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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7. Italia (2)

posted Oct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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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금요일

 

임훈민 선배는 식구들과 여름휴가를 떠나면서 자기 집을 우리에게 숙소로 내어주었다. 숙박비를 아끼면서 좀 더 편안히 쉬라는 뜻으로 그토록 살가운 배려를 베풀면서도, 임 선배는 도리어 자기가 데리고 다니면서 보살펴주지 못한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예기치 않게 우리는 남의 빈집의 점령자가 되어버렸다. 반가운 소식은, 사라졌던 우리 짐 가방이 드디어 로마 공항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방은 중간 기착지였던 바레인에서 잘못 분류되어 북유럽까지 갔다가 로마로 돌아왔다고 했다. 아내는 먼 여행이라고 아이들 옷가지를 가방에 많이도 챙겨 넣었었는데, 가방이 사라지는 바람에 지난 며칠간 두어 벌 뿐인 아이들 겉옷과 속옷을 빨아 너느라 매일 밤 호텔에서 부산을 떨어야 했었다. 낯익은 여행 가방을 되찾으니 헤어졌던 식구와 상봉하는 것처럼 반가웠다. 식구들이 패션이 이제야 좀 관광객답게 ‘업그레이드’ 되었다.

 

점심식사 후에 시내로 산책을 나갔다. 로마라는 도시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라는 점을 실감했다. 관광객에게는 행복한 일이지만, 이렇게 널따란 유적들 틈으로 난 비좁은 도로를 이용해야 하는 주민들에게는 불편한 노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막론하고 땅 좀 팠다 싶으면 고대 유적이 튀어나와 웬만해서는 새 건물을 짓는다거나 도로를 확장할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로마 시내에서 유일하게 폭이 30m에 이르는 대로인 포리 임페리알리 도로Via dei Fori Imperiali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1932년에 문화계의 비판 따위는 무시하고 뚫어버린 길이다. 그는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까지 고대의 유적들 사이로 행군하는 이탈리아군의 모습을 히틀러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우리는 포리 임페리알리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편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광장과 트라야누스 광장을 돌아보았다. 현대 도로의 높이에 비해 십여 미터 낮은 곳에 자리 잡은 이 고대의 광장은 너무 낡아서 본래 모습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콜로세움에도 왔다. 거의 2천 년 전에, 4만 명의 포로를 동원하여 지었다는 건물이다. 세 가지 느낌이 들었다. 첫째, 이런 건물을 불과 8년 만에 뚝딱 지었다는 걸 보면 역시 로마제국은 토목 제국이었다. 로마가 가졌던 힘의 더 큰 부분은 군사력이 아니라 토목건축능력이었음이 틀림없다. 강 건너편의 적을 공격할 때도 제대로 된 다리를 짓고, 공성전을 할 때면 성벽만큼이나 높은 언덕을 만들어버렸던 로마군. 로마가 정복지에 길을 닦고 수로를 놓지 않았다면 제국은 팽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진화된 문명과 법관념으로 주변의 나라들을 ‘로마화’하면서 파죽지세로 성장했던 로마. 그러나 그 로마 제국도 어김없이 쇠퇴와 해체의 길을 걸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는 이유는 꽃이 생물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발전하는 나라가 없는 이유는 나라가 살아 있는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일 터이다.

 

둘째, 5만 명이 넘는 관중이 여기 모여서 한 일은 고상한 회의가 아니라 싸움 구경이었다. 싸움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구경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보다.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는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적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피를 보기 원하는 동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로, 이소룡이 생각났다. 맹룡과강猛龍過江에서 척 노리스를 때려눕히던 곳이 콜로세움이었는데, 거기서 몸을 풀면서 고양이처럼 등뼈를 구부리던 이소룡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폭력에 매혹되는 습성으로 치자면 나도 예외가 아닌가보다. 중세에 교회를 짓는 데 쓰느라 여기저기 자재가 뜯겨진 콜로세움의 헐벗은 이미지도 주먹과 발길질 못지않게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더운 날씨에 유적을 구경하자며 끌고 다녔더니 일곱 살짜리 둘째가 피곤해서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다. 제 형이 그 나이 때 그랬던 것보다 어리광이 심한 걸 보면 막내 티를 내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목말을 태우고 다녔다. 이왕 나온 김에 고대 로마 건축물중 가장 잘 보존되었다는 판테온Pantheon도 구경했다.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이 신전은 기원전 31년 집정관 아그리파가 봉헌한 것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인 서기 125년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고, 7세기 이후로는 기독교 성당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만신전'으로 지어진 건물이 유일신의 성전으로 쓰였다는 얘기에 씁쓸한 생각도 들었지만, 수많은 고대 로마의 건물들이 중세 초기에 파괴와 약탈을 겪는 동안 판테온이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성당으로 개축된 덕분이라니, 그것도 다 이 건물의 기구하면서도 장구한 팔자였던 모양이다. 이천년 전에 지어진 판테온은 건축학적으로도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철근이 없이 지어진 가장 큰 콘크리트 건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아치와 기둥으로 건물의 하중을 분산시킨 지혜가 멋들어졌다.

