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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 Italia (1)

posted Jun 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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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9일, 월요일


1995년까지 영국에서 학생으로 지내며 서유럽을 싸돌아다닌 뒤로 어느덧 6년이 흘러갔다. 그 사이에 내가 몸담은 외무부는 외교통상부로 변신했고, 우리나라는 미증유의 외환위기를 겪었으며 나는 두 아들의 아비가 되었다. 뉴욕의 유엔대표부에서 근무하다가 2001년부터는 오만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첫 휴가를 맞았다. 중동에 와서 더위와 씨름하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로 했다. 영국 연수 시절에 유럽을 돌아다니면서도 로마는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었다. 하루 이틀 스쳐 지나가며 증명사진 찍듯 구경하기에는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중을 위해 미뤄둔 행선지였다. 이제 기회가 왔다. 마침 로마에 근무하고 있던 동기 임훈민 형이 자상하게 일정을 짜주었다.


오만에서 난생 처음으로 섭씨 50도를 웃도는 더위를 만나 몇 달간 씨름하던 우리 식구들은 7월이 오자 시름시름 생기를 잃어갔다. 머스캇의 더위를 탈출하듯 떠나온 우리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로마 공항에 내렸다. 그런데 공항의 수하물 찾는 곳에서 승객들이 다 짐을 찾아 떠날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에어 프랑스에 싣고 온 우리 짐가방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간 기착지였던 바레인에서 실수로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비행기 수하물은 며칠 뒤라도 배달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다, 가방 안에 특별히 값나가는 물건도 없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짐이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온 식구가 맨몸으로 지내야 하니 작은 걱정도 아니었다. 혼자 바레인에 떨어진 짐가방도 불쌍했지만, 땀에 젖은 채 맨손으로 호텔에 들어온 우리 식구의 몰골도 가히 이재민을 방불케 했다. 급한 대로 근처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았다. 여행은 제법 다녀 봤지만 첫날부터 세면도구나 속옷과 티셔츠 따위를 사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내는 것이 가장의 몫이었다. 식구들을 이끌고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으로 나섰다. 초등학교 1, 2학년이 된 두 사내 녀석들은 분실한 가방 따위는 아랑곳없이 신이 나서 비둘기를 잡겠다며 뛰어다녔다. 7월의 로마도 서울의 한여름보다는 훨씬 뜨거웠지만 오만 기준으로 보자면 섭씨 40도 미만이면 피크닉용 기온이었다. 아이들이 끝없이 뛰어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둘째는 기어코 손으로 비둘기를 잡아들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나타나 제 엄마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느긋한 사람들 틈에 살면서 동작이 굼뜨게 길들었기로서니, 일곱 살짜리 꼬마 손에 잡히는 비둘기라니 한심하지 뭔가.


베네치아 광장의 정면에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이 육중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1861년 이탈리아 최초로 통일왕국의 왕위에 올라 ‘국부Padre della Patria’라는 별명을 얻은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마리아 알베르토 에우게니오 페르디난도 토마소’(1820–1878)의 이름을 딴 건물인데, ‘통일기념관’이라고 통칭되고 있었다. 1935년에 완공된 이 기념관은 이탈리아 통일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기념관 건물의 상부에는 이탈리아의 통일에 기여한 무명용사들의 묘가 있다.


나로서는 이 기념관의 외관이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로마는 원래 일곱 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발달한 제국의 수도였다. 기념관 바로 뒤편의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은 원래 이름이 카피톨리누스Capitolinus, 즉 머리라는 뜻이었다. 제일 높아서 머리가 아니라, 최고신 유피테르를 비롯해 유노와 미네르바의 신전을 모신 데다, 막강한 권력자들이 저택을 짓고 살던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시절 최고 제사장을 겸직하던 황제들은 큰 전쟁에서 승리하는 국가적 경사가 있으면 이 언덕에 올라 신에게 감사하면서 시민을 결집시키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셈이다. 나라의 도성을 가리키는 캐피털capitol이라는 영어단어의 어원이 바로 라틴어 카피톨리눔이다. 머리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법. 고대에는 전 세계의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이 캄피돌리오 언덕을 가리켰을 “캐피털 힐Capitol Hill”이라는 표현은 지금은 워싱턴 DC의 미국 의회를 지칭한다. 좌우간, 무솔리니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캄피돌리오 언덕을 육중한 고층건물로 가로막아 놓은 것이었다. 어쩐지 경복궁을 가리고 섰던 예전의 중앙청 건물이 뇌리에 떠올랐다. 중앙청의 경우는 나라를 빼앗은 남이 지어놨다는 변명이라도 있었거늘.


