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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4. Jordan, Israel (1)

posted Jun 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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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게시판에 안내문이 붙었다. 1995년 4월 28일부터 5월 5일까지, ‘중동평화과정Middle East Peace Process’ 관련 박사과정 학생들이 요르단과 이스라엘로 현장학습field trip을 떠나는데, 다른 과정 학생들도 선착순으로 희망자를 받아주겠다는 안내문이었다. 자담해야 할 비용이 작지는 않았지만, 며칠 고민 끝에 이 기회를 붙잡기로 했다. 유럽정치를 전공하는 세현이도 함께 가기로 했다. 케임브리지대학 국제학연구소 부소장인 예지드 사이으Yezid Sayigh 교수가 지도교수 자격으로 여행을 인솔했다.


사이으 교수는 팔레스타인Palestine 태생 할머니와 시리아Syria에서 출생한 아버지, 영국인 부인을 두고 있으며, 자신은 미국 볼티모어Baltimore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베이루트Beirut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런던에 와서 전쟁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더 특이한 것은, 영국에서 교수직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는 팔레스타인 측 수석대표로 군축 및 지역안보 다자 실무회의에도 참석(1992-1994)하고, 199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간의 가자 및 제리코 지역에 관한 협상에도 대표로 참여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그는 수업시간이나 현장학습 여행 중에 학생들 앞에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는 언급을 삼갔다. 학자로서 객관적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럴 수 없었다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직을 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가 가르치는 대상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대학원생들이었고, 젊은 학생들은 선입견을 거부하는 지성적인 비판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나는 석사과정의 일부인 중동정세 관련 수업에서 사이으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던 처지였지만, 중동문제 박사과정 학생들과 함께 현장학습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는 긴장이 되었다. 중동문제에 관해 선수들인 사람들 틈에 자신 있게 끼어들기에는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뻔뻔스러워지기로 했다. 모르니까 배우지 다 알면 뭐 하러 공부를 하나.


나는 업무의 과정에서 알게 된 나라들 간의 사정은 이 책에 쓰지 않았다. 내가 보고 스스로 느낀 것들 위주로 쓰는 것이 옳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르단-이스라엘 현장학습은 수업의 연장이었으므로, 내용을 좀 자세히 적으려 한다. 좁은 땅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은 우리의 분단 상황에도 일정한 함의를 가지기 때문에 완전히 남의 일일 수만은 없겠기 때문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방문했던 1995년은 ‘오슬로 협정the Oslo Accords’의 시기였다. 정식 명칭이 ‘과도적 자치를 위한 원칙 선언(줄여서 원칙선언the Declaration of Principles : DOP)’인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PLO 사이에 직접 맺어진 첫 번째 협정이었다. 그것은 완결된 평화협정이 아니라 장차 협상의 틀에 관한 합의였다. 가자지구Gaza Strip와 서안지구West Bank의 ‘최종지위 문제’가 해결되려면 여전히 추가적인 협상이 필요했다. 이 협정은 1991년 마드리드 회의에서 제시되었고 오슬로에서의 비밀협상을 거쳐 1993년에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PLO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이스라엘 총리가 임석한 가운데 체결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군은 가자와 서안지구 등 ‘점령지역’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기구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 PNA가 수립되어 이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1996년까지 5년간 지속될 예정이었고, 향후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가 단계적으로 구성되도록 합의되었다. 예루살렘Jerusalem의 지위, 난민, 정착촌Settlement, 경계Borders 등 영속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민감한 사안들은 미래의 협상에 맡겨져 있었다. 오슬로 협정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건국이 이루어진 이래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측이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생존할 권리를 명시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슬로 협정은 냉전의 종식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강요한 타협이었다. 아랍Arab들 간의 싸움인 이라크Iraq의 쿠웨이트Kuwait 침공과, 거대 아랍국가의 패배인 걸프전The Gulf War이 이스라엘의 자신감과 팔레스타인의 위기감을 조성한 것도 협상에 영향을 미쳤다. (후세인Hussein 이라크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의 가족에게 위로금 명목의 현금을 지원하던 PLO의 후원자였다.)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 측에 부과한 가장 큰 숙제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치안을 유지하면서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민주적 자치기구를 선출하는 선거를 시행하는 일이었다.