 

오후에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혔다. 동전을 하나씩 받아든 우리 꼬마들은 옆의 사람들을 흉내 내어 눈을 감고 진지하게 소원을 빌더니 뒤로 돌아 어깨너머 분수를 향해 던졌다.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묻지는 않았다. 저물어가는 저녁 볕을 등으로 받으며 우리는 어슬렁어슬렁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에 들어섰다. 유럽의 관광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페루 민속악단이 광장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두 아이들은 이번에는 웬일인지 비둘기를 쫓아다니지 않고 악단 앞 길거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한참동안이나 음악을 감상했다. 전차경기장의 모양을 본떠서 기다란 타원형으로 만든 나보나 광장은 로마의 여러 광장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뜨내기인 우리 눈으로는 광장 자체가 아름답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은 광장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이 광장의 분위기였다.

 

우리는 광장 한 켠의 노천카페에 앉아 스파게티를 먹었다. 스파게티 봉골레를 시켰는데 웨이터가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를 가져왔기에 "나는 스파게티 봉골레를 시켰다"고 말했다. 젊은 웨이터가 아주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게 스파게티 봉골레 맞다"고 천연덕스레 말하고는 접시를 놓고 갔다. 성질을 한번 부려볼까 하다가, 웨이터의 말투가 퉁명스럽기보다는 애교스러웠다는 정상을 참작하고,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다가 스파게티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하는 아이들의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 그냥 참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스파게티도 맛은 좋았다. 노천카페 앞에 길거리 광대가 나타나 지나가는 행인들을 골리며 재롱을 부렸다. 나에게는 광대의 재주보다 행인들의 여유 있는 반응이 더 신기했다. 광대가 뒤쫓아 가며 엉덩이를 만졌던 아주머니나, 광대가 도둑 잡는 경찰 시늉을 하며 내리친 고무 몽둥이에 머리를 맞은 아저씨나 한결같이 껄껄 웃으며 가던 길을 갈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 이런 사람들이 광장의 참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7월 14일, 토요일

 

이번에는 남부 이탈리아 구경을 나섰다. 아침 일찍 로마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우선 폼페이Pompeii로 향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Monte Vesuvio 화산 폭발로 멸망한 비운의 도시.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귀족들의 휴양지였다가 화산재에 묻혀버렸던 폼페이는 1549년 수로공사중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발굴당시 발견된 시신들의 석고본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끔찍한 주검들을 보면서도 막상 이 도시가 당한 비극이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덥지만 화창한 날씨에다 잘 정돈된 잔디밭 사이로 펼쳐진 유적들, 그 위로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들의 모습이 비극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라틴어에는 ‘화산’이라는 말이 없을 정도로 로마인들에게 화산의 위험은 낯설었다고 한다. 지금도 활화산인 베수비오 인근에는 수백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저만치 보이는 베수비오의 중턱에서는 뭉게뭉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지역에 멋진 휴양지가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강한 이탈리아 억양의 영어로 유적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납으로 된 수도관을 가리키며 “당시 부유한 빌라들은 납 수도관을 갖추고 현대인만큼 편리하게 식수와 목욕물을 사용했는데, 납중독 때문에 일찍 죽거나 미치는 경우도 많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은근히 부자들이 당한 고통이 고소하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남의 일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인류가 전부 멸망하고 난 다음에 외계인들이 지구를 ‘발굴’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지구인들은 자기 수명을 단축하는 공해물질을 내뿜는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심지어 방사능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을 에너지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많은 사고를 경험하면서도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이동수단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자살충동이 강한 생물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폼페이의 부자들을 비웃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라는 종에게 편리하고자 하는 욕망은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에 결코 밑돌지 않는다! 폼페이를 다시 떠난 버스는 우리를 싣고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라는 나폴리Napoli에 들렀다. 가파른 산이 품고 있는 항구는 아름다웠다. 난바다를 항해하던 외로운 배들은 이 항구에 들어서면서 눈앞을 거의 직각으로 막아선 병풍 같은 산자락에 펼쳐진 나폴리의 풍경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폴리는 화려한 도시는 아니었다. 높다란 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가옥들은 장식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나폴리의 매력은 정갈한 화려함이 아니라 떠들썩하고 수더분한 분위기였다. 한편, 이곳은 북부 이탈리아에 비해 소득이 낮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범죄율도 높다고 한다.

