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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화에 관한 짧은 생각

posted Nov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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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고, 놀랍고, 감탄스러운 것들에 관해서만 생각하고 이야기하기에도 사람의 한 평생은 너무 짧습니다. 그러나, 싫은 것들에 관해서도 가끔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 이 게시판을 만들면서 내가 좋아했던 영화를 백편 쯤 추려볼 생각이었는데 영화 이야기를 쓰며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늘 좋았고, 놀라고, 감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더군요.


    한국 영화를 예전에는 '방화(邦畵)'라고 불렀더랬습니다. '방화'라는 명칭 속에는 '나라의 영화'라는 글자만의 뜻과는 무관하게, 검열에 치이고 제작비에 터지고 졸속 시스템에 녹아난 이 나라의 영화들을 내심 삼류로 치부하는 자조적인 울림이 담겨 있었더랬습니다. 사회적인 비판은 죄다 정치적인 반항으로 비쳤기 때문에 '방화'들은 사회성을 덜어내고 그 자리를 선정성으로 채웠습니다. 80년대말까지도 '맨발의 청춘' 만큼의 사회성을 담은 영화조차 찾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 맨발의 청춘!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맨발의 청춘의 신성일,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 친구의 장동건 이 세 사람은 영화 속에서 제가 본 제일 잘생긴 사내들이었습니다. 저렇게 생긴 인간들이 숨 쉬고 걸어 다닌다니.)


    영자의 전성시대 이후 이른바 '호스테스 영화'들이 범람하고 있던 그 시절, 우리나라의 영화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어린 영화팬들은 삼삼오오 조용히 모여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같은 옛 영화들을 보며 장탄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체제홍보에 陽으로(김희갑 주연의 팔도강산 시리즈처럼) 또는 陰으로(스스로 정치적 무관심의 확대재생산 도구로 전락함으로써) 동원되는 영화에 질린 관객들은 점점 더 냉소적이 되어갔고, 아마도 그런 탓에 예전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같은, 적극적인 공동체 의식에 기대는 영화는 설 자리를 잃어 갔습니다.


    유신에서 신군부 통치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영화에는 선정성과 치기만 남아서, 방화는 대체로 도색잡지의 대타역할 정도에 머물렀고, 오락영화라고 해도 이를테면 예전의 허장강 남궁원이 멋져 보이던 '극동의 무적자' 같은 수준과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90년에 나온, 잘 만들어진 깡패영화, 장군의 아들에 퍼부어진 국민들의 관심 뒤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장군의 아들이 68만명으로 관객동원기록을 갱신할 때까지 '방화'의 최다관객수 기록은 공식적으로는 겨울여자(77년, 58만명)가, 비공식적으로는 영구와 땡칠이(89년, 서울 70만, 지방 200만 이상)가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지요.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는데, 그래서 나는 임권택 감독을 좋아합니다. 지금은 거장 소리를 듣지만, 임감독님은 당초에 아키라 구로자와나 빔 벤더스 같은 작가적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척박한 이 땅의 영화 현실 속에서 영화공장의 일꾼으로 끊임없이 작업을 해 온 분이지요. 현실에 좌절해서 그만두는 일 없이, 그러나 주여진 여건이 나아졌을 때 과거의 익숙한 테두리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도 없이, 늘 자기가 처한 장소와 시간 안에서 해낼 수 있는 최선의 '감독질'을 하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벼룩을 조그만 상자 속에 넣어 기르면 나중엔 꺼내 주어도 상자 높이까지밖에는 뛰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벼룩을 가지고 실험해 본 일은 없으나, 그건 오히려 사람한테 딱 들어맞는 비유이겠습니다. 자신이 입문한 시절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데에 임감독의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영화가 상승곡선을 그릴 때 멋진 작품들을 만들다가 여건이 어려울 무렵에는 한국에 없었던 신상옥 감독(빨간 마후라 한번 다시 보십시오, 적어도 탑건보다는 훌륭합니다.)이 해내지 못한 것을 임감독은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요즘 와서 재기발랄하게 활약하면서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젊은 감독들이 딛고 서 있는 잘 안보이는 디딤돌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땅에는 다른 임권택들이 있었겠지요. 그들 없이 한국 영화가 오늘 있는 곳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길게 썼습니다만, 70-80년대 한국영화는, 잘나가는 자식들이 보기에 구질구질하고 창피한 어느 부모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그러나 자기가 할 줄 하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애써 평생을 산 부모.


