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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 lies, and videotape

posted Feb 0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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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법정에서 증인은 성경에 손을 얹고 “나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의 전모를 말하고,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한다(I swear to tell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고 선서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형사소송법 157조에 따라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하죠. 숨김과 보탬이 없는 진실을 말한다는 의미는 양측이 동일하므로 어느 쪽 선서가 내용상 더 낫거나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The truth, the whole truth, nothing but the truth”라는 표현은, 보면 볼수록 멋집니다.


    우선, 그것은 점점 울림을 더해 가며 반복되는 싯구처럼 음악적입니다. “Truth”라는 압운(rhyme)이 세 번 반복되면서 단어 수가 하나씩 늘어가는 구조는 진실의 중요성을 점층적으로 강조하는 낭송시 같은 느낌을 줍니다. ‘진실’이라는 단어를 세 번, 점점 긴 구절로 반복토록 하는 것은 그것을 읽는 증인들에게 진실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하는 은근한 부담으로도 작용할 터입니다.


    둘째로, 이 표현은 논리학이 수학(집합과 연산)과 흡사하다는 점을 간결하게 잘 보여줍니다. ‘진실의 전모(the whole truth)'를 말하는 사람은 진실에 해당하는 모든 내용을 다 이야기하겠지만, 거기에 진실이 아닌 다른 것을 섞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진실만을(nothing but the truth)' 말하는 사람의 말 속에는 진실이 아닌 내용이 들어있지 않겠지만, 진실의 일부를 감추더라도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의미상 'the whole truth'는 진실을 감하지 않고, 'nothing but the truth'는 진실에 덧보태지 않고 말한다는 뜻이 되므로 “숨김과 보탬이 없는 진실”이라는 표현과 피장파장이 됩니다만, 어감은 좀 다릅니다. 진실에 뭔가를 숨기거나 보태는 행위는 진실을 가공하는 어떤 작위(作爲)를 가리키는 반면에, 'the whole truth'와 'nothing but the truth'는 둘 다 목적격 명사로써, 진실을 대하는 방식이나 태도를 일컫는 뉘앙스가 더 강합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nothing but the truth를 중시하는 사람의 태도에는 ‘솔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고, the whole truth를 말하려고 애쓰는 사람의 태도는 ‘정직’에 가깝지 않은가 하고 말이죠.


    솔직한 사람들에게는 진실의 전신상이 어떤 모습이냐 보다는, 자기가 말하는 내용이 - 남에게 상처를 주는 내용이더라도 - 모두 다 근거 있는 사실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특징은 자연히, 조금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가식을 경멸하는 도도하고 공격적인 태도와 잘 어울립니다. 반면에 정직하려 한다는 것은, 진실 중에 -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부분이라도 - 숨겨지는 부분이 없도록 애쓰는 태도와 가깝습니다. 정직하려는 사람들은 감추고 싶은 것일수록 끄집어내서 이해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성실이라고 느끼며, 그렇게 하는 과정에는 흔히 진실의 간결한 裸身보다는 좀 더 많은 부연과 설명이 덧붙곤 하죠. 진실 위에 설명이 조금 보태지는 방어적인 태도라고 할까요.


    어떤 방식이든,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은 훌륭한 일입니다. 일상적인 관계에서 거짓은, 타인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태도이고, 최대의 불성실이며, 따라서 비난 받아 마땅하지요. 이른바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상대방보다 더 우월한 자리에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거짓말은 수평적 관계를 파괴합니다.


    1989년 스티븐 소더버그는 불과 26살의 나이에 여러 겹으로 거짓된 현대적 인간관계를 통찰하는 세련된 영화를 만들어 깐느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좋은 작품들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초기작인 Sex, Lies, and Videotape을 통해 보여준 섬세한 결이 너무도 뛰어났던 것에 비하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Erin Brockovich나 그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준 Traffic, 심지어 연달아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Ocean's Eleven 연작들조차 실망스러운 지경입니다.


