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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lk

posted Feb 2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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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경멸해 마지않는 모습을 제 자신의 속에서 보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화가 치미는 모습, 당당하지 못하고 비겁해지는 모습, 남을 얕잡아보는 모습, 정직하지 못한 모습 등등.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예전보다 쉽게 화가 나는 걸 느끼는데,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예순살 쯤 먹으면 가히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분노 자체야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이겠지만, 무슨 일에 화를 내느냐에 따라 사람은 무서워지기도 하고 우스워지기도 하지요.


    Star Trek 에서 승무원 마일즈 오브라이언은 우주정거장 DS9의 수석 엔지니어입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그는 순박하고 단순하지만 엔지니어로서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어느 에피소드에서 카다시언들에게 붙잡혀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허울 좋은 재판을 받던 오브라이언은 형식적인 자기 변론 기회가 주어지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천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매일 내가 할 줄 아는 만큼은 가장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애씁니다. 내 딸이 아침에 일어나서 나를 볼 때, 나는 그 아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볼 수 있길 원합니다."


    저는 원칙주의자도 아니고, 도덕적인 완벽주의자도 아니라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일에 큰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도 저의 두 아들들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지점이, 저의 그런 타협의 배수진이요 마지노선입니다. 대체로 정신을 차리고 지내는 동안에 그 선을 지켜내는 일은 생각처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또는 남을 위해 조금의 불편이나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피곤하거나, 바쁘거나, 정신이 산만해져서 스스로에 대한 감시의 끈을 놓으면, 더러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비겁하고 게으른 제가, 코르셋 속에 감춰두었던 여분의 살처럼 밖으로 삐져 나오곤 하는 겁니다. 아, 그럴 때의 실망감과 모멸감이란. 햄릿이 사는 문제와 죽는 문제를 두고 고민할 때, 삶의 가치를 감하는 쪽으로 셈해진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채찍과 멸시, 권력자의 횡포, 교만한 자의 작태, 무시당한 사랑의 아픔, 법의 지체된 원조, 관리의 건방진 꼴, 참을성 있는 착한 이가 못난 놈에게 받는 수모 등입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이 자기 자신의 도덕적 불민함보다 더 흉측할 것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짐승을 길들이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 문명이요, 문화일 것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Dr. Jekyll And Mr. Hyde는 자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우화입니다. 이 소설은 수많은 영화와 연극과 뮤지컬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선한 자아와 악한 자아가 다중인격으로 드러나는 병리적 현상도 여러 영화의 소재가 되었지요.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Psycho에서,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꽃미남 배우 앤토니 퍼킨스는 섬뜩할 정도로 광기어린 이중인격자의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최근에는 Me, Myself & Irene에서 짐 캐리가 몹시 정신 사나운 이중인격자 연기를 했습니다. (이 영화가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짐 캐리라는 배우는 얌전히 있을 때에도 워낙 다중인격장애를 겪는 사람처럼 부산스럽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영화 Primal Fear에서 에드워드 노튼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가식적인 이중인격자를 ‘연기하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잘나가는 변호사(리처드 기어)는 완전히 속아 넘어가서, 성직자를 살해한 그가 무죄판결을 받도록 도와줍니다. 제 생각에 에드워드 노튼은 90년대 헐리우드가 발견한 최고의 남자배우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노련함으로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디 앨런의 Everyone says I love you 같은 로맨틱 뮤지컬 코메디에서 숫기 없는 청춘남을 멋들어지게 그려내는가 하면, American History X나 Fight Club에서는 폭발할 듯한 야성을, Italian Job에서는 비열한 악당의 역할을 안성에 가서 맞춘 듯이 해내고 있어, 혀를 내두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현재 첫 시즌이 방영되고 있는 TV 시리즈 Heroes에서는 미녀배우 알리 라터가 니키라는 이중인격 수퍼 영웅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프로는 방영되자마자 세계적으로 대단한 시청율을 올리고 있다고 하는데, X-men과 13일의 금요일을 섞어놓은 것처럼 황당하고 잔혹해서 과연 TV 시리즈가 맞는지 고개를 가로젓게 만듭니다. 평범하고 연약한 보통 사람들이 특별한 재능을 선사받으면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간다는 설정의 이 드라마는, 도덕적으로도 유약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니키는 반영웅적인 사악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니키라는 인물은 아무래도 만화 드래곤볼의 런치라는 캐릭터를 표절한 것 같은 의심이 듭니다. 왜 있잖습니까, 쑥맥인 미소녀였다가 재채기만 하면 기관총을 휘두르던.)


    어쩌면 9-11 사건이 미국에서 ‘영웅’의 의미를 지나치게 잡아늘여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로선 그들을 섣불리 영웅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더군요. The Old Man and the Sea의 스펜서 트레이시나 Mr. Smith goes to Washington의 지미 스튜어드가 그들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 영웅적이지요. 자기와 싸워 이긴 사람들.


    지킬과 하이드의 현대적인 번안물에는 The Incredible Hulk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70년대 흑백TV 연속극에서 회색 괴물로 나왔기 때문에 원래의 색깔이 초록색이라는 건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던 헐크, 그 괴물 역시 자아의 통제를 벗어난 그림자의 은유이겠습니다. 마블 코믹 시리즈의 만화 속에서는 선악의 경계를 멋대로 넘나드는 괴물 헐크가 TV 주인공을 맡으면서는 착한 천하장사가 되어버리긴 했습니다만.

 

    루 페리노라는 육체미 선수가 TV판 괴물의 역할을 맡았었는데, 그는 2003년 영화 Hulk에 카메오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가 헐크로 결정되기 전에는 007에서 미스터 죠스 역을 맡았던 로버트 킬 (그는 근육이 너무 ‘빈약해서’ 탈락)이나 당시에 벌써 유럽 선수권대회를 석권하고 있던 아놀드 슈왈제네거(그는 키가 작아서 탈락)도 캐스팅 검토 대상이었다고 하는군요.


    극장용 영화 Hulk는 대만인 이안 감독이 메가폰을 쥐었습니다. 70년대 TV 연속극보다 오히려 더 우스꽝스러운 만화처럼 변해버린 영화였지만, 저는 에릭 바나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제가 좋아하는 제니퍼 코넬리의 얼굴을 보는 낙으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치한 활극으로 바꾸어 놓더라도, 헐크는 이성으로 가두고 억눌러야 하는 야성이라는, 인간이 살아서 숨 쉬는 한 멈출 수 없는 그 질기고 슬픈 전쟁을 상징하는 괴물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긴, 그 전쟁을 서글픈 자기연민의 눈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진보와 이성의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그런데도 ‘슬픈 전쟁’이라는 표현이 불쑥 먼저 나오는 까닭은, 아마도 갈수록 그 싸움의 전황이 만만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스스로의 모습에 환멸을 느낄 만큼 실망하는 날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으므로, 제 속의 괴물을 만나는 사고(!)도 직장생활 중에 생기곤 합니다. 좀 더 쉽지 않은 문제는, 그런 날일수록 집에 돌아와도, 아이들도 말귀를 영 못 알아듣고, 아내도 짜증을 내거나 삐져서 마음 기댈 곳이 없게끔 되어버린다는 점입니다. 마치, 과음하고 걸으면 나를 향해 벌떡벌떡 덮쳐오는 땅바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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