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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4. Jordan, Israel (2)

posted Oct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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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 : 오슬로 협정이 궁극적으로 상정하는 독립국가에 관한 당신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자루 : 완전한 자율성이 보장된다면 단계phase는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단계적, 점진적 해결책을 옹호하는 것은 제한적인 영향력을 가진 일부 인사들뿐이다.

  아잠 : 지금도 가자지구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있다. PNA는 실체가 아니다(hardly a reality).

 

  학생 : PNA에 반대하면서도 전복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자루 : 사실 현재 파타Fatah측과 PFLP 사이에 견해차가 있다. 파타는 PNA가 보다 건설적으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한다. 파타는 60년대에는 팔레스타인의 전 국토 회복을 목표로 운동을 전개했지만 현재는 제한된 목표만을 추구하고 있다. 아직도 이스라엘 내에는 6천여 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가 있다. 지난주에 이들과의 연대감 표시를 위한 시위 승인을 요구했는데, PNA가 시위를 불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강행하자 결국은 집회허가가 나왔다. 이런 식으로 압력행사를 통해 PNA의 방향설정을 돕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노선 차이에도 불구하고, PNA는 아직 적이 아닌 형제다.

  아잠 : 우리는 투쟁을 통해 침략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랍과 무슬림 세계의 광범위한 세력을 동원할 것이다.

  자루 : PLO가 저지른 큰 실수는 아랍 정부의 공식적인 지지에만 의존하고 아랍 인민들의 지원을 경시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처한 어려움이 영원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불의가 있는 곳에 저항이 없을 수 없다. 우리는 공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만 최소한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거부당한다면 계속 투쟁할 수밖에 없다.

  아잠 : 나는 반대다. 공존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존속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권리회복은 불가능하다. “바다에서 강까지(from the sea to the river)” 팔레스타인 전 국토의 회복이 필요하다.

 

  학생 : 협상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더라도, 협상의 과정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현재의 협상방식은 향후에도 적실성이 있는가?

  아잠 : 이스라엘과의 협상은 가치가 없다. ‘보다 나은 외교’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제까지의 방법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점은 현재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자루 : 승자와 패자간의 대화는 동등한 상대간의 협상과 같을 수 없다. 걸프전(90-91)에서 후세인만이 아니라 모든 아랍이 패배한 것이다. 오슬로 협정은 마드리드 협상 때부터 그 조건에 흠결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이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는 지금 진행 중인 협정이행의 최종결과를 보기 전에 말하기는 어렵다.

  아잠 : 이스라엘인들은 외부인으로 이 땅에 왔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개인자격으로 이 땅에 살 수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다. 아랍 세계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오래 전부터 살아 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국가entity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자루 :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난민이었다. 스스로 학대를 당해본 민족이 그들을 받아들여준 아랍 민족에게 어떻게 자신들이 당한 것과 같은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스라엘 국가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나는 나페즈와는 의견이 다르다.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일은 일어난다. 지진이 일어나 산이 평지가 되고 평지가 산이 되기도 한다. 우리 능력 밖의 새로운 현실이 생겨나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도 그와 동등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 600만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역사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다. 유엔이 정직한 중재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레바논, 유고슬라비아, 체첸 등 심각한 침략이 벌어지는 곳에 유엔의 개입은 없었다. 만약 유엔이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환영하겠지만, 이스라엘은 수많은 유엔 결의를 거부함으로써 유엔의 역할을 무시했다. 미국의 영향이 지나치게 큰 것도 유엔의 기능 마비에 일조하고 있다고 본다.

 

  학생 : 자치지구에서의 선거 실시가능성을 어떻게 보는지?

  자루 : 선거 자체는 찬성이다. 다만, 이스라엘의 통제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거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근본적인 입법선거legislative election라면 찬성할 것이지만 단순히 행정위원회의 구성만을 목표로 삼는 선거라면 보이코트boycott할 것이다.

  아잠 : 원칙의 문제로서 선거는 반대한다. 이스라엘에 의해 설정된 한계가 분명한 선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슬로 협정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것을 반대하며, 선거가 시행되더라도 그 결과를 인정치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다. 지하드나 하마스, 무자헤딘의 대이스라엘 공격은 이스라엘의 점령행위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일 뿐, PNA를 욕보이려는데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불화는 서방에 의해 과장되어 보도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5월 1일, 월요일

 

우리는 PNA의 고위급 협상대표를 맡고 있는 하산 아스푸르Hassan Asfour 씨를 만났다. 오슬로 협정의 협상과정에도 참여했던 그는 협정이행의 일환으로 준비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내의 선거에 대해서 말문을 열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측이 팔레스타인인의 참정권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투표권만 인정하려 든다는 점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장차 주권국가가 될 겁니다.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한 일본이나 독일 같은 예도 있지 않습니까?”

