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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7. Lake District, Scotland (2)

posted Oct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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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토요일

 

한국인답게, 우리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김치를 챙겨 와서 끼니마다 잘 먹고 있는 중이다. 다만 이것을 보관하는 것이 늘 숙제인데, 몇 번 해봤더니 이력이 나서 숙소 주인에게 냉장고에 밤새 보관해 달라며 김치 통을 내미는 일쯤은 익숙하게 되었다. 아침 일찌감치 주인장의 냉장고에 맡겨 두었던 김치 통을 건네받고, 숙박비를 치른 뒤 북쪽을 향해 먼 길을 나섰다. 드디어 픽트족Picts의 땅 스코틀랜드로 진입한 것이다. 영화 <Braveheart>에 나온 것처럼, 예전에 이곳에 살던 켈트족은 전투에 임할 때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얼굴에 물감으로 색칠을 했기 때문에 로마인으로부터 픽트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글라스고우Glasgow에 도착한 늦은 점심때쯤이었다. 여기서 유학중인 83학번 대학 선배들을 만나 점심을 얻어먹고, 사흘 후쯤 재회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글라스고우를 벗어나 북쪽으로 길게 뻗은 로몬드 호수Loch Lomond의 북단에 자리 잡은 아로차르Arrochar에 도착했을 때는 7시가 좀 넘어 있었다. 이곳에는 이번 우리 스코틀랜드 여행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줄 코티지Cottage를 한 채 예약해 두었다. 코티지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는 덜 근사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널찍했다. 무뚝뚝한 스코틀랜드 아가씨가 잠긴 문을 열어주고 간 뒤 찬찬히 둘러보니 호숫가에 바짝 다가서게 지어놓은 집이라서 지금지금한 민물 냄새도 짙고, 으슬으슬 한기도 돌았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낮게 드리운 구름 밑으로 호수는 옅은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즐거운 가족여행의 배경치고는 너무 을씨년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동생과 아내를 돌아보며 조금 과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조용하고 널찍해서 좋지?”

 

7월 10일, 일요일

 

아직도 간간이 가랑비가 뿌려댔다. 운기조식이 필요한 날이다. 모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어영부영 하루를 지냈다. 온 식구가 번갈아가며 낮잠을 잤고, 나는 몇 군데 상점을 들려 식료품 쇼핑을 했다. 비 내리는 호숫가 마을의 길거리는 시간이 멎은 것처럼 인적이 드물었다. 이상한 곳에서 느끼는 이상한 평화다.

 

7월 11일, 월요일

 

숙소를 나설 때는 서해안에 면한 인버레리Inverary까지 다녀와 볼 심산이었다. ‘아로차르 알프스Arrochar Alps’라는 산길을 지났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경치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베르네 오버란트의 분위기를 방불케 하는 곳이 더러 있어서, 알프스라는 명칭이 허풍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도중에 유럽양모센터European Sheep & Wool Center가 있다는 도시 로흐고일헤드Lochgoilhead로 진입했다. 그곳에는 수영장과 스케이트장까지 갖춰진 깨끗하고 풍광 좋은 주거단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뜻밖에 산속에서 쇼핑 몰을 만난 격이었으므로, 우리는 이곳의 양모제품 상점Wool Shop에서 머플러를 하나 샀고, 이름 하여 ‘양모 쇼Wool Show’라는 것을 관람했다. 양의 종류와 생김새가 그토록 다양한지 처음 알았고, 한 마리의 양으로부터 그렇게나 많은 털이 나오는지도 처음 알았다. 양을 꼼짝 못하도록 다리 사이에 끼우고 털을 깎아내는 사람의 기술도 대단해 보였다.

 

당초 인버래리를 목적지로 삼았던 이유는 그곳에 있다는 양어장Fish Farm을 구경할까 해서였다. 그런데 양털 깎는 구경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바람에 양어장이 문을 닫기 전에 인버래리에 도착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멀리까지 차로 내달으면서, 관람시간에 제한이 없는 하이랜드의 산하를 감상하기로 일정을 변경했다. 내륙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북상을 계속했다.

 

안내책자에서 ‘하이랜드의 험준한 산들’ 운운하는 표현을 봤을 때는 엄살스러운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이랜드에서 제일 높다는 벤 네비스Ben Nevis 산의 높이가 1,344미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작에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저 로우랜드Lowland에 비하면 그 이북에 위치한 하이랜드의 지형이 조금 더 고지대라는 정도의 얘기이겠거니 했다. (로우랜드란, 중세에 영어 사용이 일반화되어 ‘영국화’가 좀 더 일찍 진행된 스코틀랜드의 남동부 지역을 가리킨다.) 그런데 막상 하이랜드를 자동차로 가로질러보니 ‘험준하다’는 형용사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풍경을 떠올리기란 어려웠다. 고도가 높기 때문이 아니라 황량했기 때문이다. 하이랜드의 산과 골짜기는 거칠고 쓸쓸하면서도, 연민을 자아내는 풍경은 아니었다. 그곳은 씩씩한 의연함이 깃든 땅이었다. 하이랜드의 땅이 주는 느낌은 그것이 이고 있는 하늘과도 무관치 않다. 한여름에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은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딱 두 가지였다. 비가 내리고 있거나, 비가 내리려고 하고 있거나.

