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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under the stairs

posted Feb 2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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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서 전직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이 열렸습니다. 강사분은 강의중에 수강생들이 졸까봐 그랬던지 객석을 향해, 저기 저 여자분, 하면서 직원 한 명을 지목했습니다. “남자 동료직원과 단둘이 사무실에 남아 잔무를 정리하는데, 그가 슬슬 다가오더니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올리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아마 후배뻘로 짐작되는 그 여자 직원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죠.” 강사가 할 말을 잃고, 직원들이 웃음을 터뜨렸죠. 하지만 생각할수록, 성희롱을 그보다 더 명료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저는 ‘컬트영화’라는 표현을 들으면, 그날 강당에서 들었던 당찬 여직원의 대답이 떠오릅니다.


    컬트는 수용미학적인 현상이므로, 어느 영화가 컬트영화인지를 제작자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기존의 컬트영화를 흉내내고, 아무리 기괴하게 만들어도, 관객들이 숭배하지 않는 한 컬트영화는 생길 수 없습니다. Casa Blanca가 왜 컬트영화인지 설명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왜 똑같은 행동이 어떨 때는 성희롱이 되고 어떨 때는 아닌지 설명하려는 것처럼 헛수고를 하는 셈입니다. 관객들이 미친 듯이 좋아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는 거죠. 컬트영화에 대한 어떤 거창한 설명도 결국 불필요한 동어반복(tautology)이 되고 맙니다. 마치, 아슬아슬한 행동을 해도 용서받는 남자는 상대 여성이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는 설명처럼.


    예술작품은 그것을 수요하는 청중/독자/감상자로부터 완전히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조지 오웰의 1947년에 쓴 ‘Lear, Tolstoy, and the Fool’이라는 짧은 수필에서, 셰익스피어를 폄하했던 대문호 톨스토이의 1093년 팜플렛을 통렬하게 논박했습니다. 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실적으로 셰익스피어나 다른 작가가 ‘훌륭하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나 논리는 없다. 궁극적으로 작품의 우수성에 관한 시험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없는데, 그 자체도 다수의 견해의 표시일 뿐이다.” 좋은 작품이란 결국 오래동안 ‘살아남는’ 작품이라는 생각에 저는 공감합니다. 그러나 창작예술의 장르를 수요자의 반응에 따라 구분하는 일은 (또는 그런 구분은) 큰 뜻을 지니기 어렵습니다. 어떤 작품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 자체가 작품에 대한 수요자의 반응이 필연적으로 ‘변한다’는 점을 가리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컬트영화는 이제 없습니다. ‘컬트스러운’ 영화들이 있을 뿐이죠. 컬트영화는 있었습니다. 70년대 미국의 심야극장에서. 그 뿐이었습니다. 컬트영화를 설명하려면 누구나 Rocky Horror Picture Show 예를 듭니다. 이 영화의 예를 드는 것은 필요할 뿐 아니라, 실은 충분한 것이기도 합니다. 관객의 폭발적 반응이라는 면에서 여기에 비견될 다른 컬트는 없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싸구려 뮤지컬과 징그러운 동성애적 도착이 난무합니다. 도착적 동성애 분위기는 “캠프(Camp)”라고 불리는데, 작가 수잔 손탁은 ‘Camp적인 것들은 이상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했다죠. 지금 봐도 참 야릇한 이 영화는 이런 영화에 대한 커다란 수요가 - 따라서 시장이 -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미국 서점의 영화 코너에는 ‘Rocky Horror Picture Show 관람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관객용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어느 대목에서 뭐라고 화답하고, 언제 쌀이나 물 따위를 무대로 던지라는 따위의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만약 이 영화를 그런 예식에 맞춰 신나게 관람했더라도, 그 예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컬트 현상의 관광객 노릇을 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컬트적 숭배의 대상이 된 영화들은 Casa Blanca, Night of the Living Dead, Eraser Head 등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심야극장에 모여 독특한 제의를 통해 유대감을 느끼던 유행이 지나가버린 거죠. 70년대 미국 청년들은 자기 선배들이 우드스톡 벌판에서 즐겼던 디오니소스적 축제의 장소를 어둑한 극장 속에서 발견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 심야축제의 도구로 선택된 영화들은 버려진 영화,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화, 주류영화로 히트를 했더라도 익살스럽게 거꾸로 읽히고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영화들이었습니다.


