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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7. Europe, again (1)

posted Jun 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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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25일, 월요일


옥스퍼드를 방문한 막내 동생을 데리고 호수지방과 스코틀랜드를 다녀온 여행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다. 나는 동생이 영국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외국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름방학을 알차게 보낼 계획에 골몰했고, 유럽 수학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제법 그럴싸한 계획을 세워둔 터였다. 동료 학우들과 단체로 4개국을 돌아보긴 했지만, 식구들과 함께 더 자유롭게 유럽과 부딪혀보고 싶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서 아내와 아들, 그리고 동생과 함께 유럽 대륙을 향해 출발했다. 아침 6시부터 식구들을 깨워 8시반 경에 집을 나서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웬걸 고속도로 정체가 심해서 도버 항구에는 정오가 가까워서야 도착했다. 우리 자동차를 실은 페리선은 12시 반에 도버를 떠나 영불해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한치 앞조차 보이지 않던 도버 항구의 안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번에는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여름 바람이 선상을 덮쳐 왔다. 페리선에 차를 싣고 내리는 경험도 처음이었는데, 프랑스 칼레Calais에 도착해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핸들이 오른 쪽에 달린 영국식 자동차로 프랑스에서는 우측통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항구도시 칼레는 로뎅Auguste Rodin의 조각품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벌이고 있던 1347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칼레를 공격했는데 칼레를 사수하던 주민들은 굶주림을 못 이기고 항복하겠다는 뜻을 영국군에 전했다. 에드워드는 항복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여섯 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벌거벗은 채 목에 올가미를 걸고 걸어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치고 주민 대표로 처형될 것을 요구했다. 칼레의 가장 부자인 피에르를 포함한 여섯 명이 이 요구에 자발적으로 나섰다. 이 순간을 묘사한 로뎅의 작품은 비통하면서도 의연하고 고상한 여섯 사람의 모습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여섯 명의 주민대표는 자비를 베풀라는 영국 여왕의 탄원 덕분에 목숨은 건졌다.


칼레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며 기분을 내느라 좀 속도를 내기는 했다. 우리 고물차는 그럭저럭 잘 달려간다 싶더니만, 파리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은 지점에서 머플러Exhaust가 터져버렸다. 뭔가가 차 밑에서 ‘뻥’ 하더니, 그 다음부터 우리 자동차는 탱크 같은 소리를 내며 속도를 내지 못했다. 사방에서 운전자들이 우리 차를 쳐다보면서 추월했다. 느릿느릿 파리 시내까지 간신히 도착해서 예약해둔 호텔을 어렵사리 찾았고, 객실에 짐을 옮긴 다음에는 녹초가 되었다. 영국에서 가입해둔 자동차 수리 서비스AA : Aubumobile Association는 대륙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고 했었다. 몇 푼이 아까워서 이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큰 낭패를 볼 뻔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낭패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짐을 풀면서 AA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서비스를 요청했는데,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나타난 정비공은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 했다. 차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큰 문제는 아니라며 내일 차를 가져오라고 정비소 명함을 주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그러느라 어느새 밤 11시가 되어버렸지만,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에펠탑으로 갔다. 나는 수학여행으로 와봤지만, 파리가 처음인 아내는 조명이 휘황한 탑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영국에서 배낭처럼 생긴 ‘아기 업는 가방’을 사 왔는데, 나한테 업힌 꼬맹이는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여행에 시달려 이젠 제법 이력이 붙어 보이는 귀여운 녀석. 아들과 나는 탑 아래서 쉬었고, 동생과 아내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파리에 온 것이었다. 파리에 처음 오는 외국인은 하루치의 피로 정도는 잊을 만큼 흥분하기 마련이다.


