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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1999)

posted Dec 1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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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두 얼굴의 여자를 만든다

안심하셔도 된다. 가령, '사랑은 불륜이다'라든가 '사랑은 치정이다' 같은 야릇한 얘기를 하려고 <해피엔드>를 고른 건 아니다. 만일 그럴 생각이었다면 다이안 레인과 리처드 기어가 나왔던 <Unfaithful>을 골랐을 거다. 벌어지는 일은 똑같더라도 좀 더 담담한 소재가 되었을 테니까.

줄거리는 이렇다. 민기(최민식)는 실업자다. 어린이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아내 보라(전도연)에 얹혀사는 처지가 된 거다. 보라는 옛 연인이던 일범(주진모)과 자주 밀회를 가진다. 그녀는 젖먹이 아기와 남편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일범의 뜨거운 열정에도 주저 없이 몸을 맡긴다. 가정과 애인이 주는 서로 다른 행복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녀는 불륜관계를 불안스레 이어가고, 결국 남편은 이것을 눈치챈다. 결말은 비극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건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율배반이라든지, 또는 현대사회에서의 가정의 의미 같은 건 아니었다.

나는 단지 전도연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배우 치고 눈에 확 띌 정도의 미모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저 좀 귀여운 얼굴에 콧소리가 인상적인 발랄한 탈렌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기의 폭을 잘 넓혀가더니만 급기야 2007년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뤄냈다. 칸에서 그녀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수상했는데, 좀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전도연은 이 영화에서 자기가 보여준 것보다는 보여주지 않은 걸로 상을 받았다는 느낌이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연기했던 신애는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자주 돌아서거나 돌아눕는 뒷모습으로 등장해 관객들과의 소통도 집요하게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해피엔드>에서 전도연이 보여준 연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의 두 얼굴을 섬칫할 만큼 입체감 있게 그려냈다. 여자들 스스로도 아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여자들은 자신이 여자이고 싶을 때 돌연 표변한다. 동료거나, 후배거나, 또는 심지어 그냥 살림 사는 아내일 때의 여자와, 상대에게 여자이고 싶을 때의 여자는 다르다. 눈빛이 다르고, 목소리의 톤이 다르고, 손동작이 다르고, 걸음걸이가 다르고, 웃음의 질감이 다르다. 도대체 어떻게 달라진다는 얘기냐, 라고 물으신다면, <해피엔드>에서 애인 앞에 있는 전도연을 한번 보라고 권해볼 도리밖에 없다.

우습게도, 웬만한 남자들은 웬만한 여자들 앞에서 다 남자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느물대기도 하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실수도 자주 한다. 남자의 '이성을 대하는 회로'는 매우 단조롭기 때문에, 남자들은 때때로 여자의 의미 없는 미소나 친절을 "날 여자로 대해주세요"라는 신호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곧잘 "남자는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자기를 좋아하는 걸로 착각한다"며 불평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남자의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정자의 수정전략 자체가 '복불복의 들이대기' 방식이지 않은가. 잘못 들이댔다가 망신당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들만 있었다면, 인류의 진화과정은 지금과는 크게 다른 번식전략을 마련했어야만 했을 터이다.

여자는 유능한 배우다. 오래 전에 나는 어떤 여자 후배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건 쉬워요. 관심이 없는 척 하면서 그 앞에 '우연히' 자주 나타나서 기분 좋은 얼굴로 인사만 해줘도 남자들은 금새 관심을 갖거든요." 설마! 정말로 남자들이 그렇게까지 단순하단 말인가? 항변을 하고 싶다가도, 전도연의 연기를 떠올려보면 어쩐지 따지고 들 자신이 없어진다. 무덤덤한 자세와 펑퍼짐한 말투를 가진 아줌마에서, 어느 사이엔가 귀엽고 간드러지는 연인으로 변신하는 그녀를 보고 나면 이해하실 거다. 내가 여자들을 무섭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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