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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3. Europe

posted Jun 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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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14일, 월요일


도버Dover는 그 이름이 주는 어감보다 쓸쓸한 느낌의 항구였다. 화창한 태양빛 아래였다면 화사해 보였을지도 모를 하얀 절벽이 마치 창백한 낯빛처럼 보였다. 옥스퍼드 과정의 일부로, 동급생들과 함께 열흘간 서유럽의 주요도시들로 현장학습을 떠나는 길이었다. 큰맘 먹고 무거운 니콘 카메라를 가져왔는데, 배에 오르기 직전에 카메라의 노출계가 망가진 것을 발견했다. 젠장.


우리는 도버 항구에서 출발하는 배편으로 영불해협을 건넌 다음 버스로 벨기에까지 내달았다. 브뤼셀Brussels에 도착한 우리는 알버트 프레미에 호텔Albert Premier Hotel에 짐을 풀고 나서, 구경도 하고 저녁도 먹을 겸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그랑플라자Grand Plaza로 갔다. 나는 동료 윤성덕 학형과 함께 골목의 노천카페로 들어가 이곳의 명물이라는 홍합요리Moules Provençale를 시켜 먹었다. 홍합 국물이 혀에 닿으니 무조건반사처럼 머리 속에는 해운대의 포장마차가 떠올랐다. 프로방살이고 뭐고, 나에게는 죽는 날까지 홍합을 제대로 먹는 요리법은 한 가지 뿐일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이 광장의 골목 안으로 들어선 모든 관광객이 그러듯이, 우리는 ‘오줌싸개 소년Manequin Pis 동상’을 찾아 헤맸다. 물어물어 모퉁이를 여러 개 돈 뒤에야 어느 골목의 어귀에 조그만 소년의 동상이 나타났다. 귀엽지만 볼품없는 이 동상이 독일의 로렐라이, 덴마크의 인어 동상과 더불어 ‘별 볼 일 없는 유럽의 3대 관광명소’라는 이야기는 진작 들었던 터라, 허허 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분수에 동전을 하나 던져 넣었다. 달리 취할 자세가 없었으므로.


3월 15일, 화요일


어제는 저녁이라서 그래 보였나 했는데, 브뤼셀은 아침에 보아도 그다지 정감 어린 도시는 아니었다. 유럽 연합의 본부가 있기 때문에 ‘유럽의 수도’라고 조금 과장스레 일컬어지기도 하는 브뤼셀은 거대한 행정도시였다. 런던의 장중함이나 파리의 아름다움, 베를린의 역사성처럼 두드러지는 특징이 눈에 얼른 띄지 않았으므로, 브뤼셀이 내게 준 첫인상은 사무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유럽연합 본부의 브리핑실에서 거대유럽의 연혁과 개황, 그리고 전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이 조만간 가입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1994년 당시만 해도 EU의 회원국 수는 12개에 불과했다. 당시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던 EU 관리의 전망처럼 스웨덴, 오스트리아, 핀란드는 이듬해인 1995년에 가입을 했지만, 노르웨이의 경우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1994년 국민투표에서 가입이 부결된 이래 지금까지도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아닌 채로 남아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 이후 유럽 대륙은 빠른 속도로 통합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영국을 떠나 프랑스를 거쳐 벨기에로 오는 동안 우리에게 여권 제시를 요구하는 검문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 브뤼셀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머지않아 터키도 유럽연합 가입 후보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면 ‘야심이 크시네요’라는 답을 들으며 좌중에게 큰 웃음을 주었을 터였다. 2011년 현재 유럽연합의 회원국 수는 거의 전 유럽대륙을 아우르는 27개국에 달한다. 이제 유럽연합 대부분의 회원국들은 공통의 화폐를 사용할 뿐 아니라 공동으로 외교안보 정책을 협의하고 결정하는 단계까지 통합이 진전되었다.


