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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2 - 2003.2. Oman (2)

posted Oct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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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만의 사람들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오만은 7세기에 이슬람화 되었고, 수도인 머스캇을 포함한 일부 해안지역은 1508년부터 1648년까지 약 140년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역사도 가지고 있다. 바스코 다 가마의 발자취를 따라 대양에서 세력을 넓혀 가던 포르투갈은 호르무즈 해협 입구에서 자국의 항로를 지키기 위해 해안 도시에 성채를 짓고 포대를 건설했던 것이다. 머스캇의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뜬금없이 포르투갈의 유적과 마주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던 오만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바그다드와 아카바를 종횡으로 말 달리던 19세기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 비록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 영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오늘날에도 오만 군은 영국군과 합동훈련을 가지곤 한다. 그러나 외세가 오만 전역을 지배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만 왕실은 동아프리카와 파키스탄 지역까지 강역을 넓히기까지 했다. 이런 역사가 보여주듯이, 오만 사람들은 독립심과 자존심이 강하다.

 

참고로, 아랍지역은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순니سنة‎와 시아شيعة간의 갈등이라는 잠재적 분쟁요인을 안고 있다. 대체로, 거의 아랍 전역에서 순니파가 지배적인 정치구조를 갖추고 있는 반면,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과 같은 역할을 자처해 왔다. 아랍지역에서 종파간 갈등이 표면화되면 아랍 국가들이 ‘이란이 분열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실제로 레바논내 무장 시아파 조직인 헤즈볼라حزب الله는 이란으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얘기를 늘어놓느냐 하면, 오만은 아랍 국가 치고는 특이하게도 이란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도파르 지역에서 왕실에 항거하는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오만 왕실은 영국 및 이란의 군대의 도움을 받으면서 1975년이 되어서야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경험이 있었다.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마주보는 이웃나라이므로 오랜 원망과 갈등의 앙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죽기살기로 싸우는 사이가 되기도 어려운 탓이 아닐까 싶다. 어디든 이웃나라끼리의 사이란 것이 무릇 그렇지 않던가. 게다가, 오만은 특이하게도 순니도 시아도 아닌 이바디파الاباضية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종파분쟁의 긴장으로부터 조금 비켜나 있는 덕분에 상대적으로 이란을 덜 적대적으로 대할 여유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슬람 경전에서는 유대교 경전, 기독교 구약성서와 상당히 많은 서사적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대부분 이슬람의 성인에도 해당한다. 아랍식 발음과 성서식 표기를 비교해 보면, 지브릴은 가브리엘, 이프라임은 아브라함, 유누스는 요나, 아유브는 욥, 무사는 모세, 하룬은 아론, 다우드는 다윗, 술래이만은 솔로몬, 유수프는 요셉 하는 식이다. 특이한 점은, 오만의 살랄라 근처에 성자 욥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아랍어로 ‘나비 아유브’라고 부르는 곳인데, 살랄라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 가 보았더니 ‘욥의 발자국’이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커다란 발자국 화석과 고대 무덤 유적이 사적지처럼 보존되고 있었다. 이것을 믿는다면, 온갖 고난의 시험을 받으면서도 신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구약의 등장인물 욥은 오만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슬람에서는 ‘이사 이븐 마리암’, 즉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예언자로 취급하고 있다. 이사عيسى라는 아랍식 이름은 맨 앞에 붙은 강조 자음 때문에 우리 귀로 들으면 ‘아이사’처럼 들리는 발음인데, 내가 머스캇에서 세 들어 살던 집주인의 이름이 바로 이사였다. 미스터 예수의 집에 세를 들었던 것이다. 나의 집주인 이사 씨는 화통한 성격의 40대 남성이었다. 절약정신이 강한 탓이었는지, 집에 에어컨 같은 물품이 고장 나거나 수도관이 샌다거나 하는 말썽이 생기면 기술자를 부르기 전에 자신이 직접 공구를 챙겨 와서 수리를 시도해보곤 했다. 덕분에 수리는 언제나 늦어지기 마련이었지만, 싸구려 야외용 테이블을 주면서 엄청나게 생색을 내곤 하는 식으로 보여주던 그의 악의 없는 애교가 밉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일부러 집에 들러 나를 불러내더니 그 답지 않게 쑥스러운 말투로 자기 고향 마을 수마일سمائل‎의 집에서 동생이 결혼을 하니 하객으로 와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세 들어 사는 처지에 집주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다 결혼식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우리 예의범절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낯선 풍습에 대한 호기심도 일어서, 먼 곳까지 모르는 길을 운전해야 하는 모험을 무릅쓰고 흔쾌히 수락했다.

