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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4. Andalucia y Costa del Sol (2)

posted Oct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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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화요일

 

소도시 후엥히롤라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이 섰다. 화요일이 장날이었다. 오전에 야외에 선 장터로 가서 구경을 하면서 티셔츠와 작은 기념품 따위를 샀다. 아들은 하트 모양의 작은 선글라스를 쓴 채 유모차에 유유자적 앉아 있었는데, 수많은 스페인 아줌마들이 만면에 웃음을 띄고 다가와 아기가 귀엽다며 말을 걸어오는 통에 집사람은 마주 웃어주느라 장터 안에서 줄곧 미스 코리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어야 했다. 영국 아줌마들은 이렇게까지 스스럼없이 말을 걸지는 않던데, 스페인 사람들은 통 낯가림이라고는 모르는 듯 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느긋하게 쉬면서 지낼 생각이었는데, 오후가 되자 일단 차를 빌린 이상 놀려둘 수는 없다는, 투철한 ‘본전정신’이 발동했다. 아이와 엄마를 숙소에서 쉬도록 남겨두고 윤성덕과 함께 차를 몰고 세비야로 갔다. 우리가 세비야에 대해서 아는 건 프랑스 희극을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가 오페라로 만든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가 전부였다. 피가로 비슷한 이발사라도 찾아 이발이나 하고 오자고 했다. 농담이었지만 이발소가 눈에 띄면 정말 이발을 요량이었는데 세비야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이발소는커녕 아무 것도 구경할 수 없었다. 히랄다Giralda라는 대성당과 알카자바Alcazaba라는 아랍식 성벽을 밖에서만 봤다. 히랄다 대성당의 탑은 아름다웠으며, 모스크를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웠다는 대성당 건물은 위풍당당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1992년 세비야 엑스포가 열렸던 카르투이아Cartuia에 들렀다. 뭔가 기념이 될 구경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찾아간 것이었는데, 저녁이라 그랬을까? 도시 외곽에 유령들의 놀이터처럼 휑뎅그레 늘어선 거대한 건물들이 스산하게만 보였다. 엑스포 같은 걸 함부로 유치하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세비야 엑스포가 실패한 행사였던 건 아니다. “발견의 시대”라는 주제로 열린 1992년의 엑스포에는 100개국이 참여했고, 6개월간 무려 4천2백만 명이 관람을 했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사장은 엑스포가 끝난 후 연구소와 놀이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나의 미적 감각으로는 암만 봐도 혼자서 파티 드레스를 입고 출근한 사람처럼 생뚱맞고 꼴사납게 보였다.

 

결국 이발은 못한 채 세비야를 떠난 우리는 아내에게 공언했던 대로 아홉시 전에 후엥히롤라에 도착했지만, 아내에게 줄 피자를 사느라 돌아다니는 사이에 더 늦어버렸다. 숙소에 돌아오자 아내는 왜 이렇게 늦었냐며 피자가 급한 게 아니라 아기 분유를 탈 생수가 떨어졌으니 얼른 사다 달라고 했다. 허겁지겁 문을 연 상점을 찾아 나섰다. 자동차로 동네를 훑던 중에, 때마침 셔터를 내리려는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셔터의 창살틈새로 돈을 주고 극적으로 생수를 몇 병 샀다.

 

4월 13일, 수요일

 

아껴두었던 비장의 행선지 히브랄따르Gibraltar로 향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숙명의 과제를 받고 서쪽으로 여행하던 헤라클레스가 산맥을 두 주먹으로 부숴버리면서 생긴 해협이 지브롤터 해협이다. 그래서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가 최단거리에서 마주보는 해협의 양쪽 고지대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들Pillars of Hercules'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목젖처럼 톡 튀어나온 이 지역을 스페인 사람들은 히브랄따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지브롤터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다. 영국이 1704년에 무력으로 점령하고 1713년에 할양 받은 이래 지금도 영국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략적으로 중요하다지만 남의 나라 땅을 이런 식으로 차지해도 되는가 라는 의분이 느껴진다면, 다시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지브롤터의 영국 영유에 대해 곧잘 흥분하는 스페인도 바다 건너 모로코의 톡 튀어나온 작은 반도 세우타Ceuta를 스페인령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브롤터 입구에 도착하니 입국심사대와 간이세관이 우리를 맞았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관리들이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신기했다. 여기까지 자동차로 지나온 코스타 델 솔의 해안은 거의 다 펀펀한 평지였는데, 유독 지브롤터에만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무장한 높은 산이 바다를 면하고 있었다. 너무나 뜬금없는 풍경이라 헤라클라스의 전설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처럼 보였다. 때마침 날씨마저 지난 열흘간 스페인에서 겪어본 적이 없는 우중충한 분위기인데다 짙은 안개마저 끼어 있어, 지금 우리가 밟고 선 것이 영국 땅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426m 높이의 정상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는 가파른 각도로 올라갔다. 케이블카 말고는 정상으로 오르기도 어려워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다. 절벽의 여러 곳에 군사시설로 생각되는 포대며 벙커가 보였다. 지중해 전체를 지갑에 비유한다면 그 손잡이는 여기서 영국이 지금까지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지키고 있으면 영국의 감시를 따돌리고 지중해를 드나들 수 있는 배는 단 한 척도 없을 터였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를 여태 자기네 영토로 삼고 있다니, 영국을 괜히 해양국가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구나!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지브롤터는 영국 땅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난 며칠간 스페인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느라 잊고 있었는데, 지브롤터에서 점심으로 먹은 말라비틀어진 영국식 생선튀김Fish & Chips은 어쩌면 그리도 맛이 없던지!