깊은 불신, 불안한 치안과 경험의 부재 속에서 자치정부의 수립을 위한 선거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내가 방문했던 1995년의 이스라엘 점령지역은 흡사 해방직후 우리나라의 정치공간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그곳은 행정행위governance와 저항행위Intifada가, 기대감과 좌절감이, 협조와 반목이, 찬성과 반대가 혼재하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정부와 PNA는 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양측의 여론은 마치 서로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슬로 협정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었다.


1995년 4월 27일, 목요일


오후 세 시경 집을 나서서,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정류장(코치 스테이션Coach Station이라고 부른다)에 갔다. 택시에서 내린 후에 짐을 챙기는데, 어라?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camera가 없어졌다. 이거야 원.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카메라를 분실하다니. 시작부터 찜찜했지만 나쁜 조짐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공항의 이스라엘 행 항공편 게이트gate에는 검은 옷에 검은 모자, 양 뺨 옆으로 머리칼을 늘어뜨린 유태인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게이트 앞에서 다시 한 번 무척 꼼꼼한 보안검색수속을 통과하면서 이스라엘로 떠난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 열네 명이 탑승한 비행기는 밤10시 반에 출발했다.


4월 28일, 금요일


새벽에 텔아비브Tel Aviv 공항에 내렸다. 공항 입국수속 직원이 내 여권을 받아들더니 ‘입국도장을 원하지 않으면 안 찍어드리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잠시 당황했다. 아하, 이스라엘 입국흔적이 있으면 환영받지 못하는 중동국가가 많다던 얘기가 생각났다. 생색이 아니라 배려였다. 어차피 여권에 비자Visa도장을 받아왔으니 찍어도 좋다고 말하고 입국했다. 예루살렘 외곽을 지나 차창 밖으로 저만치 제리코Jerico의 오래된 도성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국경에 닿았다. 지도상의 거리로 미루어 두어 시간이면 가겠지 했던 암만Amman까지의 정치적 거리는 그보다 멀었다. 일행 중 요르단 비자 없이 온 사람이 있었고, 우리가 제3국인의 출입국이 흔치 않은 알렌비 다리Allenby Bridge로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경통과, 즉 출국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 시간 이상 버스 안에 앉아서 시간을 허송했다. 가건물처럼 생긴 국경 검문소는 보안요원들로 득실거렸다. 허약한 냉방기를 틀어놓은 버스 안은 말할 수 없이 더웠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요단강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넌다는 것은 내생에서 이생으로 복귀하는 것을 상징하는 셈이다. 요단강은 탁했고, 옛날 녹번동 집 앞을 흐르던 개천 정도의 너비밖에 안되었다. 황량한 사막의 비좁은 강변에 옴츠리듯 야트막히 자라는 관목과 수풀들이, 이 물줄기를 생명과 연관 짓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줄 따름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원래 요단강은 이보다는 넓었다는데, 상류인 골란고원Golan Heights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과 시리아가 수자원을 다량 확보하기 때문에 갈릴리Galilee 호수 이남으로는 강이 이렇게 메말랐다고 한다.