    영화는 예술과 상행위가 어우러진 그 무엇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언제까지나 낮은 수준에 붙들어 맬 수는 없습니다. 관객들의 예술적 감성이 성장하고 시장이 커지면, 어떤 힘으로도 누르기 어려운 가공할 팽창계수를 지닌 예술활동/상행위가 또 영화이기도 하지요. 저물어가는 80년대의 어느 날 신촌의 한 극장에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관람하면서, 아 이제 우리 영화도 전에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생각지 못했던 요소들에 힘입어 껍질을 벗겠구나 하는 예감을 가졌습니다. 우리 영화의 껍질을 가장 힘차게 벗겼던 사건들 중 하나는 '직배허용'이었습니다. 외국 메이져사의 직접배급을 허용하면 마치 이 땅의 영화는 다 말라죽어버릴 것처럼 겁먹은 영화인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직배영화 상영관에는 뱀이 풀어지기도 했었지요.


    직배가 허용된 이후 막상 말라죽은 영화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던 영화들뿐입니다. “신성일 나오고 엄앵란 나오고 비 좀 뿌리고 그러면 된다”면서 영화소비자의 눈높이를 지방흥행 손익분기점에 붙들어 맨 채 제작에 시시콜콜 참견하던 국내 배급업자들의 입김도 줄었겠지요. 영화제작집단이 소비자의 욕구를 좀 더 섬세하게 반영해야만 하는 ‘민주화’가 소리 없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수입품과 경쟁하면서 살을 깎는 노력으로 품질개선을 해야만 했던 국내 소비재 공급자들처럼, 우리 영화인들도 참 많은 수고를 들여, 참 먼 길을 왔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에서, 로카르노에서, 급기야는 칸느에서까지 깃발을 휘날리는 우리 영화들은 그토록 힘겹게, 그러나 힘찬 도약을 해 낸 것입니다. 보십시오, 불과 몇 년 사이에 "방화"라는 명칭 자체가 얼마나 어색한 외국어처럼 들립니까. 그 어색함의 한 자락이 아직 스크린 쿼터를 유지하자는 목소리 속에 묻어 남아있긴 합니다만.


    이젠 거꾸로, 어떤 국산 영화 한 편에 거의 국민의 성인 전체인구에 육박하는 숫자의 관객이 드는 현상이 혹시 좀 걱정스러운 면은 없는 것인지, 이 거친 세계화의 시대에 국내영화 점유율이 혹시 조금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봐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한데도, 아직 상당수의 한국영화 속에는, 과거 우리의 찢어지게 가난한 영화적 자산이 길러낸 냉소와 비아냥, 무책임한 남의 탓과 피해의식이 자주 몰골을 드러내곤 하는 것을 봅니다.


    현대성에 의한 소외라는 테마는 20세기 이래 전세계의 거의 모든 문학적 내러티브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만, 소외의 책임 (또는 그 회피)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다면 영화의 사회성은 일순, 궁상맞은 헐뜯기로 전락합니다. 제작자와 관객들의 시선은 영화 속의 주인공을 스스로와 동일시(identify)하거나 선망(envy)하거나 엿보기(voyeur)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주인공을 아주 무서울 정도로 객체화하지 못하면 소외가 빚어내는 타자성(otherness)은 손쉽게 비난과 증오로 설익은 채 은막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문제는 영화관람이 집단체험이라는 점입니다. 영화는 예술이고, 제품인데서 그치지 않고 프로파간다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헐리우드에 관해서 우리가 노상 이야기 하듯이, 볼리우드건 충무로건 영화산업은 그 자체로 권력입니다.


