 50분에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카이로 시내에 미리 예약해 두었던 소피텔 마디 호텔Sofitel Maadi Hotel에 여장을 풀고 시내를 산책했다. 중동에 살면서 중동의 다른 나라로 여행을 온 것이지만, 카이로 시내는 우리가 살고 있던 머스캇과는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한적한 수도들 중 하나인 머스캇과는 달리, 카이로는 어느 모퉁이를 돌건 사람들로 넘쳐났다. 아랍어로 ‘승리자’를 의미하는 알카히라القاهرة‎라는 이름의 이 도시에는 평방킬로미터당 1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살고 있어서, 수도권metropolitan area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 어딜 가나 북적였고, 부대꼈으며,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촌에서 막 상경한 사람들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씩 동네 곳곳의 모스크마다 스피커로 구성진 기도(쌀라Salat, صلاة‎) 소리를 들려준다. 오만에서 한적한 하늘 위로 울려 퍼지던 독경 소리와는 달리, 카이로에서는 쌀라를 방송하는 스피커의 음량도 우렁차고 박력 있었다. 고즈넉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쌀라의 사색적인 가락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이런 소리도 과연 신심을 고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어려울 만큼 자동차와 마차, 사람이 어지럽게 섞여있었다. 네거리의 신호등들은 만인의 무시를 받으며, 폴 틸리히처럼 ‘존재에의 용기’를 힘겹게 길어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복잡한 도로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자동차의 행렬이 있었는데, 깜짝 놀라 쳐다보는 우리에게 주변 사람들이 ‘무바라크’ 대통령이 지나간다고 했다. ‘축복받은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무바라크مبارك 대통령은 1981년부터 줄곧 이집트를 다스리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20년째 대통령직을 수행 중이었고,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흐른 뒤인 2011년, 그는 이 왁자지껄한 카이로의 민중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내 아랍어 실력은 그저 간단한 대화라도 알아들으면 다행인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집트식 아랍어 억양이 머스캇과는 다르다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아랍어는 인종과 국적이 다른 수억의 사람들의 소통을 이어주고 있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개성이 뚜렷한 사투리들이 존재한다. 아랍어에서 모음을 표기하는 문자는 세 개 뿐이어서(아ا, 이, 우و), 대게는 지역별로 모음의 발음차이에서 오는 방언들이 많다. (모음의 변형에 대한 ‘관용도’가 크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자음의 변화는 별로 없느냐? 꼭 그런 건 아니다. 아랍어의 자음 중에는 혀가 구강vocal cavity 아래쪽으로 착 깔리는 ‘무거운 디귿’, ‘무거운 티읕’, ‘무거운 th’ 등에 해당하는 특이한 소리가 있다. ذ ,ص ,ظ  ,ض 등은 그 발음이 하도 미묘해서 아랍어 자체가 “Language of Ḍādض”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랍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식별하기는 어려운 차이다. 일례로, SAS(사스)와 sauce(소스)를 영어로 읽어 주고 서양 사람들에게 그 두 단어의 발음상의 차이를 물어보면 당연히 ‘모음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아랍어에서 이 두 단어의 모음은 모두 알레프Alef로 표시되기 때문에, 아랍 사람들은 ‘당연히 자음이 다르다’고 반응한다. Sauce를 읽을 때 발음되는 그 무거운 S가 앞에서 예기한 ص 에 해당하는 음가다. 나의 절친한 레바논인 친구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이 특정 자음의 발음을 들으면 상대방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 금방 알아맞힐 수 있다고 한다.


