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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시대? (1998.1.)

posted May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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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남의 탓’이라는 말이 있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IMF 시대’니 ‘IMF 한파’라는 표현을 불필요하게 남발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풀어서 쓰자면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라는 의미일텐데, 거두절미하고 현 상황을 IMF를 머릿글자로 써서 규정하는 것은 책임회피요 자기기만의 혐의가 짙다.  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IMF가 무슨 크리스마스의 반대말이라도 되는 듯 ‘요즘은 IMF라서..’ ‘IMF인데..’라고 해버리고 마는 희극적인 현상이 벌어진다.  ‘IMF 자살’이니 ‘IMF 속병’ 등의 신문기사 제목도 눈에 띈다. 일부 식당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는 IMF 메뉴는 또 무엇인가.  밥 사먹을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조건으로 외상을 주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외식업계 고객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우려하여 식사예절이 엉망인 사람에게는 웃돈을 받거나 반찬을 덜 주고 매너 좋은 손님들에게는 곱배기로 주는 메뉴를 말하는 것일까?

    어려운 시절을 맞아 음식값의 거품을 빼자는 좋은 뜻을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IMF 무엇무엇이라는 그 생략의 미학 속에 숨은 ‘남의 탓’은 따지고 보면 결코 건강한 현상이 아니다. 현재의 위기를 ‘IMF 시대’라고 부르는 심리 속에는 예컨대 ‘일제시대’ 또는 ‘미군정 시대’ 라는 표현의 연장선상에서 남의 탓을 하고 싶은 본말전도의 책임회피가 숨어있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책임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들의 책임 떠넘기기가 일상화되어버린 사회가 있다면, 그런 사회에서 책임감 있는 정치가나 관료나 언론인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오물 속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무망하다 할 것이다.

    현 경제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 자본시장으로의 편입을 초래한 일련의 자율화 조치, 정경유착, 관치금융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고삐풀린 망아지 같았던 금융부문의 해외투자/부동산 투기), 경직된 환율정책, 기업의 과도한 차입경영, 고비용 저효율 생산구조, 생산성 증가율을 앞질러버린지 오랜 임금상승률, 가계의 과소비 등등.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 대부분이 위기를 초래하는 데 크고 작은 기여를 했거나, 위기의 주범인 ‘거품경제’의 과실을 누려온 셈이다.  한편, IMF로 말씀드리자면 한국이 지금과 같은 질곡에 빠지도록 유도한 장본인이 아니다.  IMF로 부터의 구제금융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작년을 넘기지 못하고 채무이행유예(모라토리움)을 선언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을 가리켜 ‘우리의 경제위기’라기 보다는 ‘IMF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의사들이 항상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더러 誤診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제 병을 의사 탓으로 돌리는 것은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몰상식한 행동일 것이다.  긴축(austerity measures)을 주무기로 삼는 IMF의 처방에 대한 논리적 비판을 무조건 삼가자는 의미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칠 만큼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IMF 시대’라는 용어 속에 함께 버무려져 있는 부정확하고도 감정적인 요소들이고, 정작 사태의 본질을 슬쩍 감출 수 있는 이 용어를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대량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일본이 이 틈을 이용해서 실속을 챙긴다는 서운함이 깃든 푸념도 들린다.  아닌게 아니라 금융개혁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어 보이는 수입자동차의 형식승인 문제나 수입선 다변화의 폐지문제 같은 이슈가 두드러져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치료비가 비싸다고 해서 ‘앓느니 죽을’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제경제체제에는 불행히도 시바이처와 같은 ‘공짜 의사’는 없다.  입장을 바꿔서 우리 나라가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에게 돈을 꿔 준다면 그것은 결코 공짜일수도 없고, 공짜여서도 안된다는 것이 좀 더 쉽게 명백해 진다. 여기에 대해 절치부심이나 와신상담이라면 또 모를까 억울함과 서운함을 느끼고 만다면 그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탓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책임을 면하려고만 하는 추태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누군가를 꼭 집어서 화풀이를 하고 싶다면, 글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인제는 돌아온 누님’처럼 거울 앞에 설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소쩍새 울고, 계절이 바뀌면 국화꽃 한 송이 피워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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