 

팔레스타인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에 관해서, 그는 ‘정치적 다원성은 인정하지만 치안에 도전이 되는 정도라면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행정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PNA를 조직하는 데 어려움이 없느냐고 한 학생이 질문했다.

 

  “충원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PLO도 행정적으로 충분한 역사를 가진 기구였기 때문에, 행정적 기술을 갖춘 사람을 찾기는 쉬웠습니다. 문제는 점령지 내부에서 살아왔던 팔레스타인인과 외부에서 온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조화였습니다. 정신적인 공감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행정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가자 지구에는 48-67년간 영국 위임령 법률이 가미된 이집트 행정법이 적용되었고, 서안지구에서는 요르단 법률이 적용되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한 군사명령이 법을 대체했지만, 현재 새로운 법률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는 과거 무장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보상을 바라는 경향이 있는 점이 ‘사소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도 말했다.

 

  “PNA는 군사행동을 팔레스타인 법률 위반행위로 보지만 반대파들은 저항의 연속이자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 있어요. 이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소한 사항들을 트집 잡기도 합니다. (오슬로 합의에 따라 1995년 창설된) 국가안보법정State Security Court을 통한 PNA의 사법조치가 간혹 절차상의 실수(가령 24시간 경과 이전의 형 집행 등)를 빚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위법행위는 처벌되어야 합니다. 법률과 집행의 사소한 불일치보다 중요한 것은 공공선을 보호하는 법적 정신의 구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절차적인 문제들도 상당히 개선되고 있습니다만.”

 

역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치안문제인 듯 했다.

 

  “PNA는 스스로 치안강화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측이 제공하는 치안을 불신하기 때문에 치안책임은 이관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제 사물을 좀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경제적으로 봉쇄한 목적이 하마스Hamas와 같은 과격 그룹을 자극해서 팔레스타인을 억압할 빌미를 얻으려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일정으로, 우리 일행은 PNA 정보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무하마드 다흘란Muhammad Dahlan씨와도 만났다. 1961년생인 그의 이력도 화려했다. 20세 때 파타의 가자지부 수립에 참여함으로써 정치경력을 시작한 그는 7번 투옥되었고, 이집트에서 활동하다가 추방된 후 튀니스Tunis에서 아라파트와 함께 일했다고 했다. 감옥에서 배운 유창한 히브리어가 그의 정보업무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묘한 얘기를 했다. 자기가 보기에는 이스라엘도 아랍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거였다. 안보문제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과, 이스라엘 내부에도 억압 받고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했다. 그는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이스라엘의 피해의식이라고 했다.

 

  “오슬로 합의는 팔레스타인에게 불공평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기 때문에 불평등한 조건을 강요받았죠. 점령지 내에서 이스라엘 병력의 존재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손쉬운 (저항의) 목표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항그룹들은 오슬로 합의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PNA와, 나아가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어요. 이들 때문에 가자지구 경계에 대한 봉쇄가 심해져서 경제적 손실이 막대합니다. PNA로서는 이스라엘이 병력 철수를 가급적 연기할 것임을 진작 예측했습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저항그룹들이 이스라엘 측에 그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생 한 명이 그런 악순환을 해결할 방법이 뭐냐고 물었다. 잠깐 생각하더니, 다흘란 씨가 대답했다.

 

