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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가 필요한 이유

posted Dec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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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와 정통성


    미국의 전직 국무장관이자 현실주의 정치학자인 헨리 키신저 박사에 따르면, 전쟁은 정통성(legitimacy)이 허물어질 때 벌어진다. 정통성이란, 국제정치 행위자들 대다수가 수긍하는 판단의 기준을 의미한다. 어떤 국가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국가의 행동이 옳은 것이라거나 그른 것이라는 합의가 쉽사리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통성이 존재하는 상태다. 반면에, 어떤 국가의 어떤 행동이 용인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저마다 다른 판단을 내리는 상황은 대단히 위험하다. 전쟁은 허물어진 정통성을 되찾는, 국제정치의 자기회복과정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키신저의 1954년 명저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는 이러한 정통성의 중요성을 잘 설명한다. 19세기 유럽의 상황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오늘날에도 - 특히 북한이나 이란과 같은 ‘변혁적’ 세력에 관하여 - 놀라울 만큼 적실성이 있다.

 

“안정은 평화 추구의 결과가 아니라 널리 수용된 정통성(legitimacy)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성’이란, 정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행 가능한 합의들의 성격과, 외교정책으로서 허용 가능한 목표와 수단에 대한 국제적 합의 이상의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주요 국가들이, 적어도 베르사유 조약 직후의 독일처럼 변혁적인 외교정책으로 자국의 불만을 표현하지는 않을 정도만큼은 국제질서의 틀을 받아들이는 상황을 암시한다. 정통성 있는 질서는 갈등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그 범위를 제한한다. 전쟁은 일어날 수 있겠으되, 그 전쟁은 기존의 구조의 이름으로 치러질 것이고, 전후의 평화는 ‘정통성을 갖춘’ 일반적 합의의 보다 나은 표현으로서 정당화될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외교, 즉 협상을 통해 상이점을 조정하는 일은 ‘정통성 있는’ 국제질서 하에서만 가능하다.

국제질서 또는 그 질서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압제적이라고 느끼는 국가가 존재하면 언제나 그 국가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변혁적인 것이 된다. 그런 경우에 쟁점은 주어진 체제 안에서의 차이점의 조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체제 그 자체가 된다. 조정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파국을 앞두고 입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전술적 계책이나, 적국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단으로 인식될 것이다...

‘힘의 행사를 제한하는 예술’인 외교는 이런 환경 속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선의(good faith)’와 ‘합의에 도달할 의지’만 있다면 외교가 언제든지 국제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실수다. 변혁적인 국제질서 속에서라면 모든 국가들이 다름 아닌 바로 이런 자질들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비춰질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관들은 계속 회합을 가지겠지만, 더 이상 같은 의미를 가진 언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를 설득할 수는 없게 된다. 무엇이 합리적인 요구냐에 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외교적 회합은 기본입장의 헛된 되풀이나, 악의에 대한 규탄, 또는 ‘불합리한 요구’와 ‘전복’으로 몰아세우는 주장들로 점철된다. 그러한 회합들은 서로 대항하는 체제들 중 하나에게 그때까지는 갖지 못했던 힘을 실어주는 정교한 연극무대로 전락한다.

오랜 동안 평화에 익숙하고 재앙의 경험이 없는 국가들에게, 이것은 좀처럼 얻기 힘든 교훈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안정된 기간에 취해서, 그들은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겠다는 변혁적 국가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현상유지의 수호자들은 초기에는 변혁적 국가의 주장이 단지 전술적일 뿐이라는 듯이, 마치 그런 국가가 실제로는 정통성을 수긍하고 있으면서 협상 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과장한다는 듯이, 또는 마치 제한적 양보를 통해 누그러뜨릴 수 있는 특정한 불만에 의해 그런 행동이 유발된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은 쓸 데 없이 소란을 피우는 자(alarmist)로 간주되는 반면, 상황에 순응할 것을 권하는 사람은 온갖 훌륭한 ‘합리적 이치’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균형 있고 건전한 자로 간주되고, 그런 주장들은 기존의 틀 안에서 유효한 것으로 수용된다.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면, ‘유화정책(appeasement)’은 무제한적 목표를 가진 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들은 새로운 정통성을 수립함으로써 “세계를 회복”시켰다. 새롭게 수립된 제도들 중 중요한 두 개의 기둥(pillar)을 꼽아본다면, 그 하나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는 브레튼 우즈 경제체제(Bretton Woods System)이고, 둘째는 5개 강대국의 핵 기득권을 인정하는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체제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1967년 이전에 핵실험을 실시한 나라들에게만 핵무기 보유 권리를 인정하는 핵 비확산 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NPT) 체제로 귀결되었다. NPT체제는 그 불평등성 때문에 일부 개도국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실은 불평등성이 바로 NPT체제의 요체다. 그것은 다섯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한 세상이 수십 개 국이 핵무기를 가진 상태보다는 낫다는, 매우 합리적인 합의 위에 수립된 정통성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브레튼 우즈 체제와 NPT 체제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세계의 질서와 안정과 평화라는 ‘상판’이 얹혀 있다. 북한이 핵개발을 통해 하고 있는 일은, 다름 아니라 그 기둥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허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스스로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상관없이.