고대에 지어진 유적은 웅장하면서도 제각각 특이한 디자인으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데, 20세기에 지어진 통일 기념관이 주는 느낌은 아름다움보다 위압감이 먼저다. 이 건물은 고대인들의 미적 감각을 그 후예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음을 실토하고 있었다. 로마의 석조건물은 인근지역에서 생산되는 옅은 적황색의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유독 통일기념관은 흰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어서, 뭐랄까, 마치 친지들의 집안 모임에 혼자 파티 드레스를 입고 무대화장을 하고 나타난 - 그것도 몸집이 아주 큰 - 아줌마처럼 보였다. 20세기 초의 이탈리아인들은 통일을 마음속 깊이 자랑스러워 했다기보다, 통일을 자랑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은 혹시 아니었을까?


베네치아 광장의 왼쪽 구석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 원주Colonna Traiana가 서 있었다. 역사책 안으로 뛰어 들어온 느낌이었다.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태어나 최초의 속주 태생 황제가 되었던 사나이. 그가 101년에서 106년까지 두 차례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 원정에 성공하고 제국의 판도를 넓힌 것을 기념한 기둥이다. 이 원주 둘레에 그려진 부조물은 그림으로 남겨진 다키아 전쟁기인 셈이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제위기간동안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서쪽으로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일대와 이집트 남부, 북쪽으로는 브리타니아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강역에 이르렀다. 무솔리니가 완성한 통일 기념관이 트라야누스의 원주를 고압적으로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기념관의 오른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올라갔다. 고대에 유피테르 신전이 있었던 남쪽에는 콘세르바토리 궁Palazzo dei Conservatori이 있고, 북쪽에는 산타마리아 아라코엘리 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in Aracoeli가 있다. 그 사이의 둔덕을 광장으로 ‘리폼’한 사람은 다름 아닌 16세기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였다. 개신교의 저항운동이 북유럽에서 불붙기 시작하던 무렵, 로마 교회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싶어 하던 교황 바오로 3세가 미켈란젤로에게 로마의 영광을 복원시켜 달라는 주문을 했던 것이다. 고대의 조각상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 대부분 우상으로 취급되어 파괴되지만, 캄피돌리오 언덕 한가운데에는 5현제의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기마 청동상이 보존되어 있다. 이 동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상으로 오인 받아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동상의 대리석 받침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니, 정말 로마는 거대한 노천박물관이다.


우리는 캄피돌리오 언덕을 내려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를 거닐었다. 시간의 흐름이 서글펐다. 제국의 영광을, 중요한 역사를, 무수한 사건을 담고 있는 공간이 허물어진 채 풀밭 위로 펼쳐져 있었다. 이곳을 행진했을 그 많은 개선장군들은 무엇을 위해서 싸웠던 것인가. 포로 로마노의 역사적 무게를 아직 이해할 길 없는 나의 두 아이들에게는 유적이 그저 풀밭 사이에 나뒹구는 숨바꼭질 엄폐물일 뿐이었다. 모처럼 중동의 모진 더위에서 벗어나 깔깔거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내가 서글퍼할 이유는 없었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단위의 시간은 뿌듯하고 행복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여행’이라면 의례히 아기를 업거나 안고 다니는 것을 의미했었는데 어느새 불쑥 자란 두 녀석은 의젓한 여행의 주체가 되어 있었다. 오랜 역사의 잔해 사이로 ‘나의 내일’이 되어줄 두 꼬마가 지칠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7월 10일, 화요일