 

나폴리에 처음 도시를 세운 사람들은 기원전 7세기경의 그리스인이었다는데, 그래서 그리스 말로 ‘신도시(네아폴리스Neapolis)’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아름답고도 기구한 도시는 그 뒤로 동고트족, 비잔티움 제국, 노르만족, 호엔슈타우펜 왕가, 아라곤 왕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부르봉 왕조 등등 다양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의 분위기가 떠들썩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었다. 우리 버스는 나폴리에서 잠깐 정차했다가 다시 목적지인 소렌토Sorrento로 출발했다.

 

바로 인근의 도시인데도, 나폴리와 소렌토의 분위기는 신사동과 청담동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소렌토는 바다에 면한 가파른 산 위로 이루어진 도시였는데, 첫눈에도 고급스러운 관광지로 보였다. 버스는 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소렌토의 골목길을 누비더니, 절벽을 면하고 있는 얌전한 호텔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객실에는 바다를 굽어보는 발코니도 딸려 있었다. 아직 날이 저물기 전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호텔 수영장으로 가려는데, 아뿔싸, 수영복을 빠뜨리고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텔 옆의 가게에 들러 수영복을 샀고, 아이들은 모처럼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다. 호텔에서 절벽을 타고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요트 접안시설이 있는 바닷가였다. 바닷물에도 뛰어들어 티레니아 해Mare Tirreno의 파도에 몸을 싣고 둥실둥실 떠다녀 보았다. 일상으로부터 이보다 더 멀리 달아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찌 노래 한 자락 부르지 않을 소냐. 소렌토로 돌아오라고.

 

7월 15일, 일요일

 

시간에 맞춰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버스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왔다. 이제 카프리 섬isola di Capri을 방문할 차례였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소렌토 항구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엽서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항구에 내렸고, 배에 올랐다. 웬만큼 육지에서 멀어졌을 때, 사람 좋아 보이는 선장은 우리 두 아이들에게 와보라고 하더니 배의 방향타를 맡기고 뒤에 서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저 쪽으로 몰아보라고 했다. 까불어대던 꼬마들은 갑자기 진지해지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배를 몰았다. 승객들이 웃으며 번갈아 사진을 찍었다. 카프리섬도 높다랗게 솟은 화산섬이었다. 섬의 가파른 면을 스쳐 가는데 선장이 절벽 위를 가리켰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궁이 거기 있었다.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갔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위치였다.

 