  “그건 닭과 달걀 문제와도 같아요. 양측으로부터 동시에 대담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PNA로서는 이스라엘 측에 일단 수형자 석방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보관련 업무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정보활동에 관해서 이스라엘로부터의 훈련 제공 같은 긴밀한 협조는 없습니다. 다만, 활동 영역에 있어서 중첩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수평적 협조는 하고 있죠. 이스라엘측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첩보원 노릇을 해주기 원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예측 못한 사태의 예방을 위한 정보의 교환입니다. 아직까지 협조의 명확한 정의는 없습니다. 다만, PNA는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는 팔레스타인 정보원들이 팔레스타인 상황에 영향을 미치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선거가 조속히 치러져야 합니다. 선거를 통해 주어진 정통성이 없이는 이적행위자들을 체포해도 정당하게 처벌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와 인터뷰를 한 1995년 이후로도 다흘란 씨는 왕성한 정치활동을 했다. 그가 PNA 정보책임자로 있으면서 만든 2만여 명의 수하조직 덕분에 그는 중요인물이 되었다. 그는 CIA나 모사드Mossad와도 협조했으며, 90년대 내내 그의 조직이 체포한 하마스 관계자들을 고문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한때 사람들은 그의 권력을 빗대 가자지구를 ‘다흘라니스탄Dahlanista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97년 국경통과료를 착복하는 스캔들로 명성에 오점을 남기기도 한 그는 2001년경에는 PNA의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아라파트와 충돌을 빚었고, 그 후로 생전의 아라파트와는 내내 반목했다. 그는 2006년 선거에서 입법위원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자신의 임기동안 하마스와 투쟁할 것을 공언했다. 2007년 팔레스타인 안보위원장으로 임명된 뒤에는 가자에서 하마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을 감행했고, 그의 배후에는 CIA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후, 그는 서안지구에서 총리의 안보담당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무서운 사내를 인터뷰했던 거다.

 

그날 우리는 유엔의 ‘점령지 특별조정관’ 역할을 맡고 있는 미국인 릭 후퍼Rick Hooper 씨도 만났다.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 릭 후퍼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만난 이후로도 유엔 구호활동에 깊이 관여했는데 2003년 바그다드 유엔본부 폭파테러 때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설명해준 내용에 따르면,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60만 명 정도의 난민들을 대상으로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사업기구UNRWA, UNDP, UNICEF 등의 조직들이 편의적으로ad-hoc basis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DOP 이행 이후 공공부문의 급여는 급격히 향상되고 있습니다. 특히 경찰들의 봉급이 그렇지요. 치안문제가 공여국들의 주요 관심사이기는 한데 예산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아서 당분간 현상유지 정도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아직 팔레스타인은 주권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해외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할 수는 없습니다. 유엔은 주로 사회간접자본, 주택 등 대규모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제 점심시간이었다. 우리는 양고기 팔라펠Falafel을 점심 삼아 먹었다. 팔라펠은 두툼한 밀전병 속에 콩반죽으로 만든 튀김을 야채 또는 고기와 함께 넣어 먹는, 이를테면 중동식 햄버거다. 점심 후 우리는 해변의 난민촌Refugee Camp으로 갔다.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얕은 집들, 먼지 날리는 도로, 그 위를 뛰노는 맨발의 아이들. 그리고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닭들이 몇 마리 거리를 거닐었고, 생활하수는 산동네의 시냇물처럼 집과 사람들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외국인들을 보자 꼬마들이 수십 명 몰려와 사진을 찍어달라며 장난을 걸어왔다. 심심했던 것인지, 이들은 우리를 내내 따라다녔다. 그러다 흥이 나자 아이들은 합창을 시작했다. 그것은 동요나 대중가요가 아니었다. 나는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도 저렇게 일사불란한 투쟁가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우리가 만날 사람은 하마스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Ismail Haniyeh 씨였다. 사이으 교수는 우리에게, 그가 최근 부상하고 있는 유망한 젊은 지도자이며, 자신의 생각으로는 언젠가 하마스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보다 불과 세 살 손위였고,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1989년 투옥되었다가 3년 전 출감했다. 우리는 널찍한 천막 속으로 인도되었고, 누군가가 박하mint 향이 나는 차를 가져와 학생들에게 일일이 따라주었다. 하니예 씨는 지금 당장이 무장투쟁의 적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적어도 서방의 학생들 앞에서 과격한 언사를 삼갈 만큼의 현명함은 갖추었음이 틀림없었다. 그의 표정은 비장함을 담고 있었지만 말은 속삭이듯 조용조용 이어나갔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알릴 수 있을 만한 설명도 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쉽게 간파당할 선전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제 만난 인민전선과 지하드의 인사들처럼 정치표어 같은 구호들을 손쉽게 입에 담지도 않았다. 저런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막연하지만, 그는 적당한 선에서 적과 타협할 뜻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난민촌에서 민권운동가인 변호사 라지 수라니Raji Sourani 씨도 만났다. 1953년생으로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우리와 만났을 때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권운동가였다. 그도 수차례 연행되고 조사받고 투옥당한 경험이 있었으며,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은 그를 양심수로 선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내분을 우려하면서도, 주요 모순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일종의 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외부의 적의 존재는 언제나 내부의 사소한 차이를 덮는다. 그래서 주요 모순이 오랫동안 존재하는 사회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적의 존재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다. 타자성他者性, otherness을 너무 세게, 너무 오랫동안 밀쳐내다 보면 그 타자성은 내가 기대고 선 벽처럼 되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프랑스 지식인의 타성적 반미성향 같은 데서 그런 의존적 타자성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를 나는 빌었다. 내가 그것을 진심으로 빌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 분단이라는 주요 모순이 다른 많은 모순들을 가리고 있는 사회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자성의 모순 속에서 자아의 위기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평소 주변의 모든 사소한 모순들을 중요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눌러놓았던 팔레스타인 내부의 갈등은 결국 2000년대 들어 하마스와 파타의 물리적 충돌이라는 양상으로 그 험악한 모습을 드러냈고, 결국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정치적으로 분리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날 난민촌의 길거리에서, 꼬맹이들은 죄 없는 지중해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던지기에 자신이 있다며 나섰던 그 누구도 열 살 남짓한 그 아이들보다 멀리 던지지 못했다. ‘거리에서 이스라엘 군인을 보면 일단 돌을 던지고 보는 것이 저 아이들의 인티파다거든.’ 사이으 교수가 말했다.