    아마도 영화를 보면서 '저 영화가 얼마만큼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거나, 어느 정도로 습관적인 남의 탓에 젖어있는가'라는 잣대로 영화를 평할 관객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번쯤, 그런 잣대로 요즘의 국산영화들을 봐 보시기를 권합니다. 박하사탕, 바람난 가족, 친절한 금자씨.... 이런 영화들이 과연 얼마나 성숙하게 느껴지시는지. 박하사탕의 첫 장면에서 자살하는 주인공은 "돌아가고 싶어"라며 울부짖습니다. 이 영화의 시퀀스가 상징하듯, 자신의 비극의 원인에 스스로를 포함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이 주인공은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 봤댔자 또 다시 자기가 고용한 여직원과 바람피우고,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영애의 친절한 무표정 연기를 제외하고 나면 금자씨의 행적으로부터 우리가 취해야 하는 감상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의 위선은 얇아서, 인간사회는 결국 모든 이가 모든 이에 대해서 잔혹하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결론일까요. 저는 영화 속에서 이쁘고 잘생긴 주인공이 저지르는 패악에 대해서는 일단 감독의 장사속을 수상쩍게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서 별로 안 이쁜 짓을 하는 날나리 여학생도 이영애가 연기한다면 왠지 용서하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앞에서 냉소주의에 관해서 이야기했었지요? 마치 부끄러운 부모 아래서는 비뚤게 자랄 권리가 있다고 큰소리치는 비행청소년처럼, 이 영화가 두 시간 남짓 동안 짝다리 짚고 서서 관객에게 건네는 말은 “너나 잘하세요”가 아니었나,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만.


    바람난 가족에 대해서는 다른 여행기에서 썼으므로 장황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여기서도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약속이나 한 듯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현대 중산층의 위선을 고발했다고 하기에는, 그 영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어지럽게 목청 큰 비난과 남의 탓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극장문을 나서며 욕지기를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작품을 감상했다기 보다는 희한하게 야한 대자보를 억지로 읽은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중산층 또는 상류층이라고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살면서 그렇게 추악한 일가족을 만나본 일은 없으니 영화감독께서는 저더러 행복한 줄 알라고 하실런지.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문소리네 일가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중산층을 미워하는 어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가족 아닐까 싶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서 별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 저의 그런 심증을 굳혀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람 냄새를 탈취하는 영화감독은, 이미 제작이라는 권력의 맛에 너무 많이 취해 가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런지요.


  김기덕? 저는 김기덕 감독에게 작품의 장이 마련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의 영화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일컬어지고 있고, 저도 그의 영화에 열광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만 그가 만든 영화들은 언제나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적어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아픔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조롱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아픔을 아프게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가 이야기하는 아픔에 대한 진지한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유머는 중요합니다. 저 자신도 언제나 아픔에 대한 무거운 담화보다는 그것을 유머로 소화해낸 페이소스(pathos)에 더 끌립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조롱할 수 있을 때, 조롱당하는 대상이 당하고도 미소를 지으며 수긍할 수 있을 때 그 조롱은 비로소 유머가 됩니다. 마음의 맨 밑바닥이 얼마나 따뜻하냐의 문제랄 수도 있겠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기준이겠지만, ‘넘버3’나 ‘살인의 추억’에 담긴 것은 유머고, 위의 영화들에 담긴 것은 냉소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홍상수? 저는 홍상수 감독은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가 끊임없이 뻔뻔함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의 부끄러움이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너희"가 아닌 "우리", 즉 스스로를 포함하는 대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 없이 유치하고 단순하고 뻔뻔스런 홍상수 영화들의 등장인물들에게서, 저는 뭐랄까, 영화감독 자신도, 저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러나 지우고 싶은 악취를 맡습니다. 그러나 그 악취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냄새더군요.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 그것은 얼른 생각하기 보다는 훨씬 더 소중한 재주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깨닫는 데서 시작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여 부끄러워하며, 어지러운 글을 맺습니다.

