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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piracy (2001)

posted Mar 0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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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소복히 쌓인 저택으로 멋진 차들이 하나 둘 도착합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베를린 근교 반지(Wansee)의 한적한 호숫가입니다. 나치당, 총독성, 외무부, 국가개발부, 내무부 등 소속 관료들과, 폴란드, 라트비아 등 전선을 책임진 독일군 장교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사람은 친위대(SS)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장군(케네스 브라나 분)입니다. 회의장과 음식 등 의전사항을 빈틈없이 준비하는 것은 아돌프 아이히만 대령(스탠리 투치 분)이지요. (투치의 연기야말로 빈틈이 없습니다.)


    2001년 BBC와 HBO가 합작으로 만든 TV용 영화 <Conspiracy>는 회의 장면으로만 이루어진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왜 지루하지 않은지를 설명하기란 좀 어렵습니다. 지루하긴 커녕, 일단 보기 시작하면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는 영화입니다. 역량 있는 배우들이 흡인력 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이 그 한 원인입니다.(대부분의 캐스트는 영국 배우들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반지 비밀회의는 독일군부가 유태인의 대량학살을 결정한 분수령입니다. 이 날의 회의록은 참석자들에게만 배포되고 원본은 파기되었는데, 종전후 사본 한 부가 발견됨으로써 그 전말이 알려졌죠. 의장인 하이드리히 장군은 시종일관 위압적인 자세로 회의를 한 곳으로 몰아갑니다. 조심스레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에게는 교묘한 위협이 가해집니다. 독일의 핵심 권력부서를 대표하는 참석자들과 친위대장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이런 긴장감이 영화의 더욱 근본적인 흡인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 회의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반유태주의의 생생한 모습, 그 벌거벗은 추악함입니다. 서구사회는 2차대전 이후 반유태주의적 표현에 대한 자체검열의 수위를 몹시 높였기 때문에 대중매체를 통해 그 진수를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Conspiracy>는 마치 반유태주의의 전시장과도 같습니다. 긴 논란을 거쳐, 친위대장은 결국 가스실 건설을 통한 효율적인 '疏開(evacuation)'라는 극단적인 방안에 대해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를 얻어냅니다. 그나마 가장 분명하게 반대의견을 표한 사람은 저명한 법률학자인 빌헬름 스투카르트(콜린 퍼쓰 분)입니다. 그런 그조차도 법률적 자의성에 반대하는 것일 뿐, 유태인이 말살되어야 한다는 명제에는 찬동합니다. 가스실에서 나온 유태인 시신이 ‘분홍색’이 된다는 보고를 들으며 킬킬거리며 추잡한 농담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농담을 나눌 때조차 이들은 회의의 긴장감을 해치지 않습니다. - 이건 어쩌면 오로지 영국배우들만이 해낼 수 있는 연기가 아닌가 합니다. 독일인들의 실제 회의는 영화보다 훨씬 더 지루했을 것이 거의 확실하거든요.)


    이 영화는 “회의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저는 회의(會議)에 관해 근본적인 회의(懷疑)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긴 회의, 참석인원이 많은 회의일수록 해롭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들 앞에서 덜 어리석어 보이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회의는 시작하는 그 순간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하기 마련입니다. 유순한 소수의견이 살아남는 회의란 없습니다. 소수의견이 살아남으려면 강경하고 극단적으로 변해가야만 합니다. 조직 속에서 강경한 소수의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회의의 의제가 중요할수록, 그리고 의장의 권위가 강할수록 토론이 결국 수렴하는 지점은 가장 높은 사람의 견해가 되고 맙니다. (당연합니다. 그가 가장 큰 책임을 지니까요.) 회의의 결과 채택된 방침이라는 것이 높은 사람이 지나가듯 툭 던진 내용이었고, 실은 그것이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분명이 어리석은 대책이더라. 이런 상황은 실제로 흔히 발생합니다. 참석자들이 멍청이들이라서가 아니라, 회의라는 괴물이 본시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죠.


