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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에 관하여 (2003.1.)

posted May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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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1. 3.

    눈으로 보기는 보지만 차마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2001년 9월 11일, TV 뉴스 화면에서는 ‘잠들지 않는 도시’라고 노래불리는 맨해턴의 월가에서, 두 개 마천루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이 대량살상의 화면은, 폭력으로 가득찬 첨단 영상기법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조차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뭐라고 하건 간에, 9.11. 뉴욕에서 벌어진 사건의 이름이 ‘테러리즘’에 해당한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테러리즘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거꾸로 된 질문을 던진다면 좀 난처해진다.  우리는 아직도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에 대한 공통의 정의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정의된 개념이 없다는 것은, 곧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9.11. 사건 같은 무차별 살상행위의 근본적인 비극은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철저하게 수단화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뜻에서, 테러리즘의 비극성은 그것이 테러리즘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데도 있다.  테러리즘이라는 작명은 정치기호학의 대표적인 실패작인 셈이다.

    한스 그루버 일당의 예를 드는 것으로 일단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한스 그루버가 누구냐 하면, 영화 ‘다이 하드’에서 뉴욕 형사 존 멕클레인(브루스 윌리스)과 한판 대결하던 독일계 악당의 극중 이름이다.  이들은 다국적기업 나카토미 상사에 진입해서 이런 말을 한다.
       - 한스 :  신사 숙녀 여러분, 나카토미 상사는 지금껏 세계 각지에서 저지른 탐욕 덕택에
           이제 진정한 권력이 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증인입니다.... (중략)
       - 한스 (지사장에게) : 나는 당신네 컴퓨터에 관심 있는게 아니야.  회사 창고에 있는
           6억4천만불 상당의 회사채 증서에 관심이 있지.
       - 지사장 : 돈을 원한다고?  당신 도대체 뭐하는 테러리스트야?
       - 한스 (웃으면서) : 우리가 테러리스트라고 누가 그러던가?

    한스 일당이 저지른 인질극 및 건물 폭파위협은 전형적인 테러 수법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이들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 그들을 테러리스트가 아니게끔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테러리즘이라는 것은 살상행위의 수법과는 관계없고 동기에만 관계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동기란 반드시 정치적인 것이어야 할까?  1974년 샘뉴얼 비크라는 피해망상환자는 대통령을 살해하겠다면서 델타 523편에서 승무원을 사살하고 소동을 일으켰는데, 많은 경우 새로운 형태의 ‘테러리스트’로 분류된다.  사회적 동기의 살상도 테러리즘의 자격을 얻는 거라면, 우리의 ‘한스 그루버’의 경우는 예컨대 ‘유나바머’의 범행동기보다 반드시 ‘덜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만큼 사회적’이어야 테러리즘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살상대상이 범죄의 ‘목적’에 해당하는 경우는 (한스 그루버 처럼) 일반범죄이고, ‘수단’이라면 테러리즘인가?  그렇다면, 1881년 짜르 알렉산더 2세의 암살이 테러리즘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살상행위의 형태와 관계된 것이라면, 과연 요인암살과 인질극과 항공기 폭파 사이에는 필연적 유사성이 있는 것일까?  만일, 테러리즘이라는 것이 방식과 목적과 동기와 주체와 대상 등이 적절히 다 버무려져야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당초 몇몇 특수한 사례를 테러리즘이라고 정하고 거기서부터 테러리즘을 정의하려고 드는, 본말의 전도가 아닐까.

<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의 현주소 >

    물론, 테러리즘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100여개의 권위있는 세계적인 기관들이 저마다 내놓은 100여가지의 정의를 나열한다 한들, 테러리즘에 대한 유권적인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테러리즘이 정의되지 않은 이유를 좀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테러리즘이라는 이름에다가 어떤 것을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서 다른 정치적 함의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존하는 총 12개의 테러리즘 관련 국제협약은 다음과 같다.
- 항공기내에서 행한 범죄 및 기타행위에 관한 협약
- 항공기의 불법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
- 민간항공의 안전에 대한 불법적 행위의 억제를 위한 협약
- 국제민간항공에 사용되는 공항에서의 불법적 폭력행위의 억제를 위한 의정서
-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의 예방 및 처벌에 관한 협약
- 인질억류방지에 관한 국제협약
- 핵물질의 방호에 관한 협약
- 가소성 폭약의 탐지를 위한 식별조치에 관한 협약
- 항해안전에 대한 불법적 행위의 억제를 위한 협약
- 대륙붕에 고정된 플랫폼의 안전에 대한 불법적 행위의 억제를 위한 의정서
- 폭탄테러의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
- 테러자금조달억제에 관한 국제협약

