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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inted Veil

posted Jun 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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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는 1920년대 영국입니다. 유복한 가정의 맏딸인 키티는 동생이 먼저 결혼하자 퇴물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숫기 없는 병균학자 월터 페인 박사가 갑자기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을 합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청혼에 응하지만 그에 대한 사랑 따위는 없습니다. 결혼 직후, 페인 부부는 월터의 임지인 중국으로 함께 부임합니다. 키티는 매력적이지만, 행동거지가 신중한 여성은 아닙니다. 중국에서 그녀가 유부남 찰리 타운젠트와 바람이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페인 박사는 이 사실을 알게 되는데, 내성적인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충격을 받고 자기파괴적인 결정을 합니다. 콜레라가 창궐하는 내륙지방으로 전근을 자원한 것이죠. 그는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합니다. 자기를 따라 시골로 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불륜을 사유로 이혼을 청구하겠노라고.


    그녀는 타운젠트의 애정을 믿고 남편에게 큰소리를 치지만, 남편은 그녀를 비웃습니다. 행여 타운젠트가 이혼하고 키티와 결합하겠다면 조용히 헤어져 주겠노라고. 타운젠트를 찾아간 키티는 남편이 옳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녀에겐 이제 남편을 따라가는 선택밖에 남지 않습니다. 당시 중국은 민족주의 열풍 속에서 외국인에 대한 적대심이 치솟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역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며, 키티는 전에 보려고 애쓰지 않았던, 그러므로 당연히 보지 못했던 남편의 훌륭한 점을 발견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들이 파괴적으로 자초한 고난 속에서 두 부부는 서로에게서, 또 스스로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 결말은 비극적입니다만.


    The Painted Veil은 영국 문호 서머세트 모옴의 1925년 소설입니다. 원작은 못 읽어봤습니다만, 모옴은 작품 속에 “반어적 감각과 영국적 위트로 사랑, 결혼, 간통, 제국주의, 선행, 종교와 구원 등 무거운 주제를 한꺼번에 잘 담아내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군요. 이 대목에서 낡은 우스개가 생각납니다. 어느 학교의 작문시험 문제가 “종교, 왕실, 성적 일탈, 미스테리 등이 포함된 글을 지으라”는 것이었답니다. 다들 끙끙대는데 한 학생이 다음처럼 써 놓고 유유히 나가더랍니다. “하느님 맙소사, 공주님이 임신하셨다. 범인은 누굴까?” 교수가 그 학생을 불러 준엄히 꾸짖고 “SF적 요소를 가미해서 작품을 보완하라”고 시켰습니다. 학생은 세 글자만 더 쓰고는 답안지를 다시 제출했답니다. “하느님 맙소사, 별나라 공주님이 임신하셨다! 범인은 누구인가?” 아무렴, 한 줄거리 속에 많은 이야기를 녹여내는 일은 대문호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겠죠. 그걸 영화로 잘 만들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요.


    1934년 그레타 가르보가 주연했던 The Painted Veil은 어딘가 문제학생의 답안지 같은 면이 있었습니다. 배우들이 프레임 안에 서로 가깝게 서야 했기 때문에 지금 보면 굉장히 어색하다는 등 30년대 영화문법 따위에 뒤늦게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가 맹숭맹숭한 최대 원인은 그레타 가르보라는 배우였던 것 같습니다. 주인공 키티는 걷잡을 수 없이 허영심이 많고, 종잡을 수 없이 이기적인데다, 감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워서 책잡을 일이 많은 여자입니다. 가히 여신급에 해당하는 가르보를 데려다 이런 역할을 맡기면서, 관객들에게 그녀가 ‘동생이 먼저 시집갔다고 아무 남자한테나 덥석 시집갈 법한 여자’라는 점을 납득시키기는 애당초 어려웠을 것입니다.


    1957년에도 Seventh Sin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던 The Painted Veil은 존 커란 감독의 손으로 2006년에 다시금 빚어집니다. 주연을 맡고 제작에도 참여한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와츠는 중국 자본을 참여시키고 촬영도 중국 현지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중국 영화사 로고로 시작되죠. 중국 상영때 제목은 面紗였습니다. 모옴은 “살아있는 자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저 채색된 베일을 걷어내지 말라. 비록 거기 비현실적인 형상들이 그려져 있더라도(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though unreal shapes be pictured there)”라는 쉘리의 싯구에서 소설제목을 따왔습니다. ‘인생이라는 채색된 베일’을 면사포라고 번역해 놓으면, 삶 전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신혼 이야기로 졸아들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으로는 적당한 번역일지도 모릅니다. 2006년 영화는 1934년 영화만큼 원작의 결말을 터무니없이 상투적인 해피엔딩으로 바꿔놓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설보다는 달짝지근하다니까 말이죠.


