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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멋에 관하여

posted Feb 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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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는 표현은 멋지다. 모호하기 때문이다. 멋이란 게 대체 뭔지를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그것은 차림새나 생김새에 관한 것인 경우가 많지만, 분위기나 품격, 또는 운치를 뜻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겐 멋있는 그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겐 한없이 기이하거나 심지어 촌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멋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게다. 그렇다면, ‘멋’이라는 멋진 단어를 갖지 않은 영어에서는 멋을 과연 어떻게 표현할까?

스타일리쉬(stylish)하다는 말은 차림새에 관해 자주 쓴다. 현대적인 유행에 민감하고 깔끔하다는 의미다. 특히 쉬크(chic)하다는 표현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나 인정받을 정도로 앞서가는 최첨단의 세련미를 가리킨다. 댄디(dandy), 또는 스마트(smart)하다면 날렵하고 깔끔한 멋을 강조하는 것이고, 엘리건트(elegant)하다든지 그레이스풀(graceful)하다고 말할 땐 격조가 높고 기품이 있는 우아함을 갖췄다는 얘기가 된다. 뭔가가 테이스티(tasty)하다면 맛있다는 뜻이지만, 테이스트풀(tasteful)하다면 침부터 흘릴 일은 아니다. 남달리 고급스러운 기호를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챠밍(charming)은 좀 다르다. 설령 차림새나 생김새는 날렵하고 깔끔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 뭔가를 가진 경우가 여기 해당된다. 아티스틱(artistic)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좀 난해하고 괴팍스런 아름다움까지도 포함하는 의미가 된다.

괴팍한 취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키치(kitsch)라는 멋도 빼놓을 수 없겠다. 원래 키치란 저속한 싸구려 모방품을 의미하는 독일어다. 요즘 와서 키치는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인 척하는 위악적이고 냉소적인 만족감을 위해서 일부러 촌스러움을 추구하는 반어적 세련미를 뜻하는 표현으로 정착했다. 쉽게 말해서, 노골적인 복고풍의 태반은 키치에 해당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좀 더 극단적으로 가자면 캠프(camp)라는 특이한 멋도 있다. 캠프는 동성애적인 취향을 의미하는 속어인데, 미국 작가인 수잔 손탁은 캠프라는 단어에 ‘과장되게 꾸미는 태도’라는 넓은 뜻을 부여했고, “캠프적인 것들은 괴상해서 아름답다”라고 칭송했다.

캠프라는 표현의 뜻을 알고 싶다면 사전을 뒤적일 필요도 없이, <로키 호러 픽쳐 쇼(Rocky Horror Picture Show)>(1975)라는 영국영화 한 편을 보시면 된다. 팀 커리와 수잔 서랜든 등이 출연하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건 부질없다. 어느 약혼자 내외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동성애적이고 복장도착적(transvestite)인 외계인들이 머무는 고성에 찾아들어가 한바탕 소동을 겪는다는 황당한 SF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편의 영화는 영화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70년대 미국의 심야극장에서 젊은이들이 단체로 관람하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관객들만의 대사를 일사불란하게 외쳐대며 그들만의 예식을 치르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컬트(cult)’라는 영화현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키 호러 픽쳐 쇼>를 처음 보면 ‘하도 괴상한 나머지’ 끝까지 보게 되는데, 이게 또 은근히 중독적인 데가 있다. 특히 성도착적 외계인 두목을 연기하는 팀 커리의 자신만만한 변태적(?) 연기는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어떤 경지를 구사하고 있다. ‘캠프’적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끌리는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체제에 저항하는 발칙함을 담고 있다. 요새 광고 중에, 넥타이를 목에 매지 않고 주머니에 구겨넣고 뽐내며 다니는 남자가 등장하는 게 있지 않던가. 이를테면 그런 귀여운 반항도 멋이라면 멋인 셈이다. 좀 더 심각하게 캠프스러운 이미지라면 고(故)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1971)에도 가득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좀 지나치게 폭력적이기도 하거니와, 혹시 필자가 괴상한 취향을 가진 걸로 오해하는 독자들도 계실까 걱정도 되니, 이쯤에서 화제를 좀 돌려보자.

