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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2. A Day in London

posted Jun 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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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2월 24일, 옥스퍼드 동급생들과 함께 영연방의회협회Commonwealth Parliamentary Association의 초대로 영국의회의 회의를 방청했다. 먼저 상원House of Lords의원 휴게실을 구경했다. 상원의원 몇 명이 옥스퍼드에서 온 학생들에게 호의를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670여명의 종신직 귀족으로 이루어진 영국의 상원은 법안을 수정하거나 지연시킬 입법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실질적인 정책토론과 법률입안에 있어서는 하원House of Commons의 우위가 명확해서, 상원은 국내정국을 안정시키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던 상원의원 한 사람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여기는 노인들만 가득한 지루한 곳이야. 사람들은 상원을 신들의 대기실Gods' Waiting Room이라고 부르지”라고 말했다. 하원에서는 여야의 토론을 방청했다. 졸음을 참아가며 지루한 토론을 구경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상외로 흥미진진했다. TV를 통해서 보던 것과도 판이했다. 매주 목요일은 총리와 야당 당수가 참석하는 회의가 열린다. 차분하던 토론 분위기는 존 메이저John Major 총리가 등단하자 고조되었는데, 그 열기는 스포츠 경기장에서 느끼는 흥분을 방불케 할 만큼 뜨거웠다. 의회민주주의는 교과서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낱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원의 질문요지는 미리 서면으로 작성되어 있었고 발언권을 얻은 의원은 자기 질문서의 내용을 되풀이하는 대신 자기 질문서의 번호만을 언급했다. 총리에 대한 질문서의 형태는 모두 동일한 것이었는데, “모월 모일 총리의 일정에 대해 말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 특정 질문에 대해 총리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대답을 기피한데서 생겨난 전통으로서, ‘총리의 일정’이라는 포괄적인 질문을 통해 특정 주제에 구속되지 않고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방편이라 한다. 실제로 이 질문을 받은 총리는 지극히 의례적인 논조로 짧은 대답을 먼저 했고, 의원은 후속 질문을 통해서 실제로 묻고 싶은 질의를 했다.


또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질문하는 측이나 답변하는 측이나 상대방을 쳐다보며 말하기는 하지만, 상대를 향해서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동료의원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영국 의원의 발언내용은 ‘존경하는 의장님’에게 말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의 하원의장은 베티 부드로이드Betty Boothroyd라는 65세의 노동당 소속 여성의원이었다. 옥스퍼드 학생들을 인솔했던 우리 학과장에 따르면, 영국 하원의장은 회의를 주재할 때 전통적으로 은발의 가발을 쓰는데, 그녀는 탐스러운 은발의 소유자였으므로 가발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었다. 의장이 여성이었으므로, 의원들과 총리는 ‘Madam Speaker’에게 간접적으로 묻고 답하는 식으로 발언했다. 마치 옛날 우리 양반들이 뻔히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뵙자고 여쭈어라,” “지금 아니 계시다고 여쭈어라” 하는 식으로 말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런 특이한 토론방식은 서로 직접 대거리를 하면서 분위기가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한다. 이 특이한 방식 덕분에 영국 의회의 논쟁은 독특한 유머로 채색된다. 가령,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야. 그따위 수준 낮은 발언으로 의회를 모욕하려거든 당장 옷 벗어”라고 말하는 대신 “의장님, 야당의 존경하는 동료의원이 오늘은 최상의 정신건강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바, 슬프게도 그가 오해에 근거해 언급한 내용은 우리 하원의 집단적 지성에 대한 당황스러운 수치로 여겨질 뿐입니다. 저로서는 그가 자신의 지위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하기를 희망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발언자가 적확하고 재치 있는 반격을 하면 같은 당 소속 동료의원들은 일제히 찬사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상대방 발언의 야유나 냉소가 도를 지나치면 의원들은 일제히 “우우”하는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그 응원과 야유가 어찌나 절도 있던지, 볼수록 빠져드는 묘미가 있었다.


절차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아주 익숙한 품새로 그려내는 회의 장면은 그 절차의 딱딱함에도 불구하고 순항하는 한척의 돛단배 같아 보였다. 손발이 척척 맞게 효율적이면서도 분위기를 난삽하게 만들지 않는, 흡사 미리 연습된 마스게임 같은 집단적 야유와 응대. 점잖은 발언들 속에 들어 있는 솜씨 좋은 말의 뼈들. 놀랍게 세세한 현안들까지 두꺼운 자료를 앞뒤로 뒤져가며 대답하는 총리와 각료들. 전 과정이 방청객과 방송 앞에 노출된 회의. 오호라, 이런 걸 가리켜 의원내각제도라고 하는 것이로군. 그동안 나는, 국회의원이 총리와 장관이 되는 것이 의원내각제인줄 알았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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