도시 속의 나라, 바티칸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으로 갔다. 바티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고, 산 피에트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대성당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에 바티칸이 비좁아 보인 건지도 모르겠다. 바티칸 시국은 0.44㎢의 면적에 900명 정도의 인구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다. 프랑스 남부의 소국 모나코도 바티칸보다는 4.5배나 더 크다. 우리가 흔히 ‘도시국가’라고 부르는 싱가포르의 면적조차 699㎢나 되니까, 싱가포르 지도를 바티칸 만한 크기로 오려낸다면 1588개쯤의 조각이 생겨난다. 명동성당이 있는 명동 면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크기를 가진 바티칸이지만, 이곳을 우러러보는 전 세계 11억 가톨릭 신자들을 계산에 넣으면 다른 얘기가 된다. 실제로 바티칸은 정확한 규모가 베일에 싸여진 엄청난 자금력과, 전 세계 어느 정부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 예쁘게 줄무늬 제복으로 차려 입은 100여명의 스위스 근위병이 바티칸이 보유한 군사력의 전부지만, 바티칸의 힘은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산 피에트로, 그러니까 성 베드로 대성당은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건물이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대견해 보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칼리굴라 황제가 첫 삽을 퍼서 네로 황제가 완공했던 대형 경기장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의 수제자인 성 베드로가 이 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바티칸에 교회를 지었는데, 이것이 지금 존재하는 산 피에트로 성당의 전신이다. 역설적이지만, 산 피에트로 성당이 지금처럼 거대한 건물로 변신한 것은 가톨릭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받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1505년에 교황 율리오 2세가 새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고 설계를 공모했다. 어쩌면 율리오 2세에게 크고 화려한 대성당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솔리니에게 거대한 통일 기념관이 필요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로 지어진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공을 들여 지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대성당이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120년의 세월이 걸렸다. 덕분에 이 성당의 설계와 시공과 건설에는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등 세대가 다른 쟁쟁한 예술가들이 시차를 두고 동참할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설계한 복도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기둥과 돔,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이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대성당 건축의 뒷이야기가 다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건축에 쓰일 2천개 이상의 돌은 교황의 지시로 콜로세움에서 뜯어왔고, 대성당의 거대하고 우아한 나선형 기둥들의 재료가 된 청동은 판테온의 입구에서 뜯어온 것이었다.


간혹 모든 문화재는 당연히 다 복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런 이들도 이런 경우라면 난감할 것이다. 대성당을 뜯어서 콜로세움을 복원할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문화재가 인류 공동의 역사라면, 문화재를 훼손한 기록과 기억도 분명히 역사의 일부다. 현존하는 문화적 자산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좋지만, 역사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려는 태도는 불길하고 위험하다. 누군가 덕수궁을 복원하기 위해 영국 문화원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티칸에 와서 고민을 좀 해봐야 한다고 본다.


대성당 입구의 바로 안쪽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상 앞은 관람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성당의 다른 조각 작품과는 달리, 성모가 숨진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만은 두꺼운 유리에 둘러싸여 있다. 1972년에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미치광이가 "나는 예수다"라고 소리치며 망치로 내리쳐 부순 것을 간신히 복원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스물세 살짜리 예술가가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해부학적 사실성, 고전주의적 균형미, 르네상스적인 극적 긴장감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어떤 미친 인간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도 이 작품을 유리 상자 너머로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 대신, 바티칸 박물관에서 만난 라오콘 부자상Gruppo del Laocoonte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트로이에 살던 라오콘은 비운의 예언자였다. 그는 그리스의 목마가 불길한 물건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리스 편을 들던 아테나 여신이 보낸 물뱀에 의해서 트로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바티칸에 전시되어 있는 라오콘 상은 기원전에 만들어진 헬레니즘 양식의 조각 작품으로, 1506년에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발굴되어 유럽 르네상스 예술계에 일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발굴에 참여했던 미켈란젤로도 이 조각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서양미술사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작품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 앞에서 넋을 빼앗겼다. 물뱀의 징그럽도록 정교한 묘사와, 회한과 억울함으로 일그러진 삼부자의 표정, 고통으로 긴장한 육체의 날 선 근육들! 발굴 당시 부서진 여러 조각이던 것을 복원했는데 라오콘의 오른팔과 아들들의 손은 발견되지 않았었다. 미켈란젤로는 전체적인 구도나 근육의 상태로 미루어 라오콘의 오른팔은 뒤로 꺾인 모습일 거라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유행에 맞추어 앞으로 팔을 뻗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무려 400년 뒤인 1906년에 콜로세움 근처에서 라오콘의 오른팔이 발굴되었고, 그 팔은 - 놀랍게도 - 미켈란젤로가 주장했던 것처럼 뒤로 꺾어진 모습이었다. 과연 천재 예술가 호칭을 아무나 듣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라오콘 부자상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의 눈길을 끈 것은 ‘말을 사냥하는 사자’ 석상이었다. 두 녀석은 사자의 입에 손을 집어넣으며 익살을 부리고 있었다.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은 교황의 비밀선거Conclave가 거행되는 곳이다. 묵은 때를 벗고 깔끔한 파스텔 톤으로 단장한 미켈란젤로의 천장 프레스코화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예배당의 양쪽 벽에 그려진 벽화들은 모세와 예수의 일생을 그린 것으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로첼리Cosimo Rocelli, 시뇨렐리Luca Signorelli 등 당대의 대가들의 손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역시 압권은 미켈란젤로가 창세기의 내용을 그려 넣은 천장화와 제대 뒷면에 그린 천지창조 벽화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66세가 되던 1512년까지 무려 4년에 걸쳐 사다리 위에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그림을 그리느라 휜 척추와 관절의 염증을 얻었고, 얼굴 위로 떨어지는 안료 때문에 눈병과 폐렴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이 미켈란젤로 역으로 출연했던 1965년 영화 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안료가 처덕처덕 얼굴 위로 떨어지는 천장 밑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어깨가 굽는 노 미켈란젤로를 실감 나게 그리고 있었다.