    계서적(hierarchical) 질서를 지닌 조직에서 회의는 필요악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회의가 유용한 경우는 공지사항의 통보와 같은 정보의 공유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친구들 너댓 명 모여서 행선지를 의논하는 것 같은 종류의 회의 이외의 거의 모든 회의는 무용하거나 유해하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긴 회의 시간은 생산성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공지사항은 더 효율적이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전파되는 것이 좋습니다. 공연스레 중지를 모은다는 핑계로 심각한 얼굴로 긴 이야기를 나누는 것 보다는 구성원들의 사생활에 관한 잡담을 나누는 티타임(tea time)이 더 보람 있을 지도 모릅니다. 현대조직이 결여하기 쉬운 인간적 접촉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라도 할 테니까요.


    사람들의 중지를 모으는 일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조직 속에서 그 일은 지도자의 탁월한 인내력과 자질, 구성원들의 책임감과 소신이 함께 갖추어져야만 시도나마 해볼 만 한 일입니다. 하물며 사회 전체의 중지를 모으는 일의 어려움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뉴요커>의 논설위원인 제임스 서로위키는 그의 저서 <대중의 지혜>에서 평범한 다수가 탁월한 소수보다 현명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무작위로 선정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많은 돈을 들여 현명한 사람들만 뽑아 놓은 집단보다 더 나은 문제 해결 능력이 드러낸다고 역설합니다. 단, 대중의 지혜가 힘을 발휘하려면 다양성과 독립성이라는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한답니다. 서로위키의 이러한 관찰은 실은 시장의 작동방식을 좀 다른 말로 풀어 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직감적인 선택이 독립적으로 만나는 무형의 장소, 그곳을 우리는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문제는 다양한 욕구와 아이디어들이 등가물로서 경쟁하고 선택되는 이상적인 ‘의견의 시장’을 인위적으로 만들기는 참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분업과 전문화라는 중요한 현대적 생산원리에 상충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고, 인간은 권력욕을 가진 비합리적인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주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민의에 수렴하는 정책목표를 찾아내고 그것을 이행하는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합니다. 대중의 의견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 않냐구요?


    맞습니다. 대중은 때때로 군중심리에 휩쓸려 엄청난 오류를 저지르기도 하고, 선동가의 손쉬운 먹이로 전락해 조작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지닌 선동적 속성에 신물이 난 플라톤이 옹호한 것은 귀족정치였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세월동안 동일한 정체(political entity)를 유지했던 로마의 정치체제도 원로원의 과두정과 황제의 제정이었고, 천년동안 이어진 베네치아 공화국도 10인 위원회라는 과두제 정부를 가졌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미국의 경우도, 국부인 토머스 제퍼슨이 추구한 것은 아테네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로마 원로원과 같이 책임감을 가진 소수가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형태였습니다.


    서로위키는 ‘다양성’과 ‘독립성’이라고 간단히 표현했지만, 다수의 중지를 모아 더 나은 지혜를 만들어 내기란 결코 수월치가 않습니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는 그래셤의 법칙처럼, 온순하고 합리적인 의견은 강렬하고 극단적인 의견 앞에서 점점 자취를 감춰갈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까닭은 불량화폐가 그 액면가치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매우 타당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한편, 극단적인 의견이 합리적인 의견을 구축하게 되는 까닭은 권력의지가 종종 극단적인 표현형을 가지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권력을 가졌거나 추구하는 자 앞에서 합리적인 반대의견을 자제하는 행동은 실은 상당히 ‘합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언로는 쉽사리 막히곤 하는 것입니다.


    정치란, 효율성에 조금만 치우쳐도 금새 독단과 독재에 수렴할 수 있습니다. 민주성으로 조금 기운다 싶으면 어느새 결정의 부재(indecision)라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곤 하죠.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정부라고 다 부러워할 일도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선거를 통해서 탄생한 것은 히틀러의 제3제국이라는 괴물이었습니다. 독일의 뼈아픈 경험은, 현대민주국가의 국민 개개인이 모두 예민한 도덕적 감성을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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