요르단 측 입국수속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달려가는 일만 남았는데, 버스에서 잠드는 것이 나의 주특기임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어가 바꿔 탄 버스는 너무 비좁고 냉방기도 작동을 안 해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황량한 벌판 위를 한참 달리던 버스가 암만 시내로 들어섰다. 암만의 옛 이름은 암몬Ammon이었다. 아마도 성서에 등장하는 고대의 암몬족속Ammonites과 연관된 이름이었을 것이다. 암만은 아시리아Assyria, 페르시아Persia, 그리스의 지배도 받았고, 이집트가 정복한 후에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라고 불렸으며, 그 후로도 로마Rome, 비잔틴Byzantine제국, 움마야드Umayyads, 압바스Abbasids 왕조의 지배를 거쳐 오토만Ottoman 제국의 통치하에 있다가 마침내 요르단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낡고 비좁지만 활력 있는 암만의 시내는 어딘가 70년대 초의 서울풍경을 연상 시키는 데가 있었다. 우리는 코모도어Commodore라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본때 없게 넓은 방을 세현이와 함께 쓰게 되었다. 인솔자인 사이으 교수는 오후에 암만 근교를 둘러보자고 제의했다. 제라쉬Jerash로 갈까 페트라Petra로 갈까 의논한 끝에, 우리는 암만에서 좀 더 가까운 제라쉬를 구경하러 갔다. 시내를 벗어나 한 시간 남짓 시리아 방면으로 달리니 고대에 거라사Gerasa라고 불리던 도시의 제라쉬의 유적이 나타났다. 고대에는 큰 도시였을 이곳을 지금은 돌로 지은 유적과 얕은 수풀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원형극장, 개선문, 경기장과 같은 로마제국의 유적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특히 원형극장은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원형극장 꼭대기 객석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니 적어도 10층 건물 높이는 되어 보였다. 세현이가 무대로 내려가 객석에 앉은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데도 가까이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야할라Yahala라는 아랍식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마치 시골의 한정식당에 온 것처럼 반찬접시가 끝도 없이 나왔다. 배추와 오이, 파셀리, 피망 같은 푸성귀를 하무스hummus, حمّص라는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 이채롭고 맛도 있었다. 하무스는 콩을 갈아 만든 소스로, 진한 것과 묽은 것, 마늘을 넣은 것 등 종류도 조금씩 달랐다. 양고기도 먹었는데, 서양식 램찹lamb chop 이외의 방식으로 요리한 양고기는 처음 먹어보았다. 물론 이때는 내가 장차 이태 동안이나 양고기와 하무스를 하루걸러 먹게 될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암만 외곽의 야할라 식당이 아랍 음식과의 첫 만남을 주선해 주었던 셈이다.


4월 29일, 토요일


첫 일정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암만대학의 전략연구소Centre for Strategic Studies로 갔다. 전직 요르단 공군부사령관 모하메드 샤야브Mohammed Shayyab장군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랍 공통의 문제는 민주화가 모자란다는 점이에요. 아직도 사유화된 체제personalized system인 것이죠. 요르단은 89년에 의회가 수립된 이후로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랍의 문제는 경제적으로 국가 간 불균형과 군사적 비대칭이 심하다는 데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CSCE 모델을 적용해서 지역협력을 안보 차원으로도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지요. 요르단으로서는 아랍 특유의 문화에 기초한 갈등해소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예루살렘의 회복이 전 아랍의 염원’이라고 잘라 말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과 이웃 아랍국가들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지속적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이라크 전쟁에 관해서는, ‘민주적 결정에 따라서 다국적군coalition에는 불참했지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반대하고, 현재는 이라크 국민들의 어려움에 동정적’이라는 요르단의 절충주의적 입장을 설명했다. 동료 학생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박사과정 학생들의 도발적인 질문공세는 우리의 현장학습 내내 이어졌다. 주입식 교육만 익숙하던 나는 동료학생들의 자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20년 이상 요르단에서 2등 국민으로 살던 사람들이 아닌가요? 아랍인들 사이의 문제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요.”