 

우리는 포트 윌리엄즈Fort Williams와 포트 오거스터스Fort Augustus를 지나 기어이 네스호Loch Ness에 당도했다. 흐린 날 해 저물 시간에 바라보는 네스호는 놀라우리만치 기이한 풍경이었다. 우리 가족은 호숫가에 서서 한동안 일제히 “우와-!” 탄성만 지르고 있었다. 우리가 본 광경을 묘사해 보겠다. 차에서 내려 호숫가로 걸어간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거대한 검은 물이었다. 날이 어둡고 흐려서 검은 게 아니라 호수 자체가 칠흑같이 검었다. 검은 잉크가 골짜기를 가득히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물을 떠 보니 물이 검은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스호는 바닥이 두터운 토탄peat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까맣게 보이는 것이라 했다. 낮게 드리운 먹구름 아래로 검은 호수가 적막하게 누워 있었다. 느지막한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고 인적도 없었다. 호수의 건너편 언덕위에는 흡사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검은 돌로 지어진 건물이 한 채 있을 뿐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웠다. 하고많은 스코틀랜드의 호수들 중 여기서만 괴물 소문이 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괴물 ‘네시Nessie’의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호수 앞에 홀로 서면 검은 호수 속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의 환영을 상상할 터였다.

 

아로차르로 돌아오는 길은 더 어두웠다. 해 저무는 산길. 한여름인데도 군데군데 눈과 얼음이 땜통처럼  남아 있는 산과 황량한 벌판. 그 사이로 호수가 있고, 굽이를 돌면 어느새 또 다른 호수가 나타나던 그 거칠고 야성적인 길.

 

7월 12일, 화요일

 

피로를 씻어내려고 하루 종일 숙소에서 쉬었다. 이어령 저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이후」를 읽었다. 아기를 배 위에 올려놓고 낮잠도 잤다. 누가 누구를 재운 건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단잠이었다.

 

7월 13일, 수요일

 

북해의 파도가 보고 싶어 기어이 인버래리를 방문했다. 양어장과 그 근처의 아담한 성을 구경하고, 물이 깨끗해서 상수원으로 쓴다는 에크 호수Loch Eck주위를 돌아, 더눈Dunoon이라는 마을의 입구까지 갔다가 다시 산길을 돌아 숙소에 귀환했다. 적당한 거리의 드라이브였다. 저녁에는 글라스고우의 대학선배들이 그곳의 특산물이라는 홍합과 게, 바다가재를 푸짐하게 들고 우리 숙소로 찾아왔다. 오는 길에 수산시장에 들러 사 왔다고 했다. 우리 가족만 기거하기에는 너무 넓다 싶던 숙소의 쓸쓸함이 싹 가셨다. 화기애애한 해산물 파티!

 

7월 14일, 목요일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딘버러Edinburgh를 안 보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에딘버러 인근의 노스 퀸즈페리North Queensferry에 들러 ‘Deep Sea World’라는 수족관을 구경했다. 모처럼 꼬맹이를 위한 서비스였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에게는 자동차 여행이 고단하기만 했을 텐데, 수족관에서는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부디 낯선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품는 사람으로 자라나렴.

 

이윽고 멋들어진 다리로 해협을 건너,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이-든브르’라고 발음하는 도시로 입성했다. 안내책자에서 에딘버러에는 ‘신시가지New Town가 모범적인 계획도시로 건설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일순간 분당이나 일산 같은 풍경을 상상했다. 알고 보니 신도시라는 것이 건설된 것은 18세기 때의 일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에딘버러 성은 바다를 절벽으로 면한 높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어서 시내 어디서나 잘 보였다. 성에서 내려다본 에딘버러 시가지의 정경은 차분하고 근사했다.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언덕의 꼭대기에 암갈색 암석으로 오밀조밀 지어진 성의 아름다움도 독특했다. 12세기에 지어진 이 성은 1707년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합병될 때까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투쟁과 복잡한 궁정사의 결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에딘버러 신시가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18세기는 이 성이 전투의 요새로서 역할을 다하고 난 이후였다. 성 위에서 에딘버러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빅토리아 왕조 시절 대영제국의 영광을 그리는 사극의 거대한 세트장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라도 나누어 보았으면 좋았겠지만, 당일로 구경을 마치려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 사연 많은 도시를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7월 15일, 금요일

 

어제도 제법 장거리를 왕복했고, 내일은 옥스퍼드까지 먼 길을 되돌아가야 하므로, 숙소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쉬었다. 기운이 남더라도 의도적인 조절을 해야 했다. 옥스퍼드로 귀환한 뒤에는 곧장 다시 짐을 싸서 유럽 대륙으로 자동차를 타고 떠날 예정이므로 체력을 안배하는 편이 현명했다. 어른들은 그깟 여독쯤 견딘다손 치더라도, 만에 하나 아기가 무리해서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의 맏아들은 제 아비의 직업과, 그 때문에 세상을 주유하며 자라게 될 자신의 장래를 알기라도 하는 것인지, 여행에 지치는 기색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7월 16일,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크York쯤에 들러 하룻밤을 지낼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결국 포기했다. 짐을 싸고 푸는 데 지쳐 버린 데다, 늦은 시간에 요크에 도착한들 일박 일정으로는 많은 것을 보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결국, 평양과 부산 사이보다 먼 544km의 거리를 단숨에 차를 몰아 귀가했다. 아침10시에 떠났는데, 중간쯤에 고속도로 사고가 있었던 것인지 한참동안 교통이 정체되는 바람에 최단거리 대신 곁길로 빠져 리즈Leeds를 경유해 우회했다. 옥스퍼드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 경이었다.

 

먼 여정을 마친 후 피곤한 몸으로, 익숙한 집의 현관으로 뛰어드는 그 순간의 달콤함도 여행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비록 어설픈 일정으로 돌아보았을 뿐이지만, 스코틀랜드의 산과 들, 그 차가운 호수의 물냄새는 이제 나의 기억의 일부가 - 그러므로 나의 일부가 - 되었다. 이 말은 거꾸로 써도 같은 뜻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스코틀랜드의 아주 작은 일부가 되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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