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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Andalucia y Costa del Sol (1)

posted Jun 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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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4일, 월요일


새벽 2시에 집을 나섰다. 4월에 들어섰는데도 영국의 밤 날씨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이 길고 어두운 겨울은 한여름이 찾아올 때까지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 작정인 듯 싶었다. 큰맘 먹고 햇볕을 찾아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길이었다. 백일을 갓 넘긴 아기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춥고 어둡고 긴 겨울은 아기에게도 좋을 리가 없었다. 옥스퍼드의 기숙사는 좁았고, 집밖으로 나와도 우리의 행동반경은 작았으므로, 옥스퍼드에서 겨울을 난 아내는 거의 산후우울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침체된 기분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꺼냈더니 옥스퍼드에 함께 유학중이던 동년배의 직장선배 윤성덕은 흔쾌히 합류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우리의 목적지는 태양의 해안Costa del S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페인 남부지방의 소도시 푸엥히롤라Fuengirola였다. 저렴한 패키지 여행이었으므로 새벽 비행기를 타려고 피난민처럼 자는 아기를 들쳐 업고 커다란 여행가방을 싣고서 개트윅Gatwick공항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우리 짐이 너무 큰 게 아닐까 염려되었다. 아기를 데리고 처음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저귀며 이유식, 심지어 젖병소독기까지 챙겨 넣다 보니 대형 이민가방은 어느새 가득 찼고, 무게는 우리 두 사람에게 허락된 40kg을 넘을 지도 몰랐다.


새벽길을 두 시간쯤 달려 공항의 장기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터미널로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느라 주차장 입구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덜덜 떨었고, 항공권을 버스에 떨어뜨리고 내리는 바람에 소리치며 버스를 세우느라 한바탕 해프닝도 벌였다. 체크인 카운터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들어올리기도 버거운 우리 가방이 문제가 되었다. 항공사 직원은 허용된 무게가 40kg은 맞지만 그걸 이렇게 가방 하나에 몰아넣어 가지고 오면 어떡하냐며 난감해 했다.


한숨을 쉬던 그 직원은 초보부모에다 초보여행자 티가 역력한 우리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별 수 없겠다 싶었던지 '어떻게 해 보겠다'면서 탑승권을 내주었다. 때마침 선잠에서 깬 꼬마는 가엾은 표정으로 칭얼대고 있었다. 거 참, 스페인이라는 데 한 번 가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우리 넷 다 정신없는 상태로 영국을 떠났다. 우리가 정신이 있건 말건 비행기는 산뜻하게 이륙했고 태양의 나라, 피카소와 달리를 낳은 안달루시아Andalusia를 향해 날기 시작했다.


4월 5일, 화요일


기내방송에 선잠을 깨 보니 언제 착륙을 했는지 벌써 말라가Malaga 공항이었다.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피곤해도 괜찮을까 싶었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 문을 나서며 들이마신 공기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이슬처럼 증발시켜버렸다. 따뜻하게 바스러지는, 달콤한 공기였다. 태양이 눈부셨고, 볕이 내려쬐는데도 그늘은 시원했다. 덥지만 훈풍이 습기를 순식간에 말려버려, 흐르던 땀이 옷을 적실 새도 없는 신기한 날씨였다. 앞에서도 썼듯이, 어느 도시를 가든, 공항에서 처음으로 맡는 그곳 공기의 냄새는 기억에 문신처럼 남는다. 포도주 감별사 흉내를 내서 안달루시아 공기의 맛을 표현하자면, ‘달콤한 흙냄새를 머금은 드라이한’ 향기였다. 멋진 여행기를 기대하는 독자가 계시다면 죄송한 얘기지만, 안달루시아를 종횡으로 누비며 구경한 그 어떤 풍경도 말라가 공항의 공기만큼 나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공항 주차장에서 우리가 예약한 빨간 색 르노 렌터카를 찾아 몰고 말라가를 벗어나 토레몰리노Toremolino를 지나, 푸엥히롤라에 도착했다. 우리가 2주간 머물 숙소는 아파트식 콘도였다. 큰 가방을 끌고 올라와 대강 짐을 풀고 아파트의 뒷마당에 있는 수영장에 뛰어 들어갔다. 마음은 급했지만 아직 수영하기엔 조금 이른 계절이어서 물은 몹시 차가웠다. 몇 바퀴 돌았는데 몸이 싸늘해지는 것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물에서 나와 볕만 쬐다 다시 들어왔다.