    이상의 협약 리스트가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에게는 테러리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은 없다.  그 대신, 테러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살상행위의 다양한 이미지들에 대해 상당히 느슨한 합의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합의는 늘상 도전받고, 반대에 직면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테러리즘이 정치기호학의 실패작이라는 대목으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 집게손가락을 펴고 팔을 앞으로 뻗으면서 달을 가리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손가락을 바라보는 대신 달을 바라본다.  언어학자 소쉬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때의 손가락은 기호(signifiant)이고, 달은 의미체(signifié)이며, 그 둘 사이에서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일어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는 달리, 테러리즘이라는 씨니피앙은, 예컨대, 부들부들 떨면서 쥐었다 폈다 해서 너무 자주 달 대신 손가락 자체를 바라보게 만드는 손 같은 면이 있다.  더구나 그 손가락은 너무 많은 것들을 가리켜서 씨니피카시옹의 혼란을 일으킨다.  이렇게 된 이유는 크게 역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

< 개념적 혼란의 발자취 : 역사적 측면 >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폰이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가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다수 연구가들이 합의하기로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공포정치(reign of terror)’가 테러리즘의 연원이다.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이 왕당파를 무자비하게 암살, 고문, 처형하던 방식이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보면, 관제 테러리즘(state terrorism)이 테러리즘의 본래적 연원에 오히려 가까운 것으로서, 명분이나 동기는 다 제 각각이지만, 스탈린이 반혁명파에 대해서, 히틀러가 유태인에 대해서, 90년대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가 민간인들에 대해서, 러시아가 체첸에 대해서,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해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대해서, 인도 군대가 잠무카슈미르에 대해서, 아브하즈가 그루지야에 대해서, 시에라리온의 혁명연합전선 및 콩고 반란군이 그 시민들에 대해서 저지른 잔학행위들과 (어쩌면 80년 5. 18. 광주에서 일어난 일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문제, 즉 왜 테러리즘이라는 용어가 혼란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느냐는 의문의 역사적인 출발점은 여기서부터다.  방금 열거한 민간인 살상행위들은 그것이 테러리즘의 연원에 보다 근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테러리즘이라고 부르기는 다소 꺼리고 있는 사건들이다.