3월 16일, 수요일


브뤼셀 시내에 있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본부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NATO의 역사와 현황과 당면과제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NATO 관계자들의 말투에서는 냉전 이래 최초의 유럽 내 군사작전인 코소보 개입을 통해서 모처럼 존재감을 확인한 NATO의 흥분 같은 것이 묻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냉전의 붕괴로 인해 정체성을 상실한 지역방위기구의 존재이유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고민의 그늘도 느낄 수 있었다.


NATO는 유럽의 여러 국가와 미국 및 캐나다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기초하여 1950에 설립된 집단안전보장기구다. 냉전기간 내내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성공적으로 대치했지만 상대가 사라진 뒤로 맥이 좀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1991년에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되었고, 같은 해에 소련은 ‘구소련’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NATO 본부를 방문하기 한 달 전인 1994년 2월, NATO의 전투기가 유엔이 지정한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한 세르비아 전투기 4대를 격추함으로써 NATO는 처음으로 전투행위를 수행했다. 그러니까 NATO는 냉전기간 내내 전쟁을 수행하지 않다가 냉전이 끝나고 나서야 전쟁을 수행한 안보기구였던 거다. 고작 코소보라는 작은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하면서, 유럽의 ‘강대국’들은 지나가는 뱀을 본 십대 소녀들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코소보에 대한 NATO의 개입은 미국 정부가 개입을 결정한 후에야 이루어졌다.


NATO 본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EU만 보았다면 우물 속의 개구리처럼 그릇된 환상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고대부터 줄곧 자기들끼리 투쟁을 반복하던 유럽의 국가들이 미증유의 통합을 이루어내고 있는 현상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초강대국 미국이 보장해주고 있는 안보의 방파제 안에서 벌어지고 있던 찻잔 속의 태풍 같은 측면이 있었다. 유럽은 더 이상 가장 더럽고 가장 냉엄하고 가장 위험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최전선에서 마주하지 않아도 좋은 나라들이 되었다. 한때 인류문명의 발전을 선도했던 유럽의 지성은, 이제 스스로 피 흘려 지키지 않는 평화를 만끽하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로 도덕적 불가지론을 신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나락 속으로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이 2003년에 이라는 명저를 쓰면서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후에 버스 편으로 브뤼셀을 떠나 독일로 향했고, 늦은 저녁 시간에 본Bonn에 도착했다.


3월 17일, 목요일


오전에는 본 시청에 가서 시장을 만나고 독일 외무성에서 독일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독일의 외무성은 멋진 건물이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어느 나라든 외무성 건물만큼은 별도로 지어져 있고, 그 나라의 특징을 보여주는 멋진 디자인으로 지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외교통상부는 별도 건물도 없을 뿐더러, 외교통상부가 입주한 건물에는 손님들이 기다릴 대기실조차 없다. 어쩌면 그로써 우리는 다른 어떤 나라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독일의 외교정책에 관해서는 불과 석 달 전 일주일간의 세미나를 통해 공부했던 터라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오후의 자유시간에는 베토벤의 생가를 구경했고, 저녁 식사시간에는 일행 전원이 함께 독일 식당으로 갔다. 나는 뭔지도 모르고 권해주는 대로 슈바인즈학세Schweinshaxe를 주문했다. 주문했다기보다는, 그것과 아이스바인Eisbein이라는 두 가지 중에서 택일했을 뿐이다. 이 두 가지 메뉴는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우리 일정을 관리하는 교직원 알리슨Alison이 우리 인원수의 반반씩만큼 슈바인즈학세와 아이스바인을 미리 주문해둔 것이었다. 나온 음식을 보니, 둘 다 돼지 족발이었다. 자세한 요리법은 알 길이 없으나, 학세는 구운 족발이고 아이스바인은 삶은 족발이었다. (발음에 주의가 필요하다. 발음상 비슷한 아이제바인Eisewein은 족발은커녕 포도주의 한 종류인 아이스와인을 가리킨다. 포도가 얼 때까지 수확하지 않고 있다가 당도가 극에 달할 때 수확하여 술로 담그는 아이스와인은 특유의 달콤한 맛으로 유명하다.)


