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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4. Jordan, Israel (3)

posted Oct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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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수요일

 

우리는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Tel Aviv로 갔다. 이스라엘군의 사령부에 들러 슐로모 브론Shlomo Bron 대령으로부터 치안 문제에 관한 브리핑을 들었다. 그는 테러리스트 공격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외에는 달리 대응할 현실적인 방도가 없다고 역설했다.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독립된 국가entity와의 분쟁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안보문제입니다. 기본적으로 정치적, 점진적 접근을 채택하고 있지요. 팔레스타인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치를 획득해 가도록 할 예정입니다. 카이로 협상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합의하면서, 이스라엘은 PLO에게 가자지구의 거의 완전한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그 반대급부로 가자지역 내에서 일정 수준의 치안이 유지되기를 바랐죠. 그러나 아라파트는 저항그룹을 설득하지 못했고, 치안을 강화하는 조치들도 꺼리고 있습니다. 아라파트는 자기를 믿어달라면서, 이집트나 알제리처럼 내란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약속을 못 지키고 있습니다. 만일 제리코나 가자지구가 테러리스트의 피난처가 되어버린다면 우리로서는 경계봉쇄를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봉쇄가 불가능하고 10만 명의 이스라엘 국민이 거주하고 있는 서안지구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최근 아라파트는 지하드와 같은 소규모 조직에 대해서는 비교적 강경한 조치를 취했는데, 최대 조직인 하마스에 대해서는 아직 미온적입니다. 우리는 PNA가 이상적인 상태를 만들기를 기대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그들이 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냉정히 말해서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의 테러(a certain degree of terror)와는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따지고 보면 영국도 그렇지 않습니까?(IRA 테러를 의미함, 저자 주) 다만, 일정 수준의 치안은 달성되어야 하고, 특히 하마스에 대해서는 뭔가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질문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이 비밀리에 점령지에 잠입해서 팔레스타인 요인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대부분 허구(mostly myths)입니다. 물론 순진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조직은 어디서나 비슷한 방식으로 일합니다. 그 점은 우리나 팔레스타인 측이나 마찬가지죠. 점령지 내에서 이스라엘 경찰은 4천명을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PNA의 경찰인력은 벌써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PNA는 대중의 호감을 사고 고용을 증가시키려고 주민들에게 경찰 일자리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스라엘군이 PNA와 공동순찰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조치가 테러리즘 방지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의사소통 문제로 인한 사고를 방지하거나 해결하는 데는 유용할 때도 있습니다.”

 

  “국가안보법정State Security Court에서 절차문제가 많이 발생한다던데 어떻습니까?”

 

  “그건 전적으로 PNA가 운용하는 겁니다. 우리가 절차적으로 잘못된 조치를 권유한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르겠지만(Though we may be guilty for many sins), 적어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아닙니다.”

 

점심때는 텔아비브 대학 자피JAFEE 센터에서 이스라엘 학자들 제에브 마오즈Ze'ev Ma'oz, 마크 헬러Mark Heller, 도어 골드Dore Gold, 아낫 쿠르즈Anat Kurz, 에밀리 란단Emily Landan, 제에브 에이탄Ze'ev Eytan, 에프라임 캄Efraim Kam 등과 토론을 했다. 자피 센터는 1977년 설립되어 이스라엘의 학계와 국방 및 외교 당국자들 간의 협조를 모색하는 독립 연구기관Think Tank이다. 이른바 ‘최종지위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다양한 대안에 관한 논의를 활성화 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는 설명이었다. 학생이 질문했다.

 

  “하마스측은 오슬로 협정이 성공적으로 이행되면 라빈 정부의 선거 패배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 라빈 총리가 일부러 팔레스타인 내란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연구소 측 누군가가 대답했다.

 

  “오슬로 협정은 엄밀히 말해서 평화협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주도로 제시된 신뢰구축과정 시작을 위한 문건이죠. 현재 양측 태도가 일종의 평행선(parallelism)을 달리고 있기는 합니다만, 협정의 원칙선언DOP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당초 오슬로 협정에 대한 팔레스타인 측의 축제적인 반응은 협정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선언에 포함된 모든 각각의 단계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여부는 향후 협상의 성공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하마스의 말처럼, 단기적으로 보면 현 상황은 악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야당은 보다 점진적인 접근을 주장하면서 지나친 양보가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정부를 비난하고 있어서 라빈 정부가 현 평화과정에 관해서 국민을 설득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팔레스타인 내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라빈의 재선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설령 시리아와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해도 다가오는 선거전에서 그다지 득이 되진 않을 상황입니다.”