    19세기말에 들어와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그 사용법이 한번 뒤집힌다.  순전히 이 글의 편의를 위해서 일단 이것을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의 1차적 의미전환이라고 불러보자.  이번에는 다양한 혁명전사(revolutionary militant)들의 요인암살 및 시설물 파괴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서는 1914년 세르비아의 열혈청년 가브릴로 프린키브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살해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된 사건이겠는데, 이러한 의미전환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시대사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치적 암살의 동기를 크게, 무정부주의적인 것과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은 생각보다는 그다지 쉽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것 같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주의자들의 차리스트 요인암살, 우익 시온주의자들인 Stern Gang의 1944년 영국 국무장관 암살, 우리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대 로마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무슨 이유에선지 우리는 말년의 티베리우스 황제나 칼리굴라 황제가 하던 잔혹한 통치방식 같은 그 무엇과, 부르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것과 비슷한 그 무엇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가지, 이들의 정치적 암살 활동은 예컨대 9.11. 사건과는 구분되어야 할 특징이 있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행했거나 행하고 있는 일 때문에 그를 살상하는 것과, 불특정 다수를 단지 그들이 어떤 그룹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살상하는 것 사이에는 윤리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정치적인 암살자들은 -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열혈당원’이건 중세 이슬람의 Hashashin이건, 또는 안중근 의사건 - 이 두가지의 차이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테러리스트’들은 되도록 그 도덕적 경계선을 흐리기 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테러리즘이라는 기호는 다시 한번 의미상의 변화(2차 의미 전환이라고 해보자)를 겪게 된다.  내 생각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테러리즘의 양상이 달라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우리는 다른 양태의 살상 및 파괴행위에 또다시 테러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는게 좀 더 정확한 언명이라고 본다.  앞서 말한 첫 번째 의미 전도의 내막이 정치적으로 다소 미심쩍은 데가 있는 반면, 이번 의미확장에는 소위 ‘테러리스트’ 자신들이 상당히 기여를 했다.   1차 대전 후 inter-war period에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서도, 2차 세계대전 직후 전후처리과정에서도 제국주의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남은 지역, 예컨대 북아일랜드, 팔레스타인, 케냐, 사이프러스, 남예멘, 알제리 등지에서 민족주의자들은 관료들의 암살이나 군사시설 파괴에서 그치지 않고, 식민종주국의 일반시민이나 민간시설도 살상과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 PLO의 수많은 항공기 납치사건은 이러한 ‘무차별성’을 하나의 투쟁패턴으로 정착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대목에서도 나는 의문을 갖는다. 가령, IRA의 militant가 영국 고위관료를 암살하는 것과 시가지에서 폭발물을 터뜨려 일반시민들을 살상하는 것을 과연 같은 범주의 범죄로 구분하는 것이 온당한가.  같은 조직의, 심지어 같은 사람이 저질렀고, 동일한 정치적 목적에 부응하는 행동이라고 해도 말이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근무하던 3,000여명의 미국시민이 단지 그때 그 빌딩에 있었다는 우연한 이유로 살해당한 것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자국의 독립을 위해 식민총독을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 사이에는, ‘사람이 죽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도대체 무슨 유사성이 있단 말인가!  테러리즘의 2차적 의미 확장에는, 마치 같은 사람이 저질렀다고 해서 강도와 사기를 동일한 범죄로 취급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일종의 기호학적 오류가 더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0년대 이후부터는 독일의 적군파, 이태리의 붉은 여단, 미국의 Weathermen 등 민족주의적 색채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도시게릴라들이 항공기 납치를 비롯해서 무차별, 불특정 인구를 대상으로 살상 및 파괴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이로써 테러리즘의 의미는 더욱 풍성하게(?) 되었다. (세번째 의미확장이라고 하자.) 더 최근에는 일본 옴 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등 컬트의 반사회적 파괴, 유나바머로 널리 알려진 Kaczynski 교수의 우편폭탄 등 온갖 사회적 범죄행위들이 역시 테러리즘으로 분류됨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단체 및 개인이 테러리스트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테러리즘의 의미 자체와 더불어 그 대상과 주체가 꾸준히 확장되어 온 바탕에는 세가지 현대적 현상이 있다.  그 하나는, 잘 알려진 대로, 기술의 혁신이다.  로버트 카플란은 그의 저서 Warrior Politics에서 ‘탈산업혁명은 휴대폰과 한 자루의 폭발물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권력을 쥐어준다’고 썼다.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감안하면, 새로운 미국의 적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정한 게임이라는 공식에 따라 싸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불길한 그의 예언은 작년 가을 뉴욕에서 현실로 확인되었다.  두 번째는 세계화 현상이다.  세계화 현상은 범세계적 자본주의의 확산을 초래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를 오히려 심화시키면서 안전망으로서의 국경의 의미를 감소시키고 있다.  digital divide는 지구 한편에서는 기업가적 신흥 부자를 만들어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한층 더 불길한 새로운 빈곤층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후진국에서 인구증가에 따른 빈민 청년층의 증가는 서부 아프리카의 살인적인 10대 군인들, 러시아와 알바니아의 마피아들, 라틴아메리카의 마약 상인들,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병, 그리고 전자우편으로 연락을 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추종자와 같이 (카플란의 표현에 따르면)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잔인하고도 한층 잘 무장된 전사계급”을 탄생시키고 있다.  세 번째 현상은 민주주의의 확산이다.  당연히, 일반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치적 권리를 가지게 된 뒤로, 민주주의 사회의 유권자들을 위협하는 일은 왕정체제에서 하급관리를 살해하는 일에 필적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匹夫匹婦들에게 권리, 책임과 아울러 ‘정치적 위험’도 나누어 준 셈이다.

    또다시 요즘, 유엔을 비롯한 테러리즘 관련 국제적 포럼에서는, 네 번째의 의미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국가 테러리즘(state terrorism)도 테러리즘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국가에 의해서 탄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가/단체/개인이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의 역사적 연원이 “위로부터의 테러” 또는 관제 테러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 기호의 용법을 1790년대 자코뱅 당시로 환원시키려는 노력을 ‘눈치 빠르게도’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나치즘 및 스탈리니즘은 전형적인 국가 테러리즘 사례에 해당한다.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게다가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도 자꾸만 확장되어가는 추세다.  전형적인 형태의 테러리즘 공격이라도 그 배후에 이를 조장하거나 지시한 국가(또는 국가 agent)가 있다면, 그 역시 ‘국가 테러리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나,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이 북한에 의한 국가 테러행위라고 본다.  미국정부는 이라크, 북한, 이란, 수단, 시리아 등 몇 나라들을 테러 지원국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불량국가(rogue states)라고 부르고 있다.  2200년전 연나라 태자 丹의 사주를 받아 진시황을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荊軻의 경우도, 진시황이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국가 테러리즘 사례로 불리웠을 것이다.  국가 테러리즘에 해당하는 사건들은, 살상규모가 갈수록 커진다는 점을 빼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을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은 새로운 추세다.

