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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Days of Summer(2009)

posted Dec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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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운명적인 만남이 아니다

2005년에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에서 주이 데샤넬이라는 여배우를 처음 봤을 때 두 가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이름이 이 괴상한 SF 영화 만큼이나 특이하다는 것과, 머지않아 로맨틱 코미디에서 그녀를 종종 볼 수 있으리라는 예감. 그로부터 3년 뒤 데샤넬은 짐 캐리의 상대역으로 <Yes Man>에 출연했는데, 과연 이런 데서 보는구나 싶어 반가우면서도 역할이 뭔가 미진해보였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에 드디어 <500 Days of Summer>로 사고를 쳤다. 조셉 고든-레빗이라는, 그 또한 이름이 평범하지 않은 남자배우와 짝을 이루어.

남녀 주인공이 그냥 나란히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경우가 있다. 흔치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것도 아니다. 신성일과 엄앵란이라든지, 최불암과 김혜자가 그렇다고 할 수 있고,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캐더린 햅번과 스펜서 트레이시, 아예 결혼을 해버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브레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등등. 이렇게 유명세를 타는 커플이 꼭 아니더라도,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들은 전부 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주인공들 사이의 ‘화학작용(chemistry)’ 덕을 본다. 그래서 영화에서 캐스팅은 중요하다. 심지어 각본이나 연출보다도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셉 고든-레빗과 주이 데샤넬은 몹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어서, <500 Days of Summer>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첫 영화인데도 크게 히트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놀음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컬트가 되었다.

탐(고든-레빗)은 건축설계를 전공했지만 카드회사에서 축하문구 따위를 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직장에 새로 입사한 서머 핀(데샤넬)에게 반한다. 둘은 가까워지지만, 서머는 탐에게 자신은 진정한 사랑 따위는 믿지 않으며 애인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데이트, 또는 그와 아주 비슷한 뭔가를 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탐은 로맨티스트다. 그는 영화 <Graduation>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이 영화를 함께 보지만, 서머는 여전히 이 점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둘은 헤어지고, 서머는 회사를 그만둔다.

몇 달이 흐른 후 두 사람은 회사 직원의 결혼식에서 재회한다. 신부가 던진 부케를 서머가 받는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는다. 탐은 그녀를 파티에 초대하는데, 파티장에 나타난 서머의 손가락에는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다. 한참 동안 폐인이 되어 지내던 탐은 직장에 사표를 낸다. 이제 그는 본래 전공이었던 설계 일을 하려고 입사 인터뷰를 하고 다닌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서머에게 탐은 앞뒤가 안 맞는 그녀의 행동을 따져 묻는다. 그녀는 탐에게 자기가 틀렸더라며,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더라고 말한다.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너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어떤 감정을 느꼈다고. 탐은 이번엔 편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한다. 며칠 후 그는 인터뷰에서 매력적인 입사 지망생을 만나,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그가 묻자, 그녀는 자기 이름을 알려준다. 오텀(가을)이라고.

청춘 남성의 실연극복+성장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연상시킨다. 두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비슷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봄날은 간다>가 비장할 정도로 진지한 드라마면 <500 Days of Summer>는 경쾌한 코미디다. 뜨거운 여름 한 철을 겪듯이 청년은 사랑의 통증을 겪어낸다. 유지태와 이영애가 애시당초 어쩐지 끝까지 가기는 어려운 커플처럼 보이는 반면 고든-레빗과 데샤넬은 천생연분처럼 보인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이른바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장르적 약속이 지켜지기 마련인데, 둘이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맺어지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이 아니라 실연의 과정을 그린 영화인데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게 나로선 좀 신기하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 헤어지는 코미디가 왜 성공한 걸까? 아마도 두 가지 답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 이 영화는 솜씨 좋게 잘 만들어졌다. 두 사람이 사귀는 1년 반 동안의 기간이 순서대로 그려진 게 아니라 앞뒤를 오가면서 마치 실연한 남자의 기억 속을 복기하듯이 스케치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영화들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법칙도 없이 앞뒤를 잘라 붙인 영화는 처음 봤다. 그런데 그 느낌이 묘하다. 우리가 지나간 일을 떠올릴 때, 순서대로 기억하는 법은 없지 않던가. 이태리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가 “영화는 꿈”이라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꿈에는 시공의 법칙이 따로 없다. 어쩌면 이 영화의 편집이야말로 관객의 가슴 속에 꽁꽁 묻힌 민감한 추억의 금고를 여는 ‘인셉션(inception)’ 솜씨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이런 영화의 주 소비층인 20-30대들이 ‘운명적 사랑’에 대해 예전보다 좀 더 비관적으로 변한 게 아닐까. 80년대 말의 연애정신을 대표하는 <When Harry Met Sally>는 주인공들이 만나고 사귀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맺어지는 판타지를 품고 있다. 쿨한 척 했지만 80년대 청춘들은 아직도 운명적 사랑의 해피 엔딩을 선호했던 거다. 확실히 요즘 젊은이들은 사귀던 애인과 헤어지는 일에 훨씬 더 관대하고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쿨한 연애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는 70년대의 <Annie Hall>조차도, 이만큼 경쾌하지는 않았다. 빈정대는 풍자(sarcasm)가 칼날처럼 숨어서, 두 주인공의 연애담이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탐은 서머를 원망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성공적으로 호소하는 기특한 구석일 것이다. 어느새 나는 상대를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풍조에 공감하기에는 너무 구식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500 Days of Summer>의 한 가지 전언에는 공감할 수 있다. 외모나 분위기가 얼마나 어울리느냐는 따위로 정해지는 운명적 사랑이란 없다. 운명적 사랑은 정해지는 게 아니다. 만들어 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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