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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on Dollar Baby

posted Jun 2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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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가리켜,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감독이라고 말하면 과장일 것입니다. 그는 가장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현역에 해당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성한 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차원에서 현역 영화인들 중 그를 따라잡을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1955년에 배우로 데뷔한 그는 70년대부터는 감독으로, 80년대부터는 제작자로도 1인 3역을 하면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가 영화에 출연하거나, 감독하거나, 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채 쉬고 있던 순간은 거의 없었던 것이죠. 1993년 그는 Unforgiven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양 손에 거머쥐더니만, 2005년에도 Million Dollar Baby라는 영화로 또다시 감독상과 작품상을 가져가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Million Dollar Baby는 모건 프리먼에게 남우조연상과 힐러리 스웽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기도 했었죠.


    힐러리 스웽크는 제가 각별히 좋아하는 배우는 아닙니다만, 이 영화에서는 참 대단합니다. 링 위에서 모든 상대를 1라운드에 때려눕히는 전사이면서도 상처받기 쉬운 가녀린 영혼을 가진 여자 복서 역할을, 그녀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내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풋내기 복서 매기 피츠제럴드는 지독한 연습벌레로 나오는데, 힐러리 스웽크라는 배우도 자신이 연기한 복서 매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연습벌레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화면 가득히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누구든지 뭐든 다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그 열심으로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은 크고도 넓습니다. 무슨 일에서든지.


    Million Dollar Baby의 줄거리에 예상을 뒤엎는 반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권투선수로서 자아를 실현한 매기 피츠제럴드가 자기 삶을, 그리고 죽음을 끌어안는 모습은 더없이 감동적입니다. 이 영화의 사랑스러운 점은 삐딱한 냉소주의를 담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삶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잘난 사람이라는 건 없는 법입니다. 값싼 웃음을 선사해야 하려는 치기도 없고, 과도한 비장미로 관객을 저만치 밀어내는 실수도 없이 이 영화는 정공법을 선택합니다. 흡사 매기 피츠제럴드의 권투 스타일 비슷하죠. 과연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노장의 연륜은 땅따먹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에 앞서서 저는 이른바 ‘헝그리 스포츠’인 권투의 실체를 미국 영화가 어떻게 그려낼지가 궁금했었는데, 이스트우드 감독은 화려한 링의 뒤안길, 그 구질구질하고 한없이 처절한 삶의 모습을 솜씨 좋게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코치 프랭키는 매기에게 게일어로 Mo Chuchle라는 별명을 지어줍니다. 매기가 아무리 졸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지 않는데, 결국 그 뜻을 매기에게 설명해 주는 끝장면은 저같이 무딘 남성관객의 누선도 기어이 자극하고야 맙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은, 어찌 보면 실패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프랭키 던이라는 권투 코치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프랭키라는 그의 이름은 한물 간 권투 코치의 이미지에 잘 들어맞고, 던(Dunn)이라는 이름도 끝장났다는 뜻의 Done과 발음이 같아서 사뭇 어울리지요. 이 영화에서 그는 Unforgiven에서와 마찬가지로 모건 프리먼과 친구사이로 나옵니다. 말수 적지만 가슴으로 말하는 두 노인네의 역할을, 노련미 넘치는 두 배우들은 마치 흰설탕과 흑설탕처럼 잘 어우러지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권투는 부자연스러운 행위다. 왜냐 하면 권투 속의 모든 것은 거꾸로이기 때문이다(Everything in it is backwards). 왼쪽으로 움직이고 싶으면 왼발을 내딛는 대신 오른쪽 발가락에 힘을 주고 민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려면 왼발가락을 사용해야 한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의례 그러듯이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때때로, 펀치를 날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너무 물러섰다가는 싸움이 되지 않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런 반어적 역설은 우리 주변에 가득 차 있습니다. 골짜기의 깊이는 봉우리의 높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장점은 그 사람의 단점이기도 하지요. 온유한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은 독선적이고,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은 귀가 얇고, 공정한 사람은 가혹하고, 자제력이 크면 스트레스를 쉽게 받고, 빠른 사람은 경솔하거나 부정확하고, 정확한 사람은 느리거나 편협하고, 쾌활한 사람은 덜 진지하고, 진지한 사람은 덜 쾌활하기 마련이죠. 흔히들, 물잔의 절반이 비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들 얘기 합니다만, ‘잔의 반이 찼다’고 여기는 사람 중 과연 몇 명이 그 잔을 가득 채우려 들겠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의 단점이 그 사람의 장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불가역성에 인생의 묘미가 있고, 인격수양의 가치가 있는 것이겠죠.


    어쩌면 권투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 속의 온갖 것들이 죄다 거꾸로(everything in it is backwards)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얼른 떠오르는 몇 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보지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구세주를 살해한 십자가 형틀을 신앙의 거룩한 상징물로 삼습니다. 불교의 선가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라는 임제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죠. 개인은 이타적인 희생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경제활동을 함으로써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서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지만, 나 대신 정책을 결정하고 나에게 권력을 행사할 누군가를 선출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평화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흘릴 수도 있다는 각오를 통해서만 지켜집니다. 게다가 평화를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믿음은, 평화로운 시대에 오히려 하찮고 혐오스러운 생각으로 대접받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갈구하지만, 정작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는 것은 고난과 고통입니다.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기 가장 쉬운 때는 확신에 차 있을 때입니다.


    오페라 아리아의 클라이맥스를 절절하게 만드는 부분은 정작 포르테로 부르는 후렴부가 아니라, 그것을 돋보이게 만드는 피아니시모입니다. 특히, 고음에서 작은 음량으로 소리를 점차 줄이는(decrescendo) 기량은 테너나 소프라노 가수의 실력을 손쉽게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스스로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오페라 아리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포르티시모로 부르는 것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중요하게 다룰 줄 아는 능력은, 덜 중요한 일을 덜 중요하게 다루는 능력과 한 가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죠.


    그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 빛을 그리고 싶다면 그림자를 잘 그려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빛은 그린 뒤에 나타나는 것이지 그려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떤 그림자와 그늘을 그려 넣느냐에 따라서 붉은 빛깔 도는 저녁햇살도, 눈부신 인공조명도 마술처럼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는 온화하고, 밝고, 쾌활한 사람이 좋습니다만, 정작 어떤 사람의 진정한 됨됨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가 가진 그늘입니다. 아무리 친절하고 밝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그늘을 숨기거나 감추어 드러내지 않는 사람, 또는 그림자를 아예 갖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자기의 그늘을 열어 보여주지는 않는 사람은 아마도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같은 장점이나 특기를 가진 부부나 친구보다, 비슷한 그늘과 좌절을 지닌 부부나 친구 사이가 더 원만하다고들 하더군요. 자, 어떻습니까. 가히 인간만사가 반어적 역설로 가득하다고 할 만 하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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