7월 26일, 화요일


어제 하루 종일 장거리 운전을 하고 고장 난 자동차와 씨름까지 했더니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아침 일찍 벌떡 일어나 비몽사몽인 동생을 데리고 어제 명함을 받은 정비소를 찾아 갔다. 셍술피스St. Sulpice거리에서 정비소를 찾아내기는 했는데, 변변찮은 내 불어실력으로는 의사소통도 고역이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소음기 앞의 파이프가 고장 났다는 것이었고, 차를 하루 동안 맡겨두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맏형의 외국어 실력에 감탄하는 동생의 환상을 깰 필요는 없었기에 말해주지 않았지만, 내가 알아들은 것은 정비공들의 몸짓이었지 그들의 말이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온 동생과 나는 잠을 좀 더 마저 잤다. 중천에 뜬 햇볕을 받으며 호텔 밖으로 나온 우리는 운치 있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달팽이 요리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파리에서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도 음식이 이렇게 맛있는 모양이었다. 우체국에 들려 어머니께 편지와 사진을 부쳤다. 그리고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개선문을 보았고, 무질서가 과연 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 앞의 16차선 로터리도 넋을 놓고 구경했다. 그곳을 돌거나, 끼어들거나, 가로지르는 자동차들의 운행에서는 아무런 미묘한 법칙이나 무언의 합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과연 파리 시민들은 얼마나 대담하기에 이런 로터리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인지 감탄스러웠다. 운전이라기보다는 급류타기와 흡사한 신종 스포츠처럼 보였다. 샹젤리제Champs-Elysee 거리도 산책했는데, 이번에는 좌우로 늘어선 상점마다 들어가 구경하려는 아내를 달래느라 애먹었다.


저녁에는 나의 공식 지정 민폐 대상이 되어버린 이은용 선배가 우리 호텔로 차를 몰고 와서는 집으로 데려갔다. 융숭한 저녁을 대접받으며 선배와 형수에게, 고장 난 자동차와 파리 뒷골목의 정비소가 등장하는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동생과 아내의 평에 따르면 조금 과도하게 드라마틱한 설명이었다고 했다. 사람 좋은 이 선배 내외는 식사 후에 자기 차로 우리를 세느La Seine 강변으로 데려가 바토 파리쟝Bateau Parisian이라는 유람선에 태워주었다. 강의 양편으로 산책로가 있었고, 거기서 적잖은 연인들이 짝을 지어 부둥켜안고 짙은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아폴리네르Apollinaire의 시처럼 미라보Mirabeau 다리 아래로 세느강이 흐른다. 우리의 사랑도 여기에 흐르는가.


7월 27일, 수요일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어젯밤에 사양을 했는데도 이은용 선배는 아침 열 시쯤 다시 우리 호텔로 찾아와 베르사이유 궁Château de Versaille 관광을 시켜주겠노라고 했다. 파리에서 20km 외곽에 있는 베르사이유까지 가볼 엄두는 못 내고 있던 터였는데 염치불구하고 선배를 따라 갔다. 베르사이유 궁은 ‘태양왕Le Roi Soleil’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14세가 거처로 삼은 뒤 프랑스 혁명으로 왕가가 몰락할 때까지 약 100년간 왕궁 역할을 했던 건물이었다. 그래서 이 건물은 ‘구질서Ancent Regime’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절대왕권의 부패와 사치를 상징한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베르사이유 궁전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그저 한 바퀴 돌아보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거대한 궁전 속에는 방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비슷비슷한 지루함을 감추려고 나름대로 ‘거울의 방’이니 ‘전쟁의 방’이라고 특색 있게 꾸며둔 방들이었다.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온다’고 믿는 왕권신수설의 태두인 루이 14세는 “짐은 곧 국가다(L'etat, c'est moi)”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는 지방 영주들이 자신의 등 뒤에서 음모를 짜지 못하게끔 죄다 불러 모아 이 궁전 안에 살도록 했다. 그래서 약 5천 명의 귀족이 우글거리며 몰려 살던 이 궁전은 말하자면 ‘정부종합청사’와도 같았다. 하지만 정작 와서 보니 침대며 의자들은 왜소하고 불편해 보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리던 사람 중의 하나가 누웠던 침대보다 지금 내가 누워 자는 침대가 더 편안한 거다.