시스티나 천장 벽화의 복원은 NHK의 후원으로 1980년부터 시작되어 1994년에 완결되었는데, 막상 복원해 놓고 보니 너무 밝고 깨끗해진 벽화에 오히려 실망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근대 이후 최근까지 시스티나 벽화에 대해서 미술사가들과 평론가들이 떠들어댄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 헛소리였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고색창연한 유물에 익숙하고, 그것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복원된 천장화를 가리켜 “베네통 톤의 미켈란젤로”라고 비아냥거린다. 미켈란젤로가 환생한다면 포복절도하거나 대노격분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따지고 보면 매사에 그런 식인 것이 인간세상이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관습주의에 사로잡혀 선대의 성현의 말씀을 따른답시고 도리어 그 이름을 욕되게 만든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이던가. 반드시 오랜 세월을 거쳐야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인생세간에서는 언제나 “왕보다 더 왕당파적인(More royalist than the king)”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들이 항상 큰 목소리를 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틀림없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 앞에는 1656년부터 장장 11년에 걸쳐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감독해서 만든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사실 ‘펼쳐져 있다’기 보다는 광장이 대성당의 품에 둥글게 안겨 있는 형상이었다. 사람이 가득 차면 무려 40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이 광장의 한 복판에는 로마의 정복자들이 이집트에서 옮겨 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원래는 네로황제의 경기장에 있던 첨탑을 이리로 옮겨왔다는데, 그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오벨리스크가 이집트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던 기념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이 뿔뿔이 흩어져 프랑스(파리 콩코드 광장), 이탈리아(바티칸 등 11 곳), 영국(대영박물관 등 4 곳), 미국(뉴욕 센트럴 팍), 폴란드(포즈넌 박물관), 터키(이스탄불 광장) 등 서반구의 전역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는 사실은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심지어 워싱턴 DC의 독립기념탑도 오벨리스크의 모양을 흉내 낸 것이니, 이집트 태양신 입장에서는 흐뭇한 노릇일도 모른다. 특히 그중에서도 세계 기독교의 중심인 바티칸 광장 한복판에 이 물건이 있다는 것은 유난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처럼 느껴졌다.


7월 11일, 수요일


로마 시내를 가로지르는 테베레Tevere 강을 기준으로 바티칸 시국과는 반대편에 있는 보르게제 미술관Galleria Borghese을 방문했다. 미술관 건물에 멋진 정원이 딸려 있었다. 부유한 예술 애호가이던 시피오네 보르게제Scipione Borghese 추기경의 저택이었던 건물을 20세기 초에 정부가 매입하여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18세기에 로마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채 못다 가져가고 남겨둔 걸작 예술품들이 전시된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나마 좋은 작품들이 이나마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1803년에 나폴레옹의 여동생 파올리나가 보르게제 가문의 카밀로에게 시집을 왔던 덕분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인심 좋은 후원가였던 보르게제 추기경 덕분에, 이 미술관은 루벤스, 보티첼리, 카라바지오, 다 빈치, 티치아노, 베르니니 등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기까지의 명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데, 백미는 베르니니의 조각 작품들이었다.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는 조각가 겸 건축가였다. 베르니니의 작품들은 넘치는 생동감으로 꿈틀대면서도 고전주의적인 엄격함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틀 속에 머물기 때문에 비로소 최고의 경지가 될 수 있는 역설이었다.