    나는 오늘날 ‘테러행위’라고 지칭되는 다양한 살상/파괴행위들중 어떤 수법에 의한 것이 다른 것보다 덜 악랄하다고 죄질이 낮거나 높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프랑스 혁명당시에 생겨나서 최소한 너샛겹의 다양한 의미(씨니피에)를 가리키게 된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씨니피앙)가, 오늘날에는 신문 제목라면 몰라도 정치학 용어로서는 쓸모를 다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무슨 정치학자도 아니며, 정치학 용어의 삶과 죽음 자체에 별난 애착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정치학 용어로써조차 적합하지 않다면 그것은 법적 용어로써는 더더욱 실격이라는 점을 우려한다.  실제, 테러리즘이라는 의미작용(씨니피카시옹)상의 혼란은 오늘날 국제사회가 테러리즘을 불법화하고, 이에 대처하는 데에 (가장 실제적인 어려움은 아닐 지 몰라도) 가장 근원적인 어려움이 되고 있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앞에 두고 우리는 테러리즘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아는 것 같은 착각을 갖는다. 그런 인식은, hijacking, 인질, 폭발물, 암살 등 몇몇 특수한 -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서로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는 하기 어려운 - 살상방법과, 몇몇 귀에 익은 정치집단(entity)의 이름들, 그리고 몇 가지 역사적 사례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테러리즘에 대한 논의를 한발짝만 더 일반화시키려고 들면, 대체로 “테러리즘”이라는 말은 “굉장히 못된 짓”이라는 말로 바꿔치기해도 될 만큼이나 헐거워져버렸다.

< 왜곡의 동기 : 정치적 측면 >

    다시 거슬러 올라가, 테러리즘의 1차적 의미전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8세기말 프랑스 국민들이 혁명정부의 길로틴을 보면서 공포심을 가졌다는 뜻의 ‘테러’가 어떻게 요인암살사건에도 그대로 대물림되어 쓰일 수 있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대개의 정치적 암살자들은 자신의 도덕적 확신과 우월감에 (경우에 따라 암살행위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Michael Walzer는 이것을 일종의 ‘전문가적 자부심(professional pride)’이라고 불렀다.  씨저보다도 로마를 더 사랑했다고 군중들에게 연설하던 부르투스나, 형리들한테조차 존경을 받았다는 안중근 의사를 떠올려보시라.  이들은 자신의 암살대상을 선정할 때 까다롭게, 가급적 명확하고도 중요한 권력적 책임을 가진 要人을 골랐다.  많은 경우,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건 ‘거사’를 감행하면서도 주변의 일반인들(by-standers)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하는 ‘고상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암살대상 후보에 끼일 수 있는 요인들(officials)이 느끼는 공포나, 일반대중이 불특정다수로서 느끼는 공포나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스럽다.  민간인 또는 民이라는 구분은, 軍의 대칭어가 될 수도 있지만 官의 대칭어도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정치적 암살이 테러리즘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혹시, 권력자들이 스스로를 軍에 대칭되는 의미로서의 民이라는 개념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정치적 안전의 그물을 강화하려고 한 흔적이 아닐는지.

    좀 조악하게 표현해서, 테러리즘의 1차적 의미전환은 권력자들이 위협 앞에서 스스로를 보다 광범위한 피해자 그룹(백성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위험의식을 나눠주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진 담합의 혐의가 짙다.  이때 내가 말하는 권력이란, 행정부와 같은 실체적 권력기관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를테면 미쉘 푸코가 ‘권력은 정상(normality)의 반대개념인 광기(madness), 범죄, 비정상 등을 정의함으로써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한다’고 했을 때처럼 언어적, 사회적, 기호학적 권력을 말한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론에 불과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의 남용과 학대는 이때부터 이미 운명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기득권 세력과 권력주체는 항상 테러리즘의 (그 의미가 어떻게 복잡해지든지 관계없이) 피해자의 위치에 있어 왔다.  가장 최근의 의미전환에 해당하는 ‘국가 테러리즘’의 문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고전적인 “위로부터의 테러”라는 의미로 반전시키려는 시도를 일부 포함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양상은 일종의 권력다툼이라는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균형있는 서술은 못되겠지만, 미국과 오사마 빈라덴은 서로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호학적 싸움이다.

    테러리즘의 2차적 의미전환은, 앞에 설명한 대로, 북아일랜드나 알제리 등지에서 민족주의 세력들의 투쟁방법이 고위 정부인사에 대한 선별적 암살이라는 도덕적 우위확보 관행에서 벗어나 공격대상을 민간인으로 확대한 데서 초래되는 면이 크다.  거기에 더해서, 이미 ‘테러리즘’이라는 기호가 충분히 높은 부정적인 함의(negative connotation)를 지니게 되어 민간인 살상행위를 비난하는 프로파간다로서의 정치적 효용가치가 높아졌다는 사정도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의 사용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의 기호로서의 발생론적 연원상 테러리즘은 본질적으로 ‘테러리스트’를 “잔인한 압제자”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공격 받은 쪽을 “핍박받는 민중”의 자리에 놓는다.