 

도로 표지판을 따라 수마일 시로 진입한 다음, 동네 사람에게 물어 미스터 예수의 널찍한 본가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혼식이 있는 집이 누구네인지 동네 사람들은 다 아는 것 같았다. 집 밖에 차를 세워두고 기웃거리며 마당 안을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흰 전통의상을 입은 수백 명의 사내들이 넓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가 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들어서는 동양인을 일제히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집주인 이사 씨가 어디선가 나타나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나를 자기 친척들에게 일일이 인사시켜 주었다. 가만 보니, 그는 일가친지에게 외국 대사관 직원까지 하객으로 방문한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등에서 진땀이 흘렀지만, 나는 마당에 깔아둔 자리 위로 그들 틈에 앉아 여인네들이 내어주는 양고기를 손으로 뜯어먹으면서 최대한 예의 바르게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고 앉아 있다 보니, 음식이나 언어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떠들썩한 잔치자리에 술을 마시는 행위가 빠져 있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식 전야제였다. 다들 날밤을 지새울 태세처럼 보이기에, 적당한 대목에서 예의를 갖추어 양해를 구하고 먼저 빠져 나왔다. 나오면서도 수많은 사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아랍의 문화는 가부장주의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공동체에서 족장의 권위,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그 설명은 옳다고 해야겠지만, 우리 사회처럼 연장자에게 무조건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풍습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나이를 기준으로 높임말과 낮춤말을 나누어 쓰는 언어습관을 가진 나라가 우리와 일본 정도 말고도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수마일의 결혼 전야제에서 느낀 점이었는데, 아랍인은 남녀간의 예법에는 그토록 예민하게 굴면서도 나이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연장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젊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키거나 고개를 숙이는 법도 없었고, 연장자가 목에 힘을 주거나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젊은이들을 고갯짓으로 부려먹는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왕족의 장례식에 문상을 갈 기회도 있었는데, 모스크의 장례식장에서도 상주들이 둘러앉은 순서는 나이 순서와는 무관했다. 물론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노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대 간의 관계’라는 면에서 아랍문화는 우리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연장자를 떠받드는 우리 문화의 어떤 측면이 혹시 우리 사회의 비민주적 특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이 부패하는 것이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당연시되는 특권은 도덕적 해이를 낳기 마련이다. 연장자를 존중한다는 윤리는 아름다운 미덕일 수도 있지만 안일한 담합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나이를 먹게 될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도 누리면 되니까 괜찮아’라는 생각으로 부당한 것을 참아내는 사회는, 그러지 않는 사회에 비해 덜 건전할 터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 면에서 보자면 아랍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사회적으로 보더라도, 여성들이 누리는 권리가 남성들에 필적하게 되는 날이 과연 오게 될 것인지 암담하다. 그러나 적어도 아랍사회에서 남성들끼리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거의 어떤 차별로부터도 - 최소한 우리보다는 더 -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이슬람 율법은 한 남자가 아내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남자가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의 일부다처는 우리 옛날의 처첩제도와는 전혀 다르니, 부인이 네 명이라도 전원이 본처로서 동등한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부인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자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사라의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는다. 중동지역의 정서에 비추어보면 사라와 하갈은 동등한 부인이다. 사라의 아들 이삭이 이스마엘보다 어린데도 장자의 권한을 누렸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은 이삭이 ‘약속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막에 유기하는 내용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처첩과 서얼의 문화에 대한 익숙함 때문이라는 점은 서글픈 대목이다.