 

■ 비핵화 대 비확산


    북한 핵문제에 관해 논평하는 ‘전문가들’ 중에는 미국이 (또는 국제사회가) 내심 북한의 비핵화(denuclearization)는 포기하고 비확산(non-proliferation)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거나, 또는 그래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이 두 번의 핵실험을 거쳐 ‘사실상의(de facto)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았거나, 머지않아 인정받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하거나 염려하는 견해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때때로 미국이나 다른 6자회담의 참가국들이 북한의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마치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쟁보다 대화를 통한 해결을 선호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포기한 것일 수는 없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인정받는다면, 이란의 핵보유 또한 인정하지 않을 방도가 없을 터이다. 이들 국가들은 NPT 체제에 들어와서 핵기술을 습득하고 NPT 질서를 교란한다는 점에서, 애당초 NPT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한 몇몇 나라들과도 다르다. 핵 비확산이라는 정통성에 대해서, 위법성을 감춰줄 그 어떤 기술적 명분조차 없는 타격을 정면으로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이란의 핵보유가 기정사실화 된다면, 핵무기의 세계적 확산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미얀마, 시리아 등 국제적으로 핵개발 의혹을 받았던 국가들은 물론이려니와, 일본, 대만, 한국도 핵보유 대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국제정치는 모튼 카플란이 ‘단위 거부권 체계(unit veto system)’이라고 명명했던 홉스적 투쟁상태를 닮게 될 터이다. 북한이 핵보유를 인정받는 상태라는 것은 곧, NPT 체제가 붕괴된 상태를 일컫는다.

 

    당연하게도, 북한의 핵보유는 가장 치명적인 핵확산에 해당한다. NPT조약에 가입하고 핵기술을 전수받고 발전시켰으면서 탈퇴를 선언하고 핵보유를 선언하고 그것을 인정받기에 이른다면, 북한은 그러한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북한이 유일한 사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북한의 비핵화를 포기하고 비확산에만 대처한다’는 언술은 그 자체로서 마치 ‘결혼은 하지만 미혼의 상태로 남는다’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인 언명(oxymoron)이다.

 

    핵 비확산의 정통성이 무너진 핵무기 평준화 사태는 인류가 이제껏 겪어본 적이 없는 경험이다. 그런 세계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어느 패권국가에게도 불가능한 과업이 될 것이다. 2009년 6월 New York Times에 기고한 글에서, 키신저 박사는 완곡한 가정적 화법으로 이점을 지적했다.

 

 “북한 핵 프로그램을 사실상 인정한다면 미국의 현 전략계획은 재검토되어야만 한다. 미사일 방어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다수의 핵보유국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라면 미국의 억지전략을 재설계하는 일이 핵심적이다. 이러한 도전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노쇠하고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독재자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매달리는 과대 망상적 취미생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키신저의 말처럼, “변혁적 국가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국제질서의 정통성 자체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러한 질서가 작동하면서 유지하고 있는 억지력(restraint)을 침식”한다.

 

■ 두 개의 기둥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지브롤터 해협 양편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라고 불리는 바위산이 있다. 신화에 의하면 헤라클레스는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서쪽으로 가다가 아틀라스 산맥을 만나자 산맥을 허물어버려서 해협이 생겨났다고 한다. 대륙의 끝에서 하늘을 이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 ‘산맥을 허무는’ 파괴의 결과로 생겨났다는 신화의 내용은 시사적이다. 브레튼 우즈 체제와 NPT 체제라는 두 개의 ‘정통성의 기둥’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살상과 파괴의 결과로 세워졌다.

 

    공정히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가 이 두 개의 기둥만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반목했던 냉전이라는 힘의 균형 또한 현상 유지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대결적 이념은 그 자체로서 정통성이었으며, 일종의 부(負)의 질서를 형성했다. 1980년대 말 시작된 냉전 질서의 와해가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자, 국제질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진영 간의 대립이라는 균형원리 없이도 전체적인 질서를 유지할 만큼의 정통성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가 그 도전의 핵심이었다. 탈냉전은 어쩌면 세계사의 전후기간(post-war period)이 전쟁 간 기간(inter-war period)으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냉전의 종식 덕택에 비로소 전 지구적 규모로 확장된 국제정치의 무대 위에는 세계화의 거센 물결, 그에 따라 커진 위기의 전파력, 비 국가행위자들로부터의 안보위협, 핵확산 등 예전보다 커지고 무거워진 문제들이 등장했다. 전후질서를 대표하는 기관인 국제연합은 새로운 위기를 다루기에 점점 덜 적합한 기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괴를 통해 수립된 전후질서가 - 마치 건전지가 닳듯이 - 시의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후질서의 약화는, 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희소식일 수 없다. 정통성이 붕괴되고 전란을 통해 새로운 정통성이 수립되는 과정은 모두에게 다 고통스럽겠지만, 가장 큰 패배자는 북한이나 이란처럼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교훈에서 보듯이.