 

5월 2일, 화요일

 

나라 안의 국경이나 다름없는 가자의 경계선을 지나느라 또 한 번 법석을 떨며 자치지구를 벗어났다. 이번에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달라붙어 우리 짐을 반강제로 빼앗아 들고 완충지대를 따라왔다. 단돈 몇 세겔을 받아들고 좋아하며 완충지대를 가로질러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부모 세대도 전쟁직후엔 저들과 비슷한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행선지는 동예루살렘이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지리연구소Palestine Geographiac Center로 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지리’는 투쟁의 핵심개념이다! 이곳에서 모하메드 탈랍Mohammed Talab과 할릴 투팍지Khalil Toufakji라는 두 명의 학자로부터 브리핑을 들었다. 그들이 말해주는 예루살렘 내 아랍지역의 현황과 서안지구내의 이스라엘 정착촌 증가현황을 들었다. 그들의 분노 섞인 목소리는 그 ‘연구소’의 조악한 시설과 어딘가 모르게 잘 어우러졌다.

 

우리가 묵기로 한 호텔이 수도관이 터져 임시로 문을 닫는 바람에, 우리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 승천하신 감람산Mountain of Olives에 지어진 수녀원이었다. 검박했지만 경건한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이었는데, 식사도 맛있고 시설도 불평할 것이 없었다.

 

수녀원에 여장을 푼 우리는 서안지구 내로 들어가 정착촌 지도자인 랍비를 만났다. (안타깝지만 그의 이름은 잊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는 “유대아 사마리아 및 가자지구 유태인 정착촌 위원회 의장Chairman, Council of Jewish Settlement in Judea, Samaria and Gaza”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첫눈에 척 보기에도 강골인 노인 분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시온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유태인들에게 장구한 세월동안 하루 세 번씩 매일 기도의 제목이 되어온 목표였습니다. 유태인이 ‘역사로의 복귀’를 위해 선택한 수단은 정치적인 수단이었죠. 오토만 제국 시절 북아프리카의 유태인들이 예루살렘과 헤브론 등 거룩한 땅으로 복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동유럽지방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이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공산주의자인 유태인들이 강한 혁명적 사명감을 가지고 이 지방으로 들어와 키부츠와 같은 사회주의적 실험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초기부터 아랍인들과의 공존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초창기 이주자들은 시온주의적 신앙이 너무나도 강렬했던 나머지 이 땅에 이미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거부했습니다. 주로 북부 및 해안지방에 정착한 초기 이주자들은 산악지방 정착을 등한시했는데, 막상 벧엘Bethel 등 구약의 주요 사적지들은 요단강 서안 산악지방에 다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장한 설명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67년 6일 전쟁을 통해 새로운 지역이 해방되었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와 같은 대국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치른 겁니다. 히틀러의 학살 이후 한 세대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두 번째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올 거라는 공포감을 모든 유태인들이 실감했습니다. 정착촌 건설은 건국 초기부터 줄곧 유태인들이 힘겹게 영토를 주장하기 위한 전형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제네바 협약에 의하더라도 점령국의 주민은 점령지 내로 적법하게 이주할 권한이 있어요.”

