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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제목의 우리말 표기에 관해서

posted Dec 2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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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고 즐길 때는 외화의 제목을 어떻게 표기하느냐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글을 쓰자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군요. 우선 국내에 개봉 또는 출시되었던 외화제목들 중에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Sundance Kid)’,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처럼 멋들어진 창작들도 있죠. 그런가 하면, ‘분노의 주먹(Raging Bull)', '석양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애수(Waterloo Bridge)', '사랑과 영혼(Ghost)'처럼, 칭찬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우리 기억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미 우리 정서의 일부로 굳어진 창작제목들도 있습니다.


    다른 한 쪽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로마의 휴일(A Roman Holiday)',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 ‘이창(The Rear Window)’같은 ‘직역제목’들이 있는가 하면,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영어발음을 음가대로 옮겨 적은 제목들도 많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화제목 표기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원칙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성의가 없다거나, 저속하다거나, 오류가 있다거나 하는 문제는 - 그것이 제목을 망가뜨리는 정도가 결코 작지는 않지만 - 무원칙이 초래하는 부차적인 문제들이겠습니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본디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소통하는 일은, 번역이든 외교든 전학이든 이사든, 어려운 법입니다. 옛 영화의 추억을 더듬다 보면 멋스런 창작제목이 좋을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문제점은 이내 분명해집니다. 외화 작명의 최우선 고려사항은 판매수익에 있는데다, 이제는 개봉도 되지 않고 비데오/DVD로 출시되는 영화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다 보니, 혼란의 규모가 커지고 있고, 그 수준을 보장할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테일러 헥포드 감독의 Everybody's All-American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그 영화가 ‘사랑과 정열’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시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고마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영화를 도대체 보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여인의 음모(Brazil)', '4차원의 난장이 ET들(Time Bandits)' 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같은 멀쩡한 원제를 버리고 굳이 낮은 데로 임한 ‘프라하의 봄’같은 사례도 있죠. 제일 추한 것은, 비슷한 캐스팅의 다른 영화들의 지명도에 기대어 대여순위를 조금이라도 높여볼 얄팍한 심산으로 멀쩡한 영화를 딴 영화의 속편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데미지 2(Stealing Beauty -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툴리치가 자다가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레옹 2(Wasabi), 피아노 2(The Man who Cried), 아멜리에 2 (Le Battement d`ailes du 2000) 같은 짓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As Good As It Gets)’처럼 직역된 제목이 듣기에도 산뜻하고 의미도 잘 전달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번역이라고 손쉬운 것은 아닙니다. 'Butch Cassidy and Sundance Kid(내일을 향해 쏴라)'가 개봉직전 국내언론에 “푸줏간 캐시디와 석양의 소년”이라고 소개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본시 제목이란 상징적이고, 압축적이고, 때로 중의적인 것이어서 번역이 어렵습니다. 자명해 보이는 ‘가을의 전설(Legends of the Fall)’만 보더라도, 이 영화는 ‘...가슴아픈 사랑이 아름다운 가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어쩌구,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重意的인 의도가 있기는 해도 ‘몰락의 전설’이 원뜻에 가까울 겝니다.


    음가로 적는 방법은 어떨까요? ‘사운드 오브 뮤직’ 정도면 몰라도, ‘에브리바디 세즈 아이 러브 유’같은 한글제목은 그야말로 “넌센스”입니다. 한글이 표기할 수 있는 외래어의 음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하지 못해서, '쏘우', '돈컴노킹', '브로크백 마운틴', '웨딩 크래셔', '시티즌 독', '브이 포 벤데타'라고 적힌 제목들만 보고서 뜻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식스센스’처럼 육감이 졸지에 여섯가지 느낌이 되는 경우도 있고, 소울 오브 맨(The Soul of a man)처럼 관사는 의례 빼먹어야 하는 줄로만 아는 습관적 오류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겁니다. (관사를 들어내는 전통은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것이죠.) 그보다 훨씬 더 이상한 국적불명의 제목들도 난무할 터입니다. 알랭 들롱이 주연한 1980년 영화 Trois hommes à abattre(파멸시킬 세 남자)는 ‘트르와 좀므’도, ‘레좀므’도, 심지어 ‘옴므’도 아닌 ‘호메스’라는 제목으로 버젓이 스카라 극장에 걸렸던 눈물 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실화입니다.


    외화제목도 버젓이 우리 문화의 일부를 이룬다는 면에서 이런 식의 혼란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만일 저더러 원칙을 정해보라고 하신다면, 이런 건 어떨까요. (1) 고유명사는 음가대로 쓴다 (2) 보통명사와 문장은 번역을 원칙으로 한다 (3) 단, 숫자나 알파벳 약자는 원어로 표기한다. 가령, ‘이티’나 ‘외계인’ 대신 E.T.로 쓰고, ‘제트’가 아닌 Z(1969, Costa Gavras), ‘복수의 브이’가 아닌 ‘복수의 V(V for Vendetta)’로 하는 거죠. (4) 직역했을 때 오히려 뜻이 더 안통하거나 생경한 (Matrix - 행렬?, Inventing the Abbotts - 애보트가 발명하기?) 신조어, 말장난(pun), 중의적 표현 등은 수입/배급사에 재량을 허락하여 창작/번안제목을 붙이되, 등급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제목에 대한 토론도 거친다. 이 토론은 검열이라기 보다는, 지적재산인 저작물의 품질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싶네요.