 

해발 300m 지점에는 성 마이클 동굴St. Micheal's Cave이라는 천연 석회암 동굴이 있었다. 근처에는 원숭이들도 잔뜩 볼 수 있었는데, 유럽대륙 전체에서 이 바바리 원숭이Barbary Ape를 볼 수 있는 장소는 지브롤터 뿐이라고 했다. 이 녀석들은 원래 알제리의 아틀라스 산맥에서 서식하는 종이다. 이놈들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일까? 여기가 헤라클레스가 끊어버린 산맥의 끝자락이라는 신화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이 땅이 간직한 지질학적 사연이 무엇이건 간에, 지브롤터는 신기한 곳이 분명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은 헤라클레스의 장엄한 기둥의 끝, 그 절벽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인상을 써가며 힘을 주고 한판 시원하게 응가를 하더니만 기저귀를 갈아준 뒤로는 내게 안긴 채 잠들었다. 지브롤터 순환도로로 반도를 한 바퀴 드라이브했고, 식료품 가게에도 들렀다. 마침 영국에서 가지고 온 분유가 다 떨어져 낯선 스페인제 분유를 사야 하나 망설이던 차였는데, 지브롤터의 수퍼마켓에서는 우리가 늘 사먹이던 낯익은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빙고!) 조금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땅 설고 물 설은 영국에 도착해서 낯설어 하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더 낯선 곳에 오고 보니 영국 것을 만나면 마치 고향을 보는 것처럼 푸근하다. 아아. 인간의 연약함이여.

 

4월 14일, 목요일

 

가까운 말라가를 다녀왔다. 15세기부터 기독교 세력에 밀려 세비야와 코르도바를 잃고 남쪽으로 패퇴하던 이슬람 세력이 바다를 등 뒤에 두고 결사적인 항전을 벌이던 곳이 말라가였다. 그 결전을 상상하며 바라본 성터 알카자바Alcazaba와 언덕 위의 망루 히브랄파로Gibralfaro는 애잔한 느낌을 주었다. 말라가는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도시였던 그라나다가 기독교도에게 점령당하기 불과 5년 전인 1487년에 함락되었다. 쭉쭉 뻗은 대로를 가진 대도시 말라가는 비좁지 않고 넉넉한 느낌이었다. 주차할 수 있는 빈 공간도 많았다. 사방에 수목이 우거져 있었고, 거리의 가로수 중에는 노란 열매를 매달고 있는 오렌지 나무들도 있었다.

 

광장을 걷고 있을 때, 잡동사니를 파는 집시 여인네가 아내에게 다가와 지갑을 더듬으며 빼앗아 가려는 일이 있었다.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지만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지갑을 지켜냈다. 우리가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치자 중년의 집시 여성은 도리어 자기가 "나 원 별스런 사람들 다 보겠다"는 식의 표정과 몸짓을 하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말라가는 현대미술의 대명사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고향이기도 하다. 피카소의 생가에 찾아갔지만 문을 닫아 구경은 못했다. 대신 말라가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들과 인사를 했다. 말라가 박물관 입구에는 동전을 넣으면 동전의 무게로 희한한 톱니바퀴 장치가 작동해서 이리저리 동전이 옮겨지다가 통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놓은 정교한 모금함이 있다. 신기한 나머지 동전을 여러 개 기부했다.

 

4월 15일 금요일, 16일 토요일

 

생각해보면, 휴가의 참뜻은 열심히 뭔가를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쉬는 데 있다. 마지막 이틀간 우리가 후엥히롤라에 머물며 한 일은 관광이 아니라 휴식이었다. 햇볕을 찾아 온 사람들답게 모래사장에서 눕거나 거닐면서 바닷바람을 즐겼고, 그늘 아래서 책도 읽었다. 눈부신 태양과 건조한 훈풍. 짙은 초록색의 가로수와 무심한 파도 소리. 이 지역 특산물인 얇은 햄, 하몬jamon을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굴뚝이나 지붕에 걸어놓은 돼지 뒷다리. 맛있는 식당들과, 거기서 느긋하게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담소하는 인심 넉넉한 주민들. 점심시간부터 늦은 오후까지 상점은 물론 은행이며 관공서까지 일제히 문을 닫아걸고 낮잠siesta을 즐기는 매력적인 풍습. 사람들의 느릿한 발걸음을 따라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이로써 이번 여행은 비로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 안달루시아는 다시 찾아가고 싶은 관광지가 아니라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4월 17일, 일요일

 

말라가 공항을 아침에 출발한 비행기가 저녁에 영국에 내렸다. 쌀쌀하고 축축한 바람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우편물들이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잠시 미뤄 두었던 일상이 머릿속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남국에서 빌린 햇볕의 힘으로, 자 그럼 어디, 다시 시작해보자. 삶이라는 달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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