    미인이지만 어딘가 성적으로 메마른 인상을 주는 앤(앤디 맥도웰)은 눈썹 진하고 입술 두꺼운 느끼한 인상을 가진 존(피터 갤러거)과 부부 사이입니다. 존은 처제인 신시아(로라 산 지아코모)와 바람을 피우는 중입니다. 신시아는 원하는 남성은 품에 안고야 마는, 성적 에너지가 충만한 여성입니다. 나름대로 불안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이들의 일상은, 존의 옛친구 그래엄(제임스 스페이더)이 방문한 뒤로 변합니다. 존은 여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성적인 경험에 관한 그들의 진술을 비데오로 녹화하는 희한한 취미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성적 불능상태에 있는데, 그것은 그의 옛 애인이 떠나버린 사랑의 실패가 원인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 제임스 스페이더는 그 후로도 줄곧 성적인 리비도에 이상이 있는 역할을 단골로 맡습니다.


    이들의 서로에 대한 거짓은 점점 더 쌓여 가다가 결국 앤은 남편과 동생의 배신을 알아채죠. 화가 난 그녀는 그래엄을 찾아가 그의 비데오 카메라 앞에 섭니다. 자기는 바람을 피울망정 아내와 친구가 놀아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존은, 그래엄을 찾아가 일단 그를 두들겨 팬 후 녹화된 비디오를 틀어봅니다. 그 화면 속에는 성적으로 황폐했던 앤과 그래엄이 번갈아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녹화는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서는 대목에서 멈춰 있습니다. 앤은 존과 이혼하고, 그래엄과의 관계를 지속할 것 같은 조짐을 보이죠. 거기서 영화는 끝납니다.


    섹스와 비디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대인들이 의사소통하는(communicate)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입니다. 섹스가 번식의 기능보다 소통의 기능이 오히려 더 크게끔 진화했다는 점은 인간을 지구상의 모든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는 특징입니다. 소더버그 감독은 두 가지 현대적 의사소통의 상징 사이를 ‘거짓말들(lies)’로 연결함으로써,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의 허구성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합니다. 스물 여섯살 짜리가 각본과 감독을 한꺼번에 맡아서 풀어낸 이야기라기에는 뭐랄까요, 감탄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것이죠. 이 영화는 마치 Honesty라는 빌리 조엘의 비관적인 노랫말을 연상시킵니다.


    저는 막연히, 스티븐 소더버그나 빌리 조엘이 진실에 대해 비관론을 펼치게 된 동기가 실연의 고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무릇 비관하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낙관하기에는 너무 어두운 것이 인생사이겠거늘, 실연이라는 경험은 인생의 심연을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한 시력을 선사해주는 모양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기타를 참 잘 치던 친구의 실력이 어느 날 눈에 띄게 늘었길래 비결이 뭐냐고 물어봤더니만, 부러우면 너도 실연을 하라는 답이 돌아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Sex, Lies, and Videotape는 소더버그 감독에게 영광이자 부담이기도 한 초창기의 성공작입니다. 에린 브로코비치 역할로 골든 글로브 상을 받는 자리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소더버그가 부탁한다면 전화번호부책을 읽어달라고 해도 들어주겠다”고 얘기한 걸 보면, 그는 배우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 유능한 감독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저는 그가 종당에는 스스로의 기록을 격파하는 내공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하지만, 실연의 경험이 20대 감독의 창조적 감성을 폭발시킨 기폭제였다는 근거 없는 저의 지레짐작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소더버그는 Sex, Lies, and Videotape보다 나은 영화는 영영 만들기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첫사랑의 실패를 두 번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정직함(Honesty)

                                                           - Billy Joel

    만약 당신이 찾는 것이 친절이라면, 그건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사랑을 가질 수 있지요.

    그러나 당신이 진실됨을 찾는다면 장님이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언제나 그것은 주기 어려운 것 같으니까요.


    나를 동정한다는 사람은 언제라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면.

    그러나 나는 이쁜 거짓말을 들려줄 이쁜 얼굴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할 뿐입니다.


    ‘정직’은 외로운 단어입니다.

    모두가 거짓됩니다.

    이제 ‘정직함’은 잘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당신으로부터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애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친구도 찾을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안심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다시 한 번 약속으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알아요. 압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는 동안 뭘 요구하진 않을테니.

    그러나 신실함을 원할 때 내가 갈 곳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지요.

    내가 의지하는 것은 당신 뿐이니까 말입니다.

    

    ‘정직’은 외로운 단어입니다.

    모두가 거짓됩니다.

    이제 ‘정직함’은 잘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당신으로부터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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