로마의 두 번째 황제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기원전 42~37년)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였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던 그의 친아버지는 공화정 말기의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적대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파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적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던 것이다. 양아버지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은 뒤 자기 친손자들의 양육을 티베리우스에게 맡겼다. 그냥 맡긴 것이 아니라 티베리우스가 사랑하던 아내 빕사니아와 이혼시키고 그를 자기 딸 율리아와 결혼시킨 다음이었다. 속내가 복잡한 사내가 되었을 법도 한 성장경로랄까.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이제 막 제국의 길로 들어선 로마의 내치를 튼튼하게 다졌지만, 재정 낭비를 막기 위해 전차 경기와 검투사 시합을 중단시켰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 인기는 낮았다. 대중의 천박함을 경멸했던 것인지, 대인기피증이 있었던 탓인지, 티베리우스는 68세가 되던 서기 26년부터 죽을 때까지 11년간을 로마에는 가지도 않고 카프리섬에 틀어박혀 제국을 통치했다. 이를테면, ‘포퓰리즘’이라는 현상의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서 제국을 통치한 사내였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지금도 로마에서 오기가 이렇게 번거로운데 2천 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제2대 황제가 이런 데 틀어박혀서 통치를 하는데도 로마가 세계제국으로서 기틀을 닦은 것을 보면 티베리우스가 매우 유능했거나 제국 초기의 통치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었거나, 로마의 국운이 좋았거나, 셋 다였을 것이다. 그의 거처에 꼭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서 선상에서 먼발치로만 바라보았다. 인간의 雜沓을 혐오하면서도 인간집단의 본성에 대해서 놀라운 통찰을 보였던 티베리우스. 그의 재능을 흉내 낼 길은 없겠지만 그 심정은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카프리 항구에 상륙해서 소형버스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갔다. 정류장에 내려 숨이 턱에 닿을 만큼 오르막을 올라가니 하늘과 맞닿은 아나카프리Anacapri 시내가 나타났다. 돌을 깔아 만든 도로를 사이사이에 끼고, 작지만 멋진 지중해식 건물들이 쪽빛 바다를 내려보며 서 있었다. 이승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상한 마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다 위에서 작은 조각배로 갈아타고 유명하다는 푸른 동굴Grotta Azzurra에도 들어가 보았다. 카프리섬 옆구리의 해상에 뚫려 있는 이 작은 해식동굴은 로마제국시절부터 유명했다. 입구가 너무 작아서 네 명이 탄 보트는 전원이 바닥에 바짝 누워 안과 밖을 이어주는 쇠사슬을 잡아당겨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뭐 하러 이런 짓을 하나 싶어 사실은 좀 짜증스러웠는데, 동굴 안에 들어가 보고는 악 소리가 절로 났다. 바깥쪽 입구에서 물속으로 비쳐 들어온 햇빛이 동굴 속 바다를 온통 형광빛 코발트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형광빛’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이 아니었다. 손님을 안내해 들어온 사공들은 저마다 동굴 속의 푸른 조명을 받으며 선미에 서서 이탈리아 가곡을 멋지게 뽑아내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동굴 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소렌토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밤을 달려 로마로 돌아오는 내내, 그 신묘한 카프리의 물빛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7월 16일, 월요일

 

임훈민 선배의 빈 집에서 온 식구가 늦잠을 자면서 여독을 풀었다. 우리가 2001-2003년간 살고 있던 오만은 볕이 워낙 뜨거워서 수도관이 땅속에서 가열된다. 집에서는 수돗물을 틀면 데일만큼 뜨거운 물이 나오기 때문에 샤워를 하려면 물을 식혀서 해야 한다. 로마에 휴가를 와서 아이들이 가장 반가워한 것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찬 물이었다. 임 선배가 알뜰하게 짜준 일정 덕분에, 내일은 당일 코스로 관광버스를 타고 피렌체Firenze 구경을 하도록 되어 있다. 오만에서 심심할 때 르네상스에 관한 책들을 좀 읽어두길 잘한 것 같다. 서로 씨름하면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타일러 일찍 재웠다.

 

7월 17일, 화요일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탔다. 꾸벅꾸벅 조는 사이에 버스는 토스카나Toscana 평원을 지나 어느새 피렌체 시내 바깥쪽 언덕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그림에서 보던 피렌체의 풍경이 아르노강Fiume Arno 저 편으로 펼쳐져 있었다. 붉은 벽돌 지붕의 집들. 그 사이사이로 뾰족이 솟아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프러스 삼나무들. 스카이라인에 쾅 하고 무게중심을 찍는 대성당의 붉고 둥근 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 메디치Medici집안이 다스리는 동안 금융과 정치의 중심지였던 곳.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도나텔로Donatello,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같은 화가들과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같은 작가들이 나고 자란 곳.