샤야브 장군의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꼭 따져야 한다면 팔레스타인인은 쿠웨이트에서만 2등 국민 대접을 받습니다.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돌아가겠다는 그들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요르단 정부가 가자에서 온 주민들에게 2년 기한 여권을 발급하는 것은 그들의 궁극적 귀향을 돕기 위한 조치입니다. 요르단은 아랍인구의 용광로melting-pot와도 같아요. 약 40%의 요르단 인구는 팔레스타인인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이들의 대다수는 현상유지를 선호하기 때문에 설사 주민투표를 하더라도 분리 독립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 외에도 장군은 이스라엘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시리아를 비롯해 몇몇 아랍 국가들이 보유한 화학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 중동에서 이집트, 사우디, 시리아, 이라크 등이 서로 대형大兄의 지위를 주장하면서 요르단과 레바논 같은 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는 아랍 내부의 실정 등을 설명해 주었다. 난생 처음 방문한 아랍의 도시에서, 난생 처음 아랍인의 육성으로 이곳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설명을 들은 것이었다. 불현듯 부끄러움을 느꼈다. 명색이 정치외교를 전공하고 국제관계 석사과정을 공부한다고 하면서도 중동지역에 대해서는 이토록 생소했다니. 강의실 밖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암만 대학을 둘러보았다. 캠퍼스는 넓고 현대적이었다. 이 대학의 여학생 비율은, 놀랍게도, 53%나 된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알 알베이트Al al-Bayt대학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기지였다는 이곳 대학은 사막 한가운데에 유배지처럼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대학 부총장인 아드난 바키트Adnan Bakhit 교수가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었다. 1995년 현재 22개국 학생이 모인 이 대학의 학생은 70% 이상이 외국인이고, 이곳의 학부faculty는 이슬람학, 인문과학, 경제경영 등 세 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저녁때는 하니 후라니Hani Hourani씨가 이끌고 있는 신요르단센터New Jordan Centre에 들렀다. 1945년생인 후라니 씨는 60년대에 그림을 배워 1963년 회화 및 조각협회를 설립한 활동적인 예술가, 또는 예술적인 운동가다. 그는 요르단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PLO의 막시스트Marxist 분파인 인민해방전선PFLP에 가담하여 활발한 반정부 활동에 관여했고, 70년대에는 시리아와 베이루트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80년대에 모스크바 사회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요르단으로 돌아와 1990년부터 암만에서 신요르단센터를 이끌고 있었다.


그가 설명해준 내용에 따르면, 요르단에서는 5-6개의 좌익정당을 포함한 23개 정당이 활동 중이고, 정당정치와 출판 등에 관한 새로운 법률이 정비되고 있어 ‘시작 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성취’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서안지구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든 2-3년 이내에 해결될 거라는 낙관론을 펼쳤고,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사이의 국가연합confederation에 관한 논의가 있지만 그럴 경우 인구가 다수인 팔레스타인 측이 지배적인 세력이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는 점도 실토했다. 만약 국가연합이 불가능하다면 결국은 연합국가federation 형성이 불가피하게 될 수도 있다는 개인적인 전망을 들려주었는데, 분단국에서 온 나로서는 낯선 곳에서 공동체 통합의 고민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다른 백성을 만나고 보니 묘하게 반가우면서도 서글펐다.


저녁에는 일행 중 두 명과 함께 암만의 구 시가지를 활보했다. 정감 있어 보이는 길거리에 이슬람 기도Ṣalah, صلاة의 구성진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거리의 모퉁이를 돌자, 돌로 만들어진 로마시대의 반원형 극장이 나타났다. 로마 유적이 상점들과 연이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좀 농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고 케밥Kabab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영국의 물가고에 시달리다 와서인지 케밥 1인분에 1.5디나르Dinar(1,500원 정도)인 물가가 놀라우리만치 싸다고 느껴졌다. 영국 음식 덕분에 맛에 대한 나의 기대치가 낮아진 탓인지는 몰라도, 길거리에서 파는 케밥은 맛이 좋았다.