역사가 로저-앙리 게랑Roger-Henrl Guerrand이 쓴 <화장실 문화사Les Lieux. Historie des Commdites>를 보면, 이 드넓은 궁전에는 화장실에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당시 궁전을 출입했던 수많은 귀족들은 용변이 마려우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의 구석 벽이나 바닥 또는 정원의 풀숲이나 나무 밑을 이용했다고 한다. 귀족들은 휴대용 변기에 용변을 해결하기도 했지만 하인들이 이 오물을 버리는 곳은 역시 으슥한 정원 구석이었다. 여성들은 커다란 모피 주머니에 휴대용 그릇을 넣고 다녔다니, 당시 여자들의 치마가 넓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프랑스에서 향수가 발달한 것도 귀족들이 악취를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전통주의자들이 곧잘 저지르는 실수는 과거를 지나치게 미화하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진보한다. 단지 침대의 성능이나 화장실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견제되고 인권이 널리 보호받기 시작한 것이 불과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아무리 낭만적인 복고주의자라 하더라도 섣불리 ‘백 년 전에 태어났기를’ 소망하지는 못할 터이다. 누구든 전통문화를 찬미할 때는 이런 점도 염두에 두어야만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선배 덕에 베르사이유 궁을 잘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온 뒤, 오후 3시경에는 수리된 자동차를 찾아 왔다. AA에 가입해두길 다행이었지만, 부품 값 150 파운드는 별도로 물어야 했다. 어쨌거나 차가 다시 굴러가니 마음은 한결 놓였다.  오후에 동생이 형수를 모시고 루브르와 오르세이 박물관을 관람하러 갔고, 나는 그동안 방에서 꼬마와 뒹굴었다. 아기를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은 아이에게 못할 짓이었다. 저녁에는 다시 내 차례. 아내로부터 동생을 바톤처럼 이어받은 나는 몽마르트르Monmartre로 갔다. 물랭루즈Moulin Rouge를 비롯한 유흥업소들이 줄지어 있고, 젊은 직원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보니 몽마르트르의 겉모습은 영등포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 신체적 결함을 잊으려 애쓰며 방황하던 곳, 드가Edgar Degas가 자신의 유복함을 벗어버리려고 방황하던 곳, 위트릴로Maurice Utrillo가 때 묻은 백색의 눈을 밟으며 누비던 곳, 고호Vincent van Gogh가 아픈 사랑을 추억하며 몸부림치던 곳, 청색시절의 피카소Pablo Picasso가 추위를 못 견디고 다음날 불쏘시개로 쓸 그림을 그리곤 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저만치 언덕 위의 하얀 대리석 건물, 순결함의 상징 같은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이 퇴폐적인 이 밤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7월 28일, 목요일


해가 중천에 올 때까지 다들 늘어져라 늦잠을 잤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지하철로 조르주 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 Pompidou로 갔다. 찌는 듯이 더웠다. 1977년 준공 당시 대통령의 이름을 딴 퐁피두 센터는 공공 도서관Bibliothèque publique d'information, 국립 현대예술 박물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 음향·음악연구소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와 영화관, 강당, 식당, 카페 등이 입주해 있는 복합 문화시설이다. 문화강국임을 자랑하는 프랑스가 현대 문화의 요람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지은 건물인데, 생김새가 좀 묘하다.


데이빗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1986)는 괴짜 과학자가 공간이동 실험에 자기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가 이동장치 안으로 날아든 파리와 유전자가 뒤섞이는 바람에 점점 파리를 닮은 괴물로 변해가는 영화다. 엽기적인 취향을 자랑하는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이 영화에는 온갖 끔찍스런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그중에는 실험 도중 전송 데이터가 잘못되어 안팎이 뒤바뀌는 원숭이도 나온다. 공간 이동을 마친 원숭이 한 마리가 마치 양말이 뒤집히듯이 내장이 온통 겉으로 나온 채 몸부림치는 거다. 이런 징그러운 얘기를 왜 굳이 하느냐면, 내가 퐁피두 센터를 보자마자 떠올린 것이 이 불쌍한 실험용 원숭이였기 때문이다.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퐁피두 센터 건물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도입하여 건물 벽 속에 있어야 할 배관과 배선 파이프들이 죄다 건물 벽 바깥으로 드러나 있다. 내 눈에는 흉물스럽게만 보였다.