키치적인 멋이라면 단연 퀜틴 타란티노 감독이 먼저 떠오른다. B급 영화들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한 이 수다쟁이 영화감독은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1992), <펄프 픽션(Pulp Fiction)>(1994), <킬빌(Kill Bill)>(2003-2004) 등의 작품을 통해 키치의 진수를 보여준 바 있다. 특히 <펄프 픽션>은 의도적인 촌스러움과 과장스런 저속함이 어떻게 하면 멋져 보일 수도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우마 서먼과 존 트라볼타의 저 유명한 ‘V자’ 손가락 댄스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우리 영화들 중에서 키치를 솜씨 좋게 구현한 작품으로는 신하균과 백윤식 주연의 <지구를 지켜라>(2003)가 떠오른다. 키치에 집착한 나머지 키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한 <다찌마와 리>(2008) 같은 영화도 있긴 했다.

생활 속의 멋이라면 패션도 빼놓을 수 없겠다. 패셔너블(fashionable)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최근 영화로는 단연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 주연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Devil Wears Prada)>(2006)를 꼽을 수 있다. 명품 패선의 허영을 우습게 여기던 똑똑한 여주인공이 패션잡지사에 취직해서 고군분투하면서 패션의 위력을 깨닫고, 그런 경지까지도 극복하면서 결국 자신의 자아를 되찾는다는 영화다. 패션의 세계를 과감히 등지고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자면 앤 해서웨이 만큼 예뻐야 되는 건 혹시 아닌가 싶은 의문이 좀 들긴 했어도, 이 영화가 잘 짚어낸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진정한 패션은 몸에 걸치는 천조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태도라는 점이다.

패션이 하나의 태도라는 점을 좀 다른 각도로 보여준 또 한 편의 영화로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1986)이 있었다. 홍콩 깡패들이 줄줄이 롱코트 입고 설쳐대던 이 영화 덕분에 86년 겨울의 서울 거리도 발목까지 오는 코트를 입은 사내들로 넘쳐났었다. 그들이 흉내 내고 싶었던 건 주윤발이나 적룡, 이자웅의 옷매무새 따위가 아니라 홍콩 느와르의 비장하고 우수 어린 사내 냄새였을 터이다. 울적한 80년대의 정서를 잘 짚어낸 이 영화 덕분에, 그무렵 롱코트를 판매하던 남성복 업체들은 대박을 터뜨렸었다지.

‘쉬크(chic)’한 소품이나 인테리어로 따지자면, 흥행의 귀재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Island)>(2005)가 불현듯 떠오른다. 복제인간이던 링컨 6E호(이완 멕그리거)가 조던 2D(스칼렛 요한슨)을 데리고 탈출해서 자신의 원본 인간인 탐 링컨(멕그리거)을 찾아나선다. 스타일이고 자시고 간에, 백치미 가득한 상태의 스칼렛 요한슨을 데리고 다닌다는 설정부터가 남자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긴 했지만, 이 영화의 미술담당이 차려놓은 LA의 탐 링컨 자택 풍경도 남성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탐은 실험적인 자동차나 보트 따위를 설계하는 디자이너로 설정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GQ 같은 잡지 속에나 등장할 법한 그의 집 실내장식은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럽고,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남성취향이었다.