좀 이상한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베르니니의 작품을 보고 비로소 로뎅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이미 누군가가 완성시켜버린 쟝르에 종사한다는 것은 축복이기보다는 저주다. 회화에서 피카소가 그랬듯이, 조소에서 쟈코메티가 그랬듯이, 시에서 에즈라 파운드와 T.S. 엘리어트가 그랬듯이, 더 이상 작품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창작공간 속에 놓인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쟝르의 해체과정으로 돌입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낄 터다. 20세기의 예술가들이 추상과 주지주의와 컨셉츄얼리즘과 아방가드의 요지경 속으로 들어선 것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창조적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 이상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베르니니의 조각 작품에서 본 것은, 조형예술의 막다른 종점, 궁극의 경지였다. 만약 오귀스트 로뎅의 재능이 한 치만 모자랐다면 아마 그도 앤디 워홀이나 헨리 무어나 요셉 보이스처럼 추상의 세계 속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 이후에 태어난 조각가임에도 개성 있는 구상 조형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로뎅은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내 좁은 식견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사람이 쪼아 모양을 만들기 전에는 돌덩어리에 불과했을 차가운 물건으로부터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폴로와 다프네Apollo e Dafne>는 사랑의 열병에 들뜬 아폴로가 망연히 바라보는 가운데 올리브 나무로 변신해가는 다프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베르니니는 뛰어다니던 사람이 나무로 변해가는 모습을 묘사했지만, 실제로 그가 한 일은 다프네의 변신과는 반대방향의 작업이었다. 차가운 대리석을 쪼아서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은 작품을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플루토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가는 장면을 묘사한 <페르세포네의 납치Ratto di Proserpina> 앞에서 나는 플루토의 손아귀 힘으로 움푹 들어간 페르세포네의 연약한 살결을 한참동안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미술이란, 역시 미술이어야 한다. 첫째, 아름다워야 하고(Fine, 美), 둘째, 장인의 기술(Art, 術)로 빚어진 결과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랜 동안의 치열한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익숙함 없이 우연히 획득되는 아름다움은 美일 뿐이지 術이 될 수는 없을 터다. 베르니니여, 바위 덩어리에서 욕정을 깨워낸 그대 관능의 화신이여.


베르니니를 발견한 이상 박물관만 구경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굳이 식구들을 끌고 산 프란체스코 리파San Francesco a Ripa 성당을 찾아갔다. 그곳에 있다는 베르니니의 또 다른 걸작품 <축복받은 루도비카La Beata Ludovica Albertoni>를 보기 위해서였다. 과연! 구겨진 옷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황홀경. 작품을 구경하는 나도 작품 속의 수녀 알베르토니 만큼이나 황홀한 느낌이었다. 이 작품을 만들 때 베르니니의 나이는 무려 일흔한 살이었다고 한다.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사진을 몇 장 찍었지만 플래시를 쓰지 않으니 선명한 사진은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성당 밖에서 비둘기 떼를 쫓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오후에는 스페인 광장으로 갔다.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에서 오드리 헵번이 총총거리며 걸어 내려오던 계단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 계단에 일렬로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더위를 식혔다. 기억 속에 흑백 화면의 풍경이던 곳에 앉아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도심의 풍경을 우리는 왜 갖지 못했을까.


7월 12일, 목요일


훈민 형은 자상하게도 우리 네 식구의 베네치아Venezia 왕복 기차표도 예약해 두었다. 시간을 길에다 버릴 필요가 없다며,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길은 침대칸 밤차를 예약해 주었다. 베네치아는 풍경에 취한 관광객의 지갑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터는 상술로 가득한 곳이니 정신 바짝 차리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유태인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곳의 식당과 카페들은 악 소리가 날 만큼 비쌌다. 그런데도 일 년 내내 제 발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이렇게 북적이는 데야 어쩌랴.


