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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2. Berlin, Berlin

posted Jun 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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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겨울, 옥스퍼드의 병원에서 아들이 태어난 2주 뒤인 12월 4일부터 일주일간, 산후조리 도우미 아주머니께 아내와 아이를 부탁하고 독일에 다녀왔다. 수업의 일환으로 동급생들과 함께 베를린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시와 독일국제개발재단DSE이 공동으로 주관한 세미나의 주제는 ‘통일독일의 대외정책’이었다. 갓 태어난 나의 아들처럼, 독일도 통일을 맞은지 3년밖에 되지 않던 무렵이었다.


베를린 땅은 내가 처음으로 밟아보는 유럽대륙이었던 셈이다. 공항의 분위기부터가 영국과는 딴판이었다. 표지판도, 건물의 생김새도 영국에 비하면 간소했고 사무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랄까. 독일 사람들은 영국인보다 무뚝뚝해 보였는데, 어쩌면 그것은 불공평한 첫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독어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으니까. 어두운 베를린 거리도 무뚝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도심 한복판인데도 네온사인조차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커다란 빌딩 몇 채만 그럴싸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말하자면 도시는 도시일 뿐이고, 건물은 그저 건물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미니멀리스틱minimalistic한 풍경이었다. 우리 숙소로 제공된 DSE의 숙박시설에 들어가 보고 받은 인상도 일관성이 있었다. 모든 것이 간결했고 효율적이었다.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책걸상이든, 침대든, 창문이든, 모든 사물이 자기가 만들어진 목적에 기능적으로 충실히 부합할 뿐, 아무런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색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든 일이 이토록 명확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편한 곳이 되었을 터였다.


일주일간의 세미나는 즐거운 현장학습이었다. 통일 직후의 독일, 그것도 베를린에 와서 통일과정에 대해 독일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었다. DSE에서 가졌던 토론이나 강의의 내용이 유달리 인상적이었건 것은 아니었다. 독일외무성, 국제개발재단, 베를린시 등의 기관에서 나온 강사들의 주제발표는 독일식 어법에 익숙지 못한 내가 듣기에는 너무 사변적이었다. 또는, 독일인들조차 그들의 통일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 명확히 알아내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독일의 통일이 독일인들의 주도면밀한 설계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독일인 자신들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모인 우리 동료들, 아니 어쩌면 그 무렵 세계의 모든 사람이 알아챈 것은 독일의 통일로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었을 뿐, 새롭게 막이 열린 드라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장래를 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자기들 앞에 열린 작은 기회의 창을 놓치지 않고 덥석 붙잡을 만큼은 용감했다. 그 덕분에 적어도 서반구에서 만큼은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 오던 냉전의 구조가 해체되었고, 독일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가 양 진영의 최전선이 되었던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통일비용에 관한 논란이 많지만, 독일이 통일을 함으로써 이룩한 것은 돈을 아무리 들여도 얻어내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다.


세미나를 하는 일주일 내내 곤혹스러웠던 점은, 독일 통일에 관한 여러 가지 담론 속에서 이제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게 된 남북한이 화제에 올랐던 점이다. 그런 대목에서는 다들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정부의 통일정책을 소개하고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성취한 남측이 통일과정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정도의 전망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내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은 아직 동반구에서 냉전구조의 해체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과, 한국사회에서는 통일에 관한 아무런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의 곤혹스러움의 정체는 독일에 대한 부러움과 조국에 대한 가여움, 또는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세미나에서보다 더 극적인 느낌을 받은 것은 베를린 시내를 직접 돌아보면서였다. 18세기말에 프로이센Prussia의 프레데릭Frederick 2세가 지었다는 웅장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앞의 광장에 서서, 나는 1987년에 만들어진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떠올렸다. 영화 속에서는 천사들이 저 문 위의 청동상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독일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가 만든 이 영화의 원제는 <Der Himmel über Berlin>, 그러니까 ‘베를린의 하늘’이라는 뜻이다. 벤더스는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보면, 아닌 게 아니라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우리말 제목이 더 적절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빔 벤더스는 <The State of Things>라든지 <Paris, Texas>처럼 난해하고 지루한 영화도 만들긴 했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영어제목 The Wings of Desire>는 후일 할리우드 멜로물로 번안되었을 정도로 대중적 호소력을 갖춘 작품이다. 이 영화로 벤더스는 1987년 칸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흡사 <영웅본색英雄本色>의 킬러들처럼 검은색 롱코트를 걸친 두 명의 천사가 등장한다. 이들은 베를린 시내를 떠돌며 사람들의 상념을 귀 기울여 듣는다. 태초부터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두 천사의 임무는 현실을 ‘조립하고, 증언하고, 보존하는’ 것이란다. 영화역사상 가장 격조 높게 그려진 엿보기 취향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들 중 한 천사인 다미엘Damiel(브루노 간츠Bruno Ganz 분)이 서커스 곡예사인 마리온Marion(솔베이 도마르탱Solveig Dommartin 분)을 관찰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그를 볼 수 없고, 그는 그녀를 만질 수도, 말을 걸 수도 없다. 그는 그녀의 고독을 사랑하고, 또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다미엘은 영생을 포기하고 사람이 된다. 관찰자이자 화자이던 천사가 ‘저세상을 등지고’ 인생세간으로 내려오자, 흑백이던 영화는 돌연 컬러로 변한다. 천사는 인간이 된 뒤에 비로소 색깔, 기쁨, 고통 같은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제 다미엘은 피를 흘리기도 하고, 배고픔도 느낀다. 마침내 그는 어느 술집에서 마리온을 만나 인사를 나눈다. 두 사람은 왠지 서로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느낀다. 이 영화의 무대는 80년대 후반의 서베를린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인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사실을 떠올리면, 이 영화의 밑바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냉전의 끝자락에서 한 시대와 작별을 고하는 독일 특유의 사변적 예술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베를린 장벽은 이미 흔적으로만 남아있었다. 한두 군데만 온전한 높이의 장벽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긴 세월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눈물과 한숨과, 때로는 심지어 목숨까지 요구했던 잔인한 장벽이 지금은 황당한 부조리 코미디의 소품처럼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동베를린 지역도 돌아보았는데, 통일독일의 신탁청Treuhandanstalt은 놀랍게도, 1949년 이후 보상금 없이 몰수되었던 모든 부동산을 원소유주에게 반환하는 작업을 통일직후부터 진행 중이었다. 그 때문에, 공산사회였던 동베를린에서 정부가 배정해준 주택에 살던 많은 주민들은 졸지에 거처를 잃게 되었다. 나로서는 놀라워 보이는 이러한 방식이 독일인의 법 감정에는 아마도 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우리는 동베를린 지역의 수많은 공동주택에서 퇴거당하여 얼마 전까지 살던 집의 마당에서 텐트를 지내고 있는 동베를린의 시민들도 보았고, 동독 외무성 직원이었다던 택시기사도 만났다.