하긴, 지금은 파리의 상징이 된 에펠탑도 건립초기에는 ‘흉물’이라고 비난이 많았다고 한다.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의 관문으로 건축되었는데, 설계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으로 철골로 첨탑을 만든 것이었다. 그 당시에 이 철탑에 눈살을 찌푸린 사람은 많았다는데, 작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그 중에서도 열렬한 반대론자였다. 그런데 정작 에펠탑이 완성되자 그는 탑 2층에 있는 레스토랑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어느 날 기자가 물었다. “선생께서는 에펠탑을 그렇게도 싫어하시더니 여길 자주 오시는군요.” 모파상 왈, “파리 시내에서 이놈의 탑이 안 보이는 곳은 여기뿐이잖소.” 내장을 겉으로 드러낸 퐁피두 센터와 그 앞의 기괴한 분수들도 수십 년 후에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줄 수 있을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세상은 내가 살고 싶은, 아니,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닐 거다.


7월 29일, 금요일


이제 파리를 벗어나볼 차례다. 오전에 호텔을 나선 우리는 오후 내내 프랑스의 고속도로를 타고 남동쪽으로 달렸다. 자동차가 다시 말썽을 부리면 큰일이었으므로, 되도록 차를 살살 몰았다. 알프스Alps 산맥의 품으로 접어들자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와 평행으로 콸콸 흐르는 냇물은 옅은 녹색을 띄고 있었다. 우리 차에는 에어컨이 달려 있지 않았다. 요즘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영국 자동차에는 대개 에어컨이 생략되어 있었다. 파리를 벗어난 이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창문을 열어봤는데, 차창 밖의 공기가 너무 더워서 별 도움도 되지 않는데다 아기가 센 바람을 싫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내내 무더위를 참아가며 차 안에 여러 시간 갇혀 있었다. 아내는 연신 아기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물수건으로 닦아 주어야 했다. 그런데 연녹색 냇물이 신기해서 구경이나 해 볼까 싶어 차를 길가에 세우고 내렸더니, 차 문을 여는 순간 마치 에어컨의 바람과도 같은 찬 기운이 우리를 상쾌하게 감쌌다.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물이었다. 온도 차이 때문에 물 위로는 흰 김이 서리고 있었다. 일주일동안 더위에 시달리던 우리에게는 정신이 번쩍 드는 상쾌함이었다. 동생이 소리쳤다. “형! 파리고 뭐고 다 집어치고, 진작 알프스로 올 걸 그랬어요!”


우리의 목적지는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세 나라의 접경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프랑스 마을 샤모니Chamonix였다. 1924년 세계최초의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곳인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상상외로 자그마한 산골 마을이었다. 우리는 샬레 스타일의 지붕과 발코니를 구비한 호텔에 투숙했다. 호텔 식당의 저녁식사는 훌륭했다. 호텔 앞마당에서 느긋하게 즐긴 시원한 산바람은 식사보다 더 훌륭했다. 저만치 올려다 보이는 몽블랑Mont-Blanc의 육중한 봉우리에 윤곽이 뚜렷한 상현달이 걸려 있었다. 어이, 낡은 자동차, 너도 수고했다. 오늘은 모처럼 시원한 바람에 엔진을 식히렴.


7월 30일, 토요일


알프스 산을 올랐다. 등반 대원처럼 륙색모양의 가방을 짊어졌는데, 그 속에는 생후 8개월 된 아들이 타고 있었다. 모처럼 화창하고 서늘한 바람을 받으니 기분이 좋은지 아기도 생글생글 표정이 밝았다. 샤모니 인근의 빙하Glace de Mer가 오늘의 목적지였다. 역까지 걸어가 산악열차를 타니 소풍 기분이 절로 났다. 열차에서 내려 비탈을 따라 좀 더 걸어갔다. 눈과 얼음 덩어리를 이고 선 날카로운 산봉우리들 사이로 기다란 골짜기가 나타났다. 고도가 조금 더 낮았더라면 아마도 호수가 되었을, 널따란 얼음 덩어리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 언저리에는 관광객을 위해 빙하 속으로 판 동굴이 만들어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얼음동굴 속을 거닐어 보는 것 만한 피서가 또 있을까. 아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했다. 조용한 산골에서는 해도 일찍 저문다. 샤모니의 밤에 관광객이 할 일은 산과 더불어 쉬는 것 뿐이었다. 자연의 침묵에 익숙지 않은 나와 동생은 아내가 숙소에서 아기를 재우는 동안 동네 극장으로 내려가 을 관람했다. 모처럼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국 영화였다. 문득, 서울의 오랜 친구들, 그들과의 부대낌이 그리워졌다.