숙소 바로 앞은 해변이었다. 영국인들이 어지간히도 찾아왔던 모양인지 해변의 이름이 “영국인의 해변Playa del Ingles”이었다. 영국에서라면 상점들이 문을 닫고도 한참 지났을 여덟시쯤, 그제야 문을 다시 여는 식당과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을 찾아온 영국인들은 대개 우리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길고, 춥고, 어둡고, 축축한 북해의 겨울이여, 여기서 나는 너를 잊겠다!


4월 6일, 수요일


단체관광을 해볼까 자유롭게 자동차를 몰고 다닐까 의논하다가 일단 손수운전 쪽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지도를 보면서 론다Ronda라는 도시를 찾아갔다. 낯선 타국에서의 첫 운전은 생각보다 스릴 넘치는 모험이었다.


  "와이퍼는 왜 켜?"

  "깜박이를 켜려고 했지. 영국 차랑은 또 반대잖아."

  "고속도로에서 어디로 나가면 되나?"

  "으악, 출구를 놓쳤다."

  "괜찮아. 다음에 나가서 거꾸로 오면 돼."

  "갈림길이다! 어느 쪽이냐?"

  "가만 있어봐. 이거 왜 지도랑 다르냐."


우리는 주로 이런 대화를 나누며 2시간쯤 구불구불한 길을 달렸다. 차창 밖의 풍광은 지금껏 본 어디와도 사뭇 다른 것이었다. 주로 메마른 흙과 바위로 이루어진 투박한 경치였다. 론다는 깊고 가파른 절벽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시가지를 세 개의 다리로 이어붙인, 기이한 느낌의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 푸에르타누에바Puerta Nueva는 아찔한 높이의 절벽 사이로 한 도시의 두 마을을 잇고 있었다. 그 이름처럼 대문같이 생긴 이 다리의 열린 교각 사이로 다니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계곡을 지나는 무심한 바람이었다.


론다는 근대 투우의 발상지로서, 이곳의 투우장은 18세기에 지어졌다. 투우 경기는 본 적도 없고,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이로써 우리는 투우의 발상지에서 텅 빈 투우장을 둘러본 축에는 들게 되었다. 살육을 재미삼아 즐기면서 관람하는 동물이 인간 말고 또 있을까? 아니면 거꾸로, 살육을 제도와 법으로 금지하고 규율하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3000페세타를 내고 관광객용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자세히 살펴보아도, 론다는 신비로운 도시였다.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두개의 마을이 절벽을 사이에 두고 하나로 이어진 모습이, 마치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 속에나 등장할 것처럼 보였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 같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도시들 중 하나가 되기에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돌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다리를 묘사한다.

“그런데 다리를 지탱해 주는 돌은 어떤 것인가?”

쿠빌라이 칸이 묻는다.

“다리는 어떤 한 개의 돌이 아니라 그 돌들이 만들어내는 아치의 선에 의해 지탱됩니다.”

마르코가 대답한다.

쿠빌라이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이렇게 묻는다.

“왜 내게 돌에 대해 말하는 건가? 내게 중요한 건 아치뿐이지 않은가?”

폴로가 대답한다.