 

    흥미로운 것은, 힘을 잃어가는 전후질서의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자구적 노력들이다. 특히 G20와 핵 안보 정상회의는 흡사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기 위한 패치(patch) 프로그램들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정통성 유지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반영하듯, 둘 다 정상급 회의체로 발족했고, 그렇게 유지되어 갈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이후 글로벌 거버넌스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하던 G8은 세계화(또는 탈냉전)으로 '넓어진' 세상을 다루기 버겁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08년 9월, 미국 발 국제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신흥 경제국들도 참여하는 20개국 정상 간의 협의체가 출범했다. 물론 G20가 국제연합이나 브레튼 우즈 기구들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시경제 정책공조, 유동성 공급 확충, 금융기관 감독 강화, 국제금융기구에서의 개도국 역할 강화, 보호주의 저지 등 G20의 의제를 살펴보면, 이 기구의 목적이 현재의 국제질서를 위기적 변혁 국면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것임이 이내 드러난다.

 

    핵 안보 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는 오바마 미 대통령이 주창하여 2010년 4월 워싱턴 DC에서 처음 개최되었고, 핵물질의 확산 및 전용 방지, 핵 테러 방지 등과 같은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 회의에 참여한 47개국은 핵물질 보유량, 원전 운영현황 및 도입계획, 지역배분 등을 고려하여 미국이 선정하였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건 평화적이지 못한 이용이건 간에, 핵기술과 관련하여 강한 발언권을 가진 나라들을 한 자리에 모은 셈이다. 아직은 NPT 체제가 작동하고 있고 IAEA도 그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핵 안보 정상회의는 주권국가들의 핵확산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장차 NPT 체제의 정통성에 큰 허점이 발생하게 된다면 이 회의가 응급처치용 붕대의 역할을 하게 될 상황을 쉽사리 상상해볼 여지가 있다.

 

    이 두 개의 회의가 공교롭게도 2년의 기간을 두고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대한민국은 전후 경제 질서의 역동성의 상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고, 핵 비확산 질서의 앞날을 가름할 북핵문제의 최전선에 선 당사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천안함 사건 이후


    6자회담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노력과 같이 "고전적인 의미의 외교, 즉 협상을 통해 상이점을 조정하는 일은 '정통성 있는' 국제질서 하에서만 가능하다." 당연하게도, 6자회담은 북한핵문제를 바라보는 공통의 국제적 시각, 즉 '정통성'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만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


    2010. 3. 26.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에 대한 주요국들의 반응은 이러한 느슨한 가정에조차 매우 회의적인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악행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동북아시아에서 냉전적 대립은 과연 과거지사(obsolete)인가? 중국은 (그리고 그보다 덜한 정도로 러시아는) 북한체제의 유지라는 지정학적 이익(geopolitical interest)을 북한의 핵보유로 야기될 정통성 위기의 해결과 맞바꿀 의사가 전혀 없는가? 북한체제의 유지가 중국에게 지정학적 이득이라는 가정은 아직도 올바른 것인가?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표면적인 답은 매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다. 천안함 사건이라는 비극에 대한 대응논의가 - 희극적이게도 - ‘진실공방’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애쓴 나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북한에 대한 규탄과 제재를 원치 않는 측으로서는 천안함 격침이 북한의 소행임을 일단 인정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북한의 혐의를 인정하면서 처벌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전쟁으로써만 해소할 수 있을 - “정통성의 부재”를 초래할 터이다. 천안함 공격을 북한의 ‘모험’으로 규정한다면, 북한은 대단히 위험하지만 효과적인 모험을 도발한 셈이다. 북한은 그로써 중국과 러시아를 고통스러운 양난(兩難, dilemma)에 처하게 만들었다.


    동북아시아의 장기적 안정은 물론 향후 핵 비확산의 정통성이 걸려 있는 6자회담의 앞날이 과연 얼마나 밝을 것인가? 그것은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어떤 형태로 제시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처럼 본질적인 질문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에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서글픈, 그러나 상징성이 큰 우연의 일치다. 한국전쟁은 당시 변방에 불과하던 한반도에서 벌어졌지만 그 전쟁은 그 후 40년간 지속될 세계적 냉전의 분만실이 되었다. 북한 핵문제는 언뜻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현안일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21세기의 세계가 공유할 정통성의 양과 질을 결정지을 것이다. 앞서 인용한 NYT 기고문에서 키신저 박사가 썼듯이,


"21세기의 주요 국가들은 서로 이질적일 뿐 아니라, 강대국간 협력(concert of powers)에 해당하는 경험을 그다지 가져보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서로의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 이들 국가들의 궁극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만약 저지되지 않는 (핵) 확산이라는 재앙을 세계가 피하고자 한다면."


    그리스 역사학자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관한 신화를 조금 달리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산을 깨부숨으로써 지브롤터 해협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해협을 좁게 만들어 대서양의 괴물들이 지중해로 침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잘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정통성의 기둥들은 전란이라는 괴물이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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