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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라면 이야기

posted Jan 0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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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음식은 맛도 섬세하지만 분류도 만만찮게 세분화되어 있다. 실은 그 둘은 같은 이야기다. 섬세한 맛의 차이를 중시하기 때문에 조금만 달라도 다른 종류로 구분한다는 뜻이니까. 튀김(아게모노, 揚げ物), 찜(므시모노, 蒸し物), 구이(야끼모노, 焼き物), 삶은 음식(니모도, 煮物), 절임(츠케모노, 漬物), 무침(아에모노, 和え物) 등등 각각의 분야에 놀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요리들이 있다. 음식의 지방색도 뚜렷해서, 현(県)마다, 도시마다 특색있는 요리를 자랑하고 있는 것도 일본 음식의 특징이다.

그런데 일식이 우리 음식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분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국물음식이다. 일본의 국은 ‘시루모노(汁物)’라 하여, 왜된장을 기본으로 쓰는 미소시루(味噌汁)의 변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개는 미소시루의 건더기로 김이나 다시마를 쓰느냐, 재첩(しじみ)이나 바지락(あさり) 같은 조개를 쓰느냐, 게(かに)를 쓰느냐 정도의 변화에 불과하다. 돼지고기를 볶아서 야채와 함께 끓이는 돈지루(とん汁)도 먹어보면 그저 미소시루일 뿐이다. 정식 코스요리인 ‘카이세키(懐石)’요리에는 미소시루 대신 생선의 다양한 부위를 끓인 맑은 국이 따라 나온다. ‘스이모노(吸い物)’라고 부르는 국물로, ‘치리(ちり)’라는 냄비요리와 흡사한 방식인데, 이 또한 맛이 대략 거기서 거기다.

우리나라는 사정이 크게 다르니, 우선 밥에 따라 나오는 액상음식으로 그 종류를 헤아리기 어려운 ‘국’이 있고, 그 자체가 주요리(main dish)에 해당하는 온갖 종류의 ‘탕’이 있으며, 식탁 가운데 두고 나눠먹는 ‘찌게’ 또한 종류가 부지기수다. 그나마 국과 전골은 일본의 시루모노와 나베모노(鍋物)와 격이 같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탕과 찌게에 해당하는 음식은 일식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국과 탕만 그런 게 아니다. 한식에서 국물의 존재는 어찌나 중요한지, 거의 모든 반찬에 국물이 흥건하다.

우리 음식에 국물이 많기 때문에, 중고생 시절 우리 교과서는 도시락에서 흘러나온 국물 자국에 얼룩져 있기 마련이었고, 우리 음식 쓰레기는 유난히 처리하기 골치아픈 문제가 되기도 한다. 도대체 얼마나 국물이 중요하면 “국물도 없다”라는 표현이 엄격하게 굴겠다는 엄포로 사용되겠는가 말이다. 한국인이 보기에 국물이 없는 음식은 빡빡하고, 여유가 없고, 인정이 없는 음식이다.

그래서 도시락(弁当) 문화는 마른 음식이 대부분인 일본에서 꽃필 수밖에 없었고, 동양 삼국 중에서도 커다란 숟가락이 우리만큼 필수품인 나라가 없으며, 거기에서 ‘밥그릇을 들고 먹으면 안 된다’는 것과 같은 한국식 식사예절이 진화해 나온 것이다. 일본처럼 국물이 드물게, 그나마 조연으로 출연하는 밥상에서라면 숟가락은 낭비적인 도구였고, 젓가락으로 그 모든 것을 먹자면 밥그릇을 높이 들고 먹는 방식이 자연스러웠을 터다. 자, 어쨌든 그래서 한식과 일식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맵고 덜 매운 데 있다기보다는 국물이 차지하는 비중에 있다.

가만. 그렇다면 과연 음식과 요리에 남다른 애정과 집착을 가진 일본 사람들이 국물이라는 장르를 버려두고 전혀 돌보지 않았을 것이냐? 아니올시다. 일본 음식에서 국물의 미학을 가장 깊숙히 체현하는 음식이 바로 라면이다. 라면의 본질은 면 위에 올려두는 죽순(メンマ), 돼지고기(チャーシュー), 숙주나물(もやし), 삶은 계란(たまご) 등과 같은 고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면과 국물의 균형감각’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고(故) 이타미 주조의 걸작 <담포포(たんぽぽ - ‘민들레’를 뜻한다)>는 가히 ‘음식 서부극’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아줌마 담포포는 자기만의 라면국물을 만드는 비법을 완성하기 위해 눈물겨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1910년대 일본의 중화거리에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만들던 국수의 전통에, 1930년대 중일전쟁이 끝나면서 중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일본에서 개점한 포장마차를 통해 발전시킨 음식이 오늘날 일본의 라면이다. 라면은 한자로 拉麺이라고 표기하는데 문자의 뜻으로만 본다면 손으로 뽑는 국수라는 뜻이다. 중국식 국수제조 방식이 납면법이다 보니 그렇게 쓰게 된 것이다. 라면의 별칭은 중국국수, 그러니까 ‘츄카소바(中華蕎麦)’다. 이름도 어엿이 중국음식인 라면이 일본의 대표음식이 되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이 자랑하는 모든 것은 밖에서 들여온 것이다. 일본인은 발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개량하는 사람들이다.

라면에는 보통 밀가루 국수를 사용하는데, 소금물을 관수로 사용하고 효모로 발효시키기 때문에 가게에 따라서 독특한 맛이 나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재료를 섞은 독특한 국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국수의 굵기에 따라서도 식감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다. 국물의 경우는 간장으로 간을 맞춘 쇼유라멘(醤油ラーメン), 소금을 사용하는 시오라멘(塩ラーメン), 된장을 사용하는 미소라멘(味噌ラーメン) 등 세 종류로 나뉜다. 돼지뼈를 짙게 우려낸 돈코츠라멘(豚骨ラーメン)을 파는 곳도 많다.(돈코츠라멘은 미소로 간을 맞춘 것이 많다.)

라면의 국물을 만드는 데는 설사 돈코츠라멘이라 하더라도 돼지뼈 한 가지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닭, 돼지뼈, 사골, 가다랭이, 다시마, 볶은 콩, 표고버섯, 사과, 양파, 대파, 생강, 마늘 등 온갖 재료가 동원되는 것이 라면국물이다. 어떤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각각의 점포마다 ‘며느리도 모르는’ 일급비밀이다. 계란 위에 올리는 삶은 달걀은 노른자를 완전히 익히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 또한 얼마만큼 노른자를 익히는지도 가게에 따라서 다르다. 지역마다 특색도 있기 마련이라서, 일본의 라면에 대해서라면 백과사전 분량의 설명도 족히 가능할 것이다.

라면이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본음식의 대표선수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값이 싸고(대개 천 엔 미만이다) 맛과 영양가가 뛰어나다. 둘째, 과연 일본 음식 답게도 가게마다 주인들이 필사적으로 개발한 맛의 비법 덕분에 맛이 다른 여러 종류의 라면이 존재한다. 다양한 맛은 언제나 식객들의 호사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 답게 라면의 매력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라면은 일본 음식의 종류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그러나 길거리에서는 전혀 드물지 않게 쉽사리 국물을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깊숙한 대접에 담긴 적지 않은 국물을 깨끗하게 비우노라면, 이 서민적인 음식에 대한 애정이 새록새록 깊어진다.

유독 라면에 관해서만 특별대접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국수와 국물의 절묘한 균형을 완성한 라면의 명가들을 따로 찾아서 몇 군데 따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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