    이러한 자리다툼의 방증은 2차 대전 이후 테러리즘의 사상적 옹호자로 부상한 서구 지식인들의 면면을 볼 때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사르트르는 알제리 반식민운동의 선구자인 프란츠 파농이 쓴 The Wretched of the Earth의 서문에서 “유럽인을 살해하는 것은 일석이조다.  그것은 압제자와, 그 압제자가 억압하는 사람 자체를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오직 죽은 자와 해방된 자만이 남는다.”라고 쓴 바 있다.  사르트르는 노예(식민지 피지배자)는 주인(식민지 지배자)에게 대항하여 그를 죽일 때 비로소 정신적인 해방을 누린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르트르처럼 유별나게 헤겔적인 멜로드라마에 심취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르쿠제나 호크 하이머 등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학자들은 (루카치의 영향을 받아) 서방의 번영을 제 3세계의 빈곤과의 직접적 상대작용하에서 파악했다는 점에서, 테러리즘의 공격대상이 좀 더 무차별적인 양상을 띄게 되는데 어느 정도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셈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오사마 빈 라덴의 Al Qaeda 역시 모하메트 선지자의 후예라기 보다는 - 브라질의 도시게릴라 운동가인 카를로스 마리겔라처럼 - 20세기 좌파 서구적 정신의 계승자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는 문명의 충돌보다는 오히려 문명간의 소통(?)을 상징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적어도 기호학적 측면에서, 알제리 FLN의 반식민주의 살상행위를 테러리즘으로 명명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민족주의자들과 유럽인들 간에 서로 누구를 “압제자”의 자리가 앉힐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다툼의 흔적과도 겹친다.  이러한 자리다툼은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의 매우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방이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대방이 자유를 위한 정당한 투쟁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이 점은 하나의 정치현상으로서는 흥미로운 것일 수도 있으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행위를 법적으로 범죄화 해야 한다는 좀 더 이상주의적 agenda에 비춰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테러리즘의 정의가 곤란한 것은 기술적인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 자체에 내재적으로 심어진 권력투쟁적 속성 때문인 것이다.  국제연맹이 1차 대전직후 추진하던 ‘테러의 방지 및 처벌을 위한 협약’이 발효조차 되지 못하고 사장된 사정이나, 오늘날 테러 관련 협약이 12가지로 조각조각 나 있는 사정, 9.11. 테러사건이라는 엄청난 반인도주의적 범죄가 벌어진 후에도 테러리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는 사정, 1999년 RAND 연구소가 굳이 ‘New Terrorism’이라는 카테고리를 고안한 것 처럼 새로운 기호를 발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정의 뒤에는, 이렇듯 좀 더 근본적인 정치기호학적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눈을 오늘날로 돌려서, 9.11. 사건의 여파를 살펴보자.  그 엄청난 사건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 유감스럽지만 - 테러리즘이라는 기호를 혁신하거나 좀더 협의로 정의하려는 노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기호는 새로운 종류의 남용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의 분리주의 세력(러시아의 경우 체첸, 중국의 경우 신장 및 티벳)이나, 정치적 숙적(이스라엘의 경우 팔레스타인, 인도의 경우 파키스탄)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는 유행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9.11. 직후 인도와 이스라엘은 파키스탄측이 ‘새로운 밀월관계’라고 우려할 정도로 긴밀한 대태러 협조 움직임을 과시했다.  미국은 탈레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면서 러시아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그간 러시아의 체첸 탄압을 인권유린이라고 비난해오던 것을 삼가고, 오히려 체첸 반군에게 러시아의 평화안을 수락하라는 외교정책을 펼친 바 있다.  체첸 반군이 최근 모스크바의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인 것은 오히려 그들 스스로 ‘테러리스트’라는 기호를 손쉽게 부여받는 惡手를 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대테러리즘이라는 명분으로 체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국이 이라크 문제를 9.11.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해결하려는 노력과 맞물려, 양국간의 타협의 여지를 크게 만들어 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들 국가들의 대태러 협조를 ‘협잡’이라고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국가는 무릇 국가이익에 기초해서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이익은 속성상 이기적인 agenda가 될 수 밖에 없다.  (국익이 아닌 인류애에 근거해서 분리주의자를 용납할 국가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테러리즘이라는 기호의 남용정도를 더한다는 점에서만 보자면, 이런 추세는 오히려 ‘테러리즘’의 불법화라는 제도적 해결점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테러리즘에 대한 대책은 국제법이 아닌 권력정치 쪽으로 수렴하는 셈이다.  법이 아닌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해결하려는 자와 해결 당할 대상이 날마다 조금씩 서로를 더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11.21. 네덜란드 방문 중 행한 연설에서 "대테러 전쟁의 부수적인 피해"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특히 각국의 테러리즘 대책이 인권침해를 정당하거나 은폐하는 데 악용되지 않도록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국내적에서 벌어지는 자유와 법치의 어떠한 희생이나, 새로운 분쟁의 시작도 그것이 반테러리즘의 미명하에 이루어진다면, 테러리스트들이 테러 행위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승리를 오히려 그들에게 안겨주는 셈"이라고 했다.  그는 노련한 외교관이고, 패션 감각이 좋은 멋쟁이이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반테러리즘이 국제정치의 최고 의제(top agenda)를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해야 할 이야기를 적시에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용감한 사나이이기도 한 것 같다.

