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y

posted Feb 2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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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신학자였던 에우헤메루스는 신화가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다고 여겼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인구에 회자되면서 덧칠된 것이 신화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실재하는 사건이나 인물이 신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믿는 신화관을 Euhemerism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시각으로 신화를 보는 것은 섣부른 역사왜곡의 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거니와, 불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접근한 슐리먼 같은 이가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해내는 고고학적 쾌거가 이따금 일어난다는 점만 뺀다면.


    영화 Troy(2004)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일리어드의 줄거리로부터 신들을 아예 따돌렸습니다.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면 대략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호머의 시를 충실히 극화하는 방법입니다. 고전에 의존하므로 안전한 방식이지만, 모르긴 해도 지루한 영화가 될 겁니다. 둘째, 철저한 고증에 입각한 사극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트로이 전쟁의 경우 애로사항은, 영화의 근간이 되어 줄만큼 확실하게 고증된 재료가 너무 빈약하다는 점입니다. 셋째, 트로이 전쟁사가 고대부터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수정되고 있는 역사적 창작물이라고 보고, 일종의 ‘이야기 이어 만들기’에 참여하는 길이죠.


    일단 일리어드는 덮어두기로 작심한 영화 Troy는, 나름대로 현존하는 학설과 고증에 충실하려고 애쓴 흔적을 보여줍니다. 上古의 사건을 영화로 만들자면 어차피 상상력이 메워야 할 공간이 크므로 고증의 철저함만을 잣대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이 영화는 (적어도 의도적 왜곡으로 가득한 리들리 스콧의 Gladiator보다는) 남겨진 기록에 충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영화로 만드는 제작자들이 부딪히는 곤란한 문제 중 하나는 헬렌의 캐스팅입니다. 고대 전유럽에서 이의 없이 최고의 미녀로 인정되던 얼굴,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 그리스가 10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뛰어들 만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얼굴, 이른바 “천 척의 배를 띄운 얼굴(face that launched a thousand ships)”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roy 전쟁에 관한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 지더라도 미국 여배우가 맡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줄곧 지중해 근처에서 미녀 배우를 찾아다 기용했죠.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Helen of Troy에서도 영국 배우인 시에나 귈로리가 헬렌 역을 맡았었습니다. 시에나는 제가 좋아하는 여배우지만 냉정히 말해서 헬렌 감은 못되었습니다.


    영화 Troy에서는, 독일태생 모델 출신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중이던 다이안 크루거가 헬렌으로 발탁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다이안은 막 삼십줄에 접어든, 얇은 입술에 섬세한 미모를 지닌 배우인데 모델 출신으로는 그만하면 썩 괜찮은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녀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애인 역으로 National Treasure라는 블록버스터에도 출연했죠. 다이안 하이드크루에거라는 본명으로 모델 노릇을 하던 시절의 그녀는 광활한 이마와 뾰족한 하관을 가진 깡마른 소녀였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얼굴에 좀 살이 오르더니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신하듯 몰라보게 예뻐진 여배우입니다. 어차피 헬렌도 누군가가 역할을 맡아야 한다면, 저로선 그녀 정도면 만족입니다.


    The Lord of the Rings에서 날렵한 엘프 레골라스였던 올란도 블룸은 연약한 로맨티스트 파리스 역할에 맞춘 듯이 어울립니다. 지상최고 미녀의 마음을 대번에 앗아갈만큼 매력적이고 섬세하지만, 살육의 전장에서는 목숨을 구걸해야만 하는 처지인 트로이의 왕자, 그 슬픈 인간의 모습을 블룸은 모순되어 보이거나 너무 역겨워 보이지도 않게 연기해 냈습니다.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브래드 피트는 좋은 배우입니다. 그는 불사신 아킬레스의 활약상을 마치 동양신화의 치우(蚩尤)에나 비교될 법한 파괴력으로 그려냅니다. 각개전투 장면에서의 안무가 하도 아름다워서 이 영화의 무술감독이 누구였는지 궁금해 지더군요. 단지 육체적인 활력과 놀라운 운동신경만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노를 담은 반항아의 눈빛을 브래드 피트보다 더 잘 쏟아낼 수 있는 배우는 당대에는 없는듯 합니다.