“돌이 없으면 아치도 없습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니 무어양식의 교회며 건물들이 시야 속으로 앞 다투어 뛰어들었다. 바뇨스 아라베스Baños árabes라는 아랍식 목욕탕 유적도 있었다. 13세기경에 지어진 이 공중목욕탕은 아랍식 목욕장 유적중 가장 잘 보존된 것이라고 하는데, 영국의 바스Bath에서 보았던 고대 로마 목욕탕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 욕심을 부려 유럽 최대의 동굴이 있다는 네르하Nerja까지 달려갔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관람시간이 지나버려 동굴입구만 보고 돌아서야 했다. 역시 뭔가 그럴듯한 것을 '덤으로' 보겠다는 욕심은 삼가는 편이 좋다.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었다. 네르하는 스페인 남해안을 면한 도시로, 말라가보다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꿩대신 닭이다 라는 심정으로 우리는 ‘유럽의 발코니Balcon de Europa’라는 곳을 찾아갔다. 파도로 부서지는 바다를 멀찍이 굽어보는 절벽 위로 상점과 식당이 있었다. 원래 9세기에 지어진 성이 있던 자리였는데 지금은 전망대와 식당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지도상의 위치나 절벽의 경관에 비추어, 유럽의 발코니라는 이름이 그럴듯하게 어울렸다. 실은 좀 너무 그럴듯해서 도리어 작위적인 이름이었다. 1884년에 이곳을 방문한 알폰소Alfonso 12세가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데, 이런 이름을 생각해낸 사람이 왕이었다는 건 자연스럽다. 지역주민들이었다면 '땅끝'이라든지 '과부의 절벽' 같은, 좀 더 살가운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내일은 단체관광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집어온 팜플랫과 전단지를 탁자 위에 펼쳐놓고 의논하다가, 그중 가격이 저렴해 보이는 여행사를 골랐다. 비아헤스 루사디르Viajes Rusadir라는 여행사의 당일치기 모로코 관광을 신청했다.


4월 8일, 금요일


말라가 조금 못 미쳐 있는 베날마델라Benalmadela 항구에서 아침 7시에 떠난 배는 싱겁게도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모로코의 떼뚜안Tetuan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아프리카에 왔다는 점은 스물아홉 살이던 나나 백일 난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딛었구나 라는 묘한 감상에 젖었는데, 그런 느낌 속에는 <타잔Tarzan>이나 따위로부터 부지중에 전염된 서양식 오리엔탈리즘이 섞여 있을 터였다. 아시아인에게 아프리카는 정복의 대상이었던 적도, 탐험의 대상인 적도 없었다. 서양인들의 눈을 통해 아프리카를 본 간접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좀 더 순수한 호기심과 솔직한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배에서 내려 보니 여러 여행사 직원들이 저마다 식별용 깃발을 들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다 루사디르 여행사를 찾았고, 우리한테 배정된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 셋을 제외한 손님은 전원 서양인이었고, 그중에도 독일인이 많았다. 5개국어를 유창하게 떠들어대는 우리 가이드는 콧수염을 짙게 기른 모로코 인이었다. 그의 영어로 미루어 보건대 다른 외국어도 문법에 잘 맞는 수준은 아닐 성 싶은데, 그 자신만만한 속사포 식의 언변은 썩 부러웠다. 버스 안에서 그는 마이크를 쥐고 쉴 새 없이 5개국어의 향연을 펼쳤다. “자, 신사숙녀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아름답고 유서 깊은 도시 탕헤르Tanger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탕헤르는 세계사 수업시간에도 등장하던 곳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일어난 분쟁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1905년 독일의 빌헬름 2세가 탕헤르 항을 방문함으로써 프랑스의 지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탕헤르 사건이다. 그 이후 1911년 모로코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프랑스가 군대를 파병하자 독일이 전함을 보내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독일의 외교적 고립이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바로 이곳 탕헤르에서 불붙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행하지만, 탕헤르 사건은 내게도 일어났다.


우리 버스가 탕헤르 외곽의 어느 모퉁이를 돌 때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수십 명의 청년들이 서행하던 버스로 다가왔다. 승객 중 몇 명은 그들에게 물색없이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무슨 구호를 외치는가 싶더니만, 버스를 에워싸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살의가 느껴졌다. 나는 아기를 품에 안고 버스 의자 밑으로 납작 엎드렸다. 긴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한참 동안인 것처럼 느껴졌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기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보니 커다란 버스에 남아난 유리창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내 앞자리에 탔던 미국인 아주머니는 넋이 나간 듯이 계속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내 뒷자리의 독일인 청년은 돌에 맞았는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버스가 경찰서에 가서 사고를 신고하는 동안, 나는 관광이고 뭐고 이곳까지 아이를 데리고 온 데 대한 후회가 막급했다. 경찰서 다음 병원에 들려 부상당한 독일인 청년을 치료했다. 열여섯 바늘을 꿰매고 왔다는데, 청년과 그의 가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했다. 입을 붕대로 감싼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더니, 씨익 웃으면서 “운이 없었지”라고 대답했다. 그 일가족은 그 뒤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관광을 계속했다. 저런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프랑스 사람들이 불현듯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닌 밤중에 이런 사건을 겪고 보니, 갓난쟁이를 안고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것을 내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로코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데, 독일 청년 말처럼 우리는 운이 없었던 셈이었다. 해외에서 연수과정을 밟고 있을 뿐, 아직 외교관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지 않은 나로서는 앞으로 해외 근무를 하는 동안 겪게 될 여러 종류의 어려움의 한 조각을 미리 본 것 같은 불길한 느낌도 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2001년 뉴욕 근무를 마치고 9/11을 아슬아슬하게 모면한 것이나, 중동에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무사했던 것, 인도네시아에서 지진과 화산과 홍수에도 해를 입지 않은 것, 2011년 일본에서 대지진과 해일을 겪으면서도 가족이 무사했던 것 등등이 다 아슬아슬한 모험의 연속인 셈이다.