< 이상주의적 agenda로서의 반테러리즘 >

    ‘정치적 이상주의’라는 표현을 꺼내면, 내 의도와는 다르게 곧바로 두 종류의 오해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최근 발견했다.  첫 번째는, 마치 내가 일반적인 국제정치 관행, 즉 국가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든지, 세력균형이 외교정책으로서 유효하다든지 하는 현실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정치의 ‘현실주의’ 학파가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부름으로써 왜곡한 ‘이상주의자’의 이미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비현실적인’ 도덕지상주의와 감상주의에 빠져 있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현실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론적 경쟁자들에게 선사한 셈이다.  내가 받는 오해들도 현실주의라는 기호학적 술책이 아직 잘 작동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되겠다.  ‘현실적’이라는 일반적인 술어와 국제정치상의 특정 사조(school)인 ‘현실주의’는 분명히 몹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곧잘 혼동을 일으킨다.  내가 국제정치학의 한 분파를 일컬으며 ‘현실주의’라고 쓸 때, 나는 H. Morgenthau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이 정치학 교과서에 자리잡게 만든 특정한 아이디어들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또한, 그 질적 지양점으로서 ‘이상주의’라고 말할때는 현실주의 사조가 지나치게 권력중심적인 분석 때문에 현상유지적이고, 정책지향성 강해서 처방적이고 반응적(reactive)이며, 진보에 대해서 비관적이라는 점을 극복해 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무슨 이유에선지 맑시즘과 빠르게 연관지어지며,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 단어를 Wilsonianism과 지나치게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의 잘잘못을 떠나서,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이상주의는 결코 맑시즘처럼 결정론적인 것도 아니고, Wilsonianism처럼 순진한(naive)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칸트적인 것으로서, 국제정치의 궁극적 지향점으로서 윤리적 목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국가가 도덕주의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보다 도덕적으로 될 것이라는 믿음은 틀린 것이라고 나는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인 목표를 가지는 것 자체의 중요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국제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에 대한 고민이 빠진 현실주의는 우리를 정치적 필요성의 노예로 만들고 말 것이 아닌가, 나는 걱정하고 있다. 아동의 권리, 여성의 향상, 민주주의의 확대, 전시 민간인 보호 등의 문제는, 따라서 나한테는 무척 중요한 것들이다.

    이만큼 장황하게 서두를 붙이면 눈치 채셨겠지만, 내가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테러리즘의 법적 규제라는 목표가 내 기준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이상주의적인 agenda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길게 썼듯이, 테러리즘이라는 기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고 다의적이다.  그것을 정의해 나가는 일의 어려움은 전쟁을 불법화하려는 노력과도 맞먹는다.  특히, 테러리즘에 관한 담론은 정의로운 전쟁수행을 논의하려는 정전론(Just War Theory)과는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흔히 정전론은, 그런 걸 논의한다는 자체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 말하자면 클라우제비츠 류의 - 비아냥에 직면하곤 한다.  그런 비아냥이 진실에 더욱 가까운 거라면, 안됐지만 그 냉소는 테러리즘에 관한 논의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정전론의 제반 주제들인 정치적 공동체의 권리, 침략, 선제공격, 자위권, 자결권, 분할, 내전, 인도적 개입, 무조건적 항복, 게릴라전, 보복, 중립, 긴급상황, 핵억지 등은 그대로 테러리즘 불법화 논의를 위한 목차가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간인의 면제(immunity), 군사적 필요성, 전쟁범죄 등의 주제는 반테러리즘 법제화를 위한 우선적 고려사항이다.