    과거 제임스 딘은 원숙해진 이미지를 보여줄 기회를 갖지 못하고 요절하는 바람에 반항아를 대신 일컫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리즈 테일러를 생각하면, 만일 그도 장수했다면 전설이 될 수는 없었을 게 확실합니다.) 브래드 피트와 비교해 보자면, 제임스 딘은 좀 덜 폭발적이고 좀 더 음울합니다. Waterfront에서의 말론 브란도도 액체 나이트로글리세린처럼 건드리면 탁 터질 것 같은 모습이지만 어딘지 좀 작위적인 구석이 있죠. 저는 브래드 피트와 리버 피닉스를 6:4의 비율 정도로 섞어서 잘 흔들면 제임스 딘과 상당히 흡사한 분위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휘닉스군에게도 섬세한 우울함이 있었거든요. 물론, 제임스 딘을 감싸고 있는 신화적 분위기야 재생할 길이 없겠지만 말이죠.

 


 

    또다른 반항아 닉 놀테를 스타덤에 올려준 것은, 어윈 쇼의 소설을 극화한 70년대 TV 미니시리즈 Rich Man, Poor Man이었습니다. 헐리우드 현역 배우들 중 반항아의 이미지로 브래드 피트를 능가할 사람이 만일 있다면 닉 놀테 정도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그가 젊었을 때 이야기죠. 나이 들어서까지 카리스마로 승화되지 않은 반항과 폭발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주책에 해당하겠습니다. Rich Man, Poor Man의 톰 죠다시 역할로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던 닉 놀테는 터프 가이의 이미지를 벗는 데 상당한 세월이 걸렸습니다. 형 루디 역을 맡았던 피터 스트라우스도 훌륭했습니다. 웬일인지 그는 그럴듯한 영화에는 출연하지 못하고 TV 연속극 주변만 주로 맴돌았는데, 참 아까운 배우라고 봅니다.


    국내 TV에 야망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던 이 미국 드라마는 김수현씨의 손을 거쳐 “사랑과 야망”으로 번안되었습니다. 거기서 반항아 태수 역할을 맡았던 이덕화가 보여준 연기는 감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즘 어깨에 힘주고 덤비는 터프가이들은 물론이려니와, 맨발의 청춘의 신성일도 훌쩍 뛰어넘는 호연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마음 좀 잡고 조용히 살아보려는 태수에게 동네 양아치들이 당구장에서 자꾸 시비를 걸자, 참다못한 그가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하면서 큐대를 콱 꺾는 장면은, 뭐랄까요, 최근에 리메이크한 사랑과 야망에 나오는 이훈 같은 배우가 흉내 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습니다.


    Troy의 또다른 영웅 헥토르 역할은, 남자 속옷광고의 모델처럼 생긴 호주출신 배우 에릭 바나가 맡았습니다. 그는 단아하고 절제된 연기력으로 헥토르를 멋지게 재해석했고, 영웅의 명성에 값하는 우아함을 덧입혔습니다. 그가 Hulk에서 브루스 배너 박사 역할로 캐스팅 되었던 이유는, 안으로 잘 갈무리된 인품을 가진 것 같은 그의 인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녹색 괴물과 잘 대비되니까.


    분노를 갈무리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남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화 Troy에서 헥토르는 조국 트로이를 위해 싸우고, 아킬레스는 자신을 위해 싸우죠. 그리스의 트로이 침공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면 그 목적은 헬렌을 되찾기 위한 것 따위는 아니었을 겁니다. 남자들은 단순하지만, 전쟁은 그렇게까지 단순하지 않거든요.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그리스가 트로이를 때때로 약탈한 것이 사실의 전말에 더 가까울 거라고 믿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호머라는 대 시인에 의해 터무니없이 미화되고 윤색되기는 했지만, 고대에 10년간 지속적으로 장거리 원정을 수행할 수 있는 자원을 보유한 나라는 아마 없었을 테죠.


    헥토르도 죽고, 아킬레스도 죽고, 오딧에우스가 속임수를 동원해서 만든 목마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결말은 묘한 여운을 줍니다. 교훈적이라기 보다는 냉소적이라는 느낌의 결말입니다. 일리어드의 후편을 오딧세이로 이어, 오딧세우스에게 유랑의 형벌을 내린 것이 호머에게는 일종의 시적 정의(poetic justice)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