    ‘사운드 오브 뮤직’류의 전통이 워낙 뿌리 깊다 보니, “일반적으로 이해할만 하다고 여겨지는 단어들은 음가로 표기할 수 있다”는 조건을 추가하고 싶은 유혹이 느껴지긴 합니다. 얼른 생각해보면, ‘다이하드’, ‘펄프픽션’, ‘어 퓨 굿 맨’ 같은 제목들이 그런 고민의 선상에 있겠죠. 하지만, 감시자(정부)의 규제가 개입될 여지를 최소화하는 것이 낫겠다는 점과, 영화제목에도 소설제목의 번역에 드는 정도의 노력은 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음차식 표기에는 인색하게 구는 편이 낫겠습니다. 제정신이라면, 번역소설 제목을 “백투더퓨쳐”라고 놔 둘 번역가는 아마 없을 겁니다.


    모든 사정을 감안하면, 외화제목을 한글로 표기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사정이 드러납니다. 전국민이 영어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 그런 상태는 언젠가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 이런 고민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제3국의 영화들도 세계시장에서는 영어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기 때문이죠. 다만, 그 전이라도 우리나라의 의무교육기간중 3년 이상의 영어수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외화제목 정도는 영어로 그냥 적는 쪽이, 최소한 그 음가를 한글로 표기하는 것보다는 나은 대안이 될 것입니다. 그러는 편이 분류와 검색과 의사소통에 더 유리하고, 따라서 판매와 유통과 소비에도 더 효과적일 터입니다. 그것은 아마 감상과 비평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입니다.


    상상컨대, 업계가 에로비디오 작명에 들이는 공의 반만큼만 고민해도 엉터리 제목은 많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연필부인 흑심품었네, 박하사(朴下士)랑,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라이언일병과하기, 반지하 제왕, 살흰애 추억, 털밑섬씽, 여보 보일러 댁에 아버님 놔 드려야겠어요 등등 낯뜨거운 에로물에만 유독 재치가 발휘되는 것은 아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런 기발한 제목들이 전부 패러디라는 점은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패러디에 능하고 창작에 약한 사회는 냉소적인 사회입니다.


    기호학자 소쉬르의 의미작용(시니피카시옹)에 관한 의견을 참고해 보더라도 그렇고, 제 친구 자녀들의 이름을 도맡아 작명해 주고 계시는 성명철학의 대가 마포 고모님의 의견에 따르더라도, 부르는 이름과 불리우는 대상을 잘 짝맞추어 주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김춘수 시인이 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것처럼.

 


 

■ 추신.


    영화제목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사회가 무원칙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되신다면, 국가이름의 표기를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언뜻 보면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1) 동, 서, 남, 북, 공화국, 연방, 민주 등 국명에 포함된 보통명사는 번역한다

    (2) 미국, 중국, 일본 등 전통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식 표기를 유지한다.

    (3) 그 외에는 영어식 발음표기를 따른다


    그러나, (1) 모든 보통명사가 번역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에미리트’는 ‘토후국’으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세인트 빈센트’를 ‘성 빈센트’로 번역하지 않고 ‘뉴 기니’를 ‘신 기니’로 번역하지 않으면서 ‘사우스 아프리카’를 ‘남아공’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 일인가요.


    (2) 영국, 독일은 한자식으로 쓰면서 불란서, 이태리, 서반아, 오지리, 서서, 서전 같은 다른 서유럽국가를 더 이상 그렇게 쓰지 않는다거나, 주변 4강중 유독 러시아만 노서아라고 쓰지 않는 것, 태국과 인도는 한자식으로 쓰고 비율빈과 월남은 이제 그렇게 쓰면 틀리는 것, 호주와 오스트레일리아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일은 또 어떻습니까. 예컨대 유독 영국, 독일, 태국, 인도가 우리에게 그 이웃나라들보다 그만큼 더 특수하다는 점을 누가 설명 좀 해주시렵니까.


    (3) 나머지 국가가 다 영어식으로 불리는 것도 아닙니다. 몽골과 브루나이는 각각 몽골리아와 브루나이 다루살렘이라는 꼬리를 우리 멋대로 떼어내고 부르고 있습니다. 베넹, 상토메프린시페, 코트디브와르를 불어식으로 발음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스스로 부르는 발음 그대로 불러주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멕시코는 메히꼬, 베트남은 위엣남, 독일은 도이칠란트, 스위스는 콘페데라시온 엘베티카, 알바니아는 슈티페리아, 이집트는 미스르가 되어야 합니다. 그보다 우선 중국은 쭝궈, 일본은 니뽄, 미국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가 되겠군요.


    너무 까다롭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설명할 수 있는 원칙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좀 복잡한 원칙이라도 말입니다. 언어는 생물이므로 일반인의 관행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만일 우리의 원칙이라면, 적어도 ‘불란서’, ‘서반아’, ‘오지리’, ‘월남’, ‘인디아’, ‘타일랜드’, ‘재팬’, ‘차이나’ 등의 혼용 정도는 허락되어야 옳은 것이 혹시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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