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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美封南이라는 괴담

posted Nov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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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美封南이라는 괴담


통미봉남이라는 표현은 북한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남한의 학계와 언론이 만들고 유행시켰다. 우리 사회에서 이 표현이 마치 북한의 치밀하고도 의도적인 전략인 것처럼 회자되고 있는 현상은 흥미롭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체의 복제 단위가 유전자(gene)라는데 빗대어, 어떤 생각이 사회에서 번져나가는 복제단위를 ‘밈(meme)’이라고 불렀다. 성공적인 ‘밈’들의 특징은 복잡한 현실을 매우 단순화하는 내용이어야 하고, 사람들의 직관을 건드리는 전염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들은 성공적인 ‘밈’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토록 고뇌를 거듭하며 아이디어를 쥐어짠다. 당연하게도, ‘밈’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지만, 그것은 진실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도구일 수는 없다.


통미봉남이라는 ‘밈(meme)’ 역시 겉보기는 매우 단순명료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담은 표현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는 상황은 아이러니컬하다. 왜냐 하면 이 말은 매우 대결적이고 정략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와 우파 모두에 의해 열렬히 애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통미봉남 현상을 우려하는 국회에 통일부 장관이 출석해서 ‘통미봉남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장면은 우리 국회가 보기 드물게 여야가 따로 없는 모습을 연출하는 대목이다.


상반된 생각을 하나의 표현으로 묶어준다는 점이 바로 ‘통미봉남’이라는 밈이 지닌 번식력의 핵심이다. 언론학자 더글러스 러쉬코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조각을 바이러스라고 부르듯이, 이처럼 혼란과 착각을 일으키는 밈은 ‘미디어 바이러스’에 해당한다. 당연하게도, ‘통미봉남’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직관적 감성에 크게 호소하지만, 진실을 설명하는 힘은 없다.


한국의 좌파는 북한의 ‘封南’을 두려워 한다. 좌파가 통미봉남 현상을 비판하는 참뜻은 “정부가 북한을 충분히 살갑게 대하지 않아서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갖도록 내몰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왕따’가 되었는데 그 탓은 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북한 언론매체인 조선신보가 11.7일자로 “이명박 정권이 스스로 초래한 ‘통미봉남’의 구도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주장이 그른 첫 번째 이유는 ‘봉남’이라는 행위를 하는 주체가 북한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뒤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흡사 매를 맞는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는 ‘매맞는 아내 신드롬’처럼 건강하지 못하다. ‘봉남’의 이유는 ‘봉남’을 하는 측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다. 두 번째 이유는 북한의 ‘봉남’이라는 행동이 남한을 왕따의 경지로 몰고 갈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남한과의 접촉을 거부한다면, 그건 필경 남한이 두렵기 때문일 터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안쓰러운 일일 수는 있지만, 우리가 아파할 일은 아니다.


북한은 남한 민간단체의 삐라가 날아들면 ‘군사적 대응조치’를 엄포할 정도로 허약하다. 김정일은 와병설이 나돈지 두 달 만에 이른바 ‘사진통치’를 하고 있다. 한국 언론에 김정일 와병설이 파다하자 노동신문은 녹음이 우거진 산들을 배경으로 언제적 찍은 것인지도 모를 사진을 가을에 내 놓으며 동정을 보도했다. 한국 언론이 낡은 사진 같다고 일제히 보도하니까, 북한은 이번에는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사진을 내보였다. 사진 속 김정일의 왼팔이 불편해 보인다는 분석보도가 나오자, 이튿날 북한 언론은 왼팔을 들어 박수를 치는 김정일의 사진을 실었다. 스스로를 모든 외부세계로부터 ‘封’한 북한의 통치자는 사진 속에서 위대하기 보다 고달파 보인다. 북한이 ‘봉남’을 풀기 위해서는 북한이 ‘봉남’을 풀면 될 뿐이다.