이집트 말에는 외국인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자음상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아랍어의 ‘G’에 해당하는 ج는 여타 모든 아랍지역에서는 ‘ㅈ’ 소리로 발음하는데, 유독 이집트에서는 이 글자를 ‘ㄱ’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대단히 고맙습니다”는 아랍어로 “슈크란 제질란شكرا جزيلا”이라고 하는데, 만약 당신이 이 말을 “슈크란 게질란”이라고 발음하는 아랍인을 만났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집트인이라는 뜻이다. 만약 서양인들이 이집트가 아닌 다른 나라를 통해서 아랍 문화를 먼저 접했다면, 모르긴 해도 낙타جمال의 영어표기는 camel이 아니라 jamel, 또는 jamal이 되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서툰 내 귀에도 카이로 저자 거리의 왁자지껄한 아랍어 소리가 오만에서와는 사뭇 다르게 들렸던 것이다.


저녁에는 업무를 마친 송 선배께서 우리 식구를 한식당으로 데려가 저녁을 사주셨고, 카이로에서의 이런 저런 경험담과 초행길에 주의해야 할 사항을 자상히 일러주셨다.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되, 현지 음식은 조심하는 편이 좋고, 홀로 으슥한 곳은 다니지 말라는 말씀.


11월 30일, 금요일


우리가 예약한 패키지여행은 첫날 카이로 박물관과 기자를 구경한 다음, 룩소르Luxor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나일 강 크루즈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관광수입이 최대의 외화수입원인 나라 치고 카이로 시내에 관광객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호텔에서 여행사 직원을 만나 비용을 지불하면서 비로소 그 까닭을 들었다. 두 달 반 전에 뉴욕에서 터진 9/11 사건 때문에 중동 전역으로 오는 서양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희한한 시기에 여행을 왔다는 점이었다. 호텔에서 접선한 한국인 가이드는 카이로에 살고 계신 주부였는데, 설명하고 안내하는 자세에서 베테랑다운 풍모가 풍겼다. 그분의 뒤를 졸졸 따라 카이로 시내를 구경했다.


1902년에 개관했다는 카이로 박물관을 구경했다. 이곳을 채우고 있는 12만여 점 유물의 연혁은 수천 년의 세월을 아우르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지만, 박물관 시설은 그 내용물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유럽인들이 강탈해 모아둔 유적의 규모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났다. 우리나라도 유적을 도둑맞은 피해자이므로, 그때 나는 거기서 분노와 역겨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카이로 박물관의 허술한 시설을 구경하고 나서는 좀 복잡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이 없었다면 과연 지구상에 현존하는 유물의 몇 퍼센트 정도가 보존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삶이 각박한 나라에 남겨진 문화유적은 요행히 전쟁과 동란으로부터 살아남았더라도 상당수는 부유한 개인들의 소장고로 들어가거나 투기와 밀거래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 같은 사람이 구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병인양요때 프랑스로 건너간 우리 유물들로 생각이 번진다. 루브르가 보관하고 있던 외규장각 도서는 여러 사람들이 오래 애쓴 결과 145년이 지난 2011년이 되어서야 영구임대의 형식으로 우리 땅에 돌아왔다. 1993년 9월,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약탈 고문서 가운데 하나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 상책 1권을 우리에게 반납한 적이 있다. 그 고문서의 보존상태는 놀라운 것이었다. 막상 우리나라 안에서 그렇게 잘 보존된 고문서를 구경한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입맛을 쓰게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프랑스는 우리나라에서 고속전철사업을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고문서 반납에 가장 극렬히 반대하던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관계자들이었다.


당시 나는 행사를 준비하던 의전담당 직원이었는데, 미테랑 대통령의 숙소이던 롯데호텔의 상황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프랑스 외무성 관계자들이 ‘호텔 내에 회의할 수 있는 작은 방을 하나 급히 마련해 주면 좋겠다’는 프랑스 외무성 관계자들의 부탁을 받고 호텔측에 부탁해서 그들을 빈 방으로 안내했다.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이 그 방에 들어갔는데, 한 시간 남짓 흐른 후 방에서 나오던 여자 두 명은 어깨를 들썩이며 펑펑 울고 있었다. 누가 보면 호텔방에서 남자들로부터 모진 꼴이라도 당한 형국이었는데, 알고 보니 울고 있던 여자들은 루브르 박물관 직원이었다. 아마도 가져왔던 고문서를 한국측에 반납하기로 사전에 의논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대통령이 내린 결정이었던 모양이었다. 대통령의 지시에 박물관 직원이 반발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던 시절. 끝까지 저항하다가 책을 ‘빼앗기고’ 엉엉 울던 루브르 직원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유적이 있으면 뭐하나.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저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문화유산은 보존될 수도 없었을 터이다.