4월 30일, 일요일


다시 요단강을 건넜다. 이번에도 국경통과 검색에만 두세 시간을 까먹었다. 다시 이스라엘 버스로 갈아타고 서안지구를 지나 예루살렘을 통과한 우리는 오후 네 시경, 가자지구의 경계border에 닿았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지난 번 저항운동Intifada에 대한 제재조치로 이스라엘 정부가 경계를 봉쇄하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경계 완충지대인 200여 미터의 허허벌판을 걸어서 지나야 했다. 이 완충지대의 양쪽에서는 각각 이스라엘군과 PNA 경찰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가자 쪽 검문소 앞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철조망 안쪽에는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처럼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보자 벌떼같이 몰려와 짐을 들어주겠노라고 아우성이었다. 자기들끼리 고함을 치며 멱살을 잡기도 했다. 우리는 정신없이 고물차 택시 몇 대를 골라 간단히 차비를 흥정하고 짐을 실었다. 택시 표식이나 미터기는커녕, 운전석 쪽은 문짝조차 달려있지 않은 낡은 차량이었다. 가자지구에는 산업이 없다. 이곳의 주민들은 대게 이스라엘 지역 내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경계봉쇄로 출퇴근을 할 수 없으니 이렇게 외국인 손님을 보면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팔레스타인 측 검문소 안쪽으로 들어가니 팔레스타인 경찰이 우리에게 여권을 요구하며 그 나름의 “입국수속”을 했다. 편의상 경찰이라고 썼지만, 이들의 정체는 PNA에 소속된 치안담당자들이고, 이들의 외관은 군복 분위기가 나는 가지각색의 자유 복장을 걸친 더벅머리 젊은이들이었다. 우리는 제발리야Jebalya 거리를 지나 가자시내로 들어섰다. 영국에서 뉴스를 유심히 봤던 덕분인지 길거리의 어떤 부분들은 낯이 익었다. 사이으 교수가 탑승한 선도 차량은 우리를 마르나 하우스Marna House라는 숙소로 인도했다. 이곳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호텔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민박이라기에는 너무 컸다. 아마도 대저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이 숙소는 기대 밖으로 깨끗했고, 19세기 식민지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등장함직한 고상한 품격도 지니고 있었다. 방에 짐을 풀어놓고 옥상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어지러운 이 도시의 풍경도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저만치 펼쳐진 지중해. 그래, 바다는 다 같은 바다 아니겠나,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지붕 위를 낮게 스쳐가며 초계임무를 수행하는 이스라엘 공군기 두 대.


숙소에서 물 한 잔 마시며 땀을 식힌 우리 일행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의 유네스 자루Younes Jarou와 이슬람 지하드Islamic Jihad의 나페즈 아잠Nafez Azzam 두 사람을 만났다. 시리아에 본부를 둔 PFLP는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이라는 대의와 PLO에 대한 충성심loyalty은 견지하지만 아라파트Arafat의 노선에는 반대한다는 묘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 지하드는 그보다 더 투쟁적인 노선을 견지한다. PFLP의 자루 씨가 먼저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우리(PFLP)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적 공존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측이 PLO의 존재를 인정했으면서도 팔레스타인 인민을 독자적 권리를 가진 ‘국민’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단지 ‘문제 그룹’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건 이스라엘 자신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가자지구 내에서 통금은 해제되었지만 경제상황은 악화일로에 있고,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서안지구 정착촌 주변에는 보안통제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습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수립된 PNA는 아랍의 투쟁가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 꼭두각시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문제가 보기보다 훨씬 심각하고 복잡했다. 자루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PNA를 전복시키자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PNA가 상황을 개선할 능력이 없다는 건 명백합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무능할 뿐 아니라 정치적 한계도 뚜렷합니다. 그래서 국가 수립의 꿈은 갈수록 멀어지고 있죠. PNA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원은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어제까지 함께 투쟁하던 형제들에 관해 이런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픕니다만.”


척 보기만 해도 투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페즈 아잠 씨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1948에 가자로 이주해서 살다가 이집트로 가서 약학을 공부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대통령 암살 공모혐의로 투옥되고 추방되었고, 1983년에는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알제리에서 학업을 재개했다가 통행증 갱신을 위해 입국했는데 1987년 지하드 폭탄테러사건 이후 다시 체포되어 투옥과 출감을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의 이런 경험은 팔레스타인인에게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잃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운명이 그런 것이죠.”


아잠 씨에 따르면, 이슬람 지하드의 목적은 그 어떤 형태의 폭정tyranny도 종식시키는 것이며, 오슬로 협정을 포함한 이스라엘과의 모든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는, 진정한 해결책은 저항뿐이라면서, 비록 형세는 불리하지만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질문을 던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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