    실례를 좀 들어보자.  테러리즘에 관해 합의된 정의가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정의하려고 하든 그것은 전쟁법의 영역으로 자꾸만 한 발을 들이밀게 된다.  9.11. 사건 같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행위를 테러리즘으로 볼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가령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민간도시에 대한 영국 공군의 무차별 공습(terror bombing)이나,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와는 어떻게 다른가? 특히, 이 두 가지 공습의 사례는 그 공격 목적이 폭격대상의 파괴보다는 공포감의 확산을 통한 적의 사기저하를 노렸다는 점에서 테러의 본래적 의미와도 상당히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군사적 사례들을 테러리즘에 포함시키는 것은 반테러리즘 논의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1960-65간 월맹군은 월남 정부조직의 무력화를 위해서 약 7,500여명의 촌장들을 암살했다.  이 캠페인의 희생자에는 승려 및 성직자 등 ‘자연발생적인 지역유지’들도 상당수 포함되긴 했지만, 어쨌든 관료의 암살이 테러리즘에 해당한다면 이러한 살상행위 역시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월맹군의 이러한 행위는 일반적으로 테러리즘보다는 게릴라전술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에 의해서 자행된 군사공격은 테러리즘에서 제외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썼지만, 최근의 추세는 되려 국가 테러리즘도 테러리즘의 영역에 포함시키자는 목소리가 상당히 크다.  이 점은 이스라엘을 테러리스트 국가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이나, 북한의 KAL 858기 폭파사건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나, 또는 이라크 등을 테러지원국으로 부르는 미국이나 직.간접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선전포고를 거친 교전당사자간에 벌어지는 공격은 민간인 피해자가 있더라도 테러리즘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하면 정리가 되나? 그 경우에는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 폭파사건 등은 테러리즘이라기 보다는 (다시 교전상태로 돌입한 것으로 보아) 정전협정의 위반에 불과한 것인가?  만일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을 인정해서 국가가 단체에게 테러행위를 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거꾸로 개인 또는 집단이 국가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는 경우에는 무력사용을 일종의 준교전상태로 인정할 것인가?   예컨대, 오사마 빈 라덴은 이미 80년대에 미국에 대한 聖戰(jihad)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빈라덴의 세력에 대해 미사일 공격을 하는 것이나, 빈라덴이 (영국이 전쟁중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독일 도시들을 공습했듯이) 쌍둥이 빌딩을 공격한 것이나, 전부 ‘교전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가?

< 엉킨 실타래 풀기 >

    몇 가지 말장난 같은 예를 들어서 테러리즘에 대한 궤변적 불가지론을 펼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나 역시 테러리즘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어도,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 그것이 테러리즘에 해당하느냐 아니냐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느 정도의 느슨한 합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적으로는, 9.11. 사건 같은 부류의 범죄행위를 일컫는 새로운 용어(=기호)를 만들어 냈으면 제일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테러리즘이라는 기호는 이제 와서 사장시키기에는 지나치게 널리,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한가지 대안은 그것을 이제부터라도 가급적 좁은 의미로 정의해 나가자는 것이다.  대테러리즘(counter-terrorism)의 구체적 방법론들도 포괄적으로 다루어가기 보다는 가급적 초국가적인(trans-boundary) 범죄의 카테고리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나눠가는 편이 더 유용할 것 같다.  그렇게 하는 편이 테러리즘 대책(counter-terrorism measures)을 이행하는 법집행기관들에게도 더 명확한 지침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초국가적 조직범죄, 마약범죄, 국제적 자금세탁, 소형무기 거래, 핵무기 및 발사체 거래, 폭발물의 밀거래, 국가공무원에 대한 납치 및 살상, 유해화학물질 및 방사능물질의 오용, 우편물을 통한 살상행위, 항공기 관련 범죄, 선박 관련 범죄, 공공시설물에 대한 파괴, 인질범죄, 사이버스페이스 교란행위 등 범죄유형별로 - 테러리즘이라는 상위개념에 너무 구애받음이 없이 - 구체화 하는 방안이다.  누가 무슨 동기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저지르건 간에 살인죄는 살인죄고, 절도죄는 절도죄니까.

    두어가지 실제적인 문제를 꼽자면, 테러리즘의 주체로부터는 국가를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 덜 심각한 문제라서가 아니라, 그것은 전쟁법의 영역에서 다루도록 하는 것이 보다 명확한 법률적 역할분담에 부합한다.  다만, 국가의 개입이 매우 간접적이어서 전쟁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굳이 테러리즘의 개념 속에 국가테러리즘을 우겨넣기 보다는, 특수한 사례로서, 예컨대 유사 테러리즘으로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국가를 법적 처벌 대상으로 할 수는 없고, 처벌할 수 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가해자(perpetrator)다.  가해자의 인도에는 해당정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 테러리즘을 별도 개념으로 규정하는 실익은 없다.  테러를 자행하거나 사주 또는 지시한 범죄자를 인도받는 것 이외에 국가 테러리즘을 처벌하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전쟁밖에 없다.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용어가 새삼 인기를 끄는 것는 ‘테러행위’와 ‘테러범’과 ‘테러지원국’을 한마디로 비난하고 규탄하는 정치적 편리성 때문이다.