독일식 족발은 우리식처럼 음식답게 썰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큼직한 돼지발이 보무도 당당히 통째로 접시 위에 얹혀 나왔다. 별로 시장기도 기대감도 없었는데, 독일식 김치라고 할 수 있는 양배추절임 슈크라우트Sauerkraut와 곁들여 먹어본 독일 족발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독일요리의 팬이 되었다. 독일식 족발과 햄, 소시지에 대한 그리움과 돼지고기에 얽힌 사연에 관해서는 뒤에 중동에서의 생활을 기록하는 대목에서 좀 더 자세히 쓰겠다. 내 친구 중에는 독일 유학생활을 오래 한 친구가 한 명 있다. CD를 아직도 ‘체데’라고 부르는 친구다. 이 친구가 “독일은 날씨도 안 좋고 음식도 맛이 없다”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화를 내며 말했다. “너 영국에 가서 6개월만 살아봐!!”


3월 18일, 금요일

 

아침에 본을 떠난 버스가 저녁 7시경에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 도착했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를 낳은 알자스Alsace 지방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이 보여주듯이, 이 지방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여러 번 수난을 겪었다. 윤성덕 학형과 함께 이 지방의 특산물인 달팽이escargot 요리를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 기웃거리다가, 파리 ENA에서 유학중인 유대종 선배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셋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서울에서 같은 건물에 근무할 때는 광화문에서도 우연히 마주치기 어려웠는데... 지구는 생각보다 좁은 것이 틀림없었다. 달팽이는 상상했던 것보다 시시한 맛이었다.


3월 19일, 토요일


우리 일행이 스트라스부르그까지 온 것은 이곳이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의 소재지이기 때문이었다. EU의 입법기관인 유럽의회 의원은 5년마다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입법기관이라고는 하지만, 유럽의회는 주도적으로 입법행위를 할 수는 없고, 수정을 요구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유럽 집행위원회를 감독하고 집행위원 임명 동의를 하며 불신임투표를 통해 해임할 수 있고, 예산 감독권도 가지고 있다. 유럽의회는 다른 어떤 의회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기구라서, 솔직히 말하면 설명을 듣고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현실에서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유럽의회와 유럽 각료이사회는 양원제에서의 상하원과 비슷한 면도 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살면서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저마다 자국의 정부와 의회를 두고 있고, 그 위에 또 ‘유럽의 정부와 의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초국가적 통합도 좋지만, 이런 식의 관료주의가 과연 비용에 값할 만큼 뜻 깊은 역할을 하는지가 의문스러웠다. 뭐, 내가 내는 세금을 쓰는 건 아니지만.

 

무척 피로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으로 스트라스부르그 대성당에 가서 첨탑 위를 오르느라 일주일치 운동을 다 해버렸다. 첨탑은 생각보다 높아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버스 출발시간에 늦어 일행을 20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다. 우리 버스는 이번에는 스위스로 들어섰다. 제네바Geneva에 도착해서 ‘나의 휴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숙소Hotel Mon Repos에 여장을 푼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흩어져 저녁식사를 했다. 나는 대여섯 명의 친한 친구들과 함께 까스까드Cascade라는 식당에 들어가 퐁듀fondu를 주문했다. 뜨겁게 녹인 치즈에 빵조각이나 고기 따위를 찍어 먹는 퐁듀가 스위스의 별미라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막상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영어에는 어떤 음식에 점차로 익숙해진다는 의미로 ‘the food grows on you’라는 표현이 있다. 어떤 음식의 참맛에 대한 즐거움과 그리움은 몸 안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자라난다는 의미다. 지방색이 짙은 음식일수록 그것이 ‘자라는’ 데는 더 많은 시간과 횟수가 필요한 모양이다. 한마디로, 퐁듀의 맛은 개떡 같았다.

