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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7. Lake District, Scotland (1)

posted Jun 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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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5일, 화요일


방학을 맞은 막내 동생이 서울에서 옥스퍼드로 왔다. 동생은 내가 영국에 있는 동안 수험생활을 독하게 치러냈고, 보란 듯이 서울대에 합격한 뒤 첫 방학을 맞은 것이었다. 막내 동생은 우리 삼형제들 중에서 끈기와 집요함은 가장 뛰어나다.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사실보다 더 박수를 쳐주고 싶은 점은, 좋은 내신성적으로 어지간한 다른 진로가 가능했는데도 자기가 해보고 싶은 일을 쫓아서 고2때 미술공부를 시작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 모험의 첫 걸음을 일단 성공적으로 내딛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호수지방Lake District과 스코틀랜드Scotland를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오후 내내 동생에게 옥스퍼드 구경을 시켜주었고,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긴 여정을 위한 짐을 꾸렸다.


7월 6일, 수요일


아침부터 서둘렀는데도 11시가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영국의 여름답지 않게 비가 부슬부슬 오는 통에 상쾌한 맛은 없었지만, 장시간 운전을 하려면 서늘한 편이 오히려 나았다. 옥스퍼드를 벗어난 뒤, 아내가 주장을 굽히지 않아 스톡온트렌트Stoke-on-Trent에 들렀다. 이곳에는 웨지우드Wedgewood나 로열달튼Royal Daulton 같은 유명 도자기 회사 공장이 있었고, 공장에 딸린 가게에서는 하자가 있는 제품들을 헐값에 팔고 있다. 세컨핸드 샾secondhand shop 또는 팩토리 샾factory shop이라고 부르는 이런 가게들에서는, 백화점에서 “네가 능력 있거든 어디 날 한번 데려가 봐라” 하는 도도한 자세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표를 달고 전시되어 있던 제품들이 얌전한 가격으로 판매된다. 이곳에 가면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들이 흠집 없는 성한 그릇을 찾느라 쭈그리고 앉아 북새통을 이룬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던 터라, 나는 그 서글픈 광경을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아내는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기필코 들러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럴 때는 내가 지는 편이 가정의 평화를 도모하는 길이었다. 결국 쟁반과 그릇 몇 개를 전리품으로 챙긴 우리는 오후 네 시경에 다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호수지방에 도착한 것은 저녁 6시가 넘어서였다. 호수지방이란, 잉글랜드 북서부 컴브리아Cumbria 지방에 위치한 국립공원을 일컫는다. 1만여년 전의 빙하기에 형성된 수많은 빙하호가 울퉁불퉁한 산자락들 사이로 펼쳐져 있는 곳이다. 호수는 개중 큰 것만 해도 십여 개에 달한다. 우리는 그중 가장 큰 호수인 윈더미어Windermere 호수를 끼고 있는 도시 윈더미어로 진입해 예약해둔 숙소에 도착했다. 여관규모 정도랄 수 있는 우리 숙소의 이름은 빌라 롯지Villa Lodge였다. 숙소의 주인 내외는 자기네 아침식사가 훌륭하니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짐을 대강 푼 다음 인근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객실로 돌아와 쉬었다. 습기 차고 쌀쌀한 저녁공기와 동네에 가득한 민물 냄새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실감시켜 주었다.


7월 7일, 목요일


풍성한 영국식 아침식사Full English Breakfast는 주인내외의 호언장담처럼 맛있었다. 우리는 자동차로 윈더미어호수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서 앰블사이드Ambleside를 지나 그라스미어Grasmere로 갔다. 얼룩덜룩한 회색 판석으로 지은 집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라스미어에는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가 생전에 살았던 더브 코티지Dove Cottage와 워즈워드 기념관이 있었다.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가보다. 통영이 시인 김춘수, 유치환과 작곡가 윤이상 등 수많은 예인들을 배출한 것처럼, 영국의 호수지방은 워즈워드를 낳았을 뿐 아니라, 퍼시 쉘리Percy Bysshe Shelley,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나다니얼 호돈Nathaniel Hawthorne, 토머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 존 키츠John Keats, 알프레드 테니슨Lord Alfred Tennyson,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와 같은 작가들의 거처가 되었다. 최근에는 워즈워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싱거운 일화가 한 가지 있다. 2009년 3월부터 미국정부는 스티븐 보즈워드Stephen Bosworth 대사를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임명했다. 그가 동북아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북핵문제와 관련된 관심과 추측이 국내언론을 뒤덮곤 하는데, 주한대사 시절부터 그의 이름의 한글표기는 ‘보스워스’, ‘보즈워스’, ‘보즈워드’ 등으로 들쭉날쭉했다. 언론은 물론이고 정부의 공문서에서도 그러했는데, 나는 간혹 후배가 써 오는 문서를 고쳐주면서 “이봐, Bosworth가 ‘보스워스’면 Wordsworth는 ‘워스워스’냐?”라고 묻곤 했다. 일하다가 던진 객쩍은 농담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워즈워드의 이름을 입에 올리노라면, 눈앞에는 낮은 구름 드리워진 윈더미어 호수가 창졸간에 펼쳐지곤 했다.