약탈 문화재 반환의 당위성에 토를 달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이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스스로를 속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디에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우기기 시작한다면, 거기서부터 ‘내가 못 가질 바에야 차라리 부수고 태우는 편이 낫다’는 ‘반달족의 후예(vandalist)’로 전락하는 지점까지는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아이의 친엄마를 가린 솔로몬의 재판은 그래서 위대했다!) 한국 내에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도 더러 있는 것으로 안다. 물론 우리는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아 온 적이 없으므로 그것이 흘러들어온 경위는 우리가 빼앗긴 문화재들과는 전혀 다르다. 어쨌든지, 남의 문화유산도 제 것처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도 이제는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제발 그랬으면.


이야기가 빗나갔다. 카이로 박물관에서 단체관광객 안내를 맡았던 이집트인 가이드는 신실한 이슬람 신자인 모양이었다. 꾸란에 기록된 모세의 출애굽 사건은 개괄적으로 보면 기독교 경전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막상 이집트에 와서 파라오의 후예가 모세의 경고를 무시한 파라오를 비난하는 어조로 출애굽 사건을 정열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 가이드는 이집트인이기 이전에 무슬림일 수 있고, 그의 정체성은 그의 선택에 속하는 문제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선조가 물려준 문화유산을 안내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잘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억울한 사람은 죽은 파라오뿐일 것이므로, 나는 빠지기로 했다. 원래 중동은 복잡한 땅이다.


오후에는 기자Giza를 찾아갔다. 모래 지평선 위로 크기가 서로 달라 야릇한 원근감을 주는 세 개의 피라미드Pyramid가 나타났다. 무덤을 저렇게 지었던 사람들은 생전에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살았을까? 너무 커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구조물들. 피라미드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을 현실속의 비현실적 공간에 놓는다. 그래서 이곳은 무덤이기에 앞서 신전이다. 5천 년 전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표면이 매끈매끈하고 꼭대기가 금장식으로 빛나고 있었다는 피라미드는 지구의 표면에 사람의 손으로 남겨진 가장 인상적인 기념물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도 충분히 그러하므로.


기원전 2600년경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였던 쿠푸Khufu 왕은 선대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발전시켜 높이가 146m에 달하는 대 피라미드를 기자에 지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대 피라미드 건설에는 20년이 걸렸다는데,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지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어서 이른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 식구들은 바야흐로 피라미드 속을 기어 들어가 본 무수한 사람들의 반열에 끼었다. 나보다 먼저 이집트를 여행했던 친구 장원재 박사는 이집트가 “세월의 절대성과 주관성을 다시 돌아보게 해 준 곳”이라고 말했다. 피라미드의 속에서 돌계단을 오르며 내게 떠오른 생각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는 당최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곳을 방문한 모든 사람처럼, 우리는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낙타 등에 올라 사진을 찍었고, 닳고 닳은 상인이 터무니없이 부르는 낙타의 모델료를 치렀다.


12월 1일, 토요일


선잠을 깬 아이들을 달래서 공항으로 갔다.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걸려 룩소르에 도착했다. 박진감 넘치는 눈빛을 가진 이집트 남성 가이드 알리 씨를 소개받았고, 그를 따라 여행사의 승합차로 옮겨 타고 나일강변으로 갔다. 뱃머리에 라다미스 1호Radamis I Movenpick라고 이름이 새겨진 뫼벤픽 사의 유람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배에 몸을 싣고서야 9/11 테러사건의 여파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라다미스 1호는 선원이 82명에 달하는 호화 유람선이었는데, 12월은 나일 강 크루즈의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우리 네 식구 뿐이었다. 어쩐지 예약이 쉽더라니. 설마 이대로 출발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캐나다인 중년 부부 한 쌍이 더 탑승했다. 우리 여섯 명이 승객의 전부였다.