 

3월 20일, 일요일


휴식이라는 호텔의 이름에 부응하여 정오까지 늘어지게 잤다. 오늘은 아무 일정이 없었으므로 여독을 푸는 날로 삼았다. 윤성덕과 함께 점심을 먹은 뒤 보트를 빌려 타고 두 시간동안 레만호Lac Leman의 수면 위를 누볐다. 좀 춥긴 했어도, 너른 곳에서 마주보는 시원한 바람은 언제나 유쾌하다. 호수의 주변으로 눈 덮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아무 방향으로 셔터를 눌러도, 달력 그림 같은 사진이 찍혔다.


3월 21일, 월요일


오전에 일행과 함께 관세및무역에관한협정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 GATT 본부에 갔다. 1947년 출범한 GATT는 자유무역을 촉진하는 협정으로서, 모든 비관세 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삼고 있다. GATT는 ‘라운드’라고 이름 붙여진 일련의 회의를 통하여 시장장벽을 축소해 왔는데, 우리가 방문하기 직전인 1993년 말에 GATT는 마지막 라운드인 우루과이 라운드를 마치고 이제 막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라는 새로운 기구로 변신을 하려는 참이었다. 우리나라는 농산물 개방을 둘러싼 힘겨운 진통을 겪으면서 우루과이 라운드를 겪어냈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가 장차 세게 10위 언저리 규모의 무역대국이 되리라고 확신한 사람은 없었다.


오후에는 유엔개발기구UN Development Program: UNDP 제네바 사무소에 가서 브리핑을 들었다. 이로부터 5년 뒤에 내가 유엔 대표부에 부임해서 UNDP 집행이사국 대표로 UNDP의 살림에 이러쿵저러쿵 관여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라건 사람이건 한치 앞을 알 수가 없는 법이니, 어쩌면 그래서 인생은 그렇게 힘들고, 그래서 그렇게 재미난 건지도 모르겠다.


3월 22일, 화요일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에서도 브리핑을 들었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이제는 긴 여행과 수많은 브리핑에 지친 나머지 건성으로 들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던지, 일정이 끝나자마자 튀니지인 급우 카이스Qais는 렌터카를 빌려 함께 레만호 주변을 일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우리는 득달같이 자동차를 임대해 출발했고, 생수 이름으로만 알던 프랑스 도시 에비앙Evian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했다. 같은 레만호 풍경이라도 스위스 쪽과 프랑스 쪽의 분위기는 무척 달랐으니, 에비앙은 제네바보다 훨씬 서민적이고 소박했다. 몽트뢰Montreux를 지나 샤토 시용Château de Chillon을 구경할 무렵에는 5시경이었다. 1100년경에 완성되어 사보이 공작의 거처로 사용되었다는 시용 성은 호수 위로 돌출된 곶 위에 지어져 마치 수상건물처럼 보였다. 석양을 배경으로 물안개 서리는 호수 위에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고성이 떠 있었다.


해질 무렵에는 치즈로 유명한 그뤼에르Gruyère에 도착했다. 레만호 일주도로를 벗어나 표지판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니 산등성이에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깔끔한 성채와 마을이 나타났다. 집들 하나하나가 관광객들을 의식하고 지은 것처럼 적당히 아름다우면서도 자연스러웠다. 판석으로 깔아놓은 길이 흡사 놀이공원 속의 민속촌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자동차를 모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도로의 포장상태가 어찌나 훌륭한지, 작은 마을의 이면도로조차 최상급 고속도로만큼 평탄하고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뤼에르가 더더욱 놀이공원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 에비앙의 호수 반대편인 로잔Lausanne에 도착했다. 피곤했지만 성당과 박물관 건물을 구경했다. ‘본전 정신’ 때문에 강행군을 한 것인데, 역시 무리를 하는 건 득책이 못된다. 로잔에서 뭘 봤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뿐더러, 어설프게 찾아들어간 식당에서 호되게 비싼 저녁 값을 치렀을 뿐이다. 제네바의 호텔에 돌아와 자동차를 반납한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3월 23일, 수요일