워즈워드 기념관을 둘러본 다음에는 호수를 일주하는 유람선을 탔다. 윈더미어 호수는 넓고 아름다웠다. 워즈워드의 시를 꼽아보라면 “I wondered lonely as a cloud”로 시작하는 <수선화Daffodils>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날 호수 위의 선상에서 내 마음 속에 떠오른 시는 <고지의 소녀에게To a Highland Girl>였다. 다음 행선지가 스코틀랜드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내 멋대로의 번역이다. 낭만주의라는 문학사조의 정의를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이 한 편의 시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가름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지高地의 소녀에게

          - 로몬드 호수가 인버스네이드에서


        사랑스러운 고지의 소녀야

        이승에서 너의 혼수婚需는 다름 아닌, 너의 넘치는 아름다움

        일곱 해를 갑절하는 동안

        세월은 멋진 선물을 네 머리 위로 아낌없이 내려주었구나


        여기 잿빛 바위, 저기 정다운 잔디

        막 장막을 반쯤 벗은 저 나무숲

        침묵하는 호수 곁에서

        혼잣말을 되뇌는 폭포수

        이 작은 계곡 안으로

        네 보금자리를 감싸 안은 고요한 산길

        그 속에서

        마치 꿈속에서 빚어진 그 무엇처럼 보이는 너


        세속의 번뇌가 잠들고서야

        은신처 밖을 남몰래 엿볼 법한 미인들 같은, 그러나

        일상日常의 빛 아래서도 천상天上의 빛깔처럼 해맑은

        어여쁜 것


        나는 축복하리, 설령 네가 환영幻影에 불과할지라도

        가장 인간다운 정으로 축복해주리

        너의 마지막 날까지 신의 가호 있기를

        내 비록 너를 다 알지 못하지만, 너의 벗들도 모르기는 매일반

        그런데도 내 눈에는 고이는 눈물


        내가 멀리 떠나 있는 날은 널 위해

        신실한 마음 다해 기도드리지

        순수한 가운데 성숙해져 가는

        상냥함과 소박함을

        내 일찍이 다른 어느 거동, 어느 표정 속에서도

        이토록 또렷이 찾아볼 수는 없었으니


        흩날리는 씨앗처럼

        인적 드문 이곳에 뿌려진 너, 그런 네게

        짐짓 새침하게 당황하는 표정이나

        처녀다운 수줍음이 무슨 소용 있겠니

        산에 사는 사람다운 자유를

        넌 네 이마 위로 깔끔히도 덧쓰고 있거늘


        기쁨 가득 담은 얼굴

        친절한 천성으로 빚은 부드러운 미소

        온전한 품위가 네 곁에서

        너의 몸가짐을 지켜주는구나

        너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만

        네 속에서 샘물처럼

        빠르고 격렬하게 솟구치는 상념想念들을

        그리 풍부하지 않은 너의 어휘語彙가 따라잡지 못할 뿐


        달게 견디는 속박

        너의 몸짓에 우아함과 생기를 더하는 너의 분투

        바람을 마주 안고 날면서

        태풍을 오히려 반기는 새들의 부류를 볼 때면

        나는 속으로 감동하지 않은 적 없었지


        이토록 아름다운 너를 위해 어떤 손이

        꽃다발 엮기를 마다할까

        오, 얼마나 행복한 즐거움일까, 이곳

        히스heath 관목 무성한 골짜기에서 너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나는 양치기로, 너는 양치는 소녀로

        네 소박함을 좇아 살고 입을 수 있다면!


        하지만, 엄중한 현실에 발 딛고

        너를 향한 내 한 가지 소망을 가다듬어 본다

        너는 내겐 마치 거친 바다의

        한 줄기 파도 같다만

        그래도 좋은 거라면, 그런 너에게 청하고 싶은 것 있으니

        (평범한 이웃의 부탁처럼 시시하게 들릴 테지만)

        그저 너를 듣고 너를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아니 너의 그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자, 이제 하나님께 감사를. 이 외딴 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신 그 은총을

        나는 기쁨을 알았고

        내가 받은 상을 안은 채 이곳을 떠난다

        이런 곳에서라면 누구든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알게 되지

        기억이 눈을 가지고 있음을


        그러니 내가 떠나기를 주저할 구실은 없는 것이겠지

        이곳이 너를 위해 마련된 장소임을 알고

        생이 지속되는 한 이 장소는

        언제나처럼 새로운 기쁨을 주리라는 것을 느끼는 한


        해서, 나는 저어함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사랑스런 고지의 소녀, 네게 작별을 고한다

        백발에 이르도록

        눈앞에 생생히 그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내 이미 아니까

        지금 바라보는 작은 오두막

        호수와 계곡과 폭포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정령인 네 모습까지도


7월 8일, 금요일


오전에는 객실에서 뒹굴며 시간을 보냈다. 기운이 넘치는 대학생 동생과, 돌도 되지 않은 갓난쟁이를 동시에 배려한 일정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아내에게 아기를 데리고 숙소에서 좀 쉬라고 하고서 동생을 데리고 근처의 수영장에서 더위를 식혔다. 오후에는 네 식구 모두 컴브리아 반도 남단의 그랜지-오버-샌즈Grange-over-Sands까지 드라이브를 갔다.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기찻길을 건너 모퉁이를 돌자, 안면도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갯벌이 나타났다. 동생과 둘이서 허우적대면서 발목까지 빠지는 갯벌의 중간까지 가봤지만 게도 고동도 없었다. 흙투성이가 된 자동차로 윈더미어의 숙소로 돌아와 다시 짐을 꾸렸다. 히스 관목 무성한 하이랜드highland의 황량한 산하를 보고 싶은 조바심, 또는 기대감이 가슴속에서 슬슬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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