좀 을씨년스러운 감은 없지 않았으되, 그 덕분에 우리는 아이들더러 굳이 얌전히 지내라고 구박을 하지 않아도 좋았고, 아이들은 드넓은 배 안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뛰놀아서 좋았다. 함께 여행한 캐나다인 내외와는 내내 붙어 다니다 보니 친해졌고, 특히 부인인 엘비라Elvira여사는 말수도 많고 우리 아이들을 귀여워 해주어 다행이었다. 함께 유람선의 식당에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들은 얘기에 따르면 이들의 아들은 할리우드에서 배우 수업 중이라고 했다. 승선 첫 날의 압권은 저녁의 선상만찬이었는데, 그 수많은 선원들이 달랑 우리 두 식구를 에워싸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 환영파티의 뻘쭘함이란 견디기가 어려웠다. 선장에서부터 요리사까지 전원이 나와서 손뼉을 치면서 손님들을 환영하는 것이어서, 숫기가 없는 우리 두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 녀석에게 좀 교육이 될까 싶어서 나는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도 추었는데, 그럴수록 아이들은 더 민망해 하는 것이었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고왕국 때의 유적인 반면, 룩소르에서는 수백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 신왕국의 유적이 모여 있는 왕들의 계곡을 돌아보았다. 도굴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가 아닌 터널 형식의 분묘로 변화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도굴을 면한 묘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유난히 검소하게 무덤을 만들었다는 투탕카멘의 묘 정도가 거의 유일한 예외라고 한다. 값진 물건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이승에 어디 있으랴.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Karnak Temple을 구경하면서 느낀 충격은 글로 표현하려니 부질없이 느껴진다. 앞서 소개한 내 친구 장 박사는 카르낙 신전을 가리켜 “존재론적 충격을 안겨준 건물”이라고 말했다. 유럽인들은 여기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뽑아서 자랑스레 자기네 광장에 세워두었다. 그 흔적을 도둑질해 가는 것만으로도 뭔가 위대한 짓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줄 만큼, 이 신전은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현대에도 독재자들이 만드는 건축물일수록 크고 웅장하다. 그 속이 빤히 보이는 수법이기 때문에 나는 단지 건축물의 크기에 감탄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생각해 왔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크기라는 것도 정도문제다, 라는 것이 카르낙 신전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용도가 뭐든 간에 인공적으로 이런 규모의 물건을 만들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는 사람에게라면, 그 누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인가. 하늘의 소실점을 향해 뻗어 있던 거대한 돌기둥의 숲 속을 거닐면서 람세스 2세가 꾸었을 꿈을 가늠해 보았다. 프랑스 소설가 크리스티앙 자크Christian Jacq가 쓴 5부작 소설 <람세스>가 절로 떠올랐다. 그 책은 너무 호들갑스러운 신비주의에 젖어 있었다고 기억되는데, 람세스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면서 달리 묘사할 방법도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룩소르 신전도 대단했다. 이곳의 정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두 쌍 중 한개만 남은 오벨리스크였다. 나머지 하나가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보았던 오벨리스크다. 유람선으로 되돌아온 우리는 앞서 말한 겸연쩍은 환영을 받으며 저녁을 먹었고, 4인용 선실에서 잠을 청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묘한 세계관과 그들의 삶과 죽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들의 꿈이 점점 더 또렷한 모양새를 갖추고 잠자리를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12월 2일, 일요일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가 보니 우리가 잠든 사이에 배는 수 km를 이동한 모양인지 어느새 나일 서안의 가박지假泊地에 매어져 있었고, 식사 도중에 다음 목적지인 에드후Edfu를 향해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 아이들을 데리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아직도 하류인 나일 강의 강폭은 양쪽 강변이 자세히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고, 배는 그 한가운데를 항해하고 있었다. 빈민들이 살고 있음이 틀림없을 허름한 집들이 강변에 바짝 다가선 채 줄지어 있었고, 강변에서 몸을 씻는 사람들도 보였다. “얘들아, 아빠가 배에서 뛰어내려 강에서 헤엄 좀 쳐볼까?” 허풍을 떨었더니 두 녀석 다 기겁을 했다. “안돼요. 악어가 많대요.” 넘실대는 나일 강은 악어들에게 맡기고, 그 대신 갑판 위의 수영장은 우리 식구의 독차지였다. 아무리 중동이지만 12월이다 보니 서늘했다. 그러나 언제 또 타볼 지도 모르는 유람선 위에서 수영 한번 해 보지 않을 소냐. 우리 세 남자는 오들오들 떨면서 수영도 했고, 수건을 하나씩 걸치고 선상에 길게 누워 일광욕도 했다.