아침 일찍 제네바를 떠나 저녁 7시경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연수중이던 이은용 선배에게 미리 전화를 해둔 터였다. 윤성덕과 함께 이 선배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떡 벌어지는 한식 정찬을 차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음식 구경이 오랜만이었다. 배불리 얻어먹은 뒤에 선배는 파리의 야경을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태우고 차를 몰아 시내를 한 바퀴 구경시켜 주었다. 그 후로도 파리에 여러 번 갔지만, 내 기억 속의 파리는 언제나 이 선배의 자동차 속에서 바라본 야경 속 풍경이다. 그때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았던 에펠 탑La Tour Eiffel이야말로 파리라는 도시의 얼굴에 맺힌 결정적 표정이었다. 이 선배는 우리를 에펠탑으로 데려가 전망대로 입장시켜 주었다.


영화 를 보면, 파리에서 연인 사이였던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재회한다. 다시 예전처럼 연인이 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버그만에게 보가트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파리가 있잖아.(We will always have Paris.)” 이런 대사 속에서 파리 대신 집어넣어도 좋을 다른 도시는 없다. 영화 에서는 아내 역할을 맡은 케이트 윈슬렛이 남편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모든 일상을 버리고 파리로 가서 새 출발을 하자고 한다. 남편은 아내의 뜻에 부응하려고 항공권까지 구입하지만, 사표를 내러 갔다가 승진 통보를 듣고 직장에 주저앉는다. 비극으로 끝나는 이 영화 속의 파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의 다른 이름이다. 런던이 장엄하고 로마가 위대하고 뉴욕이 특이하고 워싱턴DC가 지루하다면, 파리는 아름답다. 파리의 구석구석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과도 같다.


3월 24일, 목요일


우리 일행은 프랑스 외무성을 찾아가 브리핑을 들었는데, 오후에 파리 시내를 구경할 생각에 마음이 잿밥에 가 있어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유창한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굳이 불어로 브리핑을 하던 프랑스 외무성 직원의 노력이 애처롭게 느껴졌던 점은 기억에 남는다. 외무성 일정이 끝난 후 우리는 일제히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으로 몰려갔다. 과연 듣던 것처럼, 이곳은 이렇게 우르르 와서 반나절 만에 구경할 곳이 아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숨이 턱에 닿게 루브르 내부를 가로세로로 뛰어다니며 유명한 작품들을 눈에 주워 담다시피 구경한 후였다. 그 다음으로 방문한 오르세이 박물관Musée d'Orsay에서는 욕심을 좀 접었더니 오히려 벅찬 감흥을 느꼈다. 내가 고대의 유품보다는 미술품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교과서에서 도판으로만 보던 그림들 앞에서, 나는 적어도 몇 차례 넋을 놓았다.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샘The Source>이 저다지도 아름다웠었던가? 르느와르Auguste Renoir가 <무도회장에서Dance at Le Moulin de la Galette>에서 묘사해 놓은 햇살을 보면서는 왜 그를 관능의 화가라고 부르는지 실감했다. 야외 무도회장에는 짙은 나뭇잎 사이로 새어든 햇볕이 시원하면서도 따사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볕”이라는 뜻의 단어를 가진 외국어도 있다. 섬세한 심미안을 가진 일본인들은 ‘코모레비木漏れ日’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저녁 무렵, 다시 찾아간 에펠탑은 단체 관광을 온 수백 명의 이탈리아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30분쯤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번에는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파리 상공의 세찬 바람이 귓가에서 소리를 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집이라는 곳은 있으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돌아가고 싶은 이상한 곳이다. 에펠탑 위에서 앵발리드Invalide의 불빛을 굽어보다가, 문득 내 마음은 벌써 집에 돌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옥스퍼드에서는 갓난 아들이 감기에 걸렸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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