한편, 한국의 우파는 북한의 ‘通美’를 싫어한다. 1994년 1차 북핵위기를 풀기 위해 미-북간 직접접촉이 시작되자 한국 언론은 불안감으로 들끓었다. 당시 한승주 외무장관은 그것을 “시앗을 본 남편에 대한 본부인의 질시”에 비유했다. 이 비유는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았지만 문학적으로 정확했다. 질시의 성격이 투기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점에서. 좌파 인사들이 한미동맹관계가 미국의 이익에 한국을 부당하게 연루(entrapment)시킬 가능성을 과도하게 우려했듯이, 우파 인사들은 동맹국인 미국으로부터 방기(abandonment)당할 위험을 과장했다.


이런 우려도 여러 겹으로 그르다. 북한은 통미하면서 봉남할 수 있겠지만, 미국의 ‘통북’이 저절로 미국의 ‘봉남’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미동맹관계의 실체를 몸소 체험해보지 못한 대다수 국민들에게 이 점을 이해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동맹관계는 미국이 단지 북한과 직접 접촉한다고 해서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나 한국이 스스로 동맹으로서의 공동가치와 동반자적 믿음을 저버릴 때 비로소 약화되는 것이다. 동맹관계와 국제금융이 닮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을 토대로 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라는 것은, 내가 품거나 내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른 ‘밈’이 어째서 이다지도 널리, 그리고 깊이 퍼진 괴담이 되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 통미봉남은 ‘외톨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인간의 매우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불안감을 자극한다. 유난히 집단주의적인 경향이 크고, 유난히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자기연민의 역사관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같은 민족 또는 동맹국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그만큼 자기증식력이 강하다. 또렷이 사리를 분별하고 복잡한 현실의 가닥을 합리적으로 풀어내는 노력은 지성의 품이 많이 드는데다, 직관을 이성으로 극복해야 비로소 성과를 거둔다. ‘통미봉남’이라는 미디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은 비싸고 효능이 까다로운 셈이다.


둘째, 모든 성공적인 다른 ‘밈’들처럼, ‘통미봉남’도 진실의 일부를 재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키신저 박사는 그의 2001년 저서 <Does America Need a Foreign Policy?>에서 ‘평양으로 하여금 워싱턴으로 가는 길은 서울을 거쳐야만 하고, 그 반대는 불가하다는 점을 확신토록 만들어야 한다. 그 순서가 뒤바뀌면 남한은 주변화될 것’이라고 썼다. 이것은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논객의 ‘우정 어린 설복’이지만, 어디까지나 대북정책의 방법론과 그 효율성에 관한 언급일 뿐, 결과물로서의 미국의 ‘통북봉남’ 관계 수립 가능성을 우려하는 예언은 아니다. 오바마 후보의 대통령 당선 이후 높아지고 있는 ‘통미봉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우려는 그 둘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미국이 동맹국인 남한과의 관계악화를 무릅쓰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만일 그러한 상황이 실제로 온다면 북한은 오매불망 그리던 숙원을 이루게 되는 셈이리라. 북한은 마치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 애정표현이라고 믿는 스토커처럼, 줄기차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소망해 왔다. ‘승냥이’, ‘원쑤’라고 불러 가면서.


그러니 미국이 한국과의 동맹관계를 끊어버리고,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적인 것으로 선언해 버린다면 북한정권은 원하던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지를.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유세 도중 북한과의 직접 대화 필요성을 여러 차례 제기했다. 그가 하겠다는 것은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직접 하겠다는 것이지, 북한과 동맹을 맺겠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미-북 직접대화를 통해 북한 비핵화가 진전된다면 그것은 어느 모로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설령 미국이 양자 차원에서 합리적인 양보를 제시하더라도, 북한은 체제의 특성상 그에 대해 전략적인 결단으로 호응하지 못하고 말 공산이 크다. 만일 뭔가를 걱정할 여력이 있다면, 통미봉남으로 인한 남한의 소외를 걱정하기보다, 북한이 다음번에 그르칠 일이 1994년 위기고조 당시만큼 미국을 실망시키지나 말기를 걱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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