볕이 잘 드는 배의 식당 좌현쪽 창가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은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식사하는 것을 늘 재미있어 하는데, 유람선에서 식사를 하면서는 나와 아내까지 어린애처럼 들떴다. 물결에 반사된 햇살이 우리 얼굴 위로 어른어른 비쳐들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선실에서 낮잠을 청했다. 수도의 도심을 흐르는 강들의 인상이 저마다 다르면서도 어딘가 비슷한 표정들을 하고 있는 데 비해, 나일 강은 내가 보았던 다른 어느 강과도 달랐다. 하기야, 나일 강을 어찌 “도심을 끼고 있는 강”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랴. 악어가 사는 강. 가뭄과 범람을 거듭하면서 독특한 문명 하나를 온전히 길러낸 강. 거대한 대륙의 절반을 종단하며 여섯 나라를 거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 그 위에 떠서 우리는 다시 저녁을 먹었고, 배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에드후에 정박했다.


12월 3일, 월요일

 

에드후에서 하선하여 이곳에 있는 호루스Horus 신전을 구경했다. 신전을 걸으며 문득 깨달았는데, 사람의 적응력은 참 간사하다. 물 위에 단 이틀 떠 있었을 뿐인데 벌써 뭍을 밟는 무릎의 느낌이 어색했다.