    괴팍하고 난해하다고 다 컬트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브뉘엘, 로셀리니, 파졸리니 같이 의도적으로 진지하거나 현학적인 감독들의 작품은 컬트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괴팍한 예술성을 제도권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은 작품들도 마찬가지였죠. 80년대 이후에도 괴팍한 영화들은 넘쳐났지만, 심야극장의 축제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습니다. 가정용 비디오의 보급도 그 원인이겠습니다만, 그보다도, 워낙 이런 유난스런 짓거리는 여러 사람이 따라하게 되면 신명이 나지 않는 법이죠. 장사가 된다 싶으니까 많은 제작자들이 ‘컬트’라고 상표를 붙인 영화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던 것도 컬트현상을 잠재우는데 기여했는지도 모릅니다. 온갖 포스트모던 학자들이 정색을 하고 난삽한 용어로 컬트 현상을 설명하려고 나선 것도 그 비슷한 효과를 가져왔지 싶네요. 제딴에는 일탈이라고 묘한 짓을 하는 아이에게, 어른들이 귀엽고 신기하다고 박수치며 멍석을 깔아주는 것처럼 확실하게 아이를 머쓱하고 시들하게 만드는 일은 또 없을 테니까요.


    우리나라에는 컬트적 영화감상 풍토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컬트영화들은 차라리, 당국의 검열을 피해서 후미진 장소에서 상영되어야 했던 이름난 작품들, 수고스레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비디오를 돌려 보던 영화팬들의 수첩에 적인, 그런 영화들의 목록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영화를 ‘감상하는’ 일에 그다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영화를 ‘소비하는’ 데에는, 더 이상 힘들여 찾아봐야 할 금지된 영화들이 없다는 사정도 있는 것입니다.


    Blue Velvet(86), Delicatissen(91), Barton Fink(90)처럼 기성복 상표같이 ‘컬트’의 칭호를 부여받은 영화들은, 영화산업의 놀라운 적응능력의 징표들입니다. 80년대부터 ‘컬트스러운’ 영화들은 공장의 라인에서 찍어내듯이 대량생산됩니다. 어떤 건 좀 낫고 어떤 건 형편없고 그렇죠. 제가 이런 영화들을 각별히 애호하는 건 아니지만, 표현의 폭이 넓어지는 건 나쁜 일은 아닐 터입니다. 가끔은 야릇한 음식이 구미에 당기듯이, 독특하게 ‘튀는’ 영화를 보며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짓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죠. 상투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더라도, 상투성에 매몰되느냐 아니면 그 위에 군림하면서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영화의 평점은 갈릴 수 있습니다.


    Nightmere on Elm Street으로 상업성을 인정받은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The People Under the Stair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Eraser Head나 Barton Fink보다 더 재미있게 봤습니다. ‘Fool’이라는 별명을 가진 열세살짜리 꼬마가 누나 남자친구를 따라 사악한 집주인이 사는 집을 털러 들어갔다가 그만 혼자 그 속에 갇히고 맙니다. 집주인들은 남매지간이고, 그 집은 나올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철옹성입니다. 그 지하에는, 마치 낡은 집에 쥐들이 살듯이 갇혀 지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변태적인 집주인 남매가 아이들을 납치해서 지하에 가둬 두는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Fool의 활약으로 아이들이 이기고, 닫혔던 집은 열립니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주인공은, 갇혀 지내는 아이들에게 도망다닐 공간을 허락하는 ‘집’입니다. 크레이븐 감독은 이 영화에서, 폐쇄공포적인 좁은 집 안에 기묘한 환상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재능을 보여줍니다.


    저는 감히 ‘이제 컬트영화는 없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컬트’가 사라졌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어울려 자신들만의 일탈의 祭儀를 열고 싶어 하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야극장의 컬트가 사라진 것은, 인터넷이 발달하는 시점과 겹칩니다. 21세기 컬트의 현장은 컴컴한 극장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제의 손길이 함부로 미치지 못하는 싸이버 스페이스에 있죠. 그것은 각종 게시판과 UCC 속에 있고, 네티즌이라는 익명의 집단에 의해 구현됩니다. 이메일과 SMS의 문화는 싸이버 스페이스 속에만 머물지 않고, 플래시몹이라든지 월드컵 거리 응원이나 꼭지점 댄스 같은 현장감 있는 컬트적 퍼포먼스도 가능케 합니다. 싸이버 스페이스에 서식하는 각종 컬트와 거기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지하에 사는 사람들(People under the stairs)처럼 암울한 기운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변화의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이런 바램에 대한 답은, 2002년 월드컵 응원후 깨끗했던 길거리를 생각하면 낙관적이고, 지하철 속의 치한들 같은 일부 누리꾼들이 만들어가는 저급한 댓글 문화를 생각하면 비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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