 

시간이 많지는 않았으므로, 피렌체 시내는 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하기로 했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두오모는 부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가 설계한 붉은 색 벽돌 돔이 특색이다. 로마의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부르넬레스키는 비계scaffolding를 설치하지 않은 채로 이 돔을 만들었다는데, 설계도가 사라지는 바람에 어떤 비법을 사용했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고 했다.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는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처럼 다리 양쪽으로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였던 1966년, 아르노 강은 무섭게 범람해서 피렌체 시내를 삼켜버렸다고 한다. 길거리의 건물에는 그때 물이 들어왔던 높이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족히 바닥에서 3미터 정도 높이는 되어 보였다. 그때 유실된 문화재도 제법 많다는 설명을 하면서, 가이드는 아까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돌로 만든 도로는 베키오 정청Palazzo Vecchio이 있는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으로 이어졌다. 책에서 숱하게 접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15세기 메디치의 사내들이 피렌체를 다스리던 관청, 공직에 있던 마키아벨리가 드나들었던 바로 그 팔라초 베키오가 눈앞에 있었다. 메디치가가 물러난 뒤 피렌체를 광신의 불길로 사로잡았던 전도사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가 결국 화형을 당했던 곳도 바로 이 시뇨리아 광장에서였다.

 

광장의 한쪽에는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를 소장한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이 있었다. 그 입구에는 미켈란젤로의 저 유명한 다비드 상(물론 복제품)과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걸작 <메두사를 죽인 테세우스>가 있었고,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죠반니 볼로냐Giovanni Bologna와 잠볼로냐Giambologna의 작품인 <사비니 여인의 납치>와 <코지모 디 메디치 기마상>도 광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과연 르네상스 회화 작품의 보고였다. 장식에 불과하던 회화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독창적인 예술로 변화하는 혁명적인 과정의 증거물들을, 이 미술관은 풍성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미술관 안에서 다비드상의 진품을 감상하고 있는데 내 맞은편에서 거구의 사내가 작은 스케치북에 다비드상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와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스페인 가족의 가장이었다. 나처럼 그도 식구들을 한 쪽에 기다리게 만들고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 반갑고 신기했다.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하고 스케치북을 교환해서 구경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콧수염을 기른 그의 이름은 호세 몬티Jose Monty이고 별명은 페페Pepe라는데, 체중이 0.1톤은 족히 되어 보였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념 삼아 서로 스케치북을 바꾸어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다. 그는 내 스케치북에다가 눈앞에 보이는 가로등과 벽돌건물과 나무들을 그려주었다. 예술은 아마추어들도 하나로 만들어 준다! 피렌체가 선사해 준 근사한 기념품이다.

 

산타 크로체 광장 옆의 성당 내부에는 피렌체가 배출한 예술가들의 묘지가 있었다. 피렌체의 자랑인 미켈란젤로와 작곡가 로시니의 묘도 제각각 특이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교황파와 황제파의 정쟁에 휘말려 유배를 떠난 뒤 베네치아와 베로나를 전전하면서 생전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단테의 묘지도 있었다. 단테가 40세가 되던 해부터 죽을 때까지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쓰면서 그가 묘사한 지옥의 풍경 속에는 고향을 떠난 방랑생활의 설움도 담겨 있을 터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 오르기 전에 다시 한 번 돌아본 피렌체의 지붕들 위로는 불타는 낙조落照가 떨어져 그 붉은 색이 더 붉게 보였다.

 

7월 18일, 수요일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부지런히 다니느라 녹초가 된 우리 식구는 오전 내내 꼼짝 않고 쉬었다. 임 선배 집의 거실에 배를 깔고 아이들과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점심은 근처의 피자집에서 먹었다. 허름해 보이는 동네 식당이었는데 그 맛은 그날 이후로 우리 네 식구가 두고두고 회상할 만큼 환상적이었다. 오후에는 영어 책을 파는 시내의 서점에 들러 아이들이 읽을 책을 몇 권 샀다. 오만에 돌아가면 영어 책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잊지 않고 해야 할, 중요한 쇼핑이었다.

 

오후에는 ‘인민광장’이라는 의미의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을 산책했다. 테베레 강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광장인데, 한가운데는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기념으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왠지 뜨겁고 매운 국물이 먹고 싶어져, 저녁은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7월 19일, 목요일

 

열흘간의 휴가를 알차게 보냈다. 큰 아이는 학교에서 이번 학기 역사 시간에 고대 로마를 배우게 될 거라며 도움이 되겠다고 했다. 유럽을 다시 찬찬이 관광하게 될 일이 언제 있을지 이젠 알 수 없다. 즐거웠지만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중동의 뜨거운 우리의 일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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