독신남성 취향을 잘 구현한 집을 우리 영화에서 찾아보자면, 800만 관객 돌파에 빛나는 <과속 스캔들>(2009)이 있다. 한때 아이돌 스타였다가, 30대 중반인 지금은 인기절정의 라디오 DJ인 남현수(차태현)가 살던 그 집 말이다. 십대 때 사고를 쳐서 생긴, 그러나 있는 줄도 몰랐던 그의 딸(박보영)이 미혼모가 되어 손자까지 데리고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 집에 눌러 앉는다. 이 갑작스러운 동거가 남현수의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남현수의 집은 깔끔하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어야만 했을 터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꼬마가 망치로 박살내는 최고급 스피커는 저 유명한 뱅엔 올룹센의 제품인데, 제작진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B&O사가 간접광고(PPL) 협찬에 응해주지 않아 영화사는 지인을 통해 제품을 대여했다고 한다. 이 제품의 시가는 대략 3천만원 선이다. 쩝쩝. 있는지도 몰랐던 아들딸이 느닷없이 나타날 위험만 아니라면, 저렇게 갖춰놓고 살 수 있다면, 부럽다. 왕년의 아이돌들은 좋겠다.

만약 멋을 예술적인(artistic) 거라고 정의한다면, 보통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멋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얄팍한 흉내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라면 역시 예술가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뒤져봐야 하려나? 유명세를 타서 벌이가 좋은 예술가라면 자기 집도 잘 꾸며놓긴 하겠다. 하지만 창작에 몰입하는 진지한 예술가들의 거처란 게 반드시 깔끔하다든가 일반인들의 유행감각을 만족시킬 거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다. 우디 앨런 감독의 최근작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Vicky Cristina Barcelona)>(2008)에는 부부 미술가(페넬로페 크루즈, 하비에 바뎀)와 그들의 애인(스칼렛 요한슨)이 살다가 헤어졌다가 하는 남유럽풍의 저택이 등장한다. 이 집은 아름답긴 한데, 그 아름다움은 주로 집주인들의 창작행위에 봉사하는 기능성과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지방색에서 비롯된다. 예술가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살면서 즐길 법한 멋은 별로 아닌 것 같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살다가 헤어졌다가, 세 사람이 동거하다가, 또다시 갈라서고 하는 그 집 거주자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흠... 그렇다면, 좀 흉내내볼 수 있을 분량만큼의 예술적인 멋이 담긴 영화 한 편쯤 어디 없을까? 예술가가 되려다 만 주인공, 그러나 예술계 주변을 맴돌며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어떨까? 에쿠니 가오리의 유명소설을 영화화한 <냉정과 열정 사이>(2001)의 남자 주인공 준세이(다케노우치 유타카)가 그런 사람이다. 준세이는 그림을 그리다가 창작의 길을 버리고 이탈리아에서 중세회화 복원사로 일하는 사내다. 그의 거처가 예술적이면서도 스타일리쉬한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우선 그는 일본인이고 부자집의 내성적인 아들이다. (왠지 깔끔한 스타일이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둘째, 그는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한 화가지망생이었고, 지금은 섬세함을 특기로 삼는 복원기술자다. 셋째, 그는 학창시절의 운명의 여인을 잊지 못하는 로맨티스트다. 이탈리아나 일본에 있는 그의 집안 풍경은 이러한 그의 특징들을 다 잘 담아내고 있다. 원작자가 여성이어서였을까? 준세이의 집안 풍경은 남자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집이라기보다는, 여성이 한 번쯤 사귀어보고 싶은 남성의 집이 아니겠나 싶다.

남자라면, 예술적인 여백이 숨쉬는 준세이의 집보다는 오히려 <Nine 1/2 Weeks>(1986)의 남자 주인공(미키 루크)이 살던 사무적이고 미니멀한 아파트 쪽에 마음이 더 끌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과연 뭐가 멋있고 뭐가 한심해 보이는 건지는 한글로 쓰건 영어로 쓰건 확언하기 어렵긴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건 결국 당신이 누구냐에 달려있는 문제다. 아니다. 당신이 무엇더러 멋있다고 말하느냐가 당신이 누구냐를 결정하는 것일 게다.

리브아트, 2010봄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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