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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 2주 후

posted Mar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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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유하고 조용하고 질서 정연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적어도 60년대 이후로는 그래 왔다. 그러던 나라가 대대적인 인구 노령화 현상으로 활력을 잃어 가는가 싶더니 GDP 규모에서 국제적 순위를 중국에 내 주었고, 국내적으로는 지도력의 부재를 겪고 있었다. 3.11. 지진과 해일은 그런 일본 위에 덮쳐온 대재앙이었다. 지진 당일 희생자가 1천명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깜짝 놀랐건만,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친 숫자는 이제 2만 명에 육박해가고 있다. 일본의 동북해안지방은 대규모 공습을 받은 것보다도 더 참담하게 초토화되었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동북지방의 농/수/축산업은 장기적인 침체가 불가피해 보이고, 그 지역의 수많은 부품공장이 입은 타격은 일본의 산업뿐만이 아니라 애플, 노키아, 볼보, GM, HP 등 굴지의 외국기업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80년대 일본과의 무역협상에 참여했던 클라이드 프레스토비츠 미 경제전략연구소(ESI) 소장은 3.25자 뉴스위크 기고문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제품, 예를 들면 소형 마이크나 도금 소재, 고성능 기계, 전자 디스플레이, 거기에 골프 클럽이나 보잉의 신형 여객기 ‘드림라이너’의 날개에 사용되는 탄소섬유 등이 ‘모두’ 또는 ‘대부분’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쓰면서 “과연 실리콘밸리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해서 애플이 위기에 직면할까”라고 자조적으로 묻고 있다. 전세계 기업들이 판매하는 물건들 속에 들어가는 고부가가치 부품들은 정작 미쓰비시 가스 케미컬, 도시바(메모리반도체), 세이코홀딩스(배터리), 아사히글라스(LCD 화면용 유리), 무라타 제작소(통신용 반도체) 같은 회사들이 만들어 왔던 것이다.

2. 일본인들이 입은 심리적 상처는 그보다도 커 보인다. 전례 없는 규모에도 불구하고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의연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인들로서도 원전이라는 인공적 시설의 사고는 처음 겪어보는 것이니 불안감을 가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일본 언론도 과거에는 여간해서는 잘 보이지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보이고 있으며, 지도력의 부재를 공공연히 자탄하고 있다. 동북부 도로망은 아직도 많은 보수를 필요로 하고 있고, 일본의 예비전력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동경시내 23개구도 돌아가면서 계획정전을 실시하고 있으며, 전철의 운행횟수도 줄었다. 일본 최대규모를 자랑하던 츠키지 수산시장 입주업체들은 도산을 우려하는 지경이고, 시내와 동네의 슈퍼에는 생수가 동이 났다. 지진 이후 초기 1주일간 쌀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재기라기보다는 공급의 장애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생수의 경우는 수돗물 오염을 우려한 시민들이 누구나 생수를 구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

3. 이런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침착성은 부러운 경지를 넘어 두려울 정도다. 해일로 인한 사망자 시신 수습 장소에서 아무도 정신줄을 놓고 오열하지 않는 것은 예로부터 재난이 많은 나라에 살면서 국민들이 독특한 생사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치자. 지진 당일 저녁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어 몇 시간씩 걸어서 집으로 귀가하던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아무런 비통함을 읽을 수 없었다. 일본 언론이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 논조는 아직도 우리 언론에 비하면 지나칠 만큼 얌전하다. 예전부터 매주 행사처럼 얌전한 가두시위를 해 왔던 몇 명의 진보 인사들의 변함없는 행진시위를 제외하면 가두시위도 없다. 슈퍼와 편의점에 생수가 동났다고는 하지만, 생수를 박스 채로, 또는 여러 병을 욕심 사납게 구입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요즘 편의점에 가면 여남은 병의 생수를 진열하고 판매하는데, 사람들은 한 병 또는 두 병씩만 구입한다. “우리 가게에서는 1인당 1 병만 판매합니다”라고 점원이 말하면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생수 부족 현상도 내가 보기에는 수요 증가일 뿐 사재기 현상과는 거리가 멀다. 지진 직후 후쿠시마 원전에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중국의 상해에서 요드약제와 소금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그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사재기’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이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Trust> 를 통해 '신뢰'가 국가 발전의 필요조건임을 주장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진이나 해일보다 무서울 수도 있는 것이 이웃이다. 재난 직후 일본을 현지에서 경험하면서, 나는 일본인들이 위기시에도 절제와 배려를 잃지 않는 모습을 경험했고, 선진국 일본이 가진 최대의 자산인 ‘신뢰’- 후쿠야마의 표현에 따르면 ‘자발적 사회성’ -의 ‘쌩얼’을 본 것 같다.

4. 나의 지론이지만, 누군가의 장점은 곧 그의 단점이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은 독선적이고, 남의 말에 귀 기울여줄 줄 아는 사람은 귀가 얇고, 쾌활한 사람은 덜 진지하고, 진지한 사람은 덜 쾌활한 것이다. 일본 국민의 경우도 그러할 터이니, 일본인들의 절제와 배려는 그들이 국가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방송사들은 사고 일주일이 지나던 날 무슨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지진관련 속보를 중단하고 평소 프로그램을 재개했다. 지진과 원전 사고 진행상황을 뉴스로 접하려면 CNN을 보아야 할 정도였으니 그 또한 좋기만 한 일은 아닐 터이다. 각국에서 재해구호품이 답지하고 있어서 3월 현재 일본은 졸지에 세계 2위의 원조 수혜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전국적으로 따지면 구호물품이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정작 재난 현장에는 일주일이 넘도록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서 구호소에서는 하루에 두 사람이 주먹밥 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수일째 연명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매뉴얼에 적혀 있는 대로만 보급을 시행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어떤 한인 기업이 일본정부에 물품을 기여하고 싶다고 연락했더니 자본금 규모는 얼마며, 회사 경영상태는 어떠냐 등등을 따져묻더라며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어본 바에 따르면 능히 그럴 수 있는 것이 일본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나라에서 구호대를 보내겠다고 하면 대원들의 이력서를 먼저 보내달라고 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이 속히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사회 전체가 그런 매너리즘의 한계도 극복해야 할 텐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반드시 좋기만 한 일인지 확신은 서지 않는다. 일본이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일본의 장점 중 어떤 부분을 잃는 것과 함께 벌어질 일이 아닐까 걱정스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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