호루스는 매의 머리를 한 신으로, 태양신 오시리스와 풍요의 여신 이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시리스는 동생인 세트에게 살해당하고, 호루스는 마치 햄릿처럼, 또는 <라이언 킹>의 심바처럼 아버지를 살해한 자기 숙부와 길고도 처절한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혹자는 호루스와 세트의 전쟁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사이에 벌어졌던 정치적 투쟁의 은유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혹자는 호루스의 신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여 기독교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 신화로부터 일정 부분을 표절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드후에 지어진 호루스 신전은 이집트의 모든 고대 신전들 중 가장 잘 보존된 건물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날렵한 매의 모양을 한 커다란 석상이 신전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벌판 위에 세워진 거대한 벽면과 정문이 마치 낯선 행성 위에 건설된 이상한 도시의 입구처럼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느 때면 관광객으로 붐볐을 에드후도 9/11의 여파로 한산했다. 아니, 한산했다는 건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 관광객은 별로 없었지만 호젓한 맛이라고는 전혀 누릴 수 없었다. 룩소르에서도 그랬지만, 주요 관광지마다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들처럼 수많은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몇 되지도 않는 관광객들이 나타나면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기 때문이었다. 알라바스터석으로 만든 각종 미니어처, 혹은 파피루스, 목제 기념품, 기타 짝퉁이거나 짝퉁스러운 온갖 물건들로 중무장한 상인들은 모처럼 나타난 손님을 결코 놓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로 관광객들을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거절을 매몰차게 못하는 우리 내외는 가는 곳마다 곤혹을 당하는 형국이었다. 이들 상인들의 집요함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그만큼 이들은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나는 유적을 건설한 고대의 이집트인이 아닌,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이집트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은 수가 많았고, 하나같이 절박해 보였다. 이런 군중이란, 자국민 인구가 작고 외환수입의 대부분을 석유, 가스 수출에 의존하는 오만 같은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알카에다는 뉴욕에서 마천루를 파괴함으로써 동족에게 뜻하지 않은 불경기를 강요한 셈이었다. 카이로의 인구는 1천 6백만 명이 넘는다. 모든 사람이 가난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절박함이 언제 어떤 방향으로 분출될지를 예측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1년, 카이로의 민중은 시민혁명을 통해 무바라크 정부를 몰아냈다. 하지만 이들의 장래를 예측하기 어렵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에드후를 출발한 우리 배는 다음 경유지인 콤옴보Kom Ombo에 도착했다. 기원전 2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콤옴보의 신전은 매의 머리를 가진 호루스 신과 악어의 머리를 가진 세베크 신을 함께 섬기는 신전이었다. 저물어가는 태양의 붉은 빛이 신전의 기둥을 물들이고 있었다. 꽤 상류로 거슬러 왔는데도 나일 강 폭은 좁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에 우리 배는 드디어 배로 여행할 수 있는 종착점인 아스완Aswan 댐 근처에 정박했다. 아스완 댐은 많은 양의 물을 가두고 있어서, 그곳에서 바라본 야경은 마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12월 4일, 화요일


나일 강에 떠 있는 자그마한 섬 아길리카Agilika에 상륙해서 필라에Philae 신전을 구경했다. 아길리카 섬에 있는데 이름이 왜 필라에 신전이냐면, 아스완 댐이 지어지면서 원래 신전이 있던 필레섬이 수몰되는 바람에 신전을 150m 정도 떨어진 아길리카 섬 위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전을 통째로 옮겼다니 유네스코UNESCO도 만만치는 않다. 이 신전이 여신 이시스에게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유난스레 물 위에 지어져 있다는 특징과 참 잘 어울렸다. 작지만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신전이었다.


우리는 이집트를 나일 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아스완 댐 위를 거닐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았다. 카르낙 신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 댐도 이집트인이 이룩한 위대한 인간의 역사였다. 강변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큰 돌을 쪼개어 오벨리스크를 만들었다고 한다. 만들다가 실패한 오벨리스크 덩어리가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고대에는 바위틈을 쪼은 후 나무 쐐기를 박고 그 나무에 물을 먹여 팽창시킴으로써 큰 일직선 돌탑을 갈라냈다고 한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권력과 승리를 상징하는 저 돌탑의 고향은 이렇게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만든 거대한 돌탑을 하류로 운반하느라 수많은 인부와 배를 동원해서 부산을 떨었을 옛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불현듯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 것을.


며칠 새 정이 들었던 유람선 라다미스 1호와는 작별을 고했다. 배에서 하선한 우리 식구는 아스완 시내의 뉴 캐트락트 아스완 호텔New Catract Aswan Hotel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12월 5일, 수요일


아침 열 시 반, 우리는 제각각 다른 경로로 아스완에 도착한 여러 명의 여행객들과 함께 조그만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내륙의 아부심벨Abu Shimbel로 향했다. 그곳에는 기대감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의 신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람세스 2세라는 인간은 이런 신전을 지으면서 수천 년 후 먼 나라의 낯선 사람들이 와서 입을 떡 벌리고 놀라는 광경을 상상하고 잠들기 전에 혼자 흐뭇해 했을까? 람세스 2세는 스스로를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한 과대망상가였고, 이집트 고대사의 흐름을 바꾸어버린 위대한 정치가였으며, 지구상의 다른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대형 건축 발주자 겸 설계자였다. 그가 그 시절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지구의 표면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으리라.