어쨌든 아프리카에 대한 낭만적인 감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내도 당장 스페인의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우리만 돌아갈 차편도 배편도 없었다. 게다가 부상을 당하고서도 단체관광에서 이탈하지 않는 독일인 가족이 묘하게 자존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탕헤르를 살펴본 것은 좋은 공부가 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다니다가 스페인 남부에 오면 그곳이 유럽의 후진국이라는 사실이 절로 느껴진다. 대체로 모든 것이 낡고, 덜 깔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었다. 스페인 해안에서 저만치 건너편에 보이는 모로코가 스페인과 다르면 얼마나 다르랴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후진국과 아프리카의 선진국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격차는 상상보다 컸다. 탕헤르 시내를 다니는 동안 우리 일행을 졸졸 따라다닌 것은 푼돈을 구걸하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었다. 어쩌면 하나같이 맨발이었다. 상인들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어찌나 필사적으로 호객하는지 신변의 위협이 느껴질 정도였다. 가게를 구경하다가 아무 것도 사지 않고 돌아 나오면 상인들은 노골적으로 험담을 해댔다.


관광코스는 승마시범장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모로코 북부지역은 누미디아Numidia라고 불렸다. 이곳의 사내들은 용맹하고 기마술에 능해서, 로마의 속주가 된 뒤로도 누미디아 출신 기병대는 로마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범장에 말을 몰고 나타난 기수들은 말에서 누웠다 앉았다 일어서기도 하고 거꾸로 앉아 말을 몰거나 말의 옆구리에 착 붙어서 달리기도 하는 등 온갖 재주를 부렸다. 아까의 불운한 사건만 아니었다면 좀 더 즐겁게 구경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우리 내외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일부러 떠들썩하게 구는 사람도 있었지만, 같은 버스에 동행한 우리 일행은 더 이상 천진한 관광객처럼 보이지는 않는 착잡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현실 속의 일상을 벗어나려고 찾아온 여행지에서 일상보다 더 잔인한 현실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그 다음은 전통 천막 속에서 밸리댄스Belly Dance를 관람하며 모로코의 주식인 쿠스쿠스Couscous로 점심식사를 하는 순서였다. 팜플렛의 사진 속에서는 늘씬한 미녀들이 배꼽을 드러내고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무대에 나타난 무희는 오십 줄은 되어 보이는 살집 좋은 아주머니였다. 아내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나를 돌아보았다. 쿠스쿠스는 입자를 잘게 만든 밀 위로 여러 가지 야채와 고기를 올려서 찐 음식이었다. 특색은 있었지만 그다지 입에 맞지는 않아서 허기가 가실 만큼만 먹었다.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러 안고 나오다가 보지 말았어야 할 걸 봐버렸다. 추가로 손님이 오자 식당 종업원들은 천막 뒷켠에서 남은 접시의 쿠스쿠스를 모아다가 한 접시를 새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낯선 음식은, 그것을 언제 어떻게 처음 맛보느냐가 그 음식에 대한 평생의 인상을 좌우하는 법이다. 마그레브 지방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동료들은 더러 쿠스쿠스의 맛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중동의 여러 음식을 즐기면서도 쿠스쿠스만큼은 왠지 입에 대지 않게끔 되어버렸다.


