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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posted Sep 1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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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렉 자만 감독의 Blue라는 제목의 영화는, 79분 동안 상영되는 짙푸른 단색 화면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푸른 화면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이런 저런 '소리'가 들려오게끔 만든 영화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쓰레기'라는 혹평에서부터 '다시 만들 수 없는 걸작'이라는 찬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 존재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찬사는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죽음을 앞둔 감독이 병상에서 죽어가면서 만든 이 영화는 예술가가 죽음에 대해 언급한 가장 도발적인 내용이다. 관객은 푸른 화면을 외면하려 하지만, 결국은 시선을 그 지긋지긋한 푸르름에 빼앗기고 만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예술로 보아야 하는 걸까요? 영화 Blue는 영화예술의 평균치보다는 오히려 - 백남준의 작품처럼 - 미술에 수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추상적 전위대가 주류의 지위를 가장 확고하게 누리는 분야가 미술이죠. 저는 그림을 좋아하지만, 미술의 그런 전위적 사정 때문에 자주 곤혹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피카소에서 잭슨 폴록 정도 까지는 작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요셉 보이스처럼 변기를 벽에 걸어두거나 빈 캔버스를 내걸고 제목을 붙이는 작태는 뭐란 말입니까! 스스로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은밀히 저는 뭐가 미술이고 뭐가 미술이 아닌지 저만의 개인적인 기준을 정해버렸습니다. 살짝 말씀드릴 테니 미술가들에게 일러바치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美術'이라는 이름에 들어맞는 것만 미술로 대하기로 했습니다. 미술(Fine Art)은, 첫째 아름다워야(Fine) 합니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더라도 감동을 불러오는 아름다움이 없다면 미술이 아니라고 결정해 버린 거죠. 둘째, 미술은 術(Art)이니까, 장기간의 반복적인 노력으로 익힌 기술(craftsmanship)의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우연의 결과이거나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거라면 미술로 치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렇게 정리하니 한결 편한 마음으로 미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더군요.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읽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반가왔던 적이 있습니다. 미술 평론가로서 보다는 "가족", "동물 이야기" 등 독특한 유머 소설로 이름난 그는, 현대미술이 작가와 평론가들의 협잡에 농락당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추상예술을 뒷받침하는 튼튼한 논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사실, 인류의 모든 사상적 모험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의 각주에 불과합니다. 자연계를 되도록 충실히 관찰하고 모방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뿌리가 같습니다. 반면, 현실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관념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플라톤의 사상에서 흘러나온 지류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적인 예술관의 연장선상에 선다면, 공화국에서 예술가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관념을 그리는데 주력하는 미술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모순입니다. 추상미술가들은 현대가 부조리하고 상스럽고 무가치하므로 그런 시대의 추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고발함으로써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도를 벗어난 추상미술은 현대를 고발하기 이전에, 미술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거창한 문제의식으로 현대사회의 천박한 면을 고발한다고 주장하는 미술작품들을 대하면, 그 작품이 주장하는 커다란 주제보다는 오히려 자기 존재방식에 고민하는 미술의 딱한 모습이 보입니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보다는 오히려 냇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와 싸우던 이솝의 강아지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거죠. 백보 양보해서 현대미술이 주장하는 것처럼 극단적인 추상화가 미술의 본질적인 표현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과연 그토록 상스럽고 천박하고 부조리하고 기형적이고 무가치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현대사회는 천박하죠. 하지만, 인간이 모여 하는 사회가 언제 합리적이고 고상했던 적이 있단 말입니까? 고대건 현대건, 고상함과 합리성은 그것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그런 노력을 하는 동안만 지켜지곤 했던 것이 아니던가요. 영화 속에서 Forest Gump가 "Stupid is what stupid does"라고 했듯이, 미술도 스스로 추해지려는 만큼만 추해질 수 있는 거겠죠. 현대가 부조리하다는 상투적인 명제는 논술고사의 상식처럼 되었습니다만, 현대적 부조리는 적어도 인류가 여태까지 이루어 놓은 온갖 위대한 업적들과 패키지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저는 귀족으로 태어난대도 100년 전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거의 항상 자의적으로 행사되고,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시피 하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도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현대인은 아마 없을 겁니다. 우리가 현대를 비판할 때, 이점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노력은 피땀 어린 노력과 진지한 희생을 통해 이뤄 온 것이고, 그것은 뭔가를 창조하고 건설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만들고 가꾸고 심는 사람과 부수고 헐뜯고 깎아내리는 사람. 저는 예술가들이 모쪼록 전자이기를 바랍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결실을 - 작품의 유통구조와 명성의 확대생산과정을 포함해서 - 다 누리는 작가들이 진보의 부산물인 부조리에만 확대경을 들이대고 그것이 곧 "현대"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는 일은, 피로합니다. 줘도 줘도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처럼.


    거기서 다시 백보 양보해서, 설령 현대사회가 추하기만 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저는 그것을 충실히 드러내는 것이 미술의 임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술이 스스로 천박해짐으로서 현대사회의 천박함을 더는 일에 기여할 것은 없겠죠. 고발은 반성을 촉구하는 범위 내에서만 유용할 터인데, 그림은 글자보다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습니다. 주의주장으로 가득찬 그림은, 마치 선거유세장의 연단에 오른 축구선수를 연상시킵니다. 그림이 주는 감동의 척도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이지, "얼마나 정확히 현실을 반영하느냐"는 것처럼 저널리즘적인 요소는 아닐 터입니다.


    미술이 뭔가를 고발하려 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상자들을 얕잡아 보고 한 수 가르치려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미술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아름다움(美)을 오로지 숙련된 장인정신(術)으로만 말합니다. 만일 미술이 시대의 추함을 드러내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중이라면 미술에는 미래가 있을까요? 우리가 현대미술을 접하고 당혹하지 않으려면 미술평론가들만큼 배워야한다면, 그 배움은 교조화가 아닐까요? 한 자락 철학적 사고를 가르침 받기 위해 미술작품을 찾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만 오롯이 남아 추종하는 예술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풍경이나 인물을 '베끼는데' 연연하는 장르보다 과연 얼마나 더 값어치가 있는 걸까요? 현대미술 평론가는 작품에 값을 매기는 달콤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논의에서 떳떳하기 어렵습니다. 그림이 소수의 수집가들 사이에만 거래되던 시절로부터, 평론가가 거간하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시절로 바뀌었다는 것만큼, 더 여실히 현대적 부조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지 않은가요?


    영화 Blue는 진지한 작가의 진지한 시도임에는 틀림없지만, 제가 좋아하기에는 실험적인 강박관념을 너무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일찍이 阮堂 김정희는 寫蘭有法不可無法亦不可 (난초를 그리는 데 법도가 따로 있어서는 안되지만, 법도가 없어서도 안된다)라고 했었습니다. 허허, 그의 塞寒圖는 그래서 그런 기묘한 감동을 주나 봅니다. 유법과 무법, 손재주(craftsmanship)와 철학(philosophy) 사이의 칼처럼 선 날 위를 걷고자 했던 그의 부단한 노력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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