 

본부인 네 명과 한 집에서 생활하는 일이 즐겁기만 할 턱이 없다는 점은 결혼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일 터. 율법이 허용하는 일이지만 정작 서너 명의 부인을 두고 있는 사람은 아랍에서도 돈이 아주 많거나 남달리 활력이 많은 남자들 뿐이다. 그럼에도, 오만의 가정은 대가족이 많다. 여러 세대가 함께 생활하거나, 출가한 형제들이 한 집에서 산다거나, 또는 부인이 여러 명이거나, 핵가족이더라도 자녀들이 다수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 대가족은 금식월 라마단Ramadhan, رمضان이 되면 다 함께 식사를 즐긴다. 금식월에 식사라니 무슨 말이냐? 정확히 말하자면 라마단은 동이 튼 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금식을 하는 기간이다. (신심이 깊은 사람들은 낮 동안에는 침도 삼키면 안 된다고 해서 침을 뱉으며 지낸다.) 그 대신, 해가 지고 나면 온 식구가 함께 둘러 앉아 ‘금식해제(breakfast)’를 의미하는 이프타르Iftar, إفطار라는 식사를 함께 나눈다. 한 달 내내 식구들끼리의 오순도순한 저녁식사가 이어지는 셈이다.

 

오만 사람들은 막부스Maqbous라고 부르는 쌀밥을 먹는다. 인도 음식처럼 사프런으로 노란 물이 든 찰기 없는 밥이다. 보통 그 위에 양념해서 구운 닭고기나 양고기가 얹힌다. 이것을 수저 없이 오른손을 사용해서 요령 좋게 흘리지도 않고 먹는데, 여간해서는 흉내를 내기가 어렵다. 루할Rukhal이라는 이름의 얇은 빵도 자주 먹는다. 라마단이 끝나는 이드 알 피트르Eid Al Fitr, عيد الفطر 축제 기간에는 특별한 명절음식을 만든다. 보통 축제 첫날에는 금식을 마치면서 소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닭죽 비슷한 하리스Harees 등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둘째 날에는 양고기 꼬치구이인 미쉬칵mishkak을, 셋째 날에는 슈와shuwa라고 부르는 특별한 명절음식을 즐긴다. 축제가 시작되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불을 지핀 다음, 향신료와 허브로 양념을 한 양고기를 여러 날 동안 익혀 부드러운 육질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드 축제가 시작되면 온 동네에서 양을 잡느라 법석이 벌어진다. 우리 식구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오만 음식은 간식에 해당하는 샤와르마shawarma, شاورما다. 터키의 시시케밥과 흡사한 음식으로, 얇은 전병처럼 생긴 밀빵에 야채와 양고기 또는 닭고기를 썰어 넣은 음식이다. 야외에 놀러 갈 때 김밥처럼 몇 개씩 싸가지고 가면 훌륭한 식사가 되었고, 맛도 햄버거보다 훨씬 좋았다.

 

오만의 특산물인 대추야자는 넘치는 일조량을 함뿍 받고 자란 탓인지 당도가 무척 높았다. 한 알만 먹어도 뒷골이 당길 만큼 달다. 오만 사람들은 낱알의 대추야자나, 버터와 꿀과 향신료를 대추야자와 섞어 만든 할루와Helwa라는 약밥처럼 생긴 간식을 커피와 함께 식후에 즐긴다. 대추야자가 달디 단 대신, 오만의 커피Qahwa에는 카르다뭄이라는 향신료가 섞여 있어서 독특한 맛이 나면서도 쓰디쓰다. 소주잔만한 크기의 작은 종지에 끝도 없이 따라주는데,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사양하려면 잔을 좌우로 몇 번 까닥이면 된다. 이 동작 이외의 다른 어떤 제스처도 사양의 뜻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커피를 멋모르고 몇 잔이나 받아 마시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나는 커피를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 쓴 커피의 독특한 향기도 그립다. 낮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물담배Shisha, شيشة를 빨아들이면서 커피를 즐기던 오만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도 그립다. 오만 사람들의 여유로운 생활태도는 뿌리 깊은 유목문화의 영향이 크겠지만, 그들의 경제 구조와도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만 국민의 1인당 GDP는 무려 2만 불에 육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만이 채 되지 않는 인구를 감안하면 생각하면 규모가 큰 경제랄 수는 없다. 얼핏 보면 오만인은 어업과 농업에도 상당수 종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농작물은 주로 대추야자와 그 밖의 몇몇 채소에 한정되어 있는데다 농경지는 전 국토의 1%에 불과하고, 어업은 전통적인 연안어업이어서 자급자족 이상의 생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것은 역시 석유와 가스 수출 덕분이다. 그런데 석유 매장량이 머지않아 고갈될 것으로 보인대서 걱정이 많은 상황이다.