 

전날 필라에 신전을 옮겨놓은 것을 보면서 유네스코의 저력에 감탄했는데, 유네스코가 한 일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아부심벨 신전마저 수몰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는 1963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이 신전을 원래 위치보다 70m 높은 지점으로 옮기는 대역사를 감행했다. 당시 유네스코의 학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복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원래 아부심벨에는 1년에 딱 두 번, 람세스 2세의 생일과 즉위일에 맞춰 신전 중앙 깊숙이 자리 잡은 람세스 2세의 석상을 태양빛이 정면으로 비추었다고 한다. (다른 날에는 볕이 석상에 미치지 못했다.) 유네스코가 현대과학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신전을 이전한 이후, 빛이 신상을 비추는 날은 예전과 만 하루 차이가 난다고 하니, 고대인들의 불가사의한 천문학적, 건축학적 지식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아부심벨은 반나절 만에 구경을 마치기가 힘겨울 만큼 넓고 컸다. 오후 한 시 반에 아부심벨을 출발한 비행기는 오후 네 시에 우리를 다시 카이로에 내려 주었다.


12월 6일, 목요일


카이로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구시가지를 산책했다. 헤롯왕의 유아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온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어린 예수를 키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예수 피난교회’도 들어가 보았다. 구시가지 뒷골목의 야트막한 문을 통해 들어가니 오래되어 보이는 교회의 내부가 나타났다. 그러나 첫눈에 봐도 2천년 이상 된 건물은 아니었다. 이 근방이 예수의 아동기와 연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 건물에서 어린 예수가 피난생활을 했을 턱은 없었다. 오후의 구시가지 거리는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기도 소리로 가득했다. 골목길 어귀를 돌자 우아한 모습의 성 죠지 교회가 나타났다. 성 조지 교회라는 걸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정문 계단 앞에 성 죠지가 용을 창으로 찌르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교회 아타나시우스파 감독이 7세기에 세운 교회였다. 산들바람이 부는 교회 앞마당에 앉아 아쉬운 대로 샤프 펜슬로 교회를 스케치해 보았다.


지금은 당연히 이슬람 국가로 여겨지고 있는 이집트도, 7세기경 아랍 군대가 점령하기 전까지는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적이 있다. 사도 마가에 의해 이집트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원시기독교는 콥틱교라는 이집트 특유의 교파를 이루었다. (이집트 출신 유엔 사무총장이던 부트로스 갈리가 콥틱교도였다.) 2세기 경에는 기독교가 거의 이집트 전역으로 확대되어 다수의 이집트인이 기독교도가 되었다. 카이로 구시가지의 성 죠지 교회는 그런 육중한 역사를 깔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로마, 안디옥과 더불어 기독교의 3대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예수의 인성보다 신성을 중시하던 단성론을 신봉했는데, 451년의 칼케돈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받았다. 단성론과 삼위일체론의 격돌을 실제보다 더 실감나고 재미나게 그려낸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비잔티움의 첩자>가 떠올랐다. 알렉산드리아에 가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살다 보면 기회가 있겠지.


저녁 여섯 시쯤 카이로를 출발한 걸프항공 비행기는 자정이 넘어서야 오만에 도착했다. 이집트의 12월은 한기가 느껴졌었는데, 머스캇의 낯익은 온기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카이로에 비하면 머스캇은 평온하고 조용한 도시다. 남은 근무기간 동안 그 조용함과 여유를 감사하며 지내기로 했다. 이집트를 방문한지 3년이 흐른 2004년 성탄전야에, 갑자기 우리 생각이 났었는지, 여객선을 함께 탔던 캐나다인 엘비라 여사로부터 안부메일이 왔다.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그 여행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을 터였다.


   “당신들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지만, 나일강을 거슬러 크루즈 여행을 한 기억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거에요. 멋진 당신 가족과의 만남을 그 기억의 온전한 부분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매우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좋은 일이 많기를 기원하며, 엘비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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