해가 저물었고,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도 버스가 서행하는 곳이면 어김없이 차창 밖에는 동전과 음식을 구걸하는 까무잡잡한 수십 명의 어린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우리와 동행하던 서양인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동전이며 과자며 바나나 따위를 아이들에게 던져주었다. 아마도 선의로 그랬을 것이고, 받아 줍는 아이들도 깔깔대며 좋아했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짠하고 착잡했다. 나는 불과 한 세대 전에 미군들이 던져주던 물건들을 받아먹던 맨발의 어린이들이 자라던 나라에서 온 사람인 탓이기도 했고, 구걸하는 사람에게일지언정 뭔가를 던져준다는 것은 무례한 짓으로 느껴진 탓이기도 했으며, 어린 아이의 아비 된 입장에서 저 수많은 맨발의 아이들의 장래가 한없이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페인을 떠나 올 때는 순식간이던 항해 시간이 귀로에는 어쩌면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아마 하루 종일 아이를 신경 쓰며 돌아다닌 피로까지 가세한 덕분이었으리라. 인간의 감각은 간사하다. 배에서 내려 바라본 후엥히롤라는 마치 뉴욕을 처음 보았을 때만큼이나 세련되어 보였다. 스페인이 영국에 비해 후진적이라는 며칠 전의 느낌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무의미한 감별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돈만 가지면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니다. 영국산 관광안내책자에는 “후엥히롤라는 지나친 상업화로 망가져가는 휴양지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주변을 잘 살펴보면 훌륭한 볼거리들이 많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이야기도 상업화로 휴양지가 망가지는 걸 아까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자라면서 광안리, 해운대, 송도, 다대포가 망가지는 걸 몸소 목격한 입장에서는 후엥히롤라의 한적하고 드넓은 해안이 부럽기만 했다.


아이를 재워두고 슬리퍼를 끌고 해변을 산책했다. 외국인이 이만큼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터였다. 얼른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정치와 경제와 문화, 일정수준 이상의 GDP와 믿을만한 치안과 주민들의 마음의 여유가 다 어우러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마터면 이런 것들을 못 보고 갈 뻔 했다. 내가 다른 유색인종이 되어 한국의 밤거리를 산책하면서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해 보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여기서처럼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눈인사를 해 줄까? 한국말을 못해도 이만큼 편안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저물어가는 유럽의 국가들을 은근히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언뜻 보기보다 먼 것 같다.


해가 저물면서 문을 연 상점들이 밤 10시가 넘도록 불을 밝히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본시 야행성이라 그런지, 이곳의 생활 리듬은 편안하게 몸에 잘 맞는다. 은퇴한 다음에 이런 데서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육지에서 바다 방향으로 건조하고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4월 11일, 월요일


여행을 온 이유가 일부러 고생하기 위해서는 아니잖은가? 불현듯 약간의 사치를 부려보고 싶어졌다. 윤성덕 동지도 흔쾌히 동의해서, 이번에는 중형차인 포드 오라이언을 나흘간 렌트했다. 차가 넓으니 장거리 여행이 한결 편안했다. 그렇게 그라나다Granada에 다녀왔다.


711년경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이슬람 세력은 이곳에서 거의 800년간이나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13세기부터 이베리아에서 이슬람 제국은 기독교 세력에 밀려나기 시작해 코르도바Cordoba, 세비야Sevilla를 차례로 잃었고 그라나다가 그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1469년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녀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스페인 왕국이 수립되었고, 이들은 마침내 1492년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지배를 종식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런 역사 때문에 안달루시아 (아랍어로는 ‘엘 안달루스’다) 지역은 지금도 어디를 가나 아랍 색채가 짙다. 안달루시아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가장 잘 알려진 플라멩코Flamenco는 스페인 고유의 민족예술로 알려져 있지만 북아프리카 아랍 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종종 국수주의적 표현의 수단이 되곤 하는 민족예술이라는 것도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순혈주의 신화의 거짓이 드러난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교류하고 전파되고 섞이지 않는 문화는 생명력이 없다.