 

연구소 측 다른 사람들의 발언내용 중에도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오슬로 협정의 취지는 PNA의 역량을 시험해 보자는 데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하마스를 다룰 수 있는지 여부를 말이죠.”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군사적 해결military solution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내란이 벌어진다면 그 또한 이스라엘의 안보를 저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권력의 부담’이 책임감을 창출해 낼 수도 있겠지요. 하마스도 정권을 담당하게 되면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미리 문제를 예상하고 방지하려는 태도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에 PLO의 대안으로서 다른 과격그룹과 상대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력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인 치안수준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대표와 협상하겠지만, 어느 그룹이 대표가 될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어느 한 그룹이 과격노선을 버리면 다른 그룹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경제적, 심리적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지금의 상황을 규정짓는 갈등의 성격과 양상은 불변하리라고 봅니다.”

 

자피 연구소를 떠난 우리는 이스라엘 외무성에서 변호사 요엘 싱어Yoel Singer 씨와도 만났다. 그는 미국 변호사로서 이스라엘 측 오슬로 협상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매우 효율적이고 실무적인 태도로 오슬로 협정 이행현황을 브리핑해 주었다. 가자와 제리코 등지를 이미 다루었고 서안지구 내 자치 확대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오슬로 협정 이행은 현재 대략 3/4 단계에 와 있다고 했다.

 

  “(1978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가 서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에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의미 있는 합의가 부재했던 이유죠.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전부 혹은 무all or nothing 방식으로는 진전을 이룰 수 없는 복잡성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오슬로 협정이 상정하는 5년의 기간 동안 가능한 모든 현안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가령, 선거에 관해서는 ‘어떻게 선출하느냐’는 방식의 문제뿐 아니라 ‘무엇을 선출하느냐’하는 근본적인 구조까지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이스라엘은 투표권 부여로 족하다고 보는 반면 팔레스타인 측은 피선거권까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약 3주에 걸쳐 실시될 선거에 여러 국가들의 국제감시그룹이 참관을 희망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저항그룹들에게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방해하거나 부정할 구실을 주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될 테니까요. 일단 피선된 자치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서 국제사회의 입증하는 정통성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는 오슬로 협정과 관련 협상내용의 위반사례에 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초기에는 PLO 지도자들이 해외에서 들어와 협정 문안 자체를 본 적이 없거나 브리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합의사항이 잘 준수되지 않았습니다. 다소 모호한 조항들은 이행과정에서 자의적으로 해석되기도 했죠. 고의라기보다는 무능으로 인한 위반도 있었다고 봅니다. 팔레스타인 측의 수많은 합의위반 사항에 대해 대항조치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논의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있었습니다. 합의위반과 대응조치들이 반복되면서 합의의 전반적인 침식(erosion)현상이 초래되었습니다.”

 

학생들 중 하나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학생 : 이스라엘측이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공약committed했으면서도 왜 정착촌을 끊임없이 증설하는 것인가?”

  싱어 : 우리가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공약했다고 누가 그러던가?

  학생 : 이스라엘이 오슬로 협정을 통해서 2개 국가 방안two-state option을 공약한 게 아닌가?”

  싱어 : 아니다. 우리는 오슬로 협정과 그 내용의 준수를 공약했다. 가자 및 서안지구의 최종상태에 관해서는 추가협상이 필요하다. 이런 게 바로 문제다. 정착촌 건설 중단은 협정문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경계봉쇄의 권리는 합의문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팔레스타인 측은 이스라엘이 ‘협정을 위반한다’고 주장한다. 협상 테이블에 나오는 팔레스타인 대표들조차 합의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후에 우리 일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구시가지 바로 바깥에 자리 잡고 있는 노트르담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객실에서 케임브리지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꼬마가 부쩍 말이 늘려고 한단다. 며칠 못 봤을 뿐인데.

 

우리 일행은 저녁 무렵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Palestinian Academic Society for the Study of International Affairs : PASSIA를 방문하여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Hadi, 사이드 자이다니Said Zaydani, 모하메드 자달라Mohammed Jadallah 등 팔레스타인 학자들과 마지막 토론을 가졌다. PASSIA는 압둘 하디 씨가 1987년에 설립한 연구소다. 그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브래퍼드Bradford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하버드Harvard 국제관계 대학에서도 펠로우fellow 자격으로 공부한 학자였다.