7월 31일, 일요일


샤모니에서 가까운 몽블랑의 봉우리에는 에귀 뒤 미디Aiguille du Midi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정오를 가리키는 바늘’이라는 뜻이다. 뾰족한 시계바늘처럼, 그 봉우리 위에는 첨탑처럼 생긴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네 식구가 함께 전망대까지 올라가볼 요량으로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는데, 케이블카 승강장 직원의 설명인즉 기압과 기온 등의 문제로 유아를 데리고 가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다. 또 '형수와 시동생' 조를 먼저 전망대로 올려 보내고 나는 호텔로 돌아와 숙소에서 아들과 놀아주었다. “임마, 네가 아직 너무 쪼그매서 안 된대.” 아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살짝 잠이 들었는데 11시쯤 아내가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동생은 정상에서 좀 더 바람을 쐬면서 형을 기다리겠다고 했단다.


샤모니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해발 2,317m 되는 곳에 플랑 드레귀Plan de l'Aiguille라는 둔덕이 나온다 여기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3,842m 높이에 위치한 전망대까지 올라가면 총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꼭대기에는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높이의 절벽 위에 전망대 건물이 아슬아슬하게 지어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다 이런 것을 지어 놨을까? 케이블카를 만들자고 제일 처음 강철 케이블을 지고 나르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산을 올랐을까? 인간은 참 유별난 동물이다. 음식을 위한 것도 번식을 위한 것도 아닌데 이런 짓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전망대 난간 아래 천 길 낭떠러지로는 어지러워서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좁다란 전망대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동생을 발견했다. 알프스의 다른 준봉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정상에서의 기상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그래도 성하盛夏에 맞아보는 눈보라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식구가 함께 이곳의 별미요리라는 피에라드pierrade를 사먹었다. 돌판에 고기나 생선을 굽는 것일 뿐이어서 싱거운 요리였건만, 아니나 다를까, 무척 비쌌다. 역시 관광지에서 그곳의 별미라는 음식을 무턱대고 사먹는 건 바보짓이다. 샤모니에 도착하던 날부터, 하늘 위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런가보다 했는데, 호텔 근처에서 ‘초보자도 환영한다’는 팸플릿을 본 뒤로 동생은 꼭 타보고 싶다며 몸살이었다. 까짓것, 소원을 들어주자 싶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패러글라이딩 학원을 찾아가 동생과 둘이서 하루치 교습을 접수했다


8월 1일, 화요일


아침에 창밖을 보니 이슬비가 뿌리고 있어서 과연 이런 날도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학원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비가 와서 오늘은 아무래도 좀 어려울까요?" 겁도 좀 났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실망스러운 목소리를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기대감 비슷한 것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학원의 대답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나오시라"는 거였다. 아내에게 "잠시 후에 나와서 하늘 위를 쳐다보라"고 큰소리를 치고 동생과 함께 강습소를 찾아갔다.