 

수도 머스캇에서 생활하다 보면 이 나라의 경제구조가 뭔가 좀 야릇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오만인의 상당수는 본업이 ‘집주인landlord’인 것처럼 보였다. 내외국인에게 집을 세 내어 그 수입으로 생활하는 사람의 수가 무척 많았다. 사무실 관리직의 상당 부분은 인도인이 담당하고 있었고, 공장이나 건설현장, 길거리 청소 등 육체노동이 필요한 곳에도 인도 아대륙이나 중앙아시아 출신의 외국인들이 다수 고용되어 있었다. 오만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해마다 300억불 이상을 자기 나라로 송금한다. 오만 입장에서 보자면 국민들이 허드렛일을 하지 않는 대신 매년 300억불 이상의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는 셈이다.

 

나의 관찰이 틀리지 않았다면, 화석연료의 수출이 보장해 주는 높은 국민소득은 오만 국민의 근로의욕을 깎아내리는 주범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오만 정부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실업 수당을 자국민에게 지불하고 있었다. 오만 왕실은 산업의 다변화, ‘오만화Omanization’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만 국민 개개인의 의식의 변화가 필요할 것처럼 보였다. 정부의 ‘오만화’ 계약조건 때문에 오만에서 활동하는 외국기업은 일정 비율 이상의 오만인을 채용할 의무가 있는데, 내가 만나본 외국인 기업가들은 이렇게 채용된 오만인들의 근로의욕이 낮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필 오만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손쉽게 얻은 일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으리라.

 

오만의 일상을 설명하다가 글이 좀 곁길로 샜다. 머스캇 시내를 돌아다녀 보면, 흰 옷을 입은 사내들과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이 흑백의 대조를 이룬다. 남자들은 디시다샤Dishdasha라고 부르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옷을 입는다. 통풍이 잘 되는 합리적인 복장이고 운치도 있긴 한데, 민첩함을 요하는 현대적 노동에 어울리는 복장은 아니다. 머리에는 쿠마르Kummar라는 모자를 쓰거나 그 위에 무자르Muzzar라는 헝겊을 두르고, 허리에는 칸자르Khanjar라는 은제 단도를 차는 것이 정장이다. 기역자로 꺾어진 칸자르의 칼집은 무척 폼이 나는 오만의 상징물이어서 오만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 쿠마르와 무자르를 쓰고, 흰 디시다샤 위로 검은 색 얇은 천으로 만든 덧옷을 입고, 허리에 칸자르를 차고, 양치기들의 작대기처럼 생긴 아사assa라는 지팡이를 손에 들면, 그것이 오만 신사의 정장 차림이다. 오만의 여인네들은 화려한 색깔의 전통 복식을 즐겨 입지만, 바깥나들이를 할 때는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의 여인네들이 그러듯이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검은 히잡Hijab과 아바야Abaya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많다. 재미난 사실은 남자들이 입는 디시다샤는 치마에 가까운데, 여자들이 입는 시르왈Sirwal이라는 옷은 바지라는 점이다.

 