세상에서 베네치아와 비슷한 곳은 오로지 베네치아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베네치아를 찾는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은 과거 이곳의 주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피땀 어린 발버둥을 친 흔적이다. 6세기 경 베네치아인들은 당시 중부유럽까지 쑥대밭으로 만든 훈족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뻘밭인 석호지역으로 도망쳤고, 이곳에 수상도시를 건설했다. 습지를 간척하고, 나무로 말뚝을 박아 건물의 기초로 삼고, 물이 고여 썩지 않도록 물길을 내 가며 도시를 만들자면 초창기 정착자들은 얼마나 고달픈 시행착오를 반복했을까?


그러나 베네치아는 도망자들의 도시로 머물지 않았다. 697년 초대 총독이 선출된 때로부터 1805년 나폴레옹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될 때까지 무려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도시국가는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대제국이냐 도시국가냐를 불문하고, 천 년 이상 국체를 유지한 나라로는 베네치아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베네치아는 그냥 허접하게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상당부분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세계 최첨단을 걷는 선진국이었고 유럽 최강의 해양강국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를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베네치아인의 냉철한 현실감각이었다. 그러나 그 냉철함이라는 것은 나의 선배가 "베네치아인들은 관광객의 주머니를 턴다"며 몸서리치는 그들의 얌체스러운 이미지와 한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게 아닐까.


두 눈으로 본 베네치아는 영화나 사진을 통해서 본 것과는 딴판이었다. 도시 전체가 협소한 간척지 위에 지어진 탓인지, 모든 도로는 건물 사이사이로 참 용케도 나 있다 싶은, 미로 같은 골목길이었다. 표지판을 조심스레 따라가지 않으면 누구라도 미아가 되기 십상이었다. 베네치아가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도시는 뻔히 그 속에 있으면서도 길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랑을 닮아 있었다. 무릎까지 바다에 담그고 선 건물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물 위로 떠다니는 곤돌라. 관광용 곤돌라뿐 아니라 택시도, 버스도, 앰뷸런스나 소방차도 모두 배를 의미하는 곳. 비현실적인 한 폭의 그림 같은 도시 속에 사는 현실감 투철한 사람들. 논픽션 작가 존 베런트John Berendt는 2005년 작품 <추락하는 천사들의 도시The City of Falling Angels> 속에 이 도시의 모습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그 책이 담고 있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논픽션이라는 사실 자체가 베네치아의 이율배반적인 개성을 증명하는 셈이다.


우리는 산마르코San Marco 광장으로 가서 멋진 광장과, 그곳을 가득 메운 관광객과, 관광객보다 훨씬 많은 수의 비둘기와, 광장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대성당을 구경했다. 최근에는 우기가 되면 바닷물이 범람해서 광장이 허벅지 높이까지 물에 잠기는 일이 잦다고 한다. 혹자는 지구 온난화 때문에 해수면이 높아진 탓이라고 하고, 혹자는 천 오백년 동안 건물의 무게를 버티던 석호의 지반이 침하되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광장의 기초를 이루는 말뚝들이 내려앉기 때문이라고 주장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유가 뭐든 간에 독특하게 아름다운 것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광장 한 구석에서 대성당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그렸다. 나의 두 아들은  새 모이를 양손에 쥔 채 광장 복판에 팔을 벌리고 서서 비둘기들이 팔위로 올라타는 것을 즐거워했다.


우리는 어둑해져 가는 베네치아의 골목들을 거닐었고, 책에서만 듣던 리알토 다리를 건넜으며, 유리공예 작업장도 구경했다. (물론 입장료를 냈다.) 솜씨 좋은 아저씨가 훅훅 불어 유리병과 유리로 된 말을 만드는 모습을 손뼉 치며 구경했다. 물론 나도 냉철한 현실감각을 발휘해서, 아무 기념품도 섣불리 사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밤기차의 아늑한 침대칸을 탔다. 처음 타보는 침대차에서 들뜬 밤을 보낸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네 식구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내린 종착역은 로마의 테르미니역Stazione Termini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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