막상 설명을 듣고 보니 혼자 타는 게 아니라, 싱겁게도 강사와 함께 타면서 패러글라이딩을 '체험'한다는 거였다. 그러면 그렇지. 괜스레 겁을 먹었던 게 멋쩍어졌는데, 이번에는 마음 다른 구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던 모험심이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강사를 등에 업고 타는 것이었으므로 간단한 안전수칙을 듣고 나니 그걸로 강습은 끝이었다. 학원의 사륜구동차를 타고 제법 높은 봉우리 위로 한참 올라갔다. 절벽 앞쪽의 조그만 공터에서 강사들은 한참동안 낙하산을 만지작거리며 손질했다. 이윽고 낙하산을 풀밭에 널찍하게 펼쳐 놓은 강사는 누가 먼저 타겠냐고 물었다. 이럴 때 동생더러 먼저 하라고 할 수는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섰다. 강사의 품에 등을 대고 안기다시피 하나로 묶였다. 아까 배운 대로, 강사의 구호에 따라 그와 발을 맞추어 언덕 아래로 질주했다. 가급적이면 절벽에서 허공을 향해 멀찍이 도움닫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까마득한 절벽의 끄트머리를 있는 힘껏 박차고 두 발이 허공을 딛던 그 순간의 기분은 영영 잊을 수 없다. 완전히 펼쳐진 낙하산이 위에서 몸을 잡아채던 순간까지, 잠깐이나마 내 몸은 땅을 향해 자유낙하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수가 멋대로 높아졌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저 아래 건물과 자동차들이 모형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내 몸과 허공 사이에는 몇 가닥의 끈밖에 없었다. 물속에서 수영을 하듯이 맨몸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다. 밀랍으로 이어붙인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아갔던 이카루스Icarus의 전설이 떠올랐다. 흥분과 해방감과 성취감이 뒤섞인 고함소리가 저절로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등 뒤에서 강사가 툭툭 치며 가리키는 곳을 보니 동생도 어느새 뛰어내렸는지 저만치 날고 있었다. 내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강사는 낙하산을 몰았다. 아내가 올려보고 있을 우리 숙소 상공으로 다가가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다. 다이빙 하듯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지다가는 다시 올라가기도 하고, 좌우로 방향을 꺾으며 활강했다. 굳이 이런 위험한 짓을 하면서 노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경험해 보니 중독될 소지가 큰 스포츠임을 알게 되었다. 강사가 내려갈 시간이라며 손목시계를 가리켰을 때,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잔디밭 위로 내릴 때는 사전에 강습을 받은 대로, 허공에서부터 달리는 시늉을 하다가 발이 땅에 닿는 순간부터 내달으며 가속도를 줄였다. 생각처럼 폼 나게 되지는 않았고 결국 잔디밭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뒹굴지는 않았으니 그만하면 다행이었다.


오후에는 자동차를 몰고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로 드라이브를 했다. 샤모니에서 밀라노 방향으로 국경을 지나려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알프스 산자락을 다 벗어난 후에도 밀라노까지는 한참을 더 달려야 했다. 샤모니에서 묵는 며칠간 잊고 지내던 한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가, 감히 나를 잊었냐며 호통이라도 치듯이 엄습해 왔다. 밀라노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대도시에 와본 것이었다. 밀라노는 어쩐지 이탈리아라기보다는 독일의 도시 같은 분위기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도심 풍경에 절도가 있었고, 풍요로워 보였고, 깔끔했다. 시민들은 마치 패션 잡지 속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대부분 정장을 차려 입은 멋쟁이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밀라노의 별명이 ‘패션의 도시’였다. 중심가인 두오모 성당 주변에서부터 엠마누엘 2세 거리를 따라 구치, 아르마니, 버버리 등 명품 상점들이 즐비했다.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이 분리독립을 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밀라노 사람들은 길에서 지나가는 미인에게 악의 없이 농을 걸거나, 기분 좋을 때 큰 제스쳐를 하면서 노래를 한 곡조씩 뽑는, 그런 이탈리아인이 아니었다. 부자동네의 깍쟁이 시민들이었던 것이다.


북부지역 주민들의 하소연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들은 자기들이 근면하게 일해서 얻는 보수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내는데, 그 돈이 남부 이탈리아를 부양하는데 퍼부어지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45%인 북부지역 주민들이 세금의 70%를 내고 있으며, 밀라노가 속한 롬바르디아주는 이탈리아 전체 수출의 40%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199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북부 이탈리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북부동맹Lega Nord’이 “남부를 먹여 살릴 필요 없다”는 취지로 유권자를 선동해서 돌풍을 일으켰다. 북부동맹이 이탈리아 하원에 46명(7.3%), 상원에 19명(5.8%)의 의원을 진출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96년 북부동맹은 아예 만토바를 수도로 정하고 북부지역 8개 주를 ‘파다니아 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1997년 5월 북부이탈리아의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무려 4백만 명의 투표자 중 99%가 찬성표를 던진 일도 있었다. 북부동맹이 밀라노를 포함한 롬바르디아지역과 베네치아를 포함한 베네토지역 등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체 실시한 투표였다. 물론 프로디 총리는 이 투표를 “법적근거가 없는 선동행위”로 규정했다.