우리를 안내하던 베를린 시청직원은 동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서서 ‘통일의 주역’을 소개하겠다며 허공을 가리켰다. 머리 위 말풍선에 물음표를 떠올리고 있는 우리 일행에게 그가 설명해 주었다.


   "저 건물의 옥상을 보세요. 동베를린의 모든 건물 위에는 저렇게 수많은 TV 안테나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지요. 동독 정부는 서쪽 방송을 접할 수 있는 시설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에 서독방송용 안테나를 설치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저마다 개별적으로 안테나를 세웠고, 건물의 옥상은 입주자의 수만큼 많은 안테나를 빼곡히 이고 있게 된 겁니다. 서독의 방송프로그램이 동독 주민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죠."

 


세미나를 마친 마지막 밤, 우리 동료들은 DSE 건물의 강당에서 조그만 파티를 가졌다. 강당에 기타가 한 대 있기에 건드려 본 것이 실수였다. 우리는 거기서 새벽까지 노래를 불렀고, 나는 내내 반주를 맡았다. 서로 다른 여남은 개의 나라에서 모인 학생들이었지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놀라우리만치 많았다. 어떤 노래는 다른 이들도 그 노래를 안다는 사실을 서로 놀라워하며 함께 불렀고, 어떤 노래는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1절을 선창하면 2절을 서툴게들 따라서 부르기도 했다. 그날 밤, DSE의 소강당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촌’이었다.


베를린을 떠나기 직전, 자유시간을 이용해서 나는 동료 학생 세 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36km쯤 떨어진 포츠담Potsdam을 방문했다. 1945년 7월 트루먼Harry Truman과 처칠Winston Churchill, 장제스Chiang Kai-Shek가 이 도시에서 정상회담을 가지고,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처리 문제에 대한 합의를 "포츠담 선언"으로 발표했다. (그해 8월 스탈린Joseph Stalin도 소련의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했다.) 포츠담은 한반도의 독립과정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장소인 셈이다.


비바람이 거세게 부는 어두운 하늘 아래 포츠담 시내를 건성으로 돌아보며, 우리는 상수시Sans Souci; 걱정이 없음 궁전으로 갔다. 1747년 로코코Rococo 양식으로 지어져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제Frederick the Great가 여름 별장으로 이용했던 이 궁전은 곧잘 프랑스의 베르사이유Versailles와 비교되곤 한다. (바로크Baroque 양식의 대표건물인 베르사이유보다 상수시의 규모는 훨씬 작다.) 이 궁전은 20세기 초까지 호헨촐레른Hohenzollern 왕가의 별장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오죽이나 걱정거리가 많았으면 별장 이름을 ‘걱정이 없는 곳’이라고 지었어야 했을까?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분단시절 동독의 주요 관광지였다가 이제는 이렇게 아무나 무심히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된 상수시 궁전. 이곳의 풍경이 어쩐지 근심스러워 보였던 건 단지 날씨 탓이었을까? 아니면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는 독일을 돌아본 나 혼자만의 감상 탓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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