오만의 전통음식이나 의복 따위를 구입하고 싶다면 ‘수크Souq’라고 부르는 재래시장으로 가면 된다. 어느 도시에서든, 음식과 옷, 수공예품 따위를 파는 재래시장을 볼 수 있다. 니즈와Nizwa나 루스탁Rustaq처럼 오래된 석조 성곽이 있는 도시에서 시장의 미로 속을 걷다 보면 어느 좌판에선가 천일야화 속의 요술 램프라도 만날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은 역시 수도 머스캇의 해변에 자리 잡고 있는 무트라Muttrah 시장이었다. 이곳을 구경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금은 세공품, 목각 장식품, 이름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향신료, 양모 양탄자와 스카프, 큼지막한 도자기와 항아리들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머스캇의 해변에는 언제, 어디서나 웃통을 벗어 붙이고 모래사장 위에서 축구를 하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학창시절에도 축구는 별로 해본 적이 없었는데 오만에서는 축구 덕을 톡톡히 보았다. 축구 이야기를 하느라 국영 라디오에 출연까지 했다. 내 축구 실력을 익히 아는 친구들은 “네가 라디오에 나가서 축구 이야기를 했단 말이냐?”며 놀랐고, 나를 놀렸다. 내가 오만에 근무하던 2002년은 한국축구가 4강 신화를 빚어내던 한일 월드컵의 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그 한 해 동안 대한민국은 오만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인의 자존심이었다. 한국인이라고 내 소개를 하면 상대방은 빙그레 웃으며 엄지를 내 보이기 일쑤였다. 오만 외교부와 투자보장협정 협상을 할 때도, 법규를 위반한 한국인 선원에 대한 재판 때문에 법원을 방문했을 때도, 우리 건설업체의 유보금 반환교섭을 할 때도, 정유공장 입찰에 참여한 우리 기업에 대한 선처를 부탁할 때도, 축구 강국 대한민국은 축구장 밖에서도 존중과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라가 빛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직업, 그것이 외교관이다.

 

5. 사막의 소리

 

하마터면 사막 이야기를 빼놓을 뻔 했다. 사막은 거대한 초현실의 공간이다. 사막은 삶의 진공상태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인다. 역설적인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존재론적 영감으로 충일하다는 점이다. 머스캇에서 차를 몰고 두 시간쯤 남쪽으로 달리면 와히바 사막Ramlat al-Wahiba의 입구에 당도한다. 오만의 평지가 대부분 자갈과 바위투성이의 황무지로되, 와히바에 들어가야 비로소 거대한 사구가 느린 춤을 추는 모래사막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와히바 사막은 넓이가 12,500km2에 이른다.

 

덩치 큰 수동 사륜구동 차를 숙련된 운전기사와 함께 렌트하여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잘 생긴 청년 운전사 압둘라는 모래사막이 시작하는 지점이 가까워 오자 자동차 정비소로 차를 끌고 갔다. "어디가 고장 났느냐?"고 걱정스레 묻는 나에게,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사막에서 자동차 바퀴가 모래에 푹푹 빠지지 않으려면 타이어 공기를 많이 빼고 가야 해요." 오호라. 그런 요령이 있었군. 모래밭 같은 세상을 살면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면 적당히 힘을 빼야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렷다.

 

사막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360도 파노라마로 시야를 압도하는 누런 모래의 빛깔과 거기에 대비를 이루는 짙푸른 하늘색이었다. 이 두 색깔이 원래 이렇게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이었던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는, 그 절대적인 무의 엄청난 스케일에 주눅이 들었다. 압둘라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운전대를 내주었다. 식구들을 싣고 가파른 사구砂丘 위로 차를 모는 것이 과연 안전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긴장하면서 운전석에 앉았다. 걱정한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모래 위로 차를 모는 느낌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덜컹거리는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흡사 조용한 배를 몰거나 푹신한 매트리스 위를 뛰어가는 것 같았다. 사막의 언덕은 모래로 이루어진 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은 산보다는 파도와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 바람에 출렁이는 파도와 사구는 서로 유사한 파장과 파동을 가지고 움직인다. 단지 모래가 물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일 뿐이다. 그러니, 사륜구동 차량을 모래 위에서 몰았을 때 배를 타는 경험이 연상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적절한 느낌이었는지도 몰랐다.

 