이탈리아 반도 남북간의 지역갈등은 재미난 현상이었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태풍 속에서 유럽 대륙은 통합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데, 정작 그 회원국 안에서는 해묵은 지역갈등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고대와 중세와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법인가보다. 며칠만 굶주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동굴에서 수렵·채집하던 시절의 태도로 돌아가지 않을까? 군대 훈련소 시절에는 대학에 다니던 지성인들이 반찬으로 배식 받은 닭고기 조각의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정색 하고 싸웠었다.


우리는 대성당 일 두오모Il Duomo를 둘러보고 라 스칼라La Scala 극장 앞에서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이탈리아에 온 김에 피자를 먹어보고 싶어 피자 가게를 찾았지만 여기도 '개똥의 법칙'이 통하는 것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스파게티로 저녁식사를 했다. 다시 긴긴 터널을 빠져나와 샤모니의 숙소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었다.


8월 2일, 수요일

 

아침에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하고 그새 정이 들어버린 샤모니를 떠나 스위스로 향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길의 풍경은 근사했다. 에서 수녀 마리아가 뛰놀던 산과 들처럼 생긴 경치가 연신 곁을 스쳐갔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한니발의 코끼리처럼 알프스를 묵묵히 넘어가 주고 있는 우리의 중고차가 기특했다. 처음 접어든 스위스의 도시는 베른Bern이었다.


내가 불어나 이탈리아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어는 한 번도 공부해본 적이 없는 관계로, 유독 독일어 지역에 들어가면 긴장을 하게 된다. 시내로 들어선 우리가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쭈뼛쭈뼛 식당을 찾고 있을 때였다. 흰 옷을 입은 중년 여인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도와줄 것이 없겠냐’며 영어로 물어 왔다. 스위스에서는 이런 식의 도움을 좀처럼 받기 어렵다는 것이 관광안내책자의 정설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기차역 앞의 여행자안내소까지 몸소 데려다 주고, 직접 지도를 꼼꼼히 짚어가며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해 주었다. 지친 여행에 활력소가 되어준 그 베른시민을 우리는 ‘베른의 천사’라고 명명했다.


‘독일어의 압박’을 좀 피해 볼 요량으로 저녁은 역 근처의 멕시코 식당에서 먹었다. 식사 후에는 구시가지를 한 바퀴 둘러보았고, 베른을 벗어나기 전에 아까 천사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 ‘장미정원Rosengarten’으로 올라가 시가지를 한번 굽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스듬한 언덕 위에서 바라본 베른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십중팔구 우리가 만났던 아주머니의 공이었겠다. 어딘가에 가보았다는 것만으로 여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제 누구와 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같은 곳에서도 다른 여행이 빚어진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 아줌마, 성함이라도 여쭤볼 걸.


밤이 이슥해서야 목적지인 인터라켄Interlaken에 도착했다. 인터라켄은 ‘호수 사이’라는 뜻으로, 동쪽의 브리엔츠 호수Lake Brienz와 서쪽의 툰 호수Lake Thun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까지 온 것은 알프스의 유명한 봉우리 융프라우Jungfrau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예약했던 호텔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비 포함 문제로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예약했던 이메일에는 분명히 아침 값이 포함된 가격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아침 식사를 원하면 추가 요금을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인쇄한 이메일 종이를 코앞에 들이 밀고 따져서 추가요금을 면제받았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었는데, 덜렁 침대만 있었지 달리 구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도 닳고 닳은 깍쟁이들이 숙박업을 운영하는 전형적인 관광명소인 것이로군. 깍쟁이들 중에서도 가장 고수가 스위스 깍쟁이라던데... 이런 게 싫다면 관광객이 몰려드는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될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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