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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게알젓

posted Apr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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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아직 내가 못먹는 음식이라는 걸 만나본 적은 없다. 추어탕 개고기 개구리고기 오소리고기 등등을 먹어봤는데 별다른 혐오감도 감흥도 없었다. 딱 두가지 예외가 있다. 날당근과 삭힌 홍어는 못먹는다. 날당근을 먹으면 뒷골이 땡겨오고 어지럽고 메스껍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의 눈치를 볼 일만 없다면 카레라이스 속의 익힌 당근도 골라내고 안먹는 편이다. 눈치를 봐야만 하더라도, 심지어 협박을 받더라도 날당근을 먹기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삭힌 홍어는 그보다는 좀 낫다. 가령 벌칙삼아 그걸 먹어야 한다면 먹을 수는 있지만, 며칠 굶은 뒤에 먹을 게 그거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수고스럽게 찾아먹게 될 것 같진 않다. 암모니아 냄새를 즐기는 법을 모르는 거다. 그러니까 '홍어 먹을 줄 모르는' 사람에 해당되는 거고, 나는 '안먹는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통념에 따르자면 홍어를 '못먹는다'라고 말해야 트집잡힐 일이 없을 터이다.

개고기는 88년부터 먹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올림픽을 한다고 보신탕을 금지시켰는데, 개인의 취향에 속하는 문제에 정부가 관여하는 게 옳지 못하다고 여겨서 저항 삼아 먹기 시작했다. 곧잘 먹긴 하는데, 여름이 되면 개고기가 간절히 생각나는 그런 축에는 들지 못한다. 게다가, 강아지를 기르고 있던 몇 달 동안에는 개 냄새가 음식에서 나는 게 견딜 수가 없어서 못먹겠던 적도 있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얼른 생각나는 건 냉면이다. 내가 주재하는 회식 기회가 있으면 후배들을 줄줄이 끌고 냉면집을 순례하는 걸 일삼을 정도다. 덕분에 나랑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우래옥, 을지면옥, 필동면옥, 남포면옥, 을밀대 등을 두세번씩 가보았기 마련이다. 그 외에도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는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뜬금없이 못견디게 먹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해삼, 해삼창자, 성게알젓 등이 거기 해당된다. 인도네시아에 살 때 어머니께서 다니러 오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뭐 먹고싶은 게 없냐고 하시길래 해삼창자와 성게알젓이 보이거든 조금 사와주십사 말씀드렸다. 우리집에 도착한 어머니께서 바리바리 싸오신 짐 속에는 해삼창자 한 상자와 성게알 두 박스가 있었다. 요즘은 어느 수퍼를 가도 성게알을 젓갈로 팔지는 않더라면서...

아다시피, 해삼창자는 집에서 상자 단위로 먹는 음식은 아니다. 가끔 가는 일식집에서 감질나게 작은 종지에 갈아놓은 마 위에 살짝 뿌려 먹거나, 광어회에 비벼 먹거나, 멍게와 함께 비빔밥으로, 그것도 아주 가끔씩 먹는 음식이 아니던가 말이다. 며칠 먹다가 질려서 젓가락이 더 가게 되지 않았들때, 기어이 아내는 "먹지도 않을 걸 부탁해서 어머니만 힘드시게 만들었다"며 나무랐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해삼창자를 날마나 국이나 찌개처럼 먹을 순 없는 노릇이잖은가 말이다.

성게알로 말하자면, 그보다도 더 못먹고 결국 버리고 말았다. 성게알젓은 아주 작은 유리병 속에 든 걸 젓가락에 눈곱만큼 찍어서 맛을 보는 음식이라서, 신선한 성게알 덩어리와는 완연히 다른 음식에 해당된다. 초밥집에 가도 스무 피스에 두어개 나오는 성게알 초밥으로 날마다 끼니를 대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더 이상 성게알젓을 수퍼에서 팔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재앙이다. 아스피린 만큼의 분량으로 '바다를 먹는다'는 느낌을 가지는 즐거움을 빼앗겨버린 셈이니 말이다. 내 친구 C는 나와 오래 사귀어서 내 식성을 잘 알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성게알젓의 품절 현상을 원통히 여기는 벗이다.

어제밤에 C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퇴근하다 장보는 중인데 성게알젓이 있다. 100그람에 만육천원"

나는 냉큼 답신을 보냈다. "한병 사놔주라."

"사는 건 하겠는데 이걸 어떻게 전해주냐?"

흠... 아닌게 아니라 그게 문제였다. "내가 지금 받으러 갈까. 너희집이 지하철역 어디더라"

"가양동인데 거기서 오려면 여러번 갈아타야 할걸. 길이 너무 밀려서 내가 갖다주지도 못하겠다."

가양동에서 판다면 우리집 근처 어딘가에도 있겠지. "그래. 사지 마라 그럼."

"벌써 샀다. 걱정마라. 내가 맛있게 먹을께."

두 시간쯤 후에 다시 염장 지르는 문자가 왔다.

"야 이거 정말 맛있다. 근데 이건 무슨 술이랑 먹어야 되냐"

"정종이 좋을걸"

"술이 달아서 괜찮으려나"

"소주도 좋다."

"그래 소주가 잘 어울리겠다. 고맙다. 냉장고에 너놨다가 나중에 같이 소주 마실 때 들고 나갈께."

"고맙다. 많이 먹어라."

기억을 더듬어봤다. 처음으로 성게알젓 맛을 본 건 부산의 큰댁에서였던 것 같다. 뭔지 몰랐지만 희안무쌍한 맛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아침에 드시던 다시마차 만큼이나 오묘했다.) 사람은 음식으로 자라지만, 음식도 사람 위에 자란다. (Some food grows on you.) 당신이 만일 어느 음식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면, 당신 속에 어느 지방색, 또는 누군가의 솜씨에 대한 익숙함이 치유불가능한 정도로 자라나 있다는 뜻이다. 세계화의 진도가 아무리 나가도 이 세상 누군가는 그 어떤 희귀한 음식을 원통할만치 그리워하며 지낼 것이다. 내일 어느 대학교에 강의를 가게 되어 있다. 보편과 특수에 대해서 한시간쯤 말해주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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