 


 “기대에 못 미칠까 두렵다.”  (06.12.12.자 임권택감독 일간지 인터뷰 기사)


    거장(巨匠)의 목소리는 떨렸다. 40여 년 동안 산전수전 겪으며 99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이보다 부담스러울 때가 몇 번이나 될까. 임권택(70) 감독은 11일 자신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제작 KINO2)에 대한 부담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임 감독은 이날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에서 진행된 ‘천년학’ 현장 공개 및 기자간담회에서 “사실 100번째라는 부담을 가볍게 흘려보내려다 안팎의 관심이 커서 나 자신도 가볍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여러가지 노력할 부분이 많아 뛰어든 것 자체가 두려웠다. 100번째라는 게 기대가 클 텐데 기대에 미치는 영화가 될 것인지도 두려웠다”고 말했다.


    ‘내부의 관심’이 100이라는 숫자와의 싸움이라면 ‘외부의 관심’은 뭘까. 임 감독은 “지난해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만났는데 늦게라도 기다리겠다는 말을 들었다. 제작이 지연됐지만 지금도 기다리리라 믿는다”며 해외의 시선을 지목했다. 임권택 감독은 이어 “(하지만 칸에서) 기다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지간히 모양새를 갖춰야 칸에 출품될 것”이라면서 “출품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2000년 ‘춘향뎐’으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임 감독은 2002년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거장의 부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판소리를 소재로 한 ‘서편제’가 흥행과 완성도, 두 마리 토끼를 잡았지만 13년이 지난 지금 판소리가 관객에게 어필될 수 있느냐는 점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피해가고 싶을 정도”라고 부담을 느낀 임 감독은 “판소리의 사회적 위상도 있고 우리의 유산을 어떻게 관객에게 향유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영화를 통해 판소리를 녹여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부담 속에 둘러싸인 거장을 구출한 것은 배우들과 수십 년을 함께 호흡해온 정일성 촬영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이었다. 임 감독은 “영화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오정해 양을 제외하고 다 처음 작업하는 배우지만 이들의 뛰어난 연기력, 스탭의 정성과 노력 등 이것은 ‘천년학’이 큰 복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지금은 애초에 하고자 하는 것보다 풍성하게 담긴 것 같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특히 조재현, 오정해의 캐스팅에 매우 흡족해했다. 임 감독은 “오정해 같은 연기자가 없었으면 ‘천년학’은 소화할 수 없는 영화”라며 “진짜 판소리를 소화할 수 있는 연기자는 오정해 밖에 없다”고 칭찬했다. 조재현에 대해서는 “언젠가 함께 하고픈 연기자였고 나도 멀리서 조재현을 ‘짝사랑’한 셈”이라며 “‘동호’라는 인물을 훌쩍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줬다”고까지 표현했다.


    어르신의 무한 사랑에 배우들은 혼신을 다해 몸을 던진다. 배우들은 한결같이 “감독님과 함께 작업해 영광”이라며 1년 넘게 ‘천년학’에 매달렸다. 스탭들도 임 감독, 정 촬영감독의 완벽에 완벽을 추구하는 열의에 묵묵히 따랐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임 감독의 표정은 세 가지 부담을 털어놓은 고해성사와 칭찬 속에 어느덧 천년학의 날개처럼 가벼워졌다. 한편, ‘천년학’은 소리와 북장단을 나눠 배운 의붓남매 ‘송화’(오정해 분)와 ‘동호’(조재현 분)의 굴곡진 삶과 사랑을 담고 있으며, 오는 16일께 모든 촬영을 마치고 내년 5월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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