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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bo no Onna(民暴の女)

posted Oct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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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곧잘 “여태까지 본 영화중에 제일 좋았던 서너 편의 영화가 뭐였는지”를 종종 물어보곤 합니다. 제가 무슨 면접시험이라도 보듯이 사람을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에 대한 짤막한 답변은 그 대답을 한 사람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해줍니다. 한번 해 보세요.


    면접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언젠가 면접관 노릇을 하게 되었을 때, 영어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했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Red is my favorite colour.”라며 시작한 면접자가 있었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당연히 저는 그 사람을 뽑았죠. 그게 즉석에서 생각해낸 대답이라면 생각의 켜가 비범하게 창의적인 것이고, 만일 그게 미리 준비해온 답이었다면 적어도 색다르게 자기소개 머릿말을 준비할 정도의 성의를 가진 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면접관이 되면, “뭘 좋아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빼놓지 않고 물어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얘기를 해주거든요. “어느 것 중에 말인가요?”라고 되묻는 사람이 늘 제 기대보다 많기는 합니다만, 가끔은 멋진 대답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뚜렷이 아는 사람은 매력적입니다. 다만, 자의식의 바다에 동동 떠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얘기만 지껄이는 바보는 아닐 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쩌죠? 나이를 점점 먹어갈 수록, 후배들과 함께 있을 때 쉽사리 그런 바보가 되어버리곤 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은 후배들을 만날 때면 그날의 주제를 몇 가지 미리 생각해 가지고 와서는,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얘기해 보라고 시키곤 합니다. 이 선배님의 그런 행태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후배들도 없진 않지만, 혼자만 떠드는 바보가 되지 않겠다는 그분의 굳은 결의는, 겸손한 면접자의 준비된 자기소개 못지않게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바보가 되지 않는 열쇠는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입니다. 그분과의 식사시간 만큼은, 재미없는 설교를 들으며 딴생각하는 표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간이 아니라, 전에 생각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 됩니다.


    어쨌든, 좋아하는 것을 뚜렷이 아는 일이 아무리 멋지다고 해도, 제일 좋아하는 영화 한 편만을 꼽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호가 좌우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기호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덕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영화들을 꼽아보자니, 페데리코 펠리니의 Amarcord, 프란시스 코폴라의 God Father 2, 테리 길리엄의 Brazil 등 몇 편으로 좁혀지지만, 역시 한편만을 고르기는 어려운 노릇이군요.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먼저 고른 영화들을 앞지를 다른 영화들이 떠오르곤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친한 사람들에게 가장 권해주고 싶은 영화를 단 한 편만 뽑는다면, 그건 쉬운 일입니다. 이타미 주조(伊丹十三)감독의 Minbo no Onna(民暴の女).


    “民暴の女(A Gentle Art of Japanese Extortion)”는 이타미 감독의 1992년 작품입니다. 동경의 한 호텔은 중요한 국제회의를 유치하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이 지역 야쿠자들이 이 호텔을 상당히 애용한다는 점입니다. 야쿠자들이 애용한다는 뜻은, 이 호텔이 만만한 돈뜯기 대상이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호텔측은 손님의 발길이 끊어질까봐 두려워서, 야쿠자들이 소란을 부릴 태세로 뻔뻔하게 뒷돈을 요구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응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번 국제회의 만큼은 호텔의 사활이 걸린 문제. 마침내 호텔측은 야쿠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폭력범죄전문가인 여성변호사인 이노우에씨를 고용합니다. 이 영화는 만성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지를, 나아가, 용기로 맞서는 이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점을, 유머러스한 웅변으로 보여줍니다.


    겸손의 열쇠는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에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용기라는 것도 자신에 대한 잔인할 정도의 엄격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되새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겸손과 용기는 한 배에서 나온 남매 같은 덕목들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섬세하고 내성적인 사람은 겸손하고, 직선적이고 활달한 사람은 용감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가식어린 면종복배나 허장성세를 한 꺼풀만 걷어내고 보면, 겸손과 용기는 결국 한가지입니다.


    이타미 주조는 느아르라든지 멜로 같은 특정 장르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로 10억엔 이상의 배급수익을 올림으로써, 일본 최고 흥행감독들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서부극과 일본 음식문화의 만남을 기가 막히게 그려낸 Tampopo, 세무사들의 활약을 그린 マルサの女(Taxing Woman)과 그 속편, 그의 유작이 되고 만 Supa no onna(1996), Marutai no onna(1997) 등이 그의 작품입니다. 특히 국수가게를 개업하려는 아줌마가 맛의 비결을 찾아 헤매는 줄거리를 담은 영화 Tampopo는 국내에도 많은 팬들이 있고, 이후 많은 영화들이 그 흉내를 내기도 했었습니다.


    영화배우이자 이타미 감독의 아내인 노부코 미야모토(宮本信子)는 그의 영화에 어김 없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단 아내 사랑이 각별했던 게 아니었을까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흥종교집단과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Marutai no onna를 촬영중이던 그는, 어느 모텔에서 그가 젊은 여성과 함께 나오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주간지의 가십기사를 접하고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고 투신자살해버렸지요.


    자살로 결백을 증명한다는 식의 문화는 우리 마음의 결에는 잘 와 닿지 않는, 대단히 일본적인 정서의 발로인 것처럼 보입니다. 도덕적 결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그의 그런 정서는 ‘정의감’이라는 형태로 그의 영화에 녹아있습니다. 그가 Minbo no onna에서 그려내고 있는 야쿠자의 모습은, 단언하건데 지금껏 어느 매체에 의해 묘사된 것보다 야비하고, 치사하고, 사실적입니다. 마리오 푸조가 God Father를 집필한 후 마피아로부터 당했듯이 이타미 또한 야쿠자의 협박에 시달렸고, 기어이 자신의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칼에 찔렸듯이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었습니다.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 흔치 않은 세상이 되다 보니, 용기를 가져야 할 대목에서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자기 가슴 속의 심연으로부터 용기를 길어 올려야만 하는 순간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영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불의의 시험 앞에서 우리는 딱 한번만이라고, 사소한 일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세상 사는 이치가 다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평소에는 비겁으로 일관하는 소시민일지라도, 생각지 않던 인생의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를 영원히 경멸하지 않으려면 도저히 눈감아줄 수 없는” 어떤 불의와 맞닥뜨리기 마련입니다. 불행히도.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라는 영화가 있죠. 혹시 우주에서 미아가 되는 경우 도움을 주기 위한 안내서가 이 영화에 등장합니다. 우주에서 미아가 될 확률 따위에 비해서, 우리가 도저한 불의와 폭력과 협박과 거짓 앞에서 순결한 용기를 끌어올려야 할 경우를 만날 확률은 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겠습니다. Minbono Onna는 부조리한 세상 속을 여행하기 위한 용기의 가이드북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뜻에서, 친애하는 벗들에게 나는 이 한편의 영화를 추천합니다. 피해갈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이 영화가 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용기와 격려의 메시지를 벗들에게도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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