압둘라는 좀 더 장난기를 발동했다. 경사가 60도 이상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구 위에서 차를 몰아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놀이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느낌이라 처음에는 간담이 서늘했지만, 보기보다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자동차가 밑으로 내려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대신, 모래가 바퀴를 붙들어주어 차츰 낙하속도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우리 두 아이들은 이른바 '사구 타기Dune Bashing'라는 이 독특한 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나는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었건만, 압둘라는 길도 없는 모래 위를 거침없이 달렸다. 그는 다시 우리에게 물었다. "베두인Bedouin족을 만나보고 싶나요?" 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우리를 어느 천막 앞으로 데려갔다. 허허벌판 위의 주거시설이었는데, 천막이라기보다는 나무와 헝겊으로 만든 간이주택이었다. 남의 집 앞을 이렇게 멋대로 찾아와도 되나 망설이는 찰라, 자동차 소리를 듣고 집안에서 나온 사내가 인사를 하더니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다짜고짜 축구공을 차는 시늉을 한다. 그는 우리를 자기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커피를 내어 왔다. 그곳이 안방이었던 것 같았는데, 모래 바닥 위에 양탄자 한 장을 깔아둔 것이 전부였다. TV가 한 대 있었다. 여기서 TV를 어떻게 켜는 걸까? 살펴보니 저만치 구석에 자동차 배터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주인장이 커피를 가지러 간 사이에 양탄자 위에 누워 보았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이면 양탄자 밑의 모래가 내 몸의 모양대로 함께 움직였다.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딱딱한 푹신함’이었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일까 상상해보았다. 사막처럼 스스로를 비우고, 모래처럼 단조로워져야만 가능한 삶일 것이었다. 일전에 들은 얘기 중에, 사우디 정부가 베두인 사람들을 아파트로 이주시켰더니 다들 아파트 마당에 나와 살더라는 일화가 생각났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얘기였지만, 베두인족의 안방에 앉아서 떠올려보니 더없이 실감 나는 일화였다.

 

다시 사구 위에 올라 차에서 내린 아이들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걸어 다니면서 장난치고, 사구 아래로 뛰어가거나 널빤지를 타고 모래 스키를 즐기더니 급기야는 모래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고운 모래가 옷의 섬유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인지, 나중에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사막에서 입던 옷은 몇 번을 빨아도 붉은 색 흙탕물이 나오더란다. 이렇게 놀다 보면 어느 새 해가 진다. 모래 지평선 위로 저물어 가는 붉은 태양은 저물어 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와히바 사막에는 우리 같은 사막 초심자들을 위해 민간회사에서 지어둔 작은 캠프가 있다. 미리 예약해 두면 샤워가 딸린 조그만 흙집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다. 열 채 남짓한 캐빈이 모래 마당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지어져 있는 야영장이다. 우리는 이곳에 짐을 풀고 양고기와 닭고기를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모닥불을 끄고 하늘을 쳐다보니, 똑바로 노려보기 어려울 만큼 눈부신 달이 떠 있다. 서늘한 바람이 분다. 달마저 지고 나니 비로소 별이 뜬다. 달빛이 너무 밝아서 별들이 보이지 않았던 게다.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마치 큰 붓으로 칠해 놓은 강물처럼 선명하게 은하수가 흐른다. 은하수에 붙여진 은빛 강물이라는 이름은 사색적인 비유가 아니라 정직한 묘사였던 것이다! 심심찮게 뚝뚝 떨어지는 별똥별의 배경에는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 다른 박자로 가물가물 빛을 뿌리고 있었다. 모든 조명이 다 꺼지고 난 뒤의 별빛은 어찌 또 그리 밝은지. 광원은 별빛뿐인데도 땅에는 어른어른 그림자가 졌다. 별 그림자! 들어본 적도 없던.

 

내 경험에 따르면 사막에서 보내는 밤의 압권은, 사실은 모래도 아니고, 지는 해도, 뜨는 별도 아니다. 잠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별빛을 한참동안 감상하기 시작할 무렵, 캠프 직원들은 탈탈거리며 돌아가던 발전기를 끄고 손님들에게 호롱불을 나누어 주었다. 발전기 소리가 막아주고 있던 절대적인 고요가 우리를 덮쳐 왔다. 바람소리도, 물소리도, 풀벌레소리도, 다른 어떤 두런거림도 없던 그 정적은 손으로 만져질 것처럼 짙었다. 밀실에서라면 모를까, 야외에서 이런 고요함을 경험하는 일은 더없이 낯설었다.

 

고요한 모래 위를 혼자 산책했다. 초롱초롱한 별들이 내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별들의 반짝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막은 사방의 지평선을 향해 열린 공간이지만 그 한 가운데에 선 사람으로 하여금 바깥쪽이 아니라 하염없이 내면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이상한 공간이다. 이러한 곳에서라면 필부필부匹夫匹婦라 할지라도 일상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생각을 마음속에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을 터였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대책 없는 질문들이 나를 에워쌌다. 거기서 비로소 깨달았다. 어째서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사막 출신이어야 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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