관련된 이야기 한 가지. 요즘 들어 이른바 언플러그드Unplugged 음악 공연에 자주 등장하는 타악기로 까혼Cajon이라는 것이 있다. 사과 박스만한 상자에 걸터앉아서 상자를 두드리는 걸 본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까혼이다. 보통의 드럼은 어쿠스틱 악기와 합주하기에는 음량이 너무 커서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운데, 그럴 때 까혼을 사용하면 잔잔한 통기타 반주에 아주 잘 어울리는 소리가 난다. 이 악기의 원산지는 페루다. 스페인의 정복자들Conquistadores이 페루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강제로 노동을 시키다 보니, 이 사람들이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일을 열심히 안하더라고 한다. 그래서 정복자는 모든 악기를 금지시켜버렸다. 그래도 흥을 자제할 수 없던 페루 사람들은 감시자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화물을 포장했던 상자Carton Box나 가구의 서랍 같은 것 위에 걸터앉아 그것을 치면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니까 까혼이라는 악기는 실상은 빈 상자에 불과하다. 호기심이 나서 나도 직접 만들어 봤는데, 나무 상자의 앞면을 다른 면보다 얇은 판자로 바꿔 달고 뒷면에 구멍을 하나 뚫으면 그걸로 까혼이 된다. 앞판의 뒷면에 작은북의 스프링snare 같은 것을 덧대면 고급 까혼이다. 자, 이리하여 슬픈 역사를 가진 악기가 하나 탄생했는데, 아이러니는 여기서부터다. 페루인들이 이 이상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던 스페인 사람들은 그 소리가 모국의 플라펭코 음악과 잘 어울리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 플라멩코 반주에 까혼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페루의 악기가 스페인을 거꾸로 점령한 셈이다. 그러니, 플라멩코 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그 반어적인 역사를 떠올려보시기 바란다. 움마야드 왕조의 흥망성쇠, 카스티야노의 자존심, 라틴아메리카의 슬픔과 아픔이 한 데 뒤섞여 몸부림치는 소리가 그 속에 있다.


그라나다로 들어선 우리는 곧장 알람브라 궁전الحمراء으로 향했다. (스페인어에서 h는 묵음이다.) 아랍어로 ‘함라حمراء’는 붉은 색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라나다의 언덕 위에 서 있는 아랍식 성곽과 궁전의 색깔은 흰색이었다. 아랍인이 물러난 후 기독교 세력이 흰색으로 덧칠한 것이라고 했다. 알람브라라는 표지판을 보자마자,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de Asís Tárrega의 저 유명한 기타연주곡 <알람브라궁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의 선율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왜 있잖은가. 같은 줄을 세 손가락으로 계속 퉁기는 트레몰로 주법으로 연주하는.


아랍의 지배 시절 군주의 저택으로 사용되던 이곳에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르네상스식 건물을 덧지었다. 전체 면적이 142,000 m²에 달하는 궁전의 바깥쪽으로는 튼실한 성벽과 망루가 지어져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기둥과 벽 사이로 공간 속에 다른 공간이 있었고, 돌로 만든 아치와 벽면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언덕 아래를 굽어보는 정원은 마치 하늘 위에 둥실 떠올라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군데군데 분수로 장식된 정원 내부에는 장미와 오렌지 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언덕 아래로부터 메마른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모자를 꼭 눌러쓴 우리 아들을 제외한 세 사람의 머리칼은 엉망이 되었다.


70년대에 라는 노래로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던 바카라Baccara라는,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스페인 여성 듀엣 가수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들의 히트곡 를 들으면서 그게 스페인 어딘가에 있는 지명이라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때로부터 어언 이십 년이 넘어서 그 노래 속의 도시를 배회한 것이었다. 얄궂은 신음 소리로 노래를 시작하던 스페인의 두 미녀가수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나.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근처의 식당에서 빠에야paella와 감자 또르띠야tortilla de patatas로 저녁을 먹었다. 빠에야는 홍합과 오징어 따위의 해산물이 들어간 스페인식 볶음밥인데, 언제 먹어도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감자 또르띠야는 감자를 넣은 스페인식 오믈렛인데, 대강 어떻게 요리를 해놔도 맛있는 감자와 계란 두 가지가 주재료인 만큼 전혀 낯설지가 않은 음식이다. 며칠 묵고 나니 스페인 음식도 제법 폼 나게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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