 

학생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인에게도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학생 :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 거주할 아랍인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랍비 :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아랍 국가들이란 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노선에 따라 인위적으로 현재의 국가 단위로 나눠졌다. 따지고 보면 시리아든 요르단이든 한 개의 거대한 아랍민족One Big Arab Nation이 금세기에 들어와 갈라진 결과물이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주민들 중 상당수는 그 이후에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로부터 이주해 왔다. 그들 중 상당수도 원주민이 아닌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문제를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한 이 좁은 땅’에서가 아니라 아랍 국가들의 광활한 영토에서 해결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유태인들이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영토를 확보할 권리가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학생 :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의무복무를 하면서 군대에서 점령군으로서 심리적 충격trauma을 느끼지는 않는가?

  랍비 : 우리는 오늘날은 지원병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은 군사력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고 기꺼이 복무한다. 이념적 이유에서 복무를 거부하는 경우는 극소수다. 군복무가 - 특히 저항운동 기간 중에는 -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군대는 엄정한 군기 아래서 복무한다. 우리는 유태인으로서 핍박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세계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진압군이 군중의 폭동을 점잖게 다루는 것이다. 시카고 경찰이 법을 어긴 시위대를 어떻게 다루는지 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라는 약점 때문에 저항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지 못하는 거다. 오슬로 협정은 저항운동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승리로 끝났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에 불과하다.

 

가엾은 오슬로 협정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학생들의 질문은 이어졌다.

 

  학생 : 역사로부터 연고권을 찾는다는 점에서 당신네나 팔레스타인 쪽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랍비 : 다르다. 이스라엘은 고래로부터 구체적인 국가적 정체성statehood을 가졌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만의 국가를 구성했던 적이 없다. 이스라엘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연고 없이 이 지역을 단순히 ‘점령’한 것이 아니다.

  학생 : 정착촌 공동체는 이스라엘 정부에 어떤 방식으로 견해를 전달하는가? 어떠한 이스라엘 정부를 원하는가?

  랍비 : 이스라엘의 현 정부는 시온주의적 관점을 상실했다. 상류층 인사들이 좌익 행세를 하는 게 현실이다. 설사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서안지구 전체가 반환되더라도 나는 여기 남을 것이다. 당신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동정한다면, 적어도 같은 정도로 우리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전 세계에서 오직 유태민족만이 유독 그들의 고향homeland에서 살기를 금지당하고 있다.

  학생 : 아랍 국가들의 개별성과 그들의 민족주의를 이해할 수는 없겠는가?

  랍비 : 지금도 이해한다. 이해할 뿐이겠는가? 나는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I understand it now. I do not just understand it. I suffer from it.)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정보기관이 독일군의 암호체계를 해독하고 이를 통해 독일이 코벤트리Coventry를 폭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럼에도, 영국정부는 코벤트리 주민을 소개시키면 독일 측이 암호 노출을 알아챌 것을 우려하여 코벤트리의 피폭을 감내했다. 우리가 감정에만 좌우되면 장기적인 善을 달성하지 못할 수가 있다. 이 좁디좁은 땅에서의 2개국 방안two-state option은 결코 종식되지 않을 잔혹극을 향한 공식일 뿐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든든한 지원을 믿고 있다.

  학생 : 그렇다 하더라도, 정착촌의 건설이 실현가능한 합의 이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지 않은가?

  랍비 : 케임브리지에서 온 어린 아이들youngsters로부터 정착촌이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묘사되는 것을 듣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대들은 이 정착촌이 건설되기 전에 이 땅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기나 하는가? 우리는 남이 지어놓은 아파트에 입주한 것이 아니다. 이곳에는 흙과 돌 뿐이었다. 정착민들은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벽돌 한 개, 기와 한 장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가면서 이 촌락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곳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여기에 그렇게 지어진 촌락이 있기 때문이다. 손수 정착촌을 건설한 사람들은 미국에서, 영국에서, 노르웨이에서, 러시아에서 일부러 건너온 유태인들이었다. 이들이 그 나라들에서 부랑자로 지내던 사람인줄 아는가? 이들은 그곳에서 의사였고, 교수였고, 학자였고, 상인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국가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서 평생 동안 정착촌을 가꾸었다. 이제 와서 무슨 정치적 협상의 결과를 들이밀면서 그들더러 이곳을 비우라고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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