    대상에 관해서는, 불특정한 다수로서의 ‘민간인’을 살해함으로써, - 그의 살해 자체가 목표라기 보다는 - 테러리즘이라는 이름 그대로 ‘공포’를 피해자와 같은 집단에 소속된 다른 민간인들에게 확산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살상행위를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이런 논의들은 법률에 좀 더 식견을 가진 전문가들이 더 잘 해낼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일테지만, 이왕 문제를 제기했으니까 테러리즘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범죄행위들을 위에서 이야기한 취지대로 대략 구분지어보자면 이렇다.
(1) 개인, 단체 또는 국가가(국가의 경우 교전상대국이 아닌 대상에 대하여)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경제적 의사를 특정 커뮤니티에 광범위하게 전파할 목적으로 무차별한 민간인 및 민간시설을 목표로 행하는 살상, 납치, 억류 및 파괴행위
(2) 교전당사국 자격이 없는 개인 또는 단체가 군인 및 군용시설을 목표로 행사는 살상 및 파괴행위
(3) 교전당사국 자격이 없는 개인 또는 단체가 by-standers의 부수적 인명피해가 없이 특정인에 대하여 행하는 암살행위
(4) 개인, 단체 또는 국가가(국가의 경우 교전상대국이 아닌 대상에 대하여) 암살 등 특정인을 주요 목표로 하는 살상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불특정한 민간인의 부수적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행위
(5) 전쟁법 위반행위

    위의 구분 중에서 (1), (4)을 테러리즘으로 보는 것이 테러리즘의 의미를 가장 구체화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의 경우는 게릴라전에 해당하겠는데, 굳이 테러리즘의 이름으로 규탄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나 의심된다.  (3)의 경우는 그 가해자가 돈 콜레오네(영화 대부의 주인공)든, 리 하비 오스왈드든, 부르투스든간에 기존의 형법으로 처벌이 가능하고, 단순 살인범이냐 정치적 확신범이냐, 또는 그 죄질이 얼마나 무겁고 악랄하냐의 여부는 형의 양과 종류로 결정하면 될 일이지, 이또한 테러리즘으로 부름으로써 개념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  국가가 전쟁의 이름으로 행하는 각종 비인도적 행위를 처벌하는 데는 - 앞서 이야기했듯이 - 인류의 진보와 발맞추어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는 전쟁법의 발전에 기대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유감스럽지만.  9.11. 사건의 의미 가운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개인 대 국가의 전쟁’이라는 개념의 완성을 예상보다 훨씬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전쟁법은 처음부터 다시 쓰여져야 하겠는데, 적어도 그때까지는 주권국가간의 전쟁행위는 완전히 별개의 그 무엇으로 다루어야만 ‘테러리즘’이라는 기호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테러리즘의 불법화는 대테러리즘 대책수립 못지 않게 중요한 정책과제다.  한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개신교도, 유태인들이 그들이 단지 한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개신교도,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작위로 공격표적이 된다는 살상관념의 야만성은 어쩌면 전쟁 자체보다도 더 시급하게 막아야 하는 인류 공통의 숙제다.  이왕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좀 더 요즘 영화 한가지를 더 예로 드는 것으로 맺음을 대신하겠다.  

    Collateral Damage에서 아놀드 슈와츠제네거는 콜롬비아 게릴라들의 LA 건물폭파 테러행위에 아내와 아들을 잃은 소방관 존 브루어로 출연한다.  이 영화에서 콜롬비아의 ‘테러리스트’ El Lobo(늑대)는 “sangre o libertad(blood or liberty)”라는 구호를 쓰는데, 이것은 미국의 급진파 독립운동가 Patrick Henry의 저 유명한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는 志士的 선언의 뒤집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우선 ‘자유’와 ‘죽음(피)’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고, 영화 문맥상 El Lobo의 그것은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피)을 주마.(Give me liberty or I'll give you death.)”라는 의미로 물구나무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테러리즘’의 2차적 의미전환을 연상시키는 말장난(pun)이다.  어쨌든, 소방관 존 브루어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단신으로, CIA도 찾아내지 못했던 El Lobo의 정글 속 은신처에 잠입하다가 게릴라들에게 생포된다.  게릴라의 두목 클라우디오 뻬리니와 존(아놀드)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 클라우디오 :  흠... 그러고 보니 우리는 둘 다, 대의(cause)를 위해 기꺼이 살인을 하려
                  하는군.  우리가 서로 다른점이 뭔가?
             - 존 :  다른점은.... 난 “너를” 죽이려고 한다는 점이지.(Difference is... I'm just gonna kill you.)

    아무리 진지한 대사라도 일단 그것이 아놀드 슈와츠제네거라는 배우의 입을 통해서 읽히면 좀처럼 사려깊은 선언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는 있지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도 요컨대 이런 비슷한 것에 해당된다.  테러리즘이라는 기호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열쇠는, 존 브루어가 지적한 것 과 같은 구분에 있고, 어쩌면 이런 구분에‘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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