    에드워드 노튼은 90년대 헐리우드가 건져올린 가장 큰 수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꽃미남 아니면 터프가이들이 대부분인 요즘 미국 남자배우들 틈에서 에드워드 노튼과 숀 펜 정도를 제외하면 더스틴 호프먼이나 알 파치노 같은 예전 배우들에 필적할 존재감을 지닌 연기자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 노튼과 호주 출신 여배우 나오미 와츠 두 사람의 연기는 진한 감동을 줍니다. 모자라지 않는 연기도 어렵지만, 넘치지 않게 연기하기도 어려울 터인데, 30대 후반에 불과한 배우들이 표정으로 대사의 여백을 채우는 연기를 저토록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걸 보고 탄복했습니다.


    나오미 와츠는 키티 역할에 딱 알맞을 만큼 예쁩니다. 자칫하면 장식품 같은 금발 아가씨 역할 단골배우로 전락할 수도 있을 외모를 가진 그녀는, 현명하게도 데뷔 이후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망가지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성장했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Mulholland Dr.에서는 수상쩍은 상대에게 빠져드는 레스비언 역할을 맡았었고, 21 Grams에서는 가혹한 삶에 지친 여자의 절망을 “생얼”로 실감나게 보여줬지요. 그 덕에 그녀는 킹콩이 사모하는 금발 여배우 역할을 맡아도 인형 같은 가녀림이 아니라 생동감 있는 ‘사람냄새’를 풍길 수 있었습니다.


    The Painted Veil에서 나오미는, 사랑 없는 결혼에 뛰어드는 철부지,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허영심 많은 신혼주부, 남편의 경멸에 치를 떠는 천박한 불륜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성숙한 어른의 역할을 다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관객들이 키티라는 주인공을 미워하지 않고 그녀의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라스트신, 세월이 흐른 뒤 길에서 우연히 타운젠트와 재회했을 때 그녀가 보여준 무심한 표정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아들 ‘월터’가 저 아저씨는 누구냐고 묻자,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답하는 그녀. 어떤 사랑은 상대를 떠나보내고서야 완성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의 감정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입니다. 신체가 거부하기 어려운 호르몬의 화학적 명령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벌도 하고 나비도 하는 그런 사랑이죠.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를 얼마만큼 안다고 첫눈에 반한 것이겠습니까? 숭고하달 것까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 낮은 육욕이라고 눈을 흘길 필요도 없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없이 맺어질 수 있는 짝은 드물 테니까요. 그런가 하면, 익숙함도 사랑입니다. 그리움이라고 불러도 좋겠죠. 함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버린 결과, 상대방이 없으면 불편하고, 괴롭고, 아쉬운 ‘비정상적’ 상태에 빠지는 감정 말입니다. 발에 잘 맞는 낡은 구두같이, 특별히 아깝고 귀중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도 이 또한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은 약속(commitment)이기도 합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건만, 상대방을 짝으로 소중히 여기겠다고 공약하는 것이죠. 스스로에게, 또 상대방에게. 이런 얘기를 어린 후배들에게 해주면, 그건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처량한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더군요. 하지만, 서로에게 필요하고 고마운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힘, 결혼이라는 농사에서 보람이라는 과실을 가꾸는 주원료는 바로 이 세 번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Painted Veil에서 페인 부부가 그들의 삶 전체로 증명해 주듯이 말입니다.



추신


1. 그레타 가르보의 1934년 The Painted Veil은 2006년에 리메이크된 영화와는 판이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르보가 1929년에 주연한 Wild Orchids와 더 닮아 있지요. Wild Orchids에서 그녀는 남편을 따라 자바섬으로 왔다가, 자신에게 반해 끊임없이 “들이대는” 자바의 왕자의 유혹에 넘어가고, 파국을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과거 서구인들이 자바섬을 얼마나 낭만적으로 상상했는지 엿볼 수 있어 재미있습니다. 스크린 속에서 인도네시아는 고질라나 킹콩 같은 괴물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취미삼아 호랑이 사냥을 다니면서 그레타 가르보를 유혹하는 멀쑥한 왕자가 사는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2. 나오미 와츠는 뻔뻔한 유부남 타운젠트 역을 맡았던 리브 슈라이버와 실제 연인사이이고, 그녀는 2007년 여름에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3. 이 영화에는 뜻밖의 반가운 얼굴들도 나옵니다. 무간도의 형사반장 왕초우생이 유대령 역할을 맡았습니다. 키티가 월터를 보는 시각이 점점 바뀌는 것과 동시진행형으로, 왕초우생은 중국인의 대표격인 유대령이 월터를 점차 높이 평가하게 되는 중요한 대목을 연기합니다.


4. 60년대 영국 TV 액션 시리즈물인 Avengers에서 섹시한 여자 첩보원 역할을 맡아 화면을 누비던 다이아나 리그가 수녀원장으로 출연합니다. (Avengers의 후편 격인 New Avengers는 70년대에 ‘전격제로작전’이라는 난해한 제목으로 국내 TV에서도 방영되었죠.) 다이아나 리그는 저의 뇌리에 아직도 생기발랄한 첩보원의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그런 그녀가 인생을 달관한 수녀원장으로 나와서 ‘나와 하나님 사이에도 처음 같은 열정은 이제 없고, 애정이 식은 부부관계처럼 서로를 당연시하게 되어버렸다’고 토로하는 장면은 복잡한 감상에 젖게 만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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