 

이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1967년 이후 아랍 거주구역인 동예루살렘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1만6천여 명의 아랍 거주자들은 동예루살렘 내에서조차 소수화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동예루살렘 건축제한이 심해서 건축허가를 얻는데 10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하소연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가급적 넓은 영토를 확보한 다음,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법은 적용하고 맞지 않는 법은 폐기했습니다. 치안유지의 명목으로 경계지역의 영토를 광범위하게 빼앗았고, 현재도 정착촌 활동은 활발합니다. 1992년 마드리드 협약은 물론 최근의 오슬로-카이로 합의 이후에도 정착촌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요. 모든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라빈 총리는 정착촌 문제가 평화과정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월 4일, 목요일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인 오늘은 종일 자유 시간이었다. 나는 세현이와 함께 예루살렘 구 시가지를 산책했다. 동서 예루살렘의 대조적인 모습은 동서 베를린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멋모르고 동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번호판을 단 채 진입한 차량은 십중팔구 돌팔매 공격을 당한다고 했다. 방향감각 없이 길거리로 나온 우리는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들고 ‘다마스쿠스 게이트Damascus Gate’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영어가 서툰지 잠시 망설이더니 말없이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더니, 성벽 위로 올라가는 개구멍을 알려주며 자기에게 입장료대신 10세겔Shekel을 달라고 했다. 성벽 위에서는 도성의 동쪽을 조감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과거 솔로몬 성전과 헤롯 성전이 있었던 것으로 전승되는 현 예루살렘 성전산temple mount을 탈환하는 것이 귀향 및 국가회복의 궁극적 목표다. 그런데 이 자리는 지금 이슬람 사원인 알 아크사 모스크Al Masjid al Aqsa와 황금의 돔 모스크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신심 깊은 유태인들은 아직 형태가 남아 있는 성전산의 서쪽 벽에 안식일 전날마다 모여들어 벽을 두드리면서 메시야의 도래를 절박하게 기원한다. 우리는 이 ‘통곡의 벽’도 보았는데,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다.

 

벳세다Bethesda 연못에서는 초록색 모자를 하나같이 눌러쓴 한국인 아주머니들과 마주쳤다. 청파동 성당에서 성지순례차 온 신도 분들이었다. 가이드가 이분들에게 ‘Ecce Homo’라는 표지판을 “여기 이 사람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기에, 성경에는 “이 사람을 보라”라고 풀이되어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기분나빠했다. 속이 밴댕이 콧구멍처럼 좁은 여자였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다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도, 빌라도Pilate 법정 터 위에 지어졌다는 교회도 나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다. 예수 시대의 벳세다 연못이 5-6미터 지하인 것으로 미루어, 몇 차례나 무너지고 파괴된 후 그 위에 다시 세워진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고요한 감람산의 수도원에서는 경건한 감동을 느꼈었지만, 예루살렘의 구시가지는 모든 것이 과잉이었다. 유대교와 이슬람과 기독교가, 그 상징물들과 신도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골목마다 가득 늘어선 좌판은 각종 종교의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어느 것이 어느 종교에 속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골고다 언덕은 이제는 전혀 언덕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웅장한 중세양식으로 지어진 성묘교회聖墓敎會는 왠지 나에게는 부산 용두산의 정든 외갓집을 허물고 그 위에 세워진 사각형 고층빌딩을 연상시켰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공연히 스산한 기분에 젖어, 친구에게 엽서를 썼다.

 

        성지(聖地)에서

        - 우하(愚下)에게

 

        조바심을 죄처럼 품고 살다가

        오늘 드디어 요단강을 건넜다.

        이승의 검문소에서 네 시간

        뙤약볕 받으며 서서

        어릴 적 녹번동 우리 집 앞을 흐르던

        실개천을 닮은 저 강물이

        고달픈 모래바람 속에 파묻히면 어쩌나

        걱정했다.

        저승의 검문소에서 다시 두 시간

 

        거룩한 기관단총들 사이를 지나

        점령지로 들어서자면

        국경 속의 국경을 지나고

        아우성치는 유랑민들

        얼굴 속에 그어진 또 다른 국경을

        밟아야 한다.

        아이들은 빼앗긴 땅을 맨발로 딛고 다니며

        부서진 돌들을 공중으로 던지고 있었지

        

        거룩한 것들이 한데 섞이면

        다시 구별해 내기란 무망하다

        쿠오바디스

        옛 도성에서도 나는 主의 자취를 찾지 못하고

        포장지로 싼 전설들이 좌판에 놓인 좁은 길을 걸었다.

        걷다가

        초록색 모자를 떼 지어 눌러쓴 성지순례단

        동포 아주머니들의 사진기 셔터도 눌러주고

        목마른 자가 되어

        플라스틱 통에 든 생수를 마셨다.

        문득

        여권과 지갑과 영국에 두고 온 아들

        오늘 밤 등짐 속에 다시 챙겨야 할 내 잘잘못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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